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침몰하는 배 위에서 샴페인을 터뜨리는 사람들

2025 청룡영화상 시상식, 그리고 신뢰를 잃은 한국 영화계에 대하여.

by 조하나


화려한 턱시도와 드레스 자락이 레드 카펫을 쓸고 지나간다. 2025년 늦가을, 제46회 청룡영화상의 밤이다. 카메라는 쉴 새 없이 플래시를 터뜨리고, 배우들은 연습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다. 하지만 그 화려한 불빛 뒤편으로 나는 여전히 기이하면서도 덤덤한 공허함을 느낀다. 마치 서서히 침몰하고 있는 호화 유람선 타이타닉의 갑판 위에서, 배가 기울어지는 줄도 모르고, 혹은 알면서도 애써 모른 척하며 마지막 샴페인을 터뜨리는 귀족들의 파티를 보는 듯한 기시감이 든다.


올해도 시상식을 두고 말들이 많다. 수상 결과에 대한 이견이야 늘 있는 일이라지만, 이번엔 그 결이 좀 다르다. 사람들은 시상식의 결과를 ‘신뢰’하기는커녕 조롱거리로 소비한다.


우리는 매년 아카데미 시상식, 일명 ‘오스카’의 결과에 주목한다.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잔치임에도 굳이 수상작을 찾아보는 이유는 명확하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과 배우 윤여정의 오스카 수상 때문이 아니다. 오스카 트로피가 갖는 무게감, 즉 그 작품이 일정 수준 이상의 예술적 성취를 이뤘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수상작은 막대한 부가 수익을 올리고 전 세계적으로 상영관이 확대되는 ‘오스카 후광’을 누린다. 권위 있는 시상식이 산업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선순환의 구조다.


반면, ‘콘텐츠 문화 강국’이라는 한국의 수많은 영화제와 시상식들의 현재 모습은 어떠한가. 그들의 트로피가 관객을 극장으로 이끄는 나침반이 되어본 적이 있는가. 수천 명의 영화인들이 투표하는 아카데미의 집단지성과 달리, 소수의 심사위원과 특정 입김에 휘둘리는 한국의 시상식은 그저 ‘그들만의 배분’에 불과하다. 신뢰가 없으니 권위가 없고, 권위가 없으니 산업적 낙수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


이번 제46회 청룡영화상은 이러한 ‘권위 없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시상식이 끝난 후 대중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주조연상이나 작품상을 받은 이들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뜨거운 화제는 영화 <얼굴>로 후보에 올랐으나 빈손으로 돌아간 배우 박정민과 무대에 오른 가수 화사의 축하 공연이었다. 무관의 배우와 가수가 수상자들보다 더 빛나는 이 기이한 장면이야말로 한국 영화 시상식이 겉만 번지르르한 속 빈 강정임을 방증한다.







박정민은 오랜 시간 꾸준히 치열하게 연기하다 올해 안식년을 선언하고 출판사 ‘무제(無題)’의 대표가 되었다. 영화 <얼굴> 속 그의 연기는 트로피 없이도 이미 증명되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서 상을 주고받는 그들보다 ‘제목 없음(無題)’이라는 간판을 걸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그의 존재감이 청룡영화상에서 더 크게 다가오는 역설이라니. 트로피라는 껍데기보다, 삶을 대하는 배우의 ‘태도’라는 알맹이가 더 빛난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툭, 우리의 마음을 때린다.


매년 영화시상식에서는 배우와 감독으로 채워진 객석의 태도가 늘 화제였다. 가수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공연할 때, 팔짱을 끼고 정색하거나 점잔을 빼는 배우들의 그 오만함은 늘 구설에 올랐다. 예술에는 위아래가 없다지만, 한국의 영화시상식장에만 가면 영화인은 음악인보다 우위에 있다는 촌스러운 계급도가 그려진다. 영화인은 대중가수보다 지적이고 품위가 있다는 그들의 착각은, 내가 잡지사 에디터로 현장에 있을 때부터 뼈저리게 느끼던 바였다.


그렇게 거들먹거리던 한국 영화계는 지금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아니, 사실은 오래전부터 위기였다. 극장은 텅 비고, 티켓 값은 치솟고, 관객들은 떠났다. 그런데도 그들은 세상 근심 하나 없는 얼굴로 서로의 어깨를 두드린다. 이 기묘한 인지부조화는 한국 영화계가 거대한 ‘카르텔’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대형 자본과 소수의 스타들로 짜인 성벽 안에서 그들은 “우리는 여전히 건재하다”고 자위한다. 성벽 밖에서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는 고사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진짜 관객이 보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저 화려한 시상식 무대 조명 아래가 아니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이름 없는 창작자들의 땀방울 속에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과연 정당한 기회가 돌아가고 있는지, 영화계는 자성하지 않는다.


AI가 인간의 고유 영역이라 믿었던 창작의 세계마저 위협하는 ‘빅뱅’의 시대가 코앞이다. 하지만 한국 영화계와 영화인들에게서는 이에 대한 치열한 고민도, 깊은 사유도 찾아볼 수 없다. 침몰하는 배 위에서의 샴페인은 당장은 달콤할지 모르나, 그 취기가 깨고 나면 남는 것은 결국 차가운 바닷물뿐이다. 너무 늦기 전에 그 견고한 카르텔의 성벽이 깨진다면 다행이겠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 영화계에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00_메일주소태그.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