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국경이 없지만, 지도는 흉터투성이다

2026년, 다시 도래한 제국과 ‘주식회사 미국’의 야만

by 조하나

다이빙 강사로 세계를 떠돌던 시절, 나는 종종 바닷속 깊은 곳에서 기묘한 평화를 맛보았다. 수심 30미터 아래, 오직 내 숨소리와 물방울 소리만이 존재하는 그곳에는 국경도, 영토도, 이념도 없었다. 하지만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미는 순간, 나는 어김없이 ‘제국’이 남겨둔 거대한 흉터들을 마주해야 했다.



Whisk_e36f447bd95b545810c493aed23a012fdr.jpeg



일본 오키나와현의 남단, 이시가키섬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자신을 ‘일본인’이라 부르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들의 눈동자 속에는 1879년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류큐국의 비통함이, 그리고 제2차 대전 당시 ‘총알받이’로 내몰렸던 기억이 침전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반면, 제국의 시민들은 놀라울 만큼 해맑았다. 어느 날 만난 프랑스 친구는 인도양의 레위니옹섬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스레 말했다. “여긴 여권도 필요 없는 우리 땅이야. 아프리카 바로 옆인데 유로화를 써서 정말 편해.” 그에게 그곳은 식민의 역사가 아닌, 그저 편리한 휴양지일 뿐이었다.


압권은 미국 친구였다. 그는 카리브해의 푸에르토리코에서 다이빙했던 무용담을 늘어놓으며 말했다. “면허증 하나만 있으면 국내선 타고 훌쩍 다녀올 수 있어. 완전히 미국인데 물가는 싸고 천국이지.” 그 아름다운 비에케스섬(Vieques)이 60년 넘게 미 해군의 폭격 훈련장으로 쓰이며 주민들이 암 발병과 오염에 신음했다는 사실은 그의 ‘천국’에 포함되지 않았다.


바닷속은 국경이 없는데, 수면 위에는 제국주의의 잔재가 부유물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누군가는 빼앗긴 기억을 안고 사는데, 누군가는 그 위에서 죄의식 없이 주인 행세를 했다. 그때 나는 그것이 지나간 역사의 찌꺼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2026년 1월, 나는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제국주의는 끝난 적이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을 뿐이다.



Whisk_5748a5644a9ee8988244d41a773fa803dr.jpeg




21세기판 동인도 회사의 부활: 미국의 베네수엘라 ‘접수’


2026년 새해 벽두부터 날아든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기어이 베네수엘라를 폭격했다. ‘독재자 마두로 축출’과 ‘마약 카르텔 소탕’이라는 명분은 그럴듯한 포장지에 불과했다. 폭격의 연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백악관은 본색을 드러냈다.


트럼프는 베네수엘라의 국가 재건을 돕겠다며 ‘총독’을 파견하고, 엑손모빌과 셰브론 등 미국 석유 메이저 기업들을 베네수엘라로 진입시켰다. 그의 논리는 간명하고도 잔혹했다. “미국이 독재로부터 너희를 해방시켜 주었으니, 재건 비용은 너희의 기름으로 갚아라.”


백악관은 이미 베네수엘라 측에 3,000만에서 5,000만 배럴의 원유를 미국으로 보낼 것을 요구했다. 트럼프는 기자회견에서 “미국 납세자의 돈을 쓰지 않고, 미국 기업들이 인프라를 복구하고 그 수익으로 비용을 충당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이는 정확히 19세기 영국 동인도 회사가 인도에서 행했던 방식이자,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경영하던 ‘약탈적 주식회사’ 모델의 완벽한 부활이다. 베네수엘라는 이제 주권 국가가 아니다. ‘주식회사 미국(USA Inc.)’의 남미 지사로 전락했다.


Whisk_a00ef250bd8a9a3bb734a46379acfab8dr.jpeg



동맹도 예외는 없다: 그린란드를 향한 협박


이 야만적인 ‘부동산 사냥’의 대상은 적성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트럼프는 다시 한번 덴마크의 자치령 그린란드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지난 1기 집권 당시 "그린란드를 사고 싶다"고 했다가 핀잔을 들었던 그는, 이번엔 농담으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인다.


불과 어제(1월 6일), 백악관 대변인이 내놓은 논평은 사실상의 선전포고였다. "그린란드 인수를 위해 미군의 군사적 자산을 사용하는 것은 언제나 열려 있는 옵션"이라는 폭탄 발언이 터져 나온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 영국 등 유럽 정상들이 즉각 "그린란드의 미래는 오직 주민이 결정한다"는 이례적인 공동 성명을 발표하며 맞섰지만, 트럼프는 요지부동이다.


트럼프가 파견한 특사 제프 랜드리(Jeff Landry)는 한술 더 떠 교활한 '갈라치기'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오늘 아침 CNBC 인터뷰에서 "미국은 그린란드의 완전한 '독립'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이는 덴마크라는 보호막을 걷어내고, 홀로 남은 그린란드를 막대한 자본으로 집어삼키겠다는 속셈이다. 베네수엘라가 폭격에 무너졌다면, 그린란드는 지금 '공포'와 '돈'이라는 인질극에 갇혀버렸다. 동맹국의 영토조차 거래 가능한 매물로 취급하는 것, 이것이 2026년 오늘 목격하는 신제국주의의 민낯이다.



Whisk_bf612ac9236b7148320486c6bc0e43f9dr.jpeg
Whisk_3452aef97d2aba680c54e4a161512b5ddr.jpeg



무너진 국제 시스템과 열강의 ‘검은 침묵’


더욱 절망적인 것은 이를 제어할 국제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했다는 점이다. 유엔(UN)은 식물인간이 된 지 오래다.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의 거부권 행사와 중·러의 비토권 남발로 인해 아무런 규탄 성명도 내지 못하고 있다. ‘국제법’은 힘 있는 자들의 식탁보로 전락했다.


그렇다면 미국의 폭주를 견제해야 할 다른 열강, 중국과 러시아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미국의 폭주를 막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막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침공은 사실상 ‘21세기판 몬로주의’의 선언이다. "서반구는 미국의 뒷마당이니 건드리지 마라." 이 메시지는 역설적으로 중국과 러시아에게 "대신 너희들의 앞마당인 아시아와 유라시아에는 간섭하지 않겠다"는 달콤한 신호로 읽힌다.


중국 시진핑 주석에게 베네수엘라의 차관 1,000억 달러는 푼돈이다.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은 미국의 항공모함이 카리브해에 묶여 있는 사이, 남중국해와 대만 해협에서 확보할 수 있는 절대적인 패권이다. 러시아의 푸틴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의 시선이 그린란드라는 북극의 서쪽 현관에 고정된 순간, 러시아는 북극항로의 나머지 반쪽과 동유럽에서의 영향력을 공고히 할 절호의 기회를 얻는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이념의 대결이 아니다. 미국은 남북 아메리카를, 중국은 아시아를, 러시아는 유라시아를 각각의 요새로 삼아 각자도생 하자는 ‘지구 3 분할’의 거대한 암묵적 합의, 그 끔찍한 빅딜이 완성되고 있는 현장이다.



Whisk_e28b0b7ca9de01a9ffa412e27d40d4cbdr.jpeg



우리는 야만의 시대로 회귀했다


다시, 다이빙하던 시절을 떠올린다. 이시가키의 바다, 세이셸과 레위니옹의 바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의 바다. 그 아름다운 물빛 아래에는 제국의 폭력이 검은 산호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2026년 오늘, 그 검은 산호는 수면 위로 솟구쳐 전 세계를 뒤덮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지 않는다. 그들은 노골적인 ‘세계의 건물주’이자 ‘채권추심업자’가 되었다. 힘이 곧 정의가 되고, 자원이 곧 주권이 되는 시대. 약소국은 강대국의 하청 업체로 전락하고, 시민들은 거대 자본의 톱니바퀴로 갈려 나가는 시대.


우리는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었다. 제국주의는 갔고, 식민지는 해방되었으며, 인권과 주권 존중의 시대가 왔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의 무너진 건물 잔해 위로 꽂히는 성조기와, 그린란드 빙하 위를 맴도는 미국의 탐욕스러운 시선은 우리에게 차갑게 속삭인다.


야만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고. 제국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다만 더 세련되고, 더 효율적이며, 더 파괴적인 모습으로 돌아왔을 뿐이라고.


구글 어스를 켜고 베네수엘라 해안을 내려다본다. 그곳 로스 로케스 제도에는 ‘라 파레드(La Pared)’, 즉 ‘벽’이라 불리는 거대한 수중 절벽이 있다.


바닷속 그 ‘벽’은 수만 가지 생명을 품은 산호들의 안식처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트럼프가 베네수엘라 주위에 둘러치고 있는 또 다른 ‘벽’, 봉쇄와 폭력의 장벽은 사람들을 질식시키고 있다.


당분간 그곳의 아름다운 바다는 핏빛으로 일렁일 것이다. 수면 위를 배회하는 포식자들의 그림자가, 물속의 절벽보다 더 캄캄하고 거대하기 때문이다.



Whisk_5b86fbaa3f1726995cf4c25d08850f92dr.jpeg








00_메일주소태그.pn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