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백호 '낭만에 대하여'
내가 에디터로 최백호 선생님을 두 번이나 인터뷰했던 건, 공적인 의무감을 넘어선 순전한 '사심'이었다. 어린 시절, 술에 취해 들어오신 아버지가 넥타이를 풀어헤친 채 흐릿한 눈으로 흥얼거리던 18번이 바로 '낭만에 대하여'였기 때문이다. 그 쓸쓸한 뒷모습에 서린 정서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시작된 호기심은, 이 노래의 탄생 비화를 듣는 순간 경이로움으로 바뀌었다.
한때 1억 원이라는 거액의 계약금을 받으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이십 대 청년 가수 최백호. 그러나 세월은 냉정했고, 그는 점점 대중에게 잊혀가며 일이 끊기는 긴 슬럼프를 겪어야 했다. 마흔 중반이 다 된 어느 나른한 오후, 그는 거실에 앉아 묵묵히 설거지하는 아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생활의 소음 속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 '내 첫사랑 그 소녀는 지금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그 찰나의 상념은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라는 첫 소절이 되었고, 그렇게 한국 대중음악사를 관통하는 명곡은 탄생했다.
이 노래가 단순히 중년의 회한을 넘어 세대를 아우르는 '힙'한 명곡으로 재탄생한 결정적 순간은 2013년 서울재즈페스티벌이었다. 야외무대 위로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그 여백을 메우는 묵직한 콘트라베이스와 박주원의 집시 기타, 그리고 삶의 시간이 나이테처럼 겹겹이 둘러진 울림통을 비틀어 짜내는 듯한 최백호의 목소리. 그것은 테크닉을 초월한, 곰삭은 세월만이 낼 수 있는 소리였다.
놀라운 것은 객석의 풍경이었다. 아버지 벌인 가수의 노래에 마음을 활짝 열고 공명하는 젊은 관객들의 눈빛은 진지하게 반짝였다. 노래가 끝난 후, 그들과의 예상치 못한 연결에 울컥한 노가수가 보여준 깊은 허리 숙임은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를 남겼다.
그날의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길,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돈이 없지, 낭만이 없냐?"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