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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시대를 건너는 우리의 태도

당신의 응원봉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사랑인가 혐오인가

by 조하나


10년 전, 내 책상 위에는 종종 투박한 편지봉투가 놓이곤 했다. 스마트폰이 세상을 집어삼키기 직전, 군대라는 단절된 공간에서 날아온 것들이었다.


남성지 에디터로 일하던 그 시절, 군인 독자들은 갱지 위에 모나미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마음을 보내왔다. "기사 잘 읽었습니다." "그 칼럼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정성 들여 쓴 손글씨, 뒷면이 볼록하게 튀어나올 정도로 힘주어 쓴 그 흔적에는 '시간'이 담겨 있었다. 누군가의 글을 읽고, 사유하고, 펜을 들어 우표를 붙이기까지의 긴 호흡. 그것은 나와 독자 사이에 흐르는 무언의 존중이자 인간적인 연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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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연결은 더 빨라졌으나 역설적으로 끊어졌다. 얼마 전, 민희진 대표와 하이브 사태를 다루며 언론의 편향성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내 양심이 시킨 상식적인 비판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남초 커뮤니티 '에펨코리아(펨코)'에서 내 글은 읽어야 할 텍스트가 아니라 찍어내야 할 '좌표'가 되었다. 논리는 실종됐고 조롱과 혐오, 급기야 살해 협박 메일까지 도착했다.


그 기저에는 '부족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지금의 일부 남성 커뮤니티는 '내가 지지하는 대기업' 혹은 '남성성'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들은 자신이 소비하는 권력을 마치 자신의 권위인 양 착각한다. 그렇기에 삼성이나 하이브 같은 거대 권력, 혹은 그들이 정의한 남성성을 향한 비판은 곧 자아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된다. 그들은 논쟁하지 않는다. 감히 '우리 편'을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 좌표를 찍고 떼로 몰려와 린치를 가한다. 스포츠나 전쟁처럼 모든 이슈를 다룬다. 타인을 굴복시키고 멘탈을 붕괴시키는 과정에서 그들은 "우리가 적을 무찔렀다"는 비틀린 효능감과 소속감을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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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부족'의 실체는 얼마나 허약하고 비겁한가. 참다못해 어제 모욕죄, 명예훼손,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고소를 진행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전문 변호사와의 상담도 마쳤다. 그러자 밤사이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살기등등하던 기세는 온데간데없고, 이메일로 "고의는 없었다", "오해였다"는 장문의 변명문을 보내는 이들이 나타난 것이다.


변명문은 협박문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들의 혐오와 조롱이 '합리적 정의'라는 착각에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이 옳다는 광기에 사로잡혀 타인을 괴롭히는 것이 '범죄'가 아닌 '정의 구현'이라 믿고 있었다. 그러다 법의 칼날이 눈앞에 닥쳐서야 비로소 비겁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그들의 부모를 생각한다. 대개 40~50대일 그들은, 광장에서는 민주주의와 정의를 외치면서도 정작 집에서는 입시 경쟁의 최전선으로 자녀를 내몰았을지 모른다. 혹은 스마트폰이라는 디지털 유모에게 아이의 영혼을 방임했을 수도 있다. 괴물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모순과 가정의 무관심이 그들을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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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너진 가정교육에만 기댈 수는 없다. 다행히 사회는 늦게나마 회초리를 들 준비를 하고 있다. 어제 국회 과방위에서 '징벌적 손해배상법'이 마침내 통과됐다. 허위·조작 정보를 고의 또는 중과실로 유포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손해액의 '최대 5배'까지 배상 책임을 지게 하는 법안이다. 이 법은 언론사뿐 아니라 유튜버, SNS, 그리고 이들이 서식하는 커뮤니티까지 포괄한다. 연말까지 본회의 의결이 목표라고 한다. 익명 뒤에 숨어 타인의 영혼을 난도질하지만 쥐꼬리만 한 배상금으로 범죄자를 안도케 만들던 '가성비 좋은 혐오'의 시대는 이제 끝장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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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암담한 혐오와 야만의 대척점에는, 놀랍도록 눈부신 '사랑'이 자라고 있다. 나는 서태지와 아이들을 시작으로 아이돌 1세대를 거쳐온 세대다. 직접 팬덤 활동을 해본 적은 없지만, 사회가 그들을 '빠순이'라 비하할 때조차 나는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이 모인 팬덤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있었다.


그 마음들은 헛되지 않았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이데아>를 듣던 내 친구는 치열한 시민단체 활동가가 되었고, H.O.T.를 사랑했던 매기강은 <케데헌>을 만들었다. 사랑은 그들을 자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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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성장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12·3 내란 사태, 광장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의 응원봉을 든 소녀들이 있었다. "사랑하는 OO야, 민주주의 세상에서 살게 해 줄게"라고 쓰인 피켓을 든 소녀들의 눈빛을 나는 존경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개인의 영역을 넘어 민주주의라는 거대 담론을 지키는 방패가 된 것이다.


혐오가 좌표를 찍을 때, 사랑은 꿈을 꾼다. 한 대학생 친구는 내게 수줍게 고백했다. 이번 뉴진스 사태를 겪으며 한국 사회의 부조리와 기득권의 표독스러움, 그 뻔뻔함을 뼈저리게 목격했다고. 그래서 자신은 다짐했노라고. 억울한 이들을 지키는 '인권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가슴이 먹먹했다. 고맙고, 부끄럽고, 미안하고, 또 대견했다. 기득권에 자아를 의탁해 혐오를 배설하다 고소장에 벌벌 떠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부조리에 맞서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전자가 명백한 퇴행이라면, 후자는 위대한 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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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이 계속 꿈꾸기를 바란다. 그 순정한 마음들이 모여 아주 조금씩이라도 이 세상을 바꾸길 바란다. 혐오의 확성기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결국 역사를 밀고 나가는 힘은 사랑에서 나온다. 10년 전 꾹꾹 눌러쓴 손편지의 마음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제 응원봉을 들고 세상을 바꾸는 횃불로 진화한다.


우리는 오늘도 서로를 안으며, 그렇게 조금씩 자란다.


그러니까 나는, 멈추지 않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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