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을 말하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

고학력자들은 넘쳐나지만 토론은 못 하는 한국 사회

by 조하나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고학력 사회다. 대학 진학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서점에는 인문학 베스트셀러가 넘쳐나며, 누구나 손 안의 스마트폰으로 방대한 지식에 접속한다. 스펙으로만 따지면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똑똑한 세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회의실과 토론장은 기묘한 침묵에 휩싸여 있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깨고 나오는 말은 자신의 치열한 '생각'이 아닌, 두 가지 비겁한 알리바이뿐이다.


하나는 사건이 종결된 뒤에야 비로소 등장하는 "내 그럴 줄 알았어"이고, 다른 하나는 토론할 때마다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OO의 말에 따르면"이다. 시점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이 두 화법은 본질적으로 같은 뿌리에서 자라났다. 바로 내 이름으로 책임지기 싫어하는 두려움, 그리고 ‘내 생각이 틀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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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럴 줄 알았어’라는 사후 약방문


먼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내 그럴 줄 알았어"를 보자. 유명인의 추락이나 기업 오너의 갑질, 유력 정치인의 몰락 앞에서 대중은 약속이나 한 듯 이 말을 읊조린다. 표면적으로 이 말은 자신의 통찰력에 대한 과시처럼 들린다. "나는 겉모습에 속지 않았고, 이 파국을 예견했다"는 일종의 지적 우월감이다.


하지만 껍질을 벗겨내면, 이 말은 살아남은 방관자가 뒤늦게 제출하는 비겁한 면죄부일 뿐이다. 직장 상사의 부당한 지시나 사회적 부조리가 진행 중일 때, 회의실을 채우는 것은 무거운 침묵뿐이다. 그러다 권력이 무너져 내려 더 이상 나에게 해를 끼칠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봉인을 해제하며 "내 저럴 줄 알았지"라고 외친다.


이는 사르트르가 말한 '자기기만'의 전형이다. 그들은 '시간' 뒤에 숨는다. 결과가 빤히 드러난 뒤에야 숟가락을 얹으며, 막을 수 있었던 비극을 방관했던 자신의 책임을 '통찰력'으로 위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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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 따르면’이라는 권위의 방패


흥미롭게도 한국의 고학력자들은 토론의 자리에서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을 은폐한다. 바로 "OO에 따르면", "OO가 말하기를"이라는 화법이다.


우리는 유독 자신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대신, 유명한 철학자나 해외 석학의 권위를 빌려와야만 안심한다. 나는 이를 '지적 복화술'이라 부르고 싶다. 내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타인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을 뿐이며, 내 자아는 그 거대한 인형 뒤에 숨어버린 형국이다.


앞서 본 사람들이 '시간(결과)' 뒤에 숨었다면, 이들은 '권위'라는 견고한 방패 뒤에 숨는다. 내 의견이 반박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의견이 논파당하더라도 상처받는 건 내가 아니라 인용된 권위자라고 믿으며 안도한다. '책임의 외주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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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자가 토론을 못 하는 이유 1. 정답 강박


도대체 우리는 왜 이렇게 되어버렸을까? 왜 학위가 넘쳐나고 지식이 폭발하는 이 고스펙 사회에서, 정작 ‘내 생각’을 제대로 말하는 사람은 멸종 위기가 되었을까?


그 원인은 우리 사회가 가진 고질적인 ‘정답 강박’과 ‘토론 교육의 부재’에 있다. 한국의 엘리트 교육은 '생각하는 힘'이 아니라 '정답을 찾는 기술'을 가르치는 데 집중해 왔다. 학교와 가정에서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라는 질문보다는 "출제자의 의도가 뭐야?"라는 추궁을 듣고 자랐다.


이런 환경에서 내 의견이 상대방과 다르다는 것은 단순히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내가 '틀렸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그 '틀림'은 곧장 무능력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진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일수록 이 공포는 더 크다. 내가 틀렸다는 사실이 나의 지적 권위를 훼손할까 봐 두려워, 확실한 권위자의 말(인용)이나 결과가 나온 뒤의 안전한 비평(사후 확신) 뒤로 숨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지식을 머리에 채우는 법만 배웠지, 그 지식을 재료 삼아 나의 논리를 세우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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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자가 토론을 못 하는 이유 2.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관계의 늪


한국 사회에서 토론이 불가능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관계의 압박'이다. 내가 해외에서 서양인들과 생활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 하나가 "Don't take it personally(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였다. 서구권의 토론 문화에서는 '메시지'와 '메신저'를 철저히 분리한다. 내 의견이 공격받는 것이지, 내 인격이 공격받는 게 아니라는 합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다르다. 우리는 유독 '이성'에 '감정'을 섞는다. 상대방의 날 선 비판을 논리적인 반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한 '비난'이자 '공격'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한국의 토론장에서는 '논리'보다 '태도'가 더 중요한 검증 대상이 된다. 내용이 아무리 옳아도 말투가 공격적이거나 직설적이면 "어린 친구가 태도가 왜 저래?", "말을 참 섭섭하게 하네"라며 본질을 흐려버린다.


이는 한국 사회가 매우 폐쇄적이고 좁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토론이 끝나고 회의실 문을 나서면, 우리는 다시 상사로, 동료로, 선후배로 마주해야 한다. 어차피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 좁은 바닥에서, 굳이 상대를 적으로 돌려가며 내 주장을 관철하는 것은 '사회생활 못 하는 짓'으로 취급받는다. 혹여나 토론에서 튀는 발언을 했다가 향후 인사 고과나 평판 조회에서 불이익을 당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비겁한 침묵을 강요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토론에서 이기고 관계에서 지는 것보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쪽을 택한다. 그렇게 회의실의 공기는 평화로울지 몰라도, 그 평화는 죽은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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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펙이 아닌 ‘사유’로 부딪쳐라


해외에서 다이빙 강사로 일할 때 겪었던 일화는 이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나의 교육생 중에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1년의 '갭이어(Gap Year)'를 보내며 인턴으로 온 프랑스 여성과, 휴가 차 온 20대 슬로바키아 남성이 있었다.


어느 날 다이빙을 마치고 맥주를 마시던 중, 이 젊은이들 사이에서 격렬한 대화가 오갔다. 주제는 놀랍게도 '브렉시트가 서유럽과 동유럽에 미치는 다각도적인 영향'이었다. 10대 후반의 인턴과 20대의 교육생은 서로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치열하게 논쟁했다. 그때 나는 머리를 꽝 하고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다름' 그 자체를 확인하며 지적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게 토론은 '정답 찾기'나 '승패 가리기'가 아니라, 서로의 세계를 넓혀가는 놀이였다. 그들이 그토록 치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틀려도 안전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술자리였다면 "야, 머리 아프게 무슨 정치 얘기야"라며 핀잔을 주거나, 서로 얼굴을 붉히며 싸움이 났을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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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무새의 언어를 버리고


그날의 기억은 한국 사회의 '내 그럴 줄 알았어'와 '누구에 따르면' 현상을 관통하는 열쇠가 되었다. 우리는 틀리는 것이 두려워 입을 다물거나(침묵), 이미 검증된 남의 말(권위)을 빌려온다. 그리고 상황이 종료되어 정답이 나오면 그제야 "내 그럴 줄 알았어"라며 안전하게 등장한다.


한나 아렌트가 경고했듯, 악은 평범한 사람들의 사유 없는 복종과 방관을 먹고 자란다. 우리가 그토록 비판하는 사회의 '괴물'들을 키운 것은, 8할이 우리들의 침묵이었고, 나머지 2할은 남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 나약함이었다.


진정한 지성은 권위자의 문장을 인용하는 능력이 아니라, 서툴더라도 '나의 언어'로 세상과 부딪칠 수 있는 용기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쿨하게 받아들이고, 타인의 권위가 아닌 나의 생각으로 논쟁할 때, 비로소 우리는 비겁한 앵무새가 아닌 '사유하는 주체'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이제 타인의 권위와 지나간 시간이라는 방패를 내려놓자. 침묵과 인용부호를 걷어내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당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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