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미니애폴리스에게 1980년 광주가 보내는 편지
2026년 1월 7일. 지구 반대편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6년 전 전 세계를 향해 "숨을 쉴 수 없다(I can't breathe)"고 절규했던 조지 플로이드의 도시. 그곳의 평온했던 주택가, 하얀 눈 위로 다시금 붉은 피가 낭자하게 뿌려졌다.
그 피의 주인은 르네 니콜 굿(Renee Nicole Good). 여섯 살 난 아들을 둔 어머니이자 시인이었으며, 평생 이웃을 돌보며 살아온 평범한 미국 시민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조국이 보낸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의 총탄에 맞아 끝내 숨을 거뒀다.
그녀가 피를 흘리며 생명의 끈을 놓아가던 그 짧은 시간,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본 이웃 주민이자 의사가 절규했다.
"나는 의사요! 적어도 그녀의 맥박이라도 확인하게 해 주시오!"
그러나 세계 최강대국의 공권력은 그에게 총을 겨누며 이렇게 답했다.
"내 알 바 아니다(I don't care)."
"숨을 쉴 수 없다"는 시민의 호소에 무릎으로 짓누르던 2020년의 공권력은, 이제 "알 바 아니다"라고 뇌까리며 총구를 들이대는 2026년의 괴물이 되었다. 이 짧고 잔혹한 문장은 오늘날,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 불리던 미국이 어디까지 추락했는지를 보여주는 비문과도 같다.
생명보다 권력이, 시민의 존엄보다 통치자의 '법과 질서'가 우위에 있다는 선언.
나는 이 서늘한 장면을 목격하며, 46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겪었던 가장 시린 겨울, 1980년 5월의 광주를 떠올렸다.
이번 사건이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르네 굿이 살해당한 미니애폴리스는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강하고 진보적인 목소리가 높은 '진보의 요새'이자, 2020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에게 살해당한 후 전 세계적인 '블랙 라이브스 매터(BLM)' 운동을 촉발시킨 심장부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MAGA(Make America Great Again) 세력에게 이곳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그들에게 미니애폴리스는 '좌파 폭동의 성지'이자, 자신들이 내세우는 '법과 질서'를 다시 세워 본보기로 삼아야 할 정치적 복수의 대상이었다.
사건의 도화선은 며칠 전 타올랐고, 이는 나비효과처럼 거대한 태풍을 일으켰다. 얼마 전, 한 보수 유튜버가 미네소타주 소말리아 이민자 커뮤니티의 비리를 폭로했고, 이를 빌미로 팀 월즈 주지사가 3선 도전을 포기하는 일이 발생했다. 그는 지난 대선에서 카멀라 해리스의 러닝메이트로 뛰었고, 민주당 차기 대권주자로 유력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민주당의 거목이 흔들리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소말리아 불법 이민자를 색출하겠다는 명분으로 그들은 마치 점령군처럼 2,000명의 중무장한 ICE 요원들을 미니애폴리스의 주택가와 학교에 투입했다. 명분은 '이민자 단속'이었지만, 실상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정치적 거점을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정치적 전쟁'이었다. 르네 굿 총격 사망 사건이 벌어지기 불과 24시간 전이었다.
르네 굿은 그 전쟁터 한복판에 갇힌 '민간인'이었다. 그녀는 이민자도, 범죄자도 아니었지만 공권력이 만들어낸 공포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되었다. 2020년에는 경찰의 무릎이 시민의 목을 눌렀다면, 2026년에는 연방 요원의 총알이 시민의 심장을 꿰뚫었다. 이것은 단순한 과잉 진압이 아니라, 국가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자국민을 상대로 벌인 '내전'의 서막이다.
미국 정부의 대응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트럼프 대통령과 크리스티 놈 국토안보부 장관은 무고한 시민인 그녀를 "전문 선동가", "국내 테러리스트"라고 명명했다. 일론 머스크는 자신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 X(구 트위터)를 통해 "그녀가 사람을 치려 했다"는 거짓 정보를 전 세계에 유포했다.
왜 백인 여성이자 시민권자인 그녀에게조차 이런 끔찍한 프레임을 씌웠을까?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테러리스트'라는 낙인이 찍히는 순간, 그녀는 보호받아야 할 시민에서 제거해야 할 적으로 변모한다. 그래야만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른바 MAGA 콘크리트 지지층 30%가 죄책감 없이 이 죽음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환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번 사건에서 ICE의 정당방위를 두둔하며 트럼프와 같은 의견을 피력하는 이들을 보며, 2년 전 개봉했던 영화 <시빌 워: 분열의 시대>(2024)의 한 장면이 현실로 튀어나온 듯한 공포를 느꼈다. 영화 속에서 무장한 민병대는 총구를 겨누며 묻는다.
"너는 어떤 종류의 미국인이야? (What kind of American are you?)"
그들에게 같은 미국 시민권자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들의 이념에 부합하는 '진짜 미국인'과, 제거해야 할 '가짜 미국인'이 있을 뿐이었다.
영화 속 허구였던 이 잔혹한 질문은 2026년 오늘, 트럼프 행정부가 르네 굿에게 던진 현실의 질문이 되었다. 그녀는 권력의 눈 밖에 나는 순간 보호받을 국민이 아닌 '테러리스트', 즉 '틀린 종류의 미국인'으로 분류되어 사살당했다. 영화가 보여준 디스토피아는 더 이상 스크린 속에 있지 않다.
한국인인 나에게 이 광경은 끔찍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1980년 5월, 한국의 광주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독재 정권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들을 고립시키고, 언론을 통제해 그들을 '폭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라고 매도했다. 자국민을 죽이고 그 책임을 피해자에게 뒤집어씌우는 것. 2026년 미니애폴리스의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는 1980년 광주의 '폭도'라는 단어와 완벽한 동의어다. 이것은 파시즘이 작동하는 보편적인 방식이다.
미국 FBI는 이미 2006년부터 "백인 우월주의 세력이 법 집행 기관에 은밀히 침투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 경고는 20년이 지나, 비밀 채팅방에서 이민자를 조롱하고 나치 문양을 은밀히 공유하는 ICE 요원들의 모습으로, 그리고 마침내 미니애폴리스에서 시민을 쏴 죽이고도 "알 바 아니다"라고 말하는 괴물의 얼굴로 실현되었다.
이 섬뜩한 장면은 1980년 5월, 광주의 기억을 강제로 소환한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 역시 태어날 때부터 악마는 아니었다. 하지만 군부는 그들을 며칠씩 굶기고, "눈앞에 있는 건 시민이 아니라, 내 전우를 죽인 빨갱이"라고 끊임없이 세뇌했다. 권력은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증오라는 연료를 주입해, 평범한 청년들을 시민의 머리를 깨부수는 '살인 기계'로 개조해 냈다.
최근 다수의 작품상을 수상한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2025)에 등장하는 록조 대령은 바로 이 '시스템'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융통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는, 병사들에게 적에 대한 맹목적인 적개심을 심어주는 것을 군인의 미덕이라 믿는다. 백인 우월주의자인 그에게 전쟁은 '사람'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적'을 지우는 행위일 뿐이다.
2026년 미니애폴리스의 ICE 요원들과 1980년 광주의 계엄군, 그들 뒤에는 항상 '록조 대령'이 서 있다. 그는 때로는 '국가 안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법과 질서'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병사들에게 속삭인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다. 쏴라."
결국 르네 굿을 죽인 총탄은 한 명의 요원이 쏘았지만, 그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 구조적인 혐오와 차별을 방치하고 조장한 국가 시스템이다. 우리가 미니애폴리스의 비극 앞에서 분노해야 하는 이유는, 46년 전 광주를 피로 물들였던 그 '만들어진 증오'의 메커니즘이 지금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는 단순히 폭력만으로 기록되지 않는다. 권력이 혐오로 진실을 덮으려 할 때, 목숨을 걸고 그 진실을 기록한 이들이 있었다.
영화 <택시운전사> 속 1980년의 광주는 철저히 고립된 섬이었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그 시절, 군부는 도시를 봉쇄하고 통신을 끊었다. 외부 세계는 광주에서 시민들이 군인의 총칼에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들은 '폭도'라는 오명을 쓴 채 외롭게 죽어가야 했다.
오직 위험을 무릅쓰고 광주로 잠입한 '푸른 눈의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그를 태우고 빗발치는 총탄 속을 뚫고 달린 택시운전사 김사복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들이 목숨을 담보로 검문소를 통과해 광주 밖으로 실어 나른 낡은 필름 캔. 그 속에 담긴 흔들리는 영상이 전파를 탔기에 세계는 비로소 권력이 조작한 '폭도'가 아닌, 피 흘리는 '인간'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2026년의 미니애폴리스는 어떤가. 우리에겐 힌츠페터의 낡은 카메라 대신, 현장을 목격한 시민들의 수많은 스마트폰이 있다. 1980년의 독재자가 정보를 '차단'하여 진실을 가렸다면, 2026년의 권력자는 명백한 영상 앞에서도 "가짜 뉴스"라고 우기며 진실을 '오염'시키고, 지지자들을 가스라이팅한다. 하지만 <택시운전사>의 김사복이 울분을 삼키며 핸들을 잡았듯 지금 전 세계의 시민들은 스마트폰을 꽉 쥐고 '공유' 버튼을 누르며 이 명백한 진실을 실어 나르고 있다.
영상 기록이 사건을 증언한다면, 문학은 그 고통의 깊이를 증언한다. 2024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한강의 대표작 <소년이 온다>는 바로 이 1980년 광주의 비극을 다룬 소설이다. 소설 속에서 계엄군의 총칼 앞에 쓰러진 소년은 묻는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건가요?"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을 때, 당시 한국의 보수 정권과 일부 극우 세력은 축하는커녕 그녀를 모욕하고 광주의 진실을 훼손하려 시도했다. 그들이 문학 작품 하나를 그토록 두려워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소설이 '국가 폭력의 민낯'을 너무나 아프게, 그리고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은 기록을 지우려 하지만, 문학은,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의 기억은 그 고통을 영원히 박제한다. 르네 굿의 죽음 역시 트럼프의 트윗 속에선 '테러'로 기록되겠지만, 진실을 목격한 세계 시민들의 가슴속엔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전 세계의 민주주의자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희망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은 그 희망을 가장 최근에 증명해 보인 나라다.
2024년 12월 3일 밤, 당시 한국의 대통령 윤석열은 1980년 이후 45년 만에 기습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군대가 서울 진입을 시도했고, 국회의사당은 무장 군인들에게 포위되었다. 1980년 광주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이 순간, 한국인들의 뇌리에는 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관람했던 영화 <서울의 봄>(2023)의 마지막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1979년,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이 군사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을 그린 이 영화는, 반란군이 승리의 축배를 드는 장면으로 끝난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그 뻔뻔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 관객들은 심박수가 치솟는 분노와 깊은 좌절을 맛보았다. 뒤늦게 그는 내란죄로 재판을 받았고, 사면되어 골프나 치러 다니다 생을 마감했지만, 죽은 후 재가 되어서도 묻힐 땅이 없어 자기 집에 영원히 갇혀 있다.
계엄이 선포된 그날 밤, 우리는 영화 속의 그 끔찍한 배드 엔딩이 현실에서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2024년의 한국은 1980년과 달랐다. 계엄 선포 직후, 영하의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만 명의 시민들이 반팔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총을 든 군인들 앞을 맨몸으로 막았다. 국회의원들이 국회의 담벼락을 넘도록 돕고, 맨몸으로 장갑차 앞에 섰다.
우리 한국인의 DNA 속에 1980년 광주의 아픔이, 그리고 영화 <서울의 봄>을 보며 다짐했던 분노가 깊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때처럼 당하지 않겠다", "다시는 민주주의를 빼앗기지 않겠다"는 처절한 다짐이 공포를 이겼다. 우리는 현실에서만큼은 영화와 다른 결말을 만들어야만 했다.
결국 시민들의 힘으로 국회는 4시간 만에 계엄 해제를 의결했고, 대통령은 탄핵되었으며, 현재 내란죄의 수괴로 재판을 받고 있다. 바로 내일이면 검찰의 구형이 내려진다. 이것은 전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시민이 승리한 평화적인 혁명'이었다. 우리는 <서울의 봄>의 비극적인 엔딩을, 시민의 힘으로 해피 엔딩으로 꾸역꾸역, 다시 써 내려갔다.
미니애폴리스에서 들려온 "내 알 바 아니다(I don't care)"라는 말은 6년 전의 "I can't breathe(숨을 쉴 수 없다)"라는 비명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며 우리를 분노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의 역사는 말한다. 권력이 "상관없다"라고 말할 때, 평범한 시민들이 "우리는 기억한다(We remember)"라고 외치며 서로의 손을 잡을 때 민주주의는 지켜진다는 것을. 조지 플로이드가 숨을 쉴 수 없다고 호소했을 때 전 세계가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를 외쳤던 것처럼, 이제 우리는 르네 굿의 죽음 앞에, 그리고 권력에 의해 '테러리스트'로 매도당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연대해야 한다.
지금 미국은 내전의 위기 앞에 서 있다. 혐오와 분열의 정치가 공동체를 파괴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1980년 광주의 피가 2024년 서울의 승리를 낳았듯, 오늘 미니애폴리스의 비극이 미국 시민들을 다시 깨어나게 할 것이라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올지 모르지만, 정의는 결국 깨어있는 시민들의 연대에서 나온다. 한국이 45년의 세월을 견디며 증명해 낸 이 진실이, 지금 깊은 슬픔에 잠겨 있을 미국 시민들에게, 그리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전 세계의 모든 이들에게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다. 당신의 슬픔은 나의 슬픔이며, 당신의 투쟁은 곧 나의 투쟁이다.
한국의 광주가 미니애폴리스에게, 그리고 전 세계에게 전한다.
작가 한강의 말처럼 "산 자가 죽은 자를 살리고, 과거가 현재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