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칠 때 중국이라는 닻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지만 바로 그 시각, 지구 반대편 베이징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이재명 대통령의 중국 국빈 방문이다. 미·중 패권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시기, 이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과의 만남에서 꺼내 든 카드는 익숙한 ‘조선’이 아닌, 잊힌 ‘고려’였다.
우리의 외교적 무의식은 오랫동안 ‘조선-명나라’ 모델에 지배받아 왔다. 그것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긴다’는 사대(事大)의 질서였고,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이재명 대통령은 한중 비즈니스 포럼에서 ‘송나라와 고려’를 호출했다. 대한민국의 외교 좌표를 이념적 ‘명분’에서 냉철한 ‘실리’로 대전환하겠다는 선언이다.
고려는 조선과 달랐다. 송나라의 화려한 문물 뒤에 숨겨진 군사적 유약함을 간파했던 고려는, 송과 활발히 교류하되 그들의 안보 위기에 휘말리지 않는 냉철함을 유지했다. 개경의 관문 벽란도는 송나라 상인뿐 아니라 아라비아 상인까지 드나드는 국제적 플랫폼이었다. 이 대통령이 언급한 ‘벽란도 정신’은 정치적 긴장 속에서도 끊기지 않는 상인의 생명력, 즉 철저한 ‘정경분리’ 원칙을 의미한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칠 때 중국이라는 닻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재명 대통령은 500년 묵은 조선의 갓을 벗어던지고, 고려 상인의 계산기를 두드리며 그 해법을 찾고 있다.
무엇보다 돋보인 것은 외교의 ‘언어’였다. 외교란 칼 없는 전쟁이며, 그 무기는 다름 아닌 맥락과 품격이다. 과거 우리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며 직설적인 굴종이나 거친 저항의 언어만을 구사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고려지(高麗紙)’라는 우아한 은유를 통해 국익을 관철했다.
고려의 종이가 송나라로 건너가 그들의 지식을 담아 다시 돌아왔듯, 일방적 조공이 아닌 대등한 ‘지식 순환’의 파트너십을 제안한 이 장면은 압권이었다. 굳이 “미국의 패권에 반대한다”고 목청을 높여 불필요한 적을 만들지도, “중국의 위대함에 경복한다”며 자존심을 굽히지도 않았다. 그저 역사 속의 한 장면을 끄집어내어 “우리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임을 세련되게 주지 시켰을 뿐이다.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면서도 우리의 실리를 챙기는 것. 거친 포성이 오가는 야만의 시대에, 펜 끝 하나로 상대의 의중을 찌르는 이 고도의 외교적 수사야말로 진정한 선진국 대한민국의 품격이라 할 만하다.
이 지점에서 등골이 서늘해지는 상상을 하게 된다. 만약 운명이 우리를 비껴가지 않아, 2026년 오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이재명이 아니라 여전히 ‘내란수괴 윤석열’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트럼프의 베네수엘라 침공 속보가 타전되기가 무섭게 용산은 환영 성명을 내기에 바빴을 것이다. 그는 맥락을 읽는 은유나 침묵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자유의 확산’이나 ‘가치 동맹’ 같은 1차원적인 슬로건을 앵무새처럼 반복했을 게 뻔하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외교란 국익을 위해 행간을 읽는 고도의 예술이 아니라, 선과 악을 단죄하는 투박한 ‘종교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트럼프의 무력 사용을 “전체주의에 대한 자유 진영의 결단”이라 추켜세우며, 미국조차 요구하지 않은 지지를 맹세했을지 모른다. 그 결과는 참혹하다. 한국은 남미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물론,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중국과 러시아의 조롱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더 끔찍한 것은 그다음이다. 철저한 장사꾼인 트럼프는 자신에게 맹목적인 ‘예스맨’에게 반드시 청구서를 내민다. “한국이 자유를 사랑한다면 베네수엘라 재건 비용을 대라”, “평화유지군을 파병하라”. 그 모든 대가는 대한민국 국민의 몫이다.
다행히 역사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지금 우리 정부는 베네수엘라 사태에 대해 신중한 침묵을 지키며, 베이징에서 실리를 챙기는 데 골몰하고 있다. 국제 정치라는 정글에서 살아남는 것은, 명분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자가 아니라 위험을 감지하고 굴을 파는 여우다.
2026년의 세계는 ‘민주주의 대 독재’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트럼프의 미국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주권을 짓밟는 제국주의적 본색을 드러냈고, 중국은 그 틈을 타 영향력을 확대하려 든다. 이 난세에 맥락도 모른 채 “대의명분”만 외치던 윤석열 식의 거친 외교가 막을 내린 것은 천운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명나라 황제를 향해 읍소하던 조선 사신의 눈물이 아니라, 거란과 송, 여진 사이에서 끈질기게 생존하며 ‘코리아(Corea)’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고려 상인의 배포다.
벽란도의 뱃길은 거칠다. 그러나 맹목적인 이념의 닻을 끊고 실용의 돛을 올린 지금, 우리는 적어도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고 있다. 1945년 해방 공간에서 터져 나왔던 힘없는 나라의 비명이 2026년 베네수엘라에서 재현되는 이 비극의 시대에, 대한민국이 ‘호구’가 아닌 ‘플레이어’로 식탁에 앉아 있다는 사실. 이 냉혹한 현실 속에서, 이것만은 분명한 위안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는다. 다만, 지금 우리의 운전대만은 올바른 방향을 향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