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왼쪽 가슴에 뜨는 달

by 조하나


수면을 깨고 올라온 순간, 세상은 온통 하얀 포말과 눈을 찌르는 태양 빛으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그녀는 벤의 어깨를 붙잡고 거친 숨을 토해냈다. 기도가 찢어질 듯한 기침이 터져 나왔고, 위장에 든 것도 없는데 쓴 신물이 쉴 새 없이 넘어왔다. 단지 바닷물을 먹어서가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감싸고 있던 그 달콤하고 치명적인 푸른색 환각이 현실의 중력과 충돌하며 일으킨 멀미였다.


벤은 그녀를 다그치지 않았다. 화를 내지도, 왜 그랬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는 다만 굳은 표정으로 그녀의 BCD에 공기를 가득 채워 수면에 띄워놓고는, 그녀의 눈동자를 깊게 들여다보았다. 초점이 돌아왔는지, 의식이 명료한지 확인하는 프로 다이버의 눈빛이었다. 그리고는 보트를 향해 단호한 수신호를 보냈다.


‘다이빙 종료. 즉시 철수.’


“미안해…. 다음 다이빙은….” 그녀가 헐떡이며 말을 꺼내려 하자 벤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쉬어(Shh). 말하지 마. 호흡 조절해.”


배가 항구로 돌아오는 내내 벤은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엔진 소음과 파도 소리가 귀를 때렸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진공 상태 같은 침묵이 흘렀다. 다른 다이버들이 아쉬운 듯 웅성거리는 소리도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젖은 몸을 웅크린 채 자신이 방금 저지르려 했던 짓, 그 시퍼런 아가리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려 했던 그 순간의 기억을 떨쳐내려 애썼다. 하지만 몸 안의 질소는 빠져나가고 있었어도 뼛속에 스며든 한기와 수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벤은 그녀의 장비를 대신 정리해 트럭에 실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조수석에 태웠다. 젖은 슈트를 반쯤 벗어 허리에 묶은 채 그녀는 덜컹거리는 트럭의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흔들렸다.


트럭은 숙소 앞 골목에 멈춰 섰다. “내려. 내가 짐은 다 옮길게.” 벤은 그녀를 부축해 방으로 데려갔다. 좁은 방 안에 들어서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벤은 에어컨을 켜고, 그녀를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는 익숙한 손길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맥박을 확인했다.


“관절 마디마디 쑤시는 데 있어? 어지럽거나, 피부에 벌레 기어가는 느낌은?” 벤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듯 건조했지만, 그 이면에는 억눌린 걱정이 용암처럼 끓고 있었다.


“아니….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 그녀는 힘없이 대답했다. 벤은 안도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차가운 물병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자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신경줄이 툭, 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벤은 그녀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침대가 삐걱거렸다. 그는 물병을 쥔 그녀의 손을 자신의 큰 손으로 감쌌다. 굳은살이 박인 투박하고 따뜻한 손이었다.


“하나.” 그가 그녀를 불렀다.


“화내지 않을 거야. 다그치지도 않을 거야. 그러니까… 괜찮다는 말만 하지 마. 제발.”


그 한마디가 방아쇠였다. 그동안 그녀가 겹겹이 쌓아 올렸던 방어벽, ‘나는 괜찮아’, ‘나는 강해’, ‘나는 혼자서도 잘해’라고 써 붙여 놓았던 그 견고하고 오만한 성벽이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강한 척해왔다. 서울에서의 패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들키면 약자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서 더 냉소적으로 세상을 비웃고 타인과 거리를 두며 살아왔다. 누구에게 털어놓아 봤자 해결되는 건 없으니까. 동정이나 받는 비참한 꼴이 될 뿐이니까. 그렇게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시니컬한 농담으로 자신을 포장해 왔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가장 밑바닥, 죽음 충동이라는 가장 추한 민낯을 들켜버린 이 남자 앞에서, 그녀는 더 이상 가면을 쓸 힘이 없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소리 없는 울음은 이내 짐승이 울부짖듯 억눌려 있던 비명 같은 울음으로 변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했다. 클로드의 죽음 이후, 단 한 번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진짜 얼굴이었다.


벤은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서 바다 냄새와 땀 냄새가 섞인 냄새가 났다. 살아있는 사람의 냄새였다. 그는 그녀의 등이 진정될 때까지, 거친 흐느낌이 잦아들 때까지 가만히 등을 쓸어내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울음이 잦아들고,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벤의 파란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 눈에는 연민이 아닌, 깊은 이해와 통증이 담겨 있었다. 그 눈빛에 홀린 듯 아니 위로받고 싶은 본능에 이끌린 듯 두 사람의 입술이 천천히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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