세상의 중심에서 백인우월주의를 외치다

이 세상에 마땅히 누려야 할 영광 같은 건 없다.

by 조하나


미국의 대학 전역을 돌며 인기를 끌었던 친트럼프 MAGA(Make America Great Again)의 간판 청년 극우 활동가 찰리 커크가 암살당했다. 미국인의 총기 소유를 옹호하며 총기 난사로 사망한 피해자들에게 그 어떤 공감이나 동정, 연민을 보이지도, 추모하지도 않았던 그가 대학가 토론을 할 때 항상 내건 플랜 카드에 적힌 문장 ‘Prove me wrong(내가 틀렸다는 걸 증명해봐)’을 비웃기라도 하듯 암살범은 총을 이용해 찰리 커크를 저격했다.



04-22-2025-Charlie-Kirk-Batt-Sized-1.jpg
67fef1570b3e3.image.jpg





그의 죽음 이후, ‘White Lives Matter(백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라는 구호가 하나의 거대한 서사처럼, 혹은 잊혔던 신화처럼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기억하는, 혹은 기억한다고 믿는 세상의 중심을 되찾으려 거리로 나섰다. 그 중심이란, 그들이 ‘마땅히 누렸어야 한다고 믿는 어떤 영광’에 대한 희미한 잔상이다.


숫자는, 그러나,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 세계 인구의 60%는 아시아인이다. 아프리카인이 16%로 그 뒤를 잇는다. 유럽과 북미를 모두 합친 백인 인구는 15% 남짓에 불과하다. 여기서 15%라는 수치는 스스로를 ‘백인’으로 식별하는 인구의 비율이다.


인종을 분류하는 건 간단치 않다. 히스패닉계 백인은 백인인가? 혼혈은 백인인가? 현대 미국인들은 대부분 네이티브 아메리칸(인디언), 독일, 프랑스, 아일랜드, 이탈리안, 아프리칸, 아시안 혼혈이다. 겉으로 보기에 피부가 하얗다고 해서 코카시안 백인도 아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마치 백인이 전 세계 인구의 70% 이상은 차지하는 것처럼 돌아간다. 우리는 이 명백한 수치의 불균형 속에서 살아간다. 이 기묘한 불균형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백인 남성’, 즉 승자에 의해 쓰인 역사가 만들어 온 ‘보이지 않는 중심’, 미디어와 문화가 빚어낸 ‘당연한 풍경’, 서구 사회 주도로 이뤄진 ‘시스템의 관성’으로 유지되어 왔다.


그 기울어진 구조의 정점에서 언어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외국에서 생활할 때 나의 영어 문법 하나까지 사사건건 지적하던 한 미국 친구 때문에 속이 상한 나는 친한 영국인 친구에게 엄한 화풀이를 한 적이 있다. “너희는 좋겠다. 모국어 하나만 해도 사는 데 지장 없지 않으냐”라고. 시니컬한 영국인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가 침략을 좀 하고 다녔어야지. 나는 그게 전혀 자랑스럽지 않아.” 말하자면, 이야기의 구조 자체가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한 대니쉬 친구는 자신이 남아공 여행을 할 때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해 줬다. 작은 마을 슈퍼마켓에 들어갔는데 자기 빼고 다 흑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물건을 사는 것도, 계산하는 것도 거부했다고 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조금 통쾌했다. 그래, 백인인 너희들에게 때론 거울 치료가 필요하구나.




PEP20250914125601009_P4.jpg
ELPNO44DJBGAHJKVNKCAN3DCT4.jpg




문제는 그 백인들의 분노가 어디로 향하는가이다. 백인들의 울부짖음은 한 개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자기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인 게 다 여성, 이민자, 성소수자, 장애인, 혹은 다른 나라 사람들 때문이라 호소한다.


히틀러와 나치가 모든 불행의 원인과 책임을 유대인과 여성, 장애인으로 돌리는, 가장 손쉬운 희생양을 지목함으로써 힘을 얻었다.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히틀러가 순수 혈통의 게르만족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국의 트럼프는 독일계 이민자의 피가 흐른다.


탈진실의 시대, 진짜 백인이고 아니고는 중요치 않다. 각각 DNA 유전자 검사를 할 것도 아니고, 족보를 검사할 것도 아니다. 자신을 백인이라 인식하는 이들에겐 그저 누군가를 혐오할 명분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대한민국에도 “내가 찰리 커크다”라고 외치며 그를 추모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최근 미국, 호주, 영국 등에서 열린 반이민 시위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은 그 시위에 껴달라는 아시안에게 “원숭이는 꺼지라”고 소리친다. 그들에게 아시안은 2등도 아닌, 3등 시민이다.




sisa_2956684_20250915123804_8b1074c97ee6f705.jpg
3318729_3395859_1033.jpg




증오와 폭력으로 물든 낡은 희곡이 한 세기 만에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반복되고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다.


거리로 뛰쳐나온 이들이 백인으로서 마땅히 ‘누렸어야’ 하는데 ‘빼앗겼다’고 주장하는 권리의 실체란 무엇인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안락함? 자신의 기준이 곧 보편이라 우기며 질문받지 않을 권리? 그리고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도 괜찮을 권리?


얼마 전 영국 런던에서 백인우월주의자 청년들이 반이민 시위를 하던 도중 인디언 커리, 터키 케밥 등 이민자들이 음식을 파는 노점상으로 달려가 자기들도 뻘쭘한지 쭈뼛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그들의 이념은 생존과는 무관한 배부른 자들의 ‘관념적 유희’에 불과하며, 정작 그들의 일상은 자신들이 혐오한다고 주장하는 ‘타자들’의 노동에 깊숙이 의존하고 있다는 자기모순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었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이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지만,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른다. 백인의 권리를 외치는 이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세상은 멀리서 보면 비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희극이다.




Screenshot_20250917_201948_Threads.jpg
Screenshot_20250917_201930_Threads.jpg




반대로 생사의 기로에 선 이들에겐 누군가를 미워할 여유마저 없다. 절박한 이들에게는 혐오도 사치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영국 등지에 사는 살 만한 백인들이 더 가지겠다며 그렇게 삶을 마음껏 낭비하고 있을 때 가자지구에선 여권조차 없는 사람들이 그 백인들의 ‘묵인’과 ‘승인’ 아래 존재 자체가 지워지고 있다.



b2e599841af7fe3f44b3e8aff03eb9f6354b8d17.jpg
80a613e0-93a5-11f0-84c8-99de564f0440.jpg
pic_9.jpg




과연 인간은 평등한가? 세상 어디에서 태어나든, 피부색이 어떻든, 무슨 인종이든 평등한가?


우리의 목숨에는 가격이 매겨져 있고, 그 목숨값은 여권에 쓰여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그 가격을 얼마 전 미국 조지아주 현대 공장에서 확인했다.






잃어버렸다고 믿는 ‘중심’이라는 유령의 팔다리를 되찾기 위해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 우스꽝스러운 몸짓이 가까이서는 한 편의 코미디일지 몰라도, 그 주먹이 닿는 곳에서 누군가의 삶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리는 비극이 된다.


자신들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안락한 착각에 기댄 값싼 분노가, 세상의 가장자리에서 하루를 살아내는 이들의 존엄을 얼마나 값비싸게 파괴하고 있는지, 우리는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제발 다음 차례는 나만 아니길 바라고 아무것도 않는다면, 생각보다 빠르게 다음 차례는 내가 될 것이다.






01_메일주소태그.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