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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소멸하는 풍경의 마지막 관찰자가 되어

도시의 관찰자들은 나 말고도 차고 넘친다.

by 조하나

깊은 숲속 시골 마을에 살다 보면 가끔 읍내에 나가거나 친구들을 만나러 서울에 갈 일이 생긴다. 꼭 그렇지 않더라도 짧게는 몇 주, 길게는 한 달에 한 번 숲속을 벗어나는 특별한 외출을 감행할 때가 있는데 아무도 없는 길을 혼자서 걷다 보면, 지나다 차를 멈추고 읍내까지 태워주겠다는 마을 이웃의 호의를 한사코 거절하며 “오랜만에, 걷고 싶어서요”라고 낭만적인 이유를 대며 씩 웃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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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_(1) (8).jpg “오랜만에, 걷고 싶어서요”라고 낭만적인 이유를 대며 씩 웃곤 한다 ⓒ 조하나




숲속의 집을 나서 읍내까지는 직접 차를 몰고 갈 수도 있고, 스쿠터나 자전거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나는 두 발로 천천히 걷는 걸 좋아한다. 서울 생활을 하며 가까운 거리도 택시를 타고 다녔던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지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을의 이 집 저 집 정원에 핀 꽃들과 담벼락에 걸어 말리는 마늘 더미들과 온종일 할 일이라곤 낯선 사람을 향해 악의 없이 짖는 개들과 인사하며 걷는 게 어느새 설레고 기대되는 특별한 이벤트가 되어간다.




다운로드_(2) (4).jpg 그렇게 천천히 걷다 보면 작고 외로운 버스 정류장이 나타난다 ⓒ 조하나



그렇게 천천히 걷다 보면 작고 외로운 버스 정류장이 나타난다. 몇 번 버스가 몇 분 후 도착한다는 정보도 없이 정류장에 앉아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다 보면 눈앞에 지나는 차들이라곤 노인 돌봄이나 요양 서비스뿐이다. 대중교통이 들어오지 않는 깊은 숲속 마을에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 때부터 살아온 이제는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을 위해 시에서 지원하는 마을 택시 서비스가 있었지만 얼마 전 지역 시군의 예산 부족으로 중단됐다. 나는 감사하게도 여전히 튼튼한 두 다리가 있어 걷기라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이동권조차 정권이 바뀔 때마다 들었다 놓이길 반복하니 숲속의 삶은 아이러니하게도 젊음에만 허락된 것일지도 모른다.




다운로드_(3) (5).jpg 버스에선 내가 제일 어린 막내다 ⓒ 조하나



운이 좋으면 10분, 아니면 1시간까지도 기다려야 하는 마을버스가 도착하면 기사님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천천히 문을 열어주고, 버스에 올라 자리를 찾은 내가 앉고 나서야 서서히 출발하는 습관은 평균 연령이 60대 이상인 시골 마을에서나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버스에선 내가 제일 어린 막내다. 급할 것 없는 버스가 인적도 차량도 드문 유령도시의 도로를 천천히 달리면 창문으로 들어오는 싱그러운 바람에 버스에 탄 할아버지, 할머니의 은빛 머리칼을 보드랍게 쓸어내린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좋아 버스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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