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의 왼쪽 팔은 소년 시절의 시간에 멈춰 있다. 프레스 기계에 짓눌렸던 그날의 사고로 성장판은 닫혔고, 뼈는 길을 잃은 채 자라났다. 관절이 감당해야 할 무게를 오로지 주변 근육이 대신 짊어지고 있기에, 그의 팔은 늘 위태로운 균형 속에 놓여 있다.
"관절이 없어 근육으로 버틴다"는 그의 담담한 고백 뒤에는, 비가 오거나 몸이 고단할 때마다 살을 파고드는 시린 통증이 숨어 있다. UAE와 이집트, 남아공의 G20을 거쳐 튀르키예까지, 겨우 '7박 10일'. 효율을 좇는 대통령의 결단이 만들어낸 숨 가쁜 여정이었겠으나, 사막의 열기와 남반구의 낯선 공기를 가르며 하루하루 쌓여가는 피로 속에 점점 더 안으로 굽어 들어가는 그의 팔에 시선이 간다. 그럴 때면 가슴 한구석에 묵직한 안타까움이 쌓인다.
소년공에서 인권변호사로,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거쳐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굽은 팔을 펴지 못한 채 가파른 비탈을 오르는 과정이었다. 그 길 위에서 '장애'는 배려의 대상이 아니라, 걸핏하면 공격당하는 약점이자 조롱의 소재였다.
뒤틀린 팔과 불편한 걸음걸이는 수시로 혐오 섞인 구설에 올랐고, 그는 그 모든 차별과 비웃음을 오직 '개인의 압도적인 능력' 하나로 돌파해야만 했다.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은 우리 사회가 장애인에게 관대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그가 장애라는 거대한 벽을 홀로 넘을 만큼 강했기 때문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서글픈 민낯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는 장애를 가진 이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지만, 정작 그 장애를 보호할 최소한의 울타리조차 갖추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없는 나라다. 이 법적 공백 속에서 혐오는 제동 장치 없이 질주한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이동권을 외치는 장애인들의 절규는 '시민의 발을 묶는 떼쓰기'로 매도되고, 여성과 소수자를 향한 차별적 언어는 일상의 공기처럼 우리 주위를 부유한다.
심지어 정치권 내부에서도 자정 작용은 멈췄다. 최근 국민의힘 박민영 대변인이 같은 당의 김예지 의원을 향해 쏟아낸 혐오 발언과, 이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맹목적으로 두둔한 정당과 지지자들의 모습은 충격적이다. 아니, 충격을 넘어 이것이 부정할 수 없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국회의원이라는 헌법기관의 자리에 오른 장애인조차, 진영의 논리와 비틀린 우월감 앞에서는 그 존엄을 난도질당한다. 법이 보호하지 않는 사회에서, 힘없는 개인은 영원히 혐오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소년공 출신 대통령이 세계 정상들 사이에서 악수를 나누는 장면은 벅찬 자부심을 주지만, 그 장면이 송출되는 TV 화면 밖의 현실은 여전히 '야생'이다. 탁월한 능력으로 살아남은 장애인은 잠시 영웅이 되었지만, 평범한 장애인은 시민으로조차 대접받지 못하는 나라.
살인적인 스케줄의 순방 일정이 더해갈수록 점점 더 굽어가는 대통령의 팔을 보며 생각한다. 가장 약한 자를 가장 높은 곳에 올린 이 자랑스러운 나라는 이 이해할 수 없는 역설 속에서 모순과 기만이 뒤엉킨 누아르 속을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