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가 99년 종말이 온다고 했다. 98년 고등학교 2학년 때 IMF를 겪었다. 난생처음 가보나 싶었던 수학여행지 제주도가 경주로 바뀌었다. 세기말 분위기는 노스트라다무스가 아니어도 저절로 형성됐다. 전환이 필요했다. 연도의 앞자리가 바뀌면서 우리가 대학에 입학하자, 세상은 새천년이 밝았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단 하루 차이로 1999년이 2000년으로 변한 것뿐인데 그 온도차가 너무 컸다. 세상은 자꾸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했다. 우리가 이 사회의 밝은 미래요, 새천년의 주인이 될 것처럼 추켜세웠다. 99학번까지는 ‘X세대’, 00학번부터는 ‘N세대’라며 한 학번 차이에 있지도 않은 의미를 억지로 만들었다. 하나 캠퍼스에서 체감하는 현실은 희망적이지 않았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어색했다. 구정과 신정, 음력과 양력, 띠와 별자리, 빠른 생일과 서열 정리가 혼재했던, 이름만 그럴싸했던 ‘밀레니엄’ 시대, 우리는 그저 90년대의 진부한 사회에서 그런 어른들에게 그런 교육을 받으며 자란, 깨어있지 못한 수동적인 아이들이었다.
영혼 없이 대학을 다녔다. 대부분의 동기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대학생이 되면서 허락된 자유를 누리기에 바빴다. 술을 마시고 당구를 치고 PC방에 갔다. 비뚤어진 고등학교 생활에서 이미 다 해본 짓이었다. 재미없고 시시했다. 모든 게 희망이고 긍정이었던 새내기들은 누구도 자신이 훗날 비정규직이 되거나 계약직이 되거나 취업이 안 돼 여전히 술을 마시고 당구장과 PC방을 들락거리게 될 수도 있단 걸 몰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학은 스무스하게 사회로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는 골든 티켓이라 굳게 믿었다. 이전까진 그게 먹혔는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겐 더 이상 해당하지 않는다는 걸 그때 우린 몰랐다. 어리석고 건방지고 의심 없고 나태했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내가 앞으로 맞닥뜨릴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OT 첫날밤, 선배들은 우리를 암수로 짝을 지어 거북한 게임을 시키며 술을 먹였다. 남자애 바지에 동전을 집어넣고 여자애가 무릎을 꿇고 입으로 더듬어 그 동전을 찾아 꺼내게 하거나 남자애 목에 테이프를 잔뜩 붙여놓고 여자애가 입으로 떼어내야 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그런 비슷한 게임 종류가 열 가지는 더 됐다.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분명했고, 선배들은 마치 군사 훈련의 조교처럼 각각 위치를 정해 강압적으로 게임을 진행했다. 뭔가 잘못됐다 느꼈지만 나는 용기가 없었다.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욕을 바가지로 쏟아붓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나를 ‘기 세고 독한 년’으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이었다. ‘페미니즘’의 ‘ㅍ’ 자도 들어본 적 없는 시절이었고, 그런 개념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본 적도 이야기할 기회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나는 한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역할을 역이용했다. 게임 시작 전 선배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다. “선배… 제발… 남자 친구가 지난주에 군대 갔어요. 지금 훈련소에…”
그렇게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만들어 결국 열외 됐다. 무리에서 저만치 떨어져 주저앉아 퉁퉁 부은 눈을 하고 처량하게 앉아있었다. 은장도 품은 춘향이가 칼을 차고 감옥에 앉은 꼴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은장도도 없고 춘향이도 아니지만 다른 남자 핑계를 대고서야 이 남자들의 폭력적인 세계를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게 기가 막혔다. 동기들은 대부분 시키는 대로 했다. 단체로 여자애들이 무릎을 꿇고 남자애들 성기 주변을 입으로 더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명치끝에서부터 신물이 올라왔다. 그걸 시키는 선배들과 그걸 하는 동기 남자애들은 재밌어 죽겠다고 키득거렸다. 이것이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사회였다. 그곳에서 웃지 않은 건 나와 여자들뿐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상황이 얼마나 끔찍한지 말하지 않았다. 아무 말 않고 그걸 지켜보던 여자 선배들도 있었고, “재미로 하는 건데 뭐 어때” 적극적으로 게임 진행을 독려한 여자 선배들도 있었다. 모든 게 너무 자연스럽고 협조적이다.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 조차 명확하지 않았다. 내가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조차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대학 생활 4년 내내 나는 지금처럼 열외자가 될 거라는 걸.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훗날 사회에서 과장, 부장, 벤처 CEO 등 한자리 꿰어 차고앉아 이렇게 살 거란 걸. 이들이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될 거라는 걸. 가정, 학교, 사회에서 이리도 열심히 교육을 시키고 있으니 그들은 무엇이 잘못인지조차 모르고 잘못을 반복할 거라는 걸. 침묵하는 자, 방관하는 자도 언제나 함께 할 거란 걸. 우리를 ‘새천년을 바꿀 혁신가’처럼 떠받들고 기대하던 시대, 우리는 너무 뻔뻔하고 당연하고 끊임없이 어른들과 선배들을 복제하고 학습하고 있었다.
OT 이후 나는 수강 말곤 대학 활동에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뭘 배우고 뭘 하는 과인지 모르고 입학해 결국 같은 상태로 졸업했다.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가장 팔자 좋은 직업은 교수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강의 내용은 엉성했고 무성의했다. 그마저도 대부분 조교들이 한 일이었다. 대학 학점은 출석만 잘하고 내라는 것만 잘 내면 따기 쉬웠다. 워낙 다른 애들이 처음 눈뜬 자유에 노는 바람에 상대 평가를 잘 이용하면 됐다. 열심히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좋은 학점이 나왔다. 덕분에 성적우수장학금으로 학기마다 몇십만 원은 돌려받았다. 배우는 게 없으니 빈 껍데기 학점으로 취업한다는 것 자체가 웃기는 판국이었다. 대한민국의 시스템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 어렴풋이 보였고, 나는 심드렁하게 장단을 맞춰주고 있었다.
대학 생활은 곧 수능 끝난 날부터 바로 시작한 아르바이트에 초점이 맞춰진 생활이나 다름없었다. 대학 2년이 지나자 다들 군대에 어학연수다 뭐다 유행처럼 휴학을 하기에 덩달아 나도 했다. 파트타임으로 하던 아르바이트를 풀타임으로 바꿀 수 있어 좋았다. 휘청거리는 집안 사정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용돈 받으며 여유 있게 대학 생활을 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전에 말했듯 우리 집은 항상 그렇게 애매했다. 엄마도, 아빠도, 나도 늘 일을 하고 있었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것도, 여유 있게 잘 사는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를 아주 오래도록 유지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휴학생으로서 보낸 건 내 삶에 기록된 아름다운 사건 중 하나다. 월드컵 경기 중계 중에도 손님들 서빙을 하고 테이블을 치워야 했지만, 그렇게 만날 싸우던 수많은 한국인이 같은 시공간에서 같은 걸 바라는 명장면을 관찰하기엔 충분했다. 나를 둘러싼 온 세상이 무모한 희망과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했다. 우리보다 역사가 깊고 체력이 좋고 팔다리가 긴 웨스턴 축구에 오랜 시간 알게 모르게 쌓인 소외된 한국인의 자격지심이 조금은 해소된 듯 보였다. 내 생에 처음 목격한, 한국인 모두가 동시에 모두 행복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성공에 대한 강박과 잘난 놈들에 대한 자격지심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 보였다. 내가 죽기 전 한 번 더 한국이 월드컵을 개최하거나 남북이 통일이 되지 않는 한 다시 못 볼 장면이다.
휴학 하반기엔 바텐더로 일했다. 호프집 서빙 알바보다 월급이 훨씬 많았다. 사람 대하는 기술도 배웠다. 공부하고 연습해 조주사 자격증도 땄다. 바텐더를 ‘술 따르는 여자’로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마티니를 만들고 싶어 그 바닥에서 유명하다는 마티니 장인을 찾아가 특별한 레시피와 조주법을 배우는 일본 만화 같은 짓도 했다.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한 분야의 장인이 되고 싶었다.
술 취한 남자 손님들로부터 온갖 성차별 발언과 성희롱을 면전에서 당하는 게 일상이었지만, 가끔은 나도 바득바득 맞서 받아쳐 결국 가해자의 무릎 사과를 받은 적도 있다. 호프집 서빙이나 바텐더로 일하는 유난히 학력으로 거들먹거리며 무시하는 놈들이 많았다. 그렇게 내가 불평하던 대학도 이럴 땐 막돼먹은 인간들에 대응하는 수단이 되었다. 나는 이걸 ‘대학생 찬스’라 불렀다. 나를 그렇게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다가도 대학생이라고 하면 말투부터 바뀐다. 아이러니했다. 이게 엄마가 말하는 “슈퍼마켓을 해도 대학 나와 해야 한다”는 이론의 증거인걸까. 그래서 우리 사회는 대학에 이리도 목숨을 거는 걸까. 다행히 사장님이 내 편이었다. 나를 내쫓지 않고 손님을 쫓았다. 그런 사장 밑에서 일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운이었다. 그렇게 여자들은 능력과 노력 이외에도 운이라는 게 따라주어야 성차별과 혐오를 비롯한 온갖 종류의 폭력으로부터 그나마 조금이라도 보호받을 수 있다.
아빠는 가끔 내가 일하는 바에 친구를 데려와 술을 마셨다. 걸쭉하게 취해서 돌아가는 아빠를 보며 함께 일하는 친구들은 “세상에서 가장 쿨한 아빠”라며 부러워했다. 아빠는 늘 그랬다. 이래라저래라 훈계도 없었고, 잘했다 못했다 판단도 안 했다. 언제나 나를 지지했다. 그게 너무 고마웠다. 또 한편으론 부담이었다. 나에게 일찌감치 허락된 자유 때문에 세상이 말하는 ‘자랑스러운 딸’에 속하지 못하는 나를 자책할 때가 많았다. 아빠가 너무 쿨하고 앞서가는 사람이라 가끔은 내가 오히려 보수적이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자존감과 자신감이 있다면, 그 뼈대는 아빠 때문에 견고해질 수 있었다.
대형 클래식 바에서 홀 서빙으로 시작해 바텐더 매니저 자리까지 올라갔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나는 거창한 미래를 내다보고 길을 찾을 줄은 몰랐지만 순간만큼은 집중하고 충실했다. 재밌게 열심히 살았다. 이렇게라도 하면 뭐라도 되겠지, 그때 내가 가진 건 시간뿐이라 혼자서 이런저런 실험과 경험을 해본 것 같다. 당장 내 눈 앞에 보이는 건 없지만 계속 실체가 없는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하면 낭만적인데 당시에는 자기 비하와 자기 연민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중심을 잡으며 위태롭고 불안하게 지냈다.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건 지속성과 꾸준함이었다. 그 동력을 어디서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조금씩 건드리고 배운 것 중 하나만 그저 진득하니 오래도록 했다면 지금쯤 장인이 되었을지 모르겠다고, 지금도 가끔씩 자조 섞인 농담을 하곤 했다. 세상은 하나만 잘하라는데 나는 하고 싶은 것도,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다. 지금은 좀 알 것 같다. 세상엔 한 우물만 꾸준히 잘 파는 사람도 있고, 한 우물 파다 기름을 발견하는 운까지 겹쳐 계급 상승하는 사람도 있고, 나처럼 이것저것 건드리며 드넓고 얕게 사는 사람도 있다고. 내가 이상하거나 잘못하는 게 아니라고. 불안해할 필요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