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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에서 ‘생존기’라는 꼬리표를 떼기로 했다

‘삶은 축복’이라는 아주 거창하면서도 아주 단순한 진실.

by 조하나
00 (1).jpg 오뉴월이 되면 숲 속 정원은 화려해진다 ⓒ 조하나



오뉴월이 되면 숲 속 정원은 화려해진다. 벌써 여러 해를 살아온 집 앞 오디나무는 지난겨울 과감한 가지치기를 해준 덕에 올해 시꺼멓고 탐실한 열매를 더 많이 맺었다. 진주알처럼 뽀얀 빛깔을 뽐내는 물앵두는 붉은색 앵두만 알고 있던 나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었고, 역시 붉은색 앵두와는 닮은 듯 또 달라 헛갈리던 나에게 앵두보다 말랑하고 기다란 보리수는 “네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다”라는 깨달음을 주었다. 작년에 데려온 블루베리 나무들도 탐스러운 보랏빛 자태의 과실을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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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2).jpg 숲 속의 새들과 나누어 먹을 만큼 모든 것이 풍족하다 ⓒ 조하나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빨갛고 하얗고 검은 열매들을 한 손 가득 딴다. 숲 속의 새들과 나누어 먹을 만큼 모든 것이 풍족하다. 욕심부리지 않고 내가 먹을 만큼 과실을 따오고 나면 참새가 짹짹거리며 나머지로 수다스러운 아침 배를 채우고, 바람이 불면 후드득 땅에 수북이 떨어진 오디는 동네 강아지들과 숲 속 고라니들의 몫이다. 오디에 검붉게 물든 손으로 열매를 대충 물에 씻어 입에 넣고 오물오물하고 있으면 입안에서 터지는 새콤하고 달큼한 맛에 숲 속의 싱그러운 초여름이 한꺼번에 몰려온다. 추운 겨울을 또 한 번 이겨내고 옥신각신하는 해와 달을 수백 번 기다리며 하늘에서 내리는 물을 마시고 터뜨린 열매들의 축제다. 그 열매의 탄생에 아무 보탬이 없었던 내가 결과적으로 이런 호사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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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1).jpg 그 열매의 탄생에 아무 보탬이 없었던 내가 결과적으로 이런 호사를 누린다 ⓒ 조하나



숲 속에 뜨고 지는 해는 회색빛 고층 빌딩들의 방해 없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매일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가 지면 기다렸다는 듯 뜨는 달도 매번 모양을 바꿔가며 밤의 여왕의 매력을 뽐낸다. 숲 속에선 아무도 꽃이 늦게 핀다고 불평하거나 재촉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알아서 자연스럽게 오기 때문이다. 숲 속의 모든 구성원이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반복되어 온 억겁의 순환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해는 뜨고 지며 낮과 밤, 24시간을 주관한다. 달의 위치 변화는 지구의 조수간만의 차로 형상화되고 지구상 모든 인간에게 작동하는 중력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달은 잉태를 관장하는 여성의 월경주기를 만든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달을 품는다’라는 표현에는 바로 이런 시선이 담겼다. 해와 달의 끊임없는 영속적인 대화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계절의 주기와 자연의 리듬이 창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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