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패션지 에디터가 본 ‘W 코리아’ 행사 논란

패션계의 위선과 허상, 그리고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by 조하나






10월 19일은 ‘세계 유방암의 날’이다. 며칠 전 여성 패션지 <더블유 코리아(W Korea)>가 주최하는 유방암 인식 향상 캠페인, ‘Love Your W’ 파티가 열렸다. 그 선(善)한 의지와 화려한 사람들, 명품 브랜드들이 만나 빚어내는 풍경은, 내가 한때 몸담았던 세계가 늘 그렇듯, 기막히게 연출된 한 편의 판타지처럼 보였다. 그리고 미디어는 약속이라도 한 듯 그 황홀한 순간들을 대중에게 바쁘게 실어 날랐다.


하지만 그 화려한 막 뒤편의 이야기는 언제나 조금 더 복잡하고, 때로는 추악하다. <더블유 코리아>의 17년간 누적 기부금이 11억 원이라는 자랑스러운 발표와 달리, 실제 캠페인의 공식 파트너인 한국유방건강재단에 전달된 금액은 고작 3억 남짓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심지어 2008년, 2009년, 그리고 2017년부터 올해까지는 이 재단에 기부된 내역이 전무하다. 8억 원의 행방에 대해 <더블유 코리아>는 설명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 돈이 화려한 파티와 셀러브리티들의 거마비, 브랜드의 홍보 비용으로 흘러 들어간 것이 아니냐고 의심한다. ‘여성’과 ‘유방암’을 명분으로 기부금을 모으는 주체인 <더블유 코리아> 편집장이 기부금을 전달받는 한국유방건강재단의 이사직을 겸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져 더욱 논란이 됐다. 기부금을 모으는 손과 받는 손이 다르지 않다는 이 구조적인 문제는 의혹을 더욱 짙게 만든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자선 행사’라는 명분 아래 몇몇 셀러브리티들은 거마비 없이, 심지어 헤어, 메이크업, 스타일링 비용까지 자비로 부담하며 좋은 뜻으로 참여했지만, 정작 <더블유 코리아>는 행사를 통해 브랜드들로부터 거액의 ‘기부금’(패션 브랜드 3천만 원, 주얼리 5백만 원 선)을 받았다는 점이다. 결국 스타들의 선의와 재능기부는 브랜드 협찬과 돈을 끌어모으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즉 ‘여성 유방암 인식 향상’은 그저 <더블유 코리아>가 브랜드로부터 돈을 지원받기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는 것이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유방암 인식 향상’이라는 중요한 여성 건강 이슈를, 스스로 한국 최고의 ‘여성’ 패션지라 자부하는 매체가 상업적인 브랜드 파티와 연예인들의 친목 도모를 위한 화려한 배경으로 소비했다는 점이다. ‘여성’의 ‘건강’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정작 여성들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반짝이는 세계를 공고히 하는 데 열중한 모습은 천박한 자본주의의 민낯처럼 보였다.


가장 최근 열린 제20회 행사마저 ‘유방암 빠진 유방암 행사’라는 오명을 썼다는 사실은 <더블유 코리아>의 행보가 단순한 실수가 아닌, 뿌리 깊은 인식의 부재임을 증명한다. 유방암 인식 개선과 관련된 의미 있는 내용은 온데간데없었고, 매거진 공식 SNS는 셀러브리티들의 화려한 파티 사진으로 도배되었다. 유방암 인식의 상징인 핑크 리본 대신, 테이블 위에는 값비싼 핑크 샴페인과 붉은 장미만이 놓였다. 이 또한 모두 브랜드 협찬이다.




이렇게 암 유발 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하는 주류를 버젓이 제공하고, 심지어 참석자들에게 행사 목적과 무관한 유행 챌린지를 강요하거나 활동 계획을 묻는 등, 그저 셀러브리티들을 이용한 홍보와 네트워킹에만 열중하는 모습이었다. 공식 SNS에는 ‘유방암인식향상캠페인’ 해시태그만 기계적으로 덧붙였을 뿐이다.


여기에 더해, 무대 위에서는 여성의 신체를 노골적으로 대상화하는 박재범의 ‘몸매’가 울려 퍼졌다. 유방암은 여성의 몸, 바로 그 ‘몸매’에 대한 인식 자체를 뒤흔드는 질병이다. 수술로 가슴을 도려내고, 그 상흔과 변형된 신체를 마주하며 항암 치료의 고통 속에서 자신의 몸을 다시 받아들이고 긍정하기 위해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이들 앞에서, 그 몸을 단지 성적 매력의 대상으로만 환원하고 소비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 그것은 무심함이나 부주의를 넘어선 폭력이자, 행사의 본질적 의미를 스스로 부정하는 기만이었다.


이런 와중에 한 배우가 이 행사에 협찬한 명품 브랜드 스타킹을 사이즈 문제로 착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 포토월 출입을 저지당하는 촌극까지 벌어졌다. 맨다리로는 ‘전신 노출’이 불가하다는 <더블유 코리아>의 논리는 ‘유방암 인식 개선’이라는 행사의 ‘본질’보다 협찬 브랜드의 요구와 피상적인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하게 작동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순간, 행사의 ‘자선’이라는 명분은 완전히 껍데기만 남은 채, 천박한 자본주의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말았다. ‘자선 워싱(Charity Washing)’. 듣기만 해도 혀끝이 아려오는 그 단어가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모든 논란 속에서 <더블유 코리아>는 여전히, 굳건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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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꽃’, 그 천박한 민낯


이 소란을 접하며 나는 기시감에 휩싸였다. 반짝이는 포장지, 그러나 그 속이 과연 겉만큼이나 진실한지에 대한 의구심. 그것은 내가 한때 유령처럼 배회했던 상업 패션지의 세계, 그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리던 세계의 공기와 닮아 있었다.


상업 패션지는 자본주의가 피워낸 가장 현란하고도 위태로운 꽃이었다. 브랜드의 막대한 광고 없이는 단 한 페이지도 넘길 수 없는 구조. 내가 일했던 시기는 특히 종이 잡지 시장 자체가 기울어 가던 때라, 광고주를 향한 의존성은 더욱 절대적이었다. 잡지는 책을 팔아 돈을 벌지 않은 지 아주 오래됐다. 한국에선 아무도 잡지를 돈 주고 사서 보지 않았다. 잡지는 그저 미용실이나 병원, 은행에서 대기할 때 보는 것쯤으로 치부됐다. 브랜드의 찬양과 소비 조장은 잡지의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았다.


<더블유 코리아>의 이번 행태 역시, ‘여성 패션지의 최고’를 자부하는 그들이 오랫동안 반복해 온 방식의 자연스러운 귀결일 뿐이다. 아마 편집장을 비롯한 그들 대부분은 지금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잘 모르고, 또 안다고 해도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비슷한 생각과 시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자본주의의 꽃 정중앙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패션계의 ‘자선 워싱’의 위선은 내가 패션지에서 일할 때 ‘그린 워싱’이라는 또 다른 얼굴로도 나타났다. 소비를 조장하는 것이 존재 이유인 산업이 앞다투어 ‘친환경’을 외치는 역설이 유행이던 시절이다. 각종 브랜드 행사에 다녀올 때마다 ‘친환경에 앞장선다’며 건네받은 에코백이 불과 일주일 만에도 서너 개씩 쌓여갔다. 결국 그 에코백들은 또 다른 쓰레기가 되어, 어쩌면 지금쯤 필리핀이나 아프리카의 해변을 떠돌다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을 운명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경험한 상업 패션지는 거대한 착각과 오만의 결정체였다. 수백,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들이 지면을 점령했고, 스튜디오의 조명은 존재하지 않는 완벽함을 창조해 냈다.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에서의 촬영, 해외 호화 리조트로의 출장, 눈이 멀 듯한 플래시 세례 속 셀러브리티들의 계산된 미소. 그 세계는 분명 매혹적이었고, 그 안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된 듯한 착각에 잠시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현란함의 이면에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톱니바퀴가 쉬지 않고 돌고 있었다. 잡지의 숨통을 쥐고 있는 것은 거대 자본, 즉 브랜드 광고주였다. 우리는 광고주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써야 했고, 때로는 영혼 없는 인터뷰로 지면을 채워야 했다.


“돈이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이유로 진정 실력 있고 진정성 있는 아티스트를 다루지 못하면, 나는 어떻게든 편집장과 논쟁을 벌이고 설득하려 했다. 당시 최고의 아이돌을 다루면 잡지는 예약 판매부터 품절이었다. 하지만 인터뷰는 지루하고 허망했다. 내가 아티스트와 인터뷰를 하는지 매니저와 인터뷰를 하는지 모를 정도였고, 아티스트는 회사가 시키는 말만 앵무새처럼 읊어대거나 인터뷰 도중 화장실로 뛰쳐나가 복용 중인 다이어트 약으로 인한 부작용으로 속을 게워내기도 했다. 어떤 아티스트는 회사 관계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나에게 우울증을 고백하기도 했다.


편집장과 내가 다다른 협의안은 이랬다. 잡지의 화제성과 판매 부수를 높이는 아이돌 한 팀을 인터뷰하는 대신 내가 소개하고 싶은 인디 뮤지션 한 팀을 인터뷰하는 것. 하지만 인디 아티스트 인터뷰도 패션지에선 쉽지 않았다. 아무리 음악을 잘하고 진정성 있는 아티스트를 인터뷰하려 해도 그들에게는 브랜드 협찬이 붙지 않았다. 패션계는 냉정하게 이름값과 이미지로 사람의 가치를 매겼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 위의 상품처럼 아티스트에게 가격표를 붙이는 행태가 공공연했다. 나는 그게 뭐 대수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편집장과 다른 에디터까지, 대부분 그 시스템의 논리를 내면화하고 있었다. 잡지에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자신의 자리가 위태로웠기 때문이다.


화보 사진 아래 찍힌 가격표가 마치 그 인물의 가치를 매기는 듯 느껴졌던 불편함, 수천만 원짜리 명품을 소개하는 기사를 쓰면서도 정작 내 월급 통장의 초라한 숫자에 자괴감을 느껴야 했던 밤들. 그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이 진정 가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우주의 쓰레기’를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역시 그 시스템에 일조하고 있다는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피처 에디터로서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하려 애썼다. 나는 글 쓰는 사람에게도 시인이나 소설가와 같은 용기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패션지는 유행을 만들지만, 유행은 때로 개인의 고유한 색깔을 지우고 획일적인 사고를 강요한다. 대세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것이 피처 에디터의 역할이라 생각했다.


값비싼 선물과 화려한 파티의 유혹 속에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자신의 월급으로는 감당 못 할 명품에 둘러싸여, 많은 이들이 그 허영의 덫에 걸려들었다. 다행히 나는 ‘인디 잡지 출신’이라는 방패가 있었다. 편집장은 늘 나를 ‘거리의 아이’라고 불렀다. 그게 은근슬쩍 들어간 비아냥이든, 나는 다른 에디터와는 다르다는 개성을 인정한 편집장의 응원이든 나는 개의치 않았다. 나는 패션지의 화려함 속에서도 그 가치를 느끼지 못했고, 나만의 방식으로 무언의 저항을 이어갔다. 매일 같이 닳아빠진 반스 운동화에, 내가 지지하는 인디 스트리트 브랜드 티셔츠, 심지어 BYC의 값싼 반팔 티셔츠를 고집하며, 내가 진짜 멋지다고 생각하는 아티스트를 만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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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하나








그들이 사는 세상


인간은, 아니 특히 한국 사회는 너무 쉽게 누군가를 우상화하고 그들에게 권력과 명성을 안겨주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 바로 패션지가 있다. 잡지는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콘을 발굴하고, 브랜드와의 결탁을 통해 그들에게 A급, B급 같은 보이지 않는 ‘등급’을 매긴다.


그렇게 매겨진 등급은 곧 그들의 상업적 가치가 되고, 패션지는 그 가치에 따라 누군가를 추앙하고 누군가는 외면하며 이미지를 소비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돌이나 연예인은 한 명의 인격체가 아닌, 언제든 대체 가능한 ‘물건’처럼 다뤄지기 일쑤다. 큰돈이 될 때는 찬양하고 떠받들다가도, 유행이 지나거나 스캔들로 그 가치가 떨어지면 가차 없이 버려지는 소모품처럼. 문제는 그 과정에서 비판적인 시선이 거세된다는 점이다.


화려한 화보와 인터뷰는 그 인물의 복잡한 내면이나 사회적 맥락을 지우고, 오직 이상화된 이미지만을 부각한다.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진 허상에 열광하고, 그들에게 기꺼이 우리의 시간과 돈, 감정을 내어준다. 하지만 그 반짝이는 표면 아래 무엇이 있는지, 그들이 휘두르는 영향력이 과연 정당한 것인지 질문하는 것을 잊는다. <더블유 코리아> 행사 역시 마찬가지다. 셀러브리티라는 이름값에 기대어 행사의 본질적인 문제점을 가리고, 대중의 비판 없는 열광 속에서 그들만의 리그를 공고히 해 온 것은 아닐까.


패션지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가치관을 더욱 선명하게 벼려주었고,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분명 내 삶에 깊은 흔적을 남긴 시간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서울을 떠나 해외의 작은 외딴섬, 깊고 푸른 바닷속에서 새로운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바다에는 샤넬도 루이비통도 그저 표류하는 쓰레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 섬에서는 아무리 값비싼 명품으로 온몸을 감싸도 그 누구의 시선도 끌지 못한다. 오히려 그 천박한 과시욕은 조롱과 연민의 대상이 될 뿐이다. 명품 구두는 모래사장에 파묻히고 명품백은 소금기에 망가진다. 명품 슈퍼카는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같은 자리를 맴돌다 결국 섬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 도망친다. 선 곳이 다르면 풍경도 달라진다. 패션이라는 유리 성에 갇혀 사는 이들은 아마 영원히 이 진실을 모를 것이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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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하나







상처를 응시하는 방식


다행히 세상에는 <더블유 코리아>의 방식과는 다른 길을 걷는 사례들도 존재한다. 뷰티 기업 에스티 로더 컴퍼니즈가 30년 넘게 이어오고 있는 ‘핑크 리본’ 캠페인은 막대한 기금 조성과 함께 전 세계적인 유방암 인식 개선에 기여해 왔다. 물론 이 역시 ‘핑크 워싱’(상업적 이익을 위해 핑크 리본을 이용한다는 비판) 논란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꾸준함과 투명한 기부금 집행(연구 지원, 무료 검진 등)은 그 진정성을 일정 부분 담보한다.

영국에서 시작된 ‘CoppaFeel!’ 캠페인은 젊은 층을 대상으로 유방암 자가 검진의 중요성을 쉽고 유쾌하게 전달한다. ‘Know Your Boobs(네 가슴을 알라)’라는 직관적인 슬로건 아래, 그들은 딱딱한 의학 정보 대신 유머와 긍정적인 메시지로 젊은 여성들에게 다가간다. 유명세를 이용하되, 결코 본질을 흐리지 않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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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aad4c0-704e-47e0-98e9-af9ed78d19b2.jpg ⓒ CoppaFeel! 캠페인




더 나아가,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유방암 환우들의 상처와 변화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가들도 있다. 미국의 사진작가 데이비드 제이(David Jay)의 ‘The SCAR Project’는 유방 절제술을 받은 젊은 여성들의 몸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그의 사진 속 여성들은 완벽함이라는 사회적 강박에서 벗어나, 상처마저 자신의 일부로 끌어안은 강인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 시선은 결코 동정적이거나 선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흉터를 통해 드러나는 생명의 의지와 여성성의 재정의를 담담하게 포착한다. 이러한 예술적 시도들은 <더블유 코리아> 행사처럼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할지언정, 훨씬 더 깊은 울림으로 유방암이라는 질병과 여성의 몸에 대한 진솔한 성찰을 이끌어 낸다. 그들은 감추거나 미화하는 대신, 상처를 똑바로 응시함으로써 진정한 공감과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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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제이(David Jay)의 ‘The SCAR Project’




이 지점에서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 또렷하게 드러난다. 유방암으로 가슴을 절제한 한국 여성들은, 다른 많은 나라의 여성들보다 훨씬 더 높은 비율로 유방 재건술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재건술은 상실된 신체 일부를 복원하여 심리적 안정감을 찾고 삶의 질을 높이는 중요한 의료적 선택지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정상성’과 ‘완벽함’을 강요하는 한국 사회의 지독한 외모 지상주의가 깊게 자리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여성의 신체를 끊임없이 평가하고 규격화하는 사회적 시선 속에서, 수술의 흔적은 감춰야 할 ‘흠’으로 여겨지기 쉽고, 재건술은 마치 사회적 통념에 부합하기 위한 필수 과정처럼 인식되기도 한다. ‘온전한 몸’에 대한 강박은 개인의 선택을 넘어서는 보이지 않는 압력이 되어, 유방암 환우들에게 또 다른 심리적 부담을 안겨주는 것이다. 데이비드 제이의 작업처럼 상처를 드러내고 그 의미를 재해석하려는 시도조차, 한국 사회의 견고한 외모지상주의 앞에서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이유다.


<더블유 코리아>의 ‘자선 워싱’ 논란은 우리에게 다시 한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 현란한 이미지와 소음의 시대에,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어야 하는가. 반짝이는 포장지에 홀리지 않고 그 속의 진실을 꿰뚫어 볼 용기를 우리는 가졌는가. 자선마저 상품이 되고 이미지가 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로의 진심을 알아보고 손을 내밀 수 있을까.







껍데기 너머의 ‘사람’을 바라본다는 것


눈부신 조명과 화려한 이름들, 가격표 그 자체로 가치를 올리는 상품들 너머, 상처 입고 소외된 이들, 유방암의 고통과 싸우고 있는 이들,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난 이들, 유가족, 그리고 유방암과 싸워 이겨낸 생존자들의 작지만 진실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언론과 소셜 미디어가 걸러낸 표면 대신 자신만의 시각과 본질을 찾아 주목하는 것. 데이비드 제이 작가의 사진처럼, 때로는 불편하고 아프더라도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를 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그 목소리를 찾아 따라 걷는 것. 이 모든 것이 그 너머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성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우리는 여성의 풍만한 가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했지, 상처에 대해서는 아주 오랫동안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슴이 다수의 여성들과 다르거나 가슴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목소리를 잃고 숨어야 하는 보이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와 압력이 생겼다. 공감하고, 연대하고,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우리가 모르던 환우와 생존자들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것이다. 화려한 껍데기 너머의 진실을 보려는 인문학적 성찰의 부재가 낳은 비극 앞에서, 다시금 다정함과 친절, 배려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가치를 생각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내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흥미로운 반전이 일어났다. 이 논란의 행사에 BTS의 멤버 뷔와 제이홉, RM이 참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여성’이 대다수인 그들의 팬덤 ‘아미(ARMY)’가 “논란을 행동으로 바꾸자”며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더블유 코리아>가 그토록 소홀히 대한 캠페인의 ‘본질’, 즉 ‘유방암 인식 개선’이라는 가치에 스스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SNS에는 #유방암인식 같은 해시태그와 함께 유방암 자가 검진 방법, 정기 검진의 중요성을 알리는 정보성 게시물들이 전 세계의 언어로 퍼져나갔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미국, 한국, 일본, 유럽 등 각국의 팬들은 자국의 유방암 재단과 병원에 기부를 시작했고, 실시간으로 기부 인증 릴레이를 펼쳤다. 행사를 주최한 <더블유 코리아>가 보여준 ‘자선 워싱’의 민낯과는 정반대로, 팬덤이 스스로 그 ‘워싱’을 걷어내고 캠페인의 진정한 의미를 되살려낸 셈이다.


물론 이 또한 셀러브리티의 영향력에서 시작된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영향력이 앞서 비판했던 맹목적인 추종이나 수동적인 이미지 소비로 그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들은 논란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아티스트의 이름에 기대는 대신 그들이 지지하는 가치를 직접 ‘행동’으로 전환시켰다. 어쩌면 이 자발적인 움직임은, <더블유 코리아>가 수십 년간 화려한 파티로도 해내지 못한 진정한 ‘인식 개선’을 단 며칠 만에 이뤄낸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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