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푸른 현기증

by 조하나


다음 날 아침, 섬의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날이 서 있었다. 밤새 내린 스콜 탓이었을까 턱 밑까지 차오른 습도 위로 항구 특유의 기름 냄새와 비릿한 갯내음이 무겁게 가라앉아 숨을 쉴 때마다 폐부 깊숙한 곳을 찔러왔다. 그녀는 말없이 장비를 챙겼다. 숙취는 없었지만 온몸의 감각은 껍질 벗겨진 살갗처럼 예리하게 곤두서 있었고, 어젯밤 골목 어귀에서 미처 다 삼켜내지 못한 신물이 여전히 식도 어딘가에 가시처럼 박혀 그녀를 자꾸만 더 깊은 곳, 더 차가운 심연으로 떠밀고 있었다.


“오늘 포인트는 ‘요나라 수로’야. 조류가 세고 바닥 수심이 30미터 아래로 떨어지는 곳이니까 부력 조절 잘해야 해. 절대 깊게 내려가지 마.”


벤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명랑하면서도 다정했지만, 선글라스 뒤에 가려진 파란 눈동자는 집요하리만치 그녀의 동선을 쫓고 있었다. 그녀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웨이트 벨트를 허리에 감았다. 골반을 조여 오는 납덩이의 묵직한 무게가 오히려 기이한 안도감을 주었다. 벤의 경고가 그녀의 귀에는 위험 신호가 아니라 어서 오라는 은밀하고도 치명적인 초대장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배가 포인트에 도착해 엔진을 멈추자 거친 파도 소리가 뱃전을 때리는 소음만이 남았다. 수평선 너머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배 아래 일렁이는 바다 색은 소름 끼칠 정도로 짙고 선명한 코발트블루였다. 입수 신호가 떨어졌다.


풍덩.


물에 닿는 순간 전신의 피부가 수축했고, 그녀는 반사적으로 호흡기를 통해 건조하고 차가운 공기를 폐가 터질 듯 깊게 빨아들였다.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의 감각 기관이 고장 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꼬따오의 바다가 부유물과 생명체로 가득 차 있어 거리감을 가늠할 수 있는 현실적인 공간이었다면, 이곳은 시각적인 폭력에 가까울 만큼 압도적인 투명함만이 지배하는 거대한 푸른색의 진공 상태였다. 가시거리가 비현실적으로 좋아 원근감이라는 물리적 법칙마저 지워버린 투명한 허공.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산호 군락이 실은 까마득한 저 아래, 수십 미터 바닥에 엎드려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시각적 기만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물속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중력이 소거된 우주 공간에 부유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극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위를 봐도 파랑, 아래를 봐도 파랑, 옆을 봐도 파랑. 참조할 지형지물 하나 없이 오로지 색채만으로 이루어진 이 광활한 감옥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잊은 채 홀린 듯 BCD의 공기를 빼고 하강을 시작했다. 슈우욱, 후우욱. 고막을 가득 채우는 것은 오직 자신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수심 15미터. 20미터. 무심코 고개를 들어 수면을 보았을 때 태양은 산산이 부서지며 물속으로 날카로운 빛의 창을 꽂아 내리고 있었지만, 지금 그녀가 원하는 것은 그런 구원의 빛이 아니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더 깊고 짙은 쪽, 빛마저 먹어 치워 검푸르게 변해가는 심연의 아가리를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강한 조류가 보이지 않는 손처럼 그녀의 등을 떠밀었다. 그녀는 핀을 차지 않고 조류에 전신을 맡긴 채 벤과 다른 다이버들과 거리를 두고 조금씩 더 아래로, 사선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미끄럼틀을 타듯 저항 없이, 무게 없이, 아주 매끄럽게.


춥고, 시리고, 선명했다. 차가운 수온이 슈트 틈새로 스며들어 살을 에는 듯했다. 그때였다.


깡- 하고 머릿속에서 금속성의 종소리가 울리는 환청과 함께 갑자기 빡빡하던 호흡기가 헐겁게 느껴졌다. 턱관절을 딱딱하게 조여오던 추위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온몸을 감싸는 차가운 물이 자궁 속 양수처럼, 연인의 체온처럼 포근하고 미지근하게 변해갔다. 이상했다.


‘분명 춥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내가 왜 춥다고 생각했지? 이렇게 따뜻하고 평온한데.’


입가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시야가 터널처럼 좁아지는가 싶더니 눈앞에 넘실거리는 저 푸른색 물이 액체가 아니라 고체처럼,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말랑말랑한 젤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음속을 꽉 채우고 있던 날카로운 납덩이들, 벤에 대한 묘한 적대감, 한국인이라는 강박, 피해의식, 꼬인 열등감이 뜨거운 물에 녹는 설탕처럼 순식간에 기화되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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