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게인4>, 무명 혹은 망각에 대한 잔혹극

뮤지션이 이름을 내어주고 얻는 것은 무엇인가.

by 조하나


지금은 사라진 인디 매거진 <F.OUND>로 시작해 <ARENA>, <HYPEBEAST> 피처 에디터를 거치는 동안, 나의 시간은 늘 인디 뮤지션들의 곁을 서성였다.


‘화요일 밴드’라는 이름표를 달고, 관객이라곤 열 명 남짓, 그마저도 서로 얼굴 익힌 지인들이 전부인 텅 빈 라이브 클럽 무대에 오르던 이들의 헛헛함을 나는 기억한다.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무기력하게 제 노래를 뱉어내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희미한, 그러나 끈질긴 희망 한 마디를 품고 있던 그 양가의 감정을 나는 너무나 잘 안다. 마치 스스로 선택한 가시밭길을 걷듯 피 흘리면서도, 자신이 지은 노래를 부적 삼아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는 그 위태로운 모습에, 나는 그저 작은 꽃잎 하나라도 놓아주고 싶었다.


그렇게 세상의 눈이 미치지 않는 어둑한 구석에서, 눈이 멀 것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제 안의 불빛으로 끊임없이 흔들리며 성실하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55호’ 같은, 이름조차 지워버린 숫자의 그림자 뒤에 숨어 <싱어게인4>의 무대에 오르는 풍경은 어딘가 뒤틀린 잔혹극처럼 느껴진다.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 온 이들이, 그들보다 훨씬 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을 뿐인 심사위원석의 인물들에게 평가와 점수를 받는 모습은 실존적 부조리극의 한 장면처럼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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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어게인>이라는 포맷 자체는 ‘한 번 더’ 기회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구원의 서사처럼 포장된다. 잊힌 가수, 시대를 잘못 만난 가수, 한 장의 앨범만을 남기고 사라진 가수…. 그들의 절박함은 시청자의 연민과 향수를 자극하며 뜨거운 공감을 이끌어낸다. 실제로 시즌을 거듭하며 재발견된 뮤지션들의 성공 사례는 이 프로그램의 존재 이유를 더욱 공고히 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질문은 더 복잡해진다. 과연 이름 대신 번호를 부여하는 익명성이 진정한 기회의 평등을 가져다주는가? 아니면 오히려 한 아티스트가 쌓아온 고유한 역사와 정체성을 손쉽게 지워버리는 편리한 장치에 불과한가?


심사위원과 참가자 사이에 놓인 명백한 권력관계는 때로 음악 자체보다 ‘어떻게’ 보여지는가, ‘어떤’ 이야기로 포장되는가에 더 집중하게 만든다. 특히 오랜 시간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인디 뮤지션들에게 이 무대는, 과연 대중적 인지도라는 달콤한 열매를 향한 유일한 통로일까, 아니면 자신의 음악적 자존심과 역사를 일정 부분 저당 잡혀야 하는 위험한 거래일까.


우리가 <싱어게인4>에서 목격하는 것은 단순히 잊힌 목소리의 부활만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예술이 살아남는 방식, 혹은 살아남기 위해 변형되는 방식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증언일 수 있다.


‘아무도 듣지 않는 음악’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으로 지새우던 숱한 밤들. 그 고독한 시간을 견뎌낸 이들에게, 대중매체의 스포트라이트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자 어쩌면 유일하게 남은 희망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빛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오히려 자신의 본래 색깔을 바래게 만들거나 왜곡시키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숱하게 목격해 왔다.


나의 지난 시간들은 바로 그 경계 위에서 서성였다. 소수의 관객 앞에서, 때로는 단 한 명의 관객도 없는 텅 빈 무대에서 제 영혼을 쏟아내던 이들의 진심을 기록하며, 나는 그들의 음악이 결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님을 믿었다.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세상을 바꾼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러나 <싱어게인4>의 무대는, 그 믿음만으로는 버틸 수 없는 현실의 냉혹함을, 그리고 그 냉혹함 속에서 피어나는 절박한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며 우리에게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 이 잔혹극의 구원자는 과연 존재하는가, 아니면 여전히 이것뿐인가. 숫자의 그늘 뒤에서, 그들의 진짜 노래는 시작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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