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이지만 김지영은 아닙니다82년생이지만 김지영은 아닙니다
‘명랑한 아웃사이더’에서 이어집니다.
복학 후 동기들은 언론고시를 준비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유학을 가거나, 학교에서 사라졌다. 휴학 마치고 겨우 3학년에 대부분 각종 자격증 학원에 영어 학원까지 다니기 시작했다. 취업 면접 학원에 스피치 학원에, 여자라면 면접 메이크업 학원도 있다. 그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다니면서 그러고들 있었다. ‘못 살겠다’ 하면서 다들 그 돈이 어디서 나는지 신기했다. 눈치 게임 같았다. 모두 다 그만 두면 될 일인데 누구 하나 그러질 못했다.
나는 그럴 형편도 안 됐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뭘 위해서, 누굴 위해서 그래야 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 됐다. 동기도 목적도 없이 그 소리 없는 전쟁에 뛰어들고 싶지 않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나에게 대안은 없었다. 초조했다. 이제 막 읽기 시작한 책이 있는데 자꾸 누군가가 결말을 묻고 독후감까지 쓰라고 독촉하는 것 같았다. 자기 계발서 저자들은 ‘걱정 마세요!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하며 약을 팔았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너는 뭐가 그리 힘드냐고, 그냥 남들 하는 대로 하라고, 엄마가 그랬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되고 싶은지, 뭘 하고 싶은지, 심지어 내가 어떨 때 행복한지도 모른 채 대학에 입학했을 때처럼 또 회사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 멋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양화대교를 건넜다. 서울, 그중에도 홍대가 가진 문화적 인프라를 오래전부터 동경했다. 98년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 문화 콘텐츠 수입 개방을 하기 전까진 일본 영화, 만화, 음악 등 모든 게 불법이었다. 내 생에 최초로 흑인은 TV 속 ‘부시맨’이요, 백인은 ‘맥컬리 컬킨’이었다. 머라이어 캐리 앨범을 카세트테이프로 들으며 노래 가사를 한글로 소리 나는 대로 또박또박 종이에 적어 뜻도 모르면서 외워 불렀다. 서태지와 아이들에 이어 H.O.T와 젝스키스가 데뷔하며 아이돌 시대가 열렸지만, 우리 세대는 아이돌 문화를 얻은 대신 다른 문화를 잃었다. 우리는 유행을 선도한다고 착각했지만 끌려가고 있었다. 똑같은 노래를 부르고 똑같은 춤을 췄다. 다양성도, 다양성에 대한 존중도 사라졌다.
나의 90년대는 문화적으로 가난했다. 누군가는 90년대를 ‘문화적 황금기’라고 했지만 그건 어느 시대와 비교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문화와 경험이 모자라니 편견과 혐오가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나뿐 아닌 그 시대 사람들 대부분이 그랬다. 공중파 인기 드라마 시청률이 60%인 시절이었다. ‘인터넷’이라는 게 생기고부터 이 넓은 세계에서 얼마나 다양한 문화 씬이 펼쳐지고 있는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는데, 나는 유난히 그런 것들에 결핍을 느꼈다. 마음껏 누릴 수 없는 문화적 콘텐츠가, 모든 사람이 같은 걸 좋아하라고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에 막연한 거부감이 들었다. 시스템에 대한 소심한 반항이기도 했다. 하지만 확신은 없으니 직접 해보는 수밖에. 그래서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홍대로 가기 위해 양화대교를 건넜다.
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이어진 정부가 관광특구를 만들겠다고 마포구에 공을 들이던 시기였다. 마이클 잭슨을 좋아했던 김대중은 작은 나라가 당당하게 서려면 문화의 힘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독재 시절엔 사람들이 마음껏 노래도 못하고 공연도 못 보고 책도 못 읽었더랬다. 그러고 보니 나쁘지 않은 시절에 청춘을 보냈다. 20대 대부분을 이명박과 박근혜가 아닌 김대중과 노무현과 함께 했다. 나의 이십 대, ‘2002 한일 월드컵’에 이어 두 번째로 맘에 드는 점이다.
당시 홍대 클럽 하나하나 규모가 아주 작았다. 각 클럽마다 힙합, EDM, 펑크록 등 한 장르의 음악만 전문적으로 틀었다. 그런 곳이 홍대 골목에 수십 군데가 있었다. 나에겐 별세계였다. TV나 라디오에서 누군가가 선곡해주고 추천해주고 들려주는 음악이 아닌, 내가 직접 취향대로 찾아가 듣는 음악이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지?’ 질문을 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한 탐색이 시작되자 ‘나는 어떤 사람이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었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는 게 그저 신나고 좋았다. 매월 마지막 주 금요일, 그런 작은 클럽들을 팔찌 하나로 돌아다니며 즐기는 ‘클럽데이’가 홍대라는 지역을 넘어 젊은 세대의 놀이문화가 되기 시작했다.
술은 한 잔도 못 하는 애가 매일 클럽에 와서 음악을 듣고 있으니 신기했는지, 클럽 사장님이 입장료 낭비하지 말고 아르바이트나 하라며 일자리를 줬다. 돈을 벌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니, 땡큐였다. 손님들 드나들 때 인사하고, 분위기 띄우고, 청소하고, 칵테일 만들고, 맥주 채우고, ‘진상’을 솎아내는 일이었다. 클럽데이엔 하룻밤 팔찌를 채워준 사람만 수천이었다. 밤낮이 바뀌는 일이라 몸은 고단해도 재미있었다. 음악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클럽이 한산해지면 항상 DJ 부스로 달려가 스피커에 껌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소리바다로 당시 내가 모을 수 있는 국내외 힙합 음악은 다 모았다. 아직도 그때 모은 불법 희귀 힙합 음원이 외장 하드에 남아 있다. “DJ 해볼 생각 없냐” 진지한 제의를 받은 적도 있었다. 하나 그때도 나는 애매했다. 발만 담그고 노는 것만 잘했지 막상 물속에 빠지질 못했다. ‘난 사람’이 되긴 그른 타입이다. 하지만 그렇게 순수하게 무언가를 즐길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행복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를 쫓던 질문,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의 희미한 답을 찾은 곳도 그곳이었다.
일을 마치고 홍대에서 부천으로 가는 새벽 첫차에 앉아 가는 퇴근길. 같은 시간, 어딘가로 출근하는 사람들은 충혈된 눈에 담배 냄새로 찌든 나를 힐끗거렸다. 일 끝나고 스태프들과 회식이라도 있는 날엔 신촌 24시간 기찻길 소갈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어쩌면 난 즐긴 것 같다. ‘머리가 찼지만 꽉 막히지 않은 아이’ 같은 쿨한 이미지,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 연대생이 아니어도 집이 서울이 아니어도 신촌과 홍대를 내 집처럼 드나들 수 있다는 걸. 그렇게 알 수 없는 자격지심을 자존감으로 바꾸려 했다.
양화대교를 사이에 두고 모든 게 너무 차이 났다. 경제적, 문화적, 심리적 차이가 컸다. 그래서 사람들이 ‘서울, 서울’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강이 보이는 고급 빌라 펜트하우스에 살며 벤츠를 몰고, 대학 졸업 후 이태원에 부모님이 내준 앤틱 가구숍을 하는 클럽 단골손님이었던 언니를 떠올렸다. 그 언니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본 적이 한 번이라도 있을까. 그런 삶이 있다는 건 인정했지만 내 삶보다 낫거나 덜하다 생각하진 않았다. 그녀나 나나 갈 곳 없이 헤매는 영혼인 건 마찬가지였다. 양화대교를 두고 창밖 풍경이 달랐다. 지하철 유리창에 비치는 내 얼굴 땀에 번진 마스카라 자국이 정해진 시간에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신데렐라 같았다.
가끔 아빠는 새벽 대여섯 시에 내가 일하던 클럽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오곤 했다. ‘일찍 일어나 할 일이 없어서’라고 했지만, 나는 알았다. 아빠가 나를 지지한다는 제스처를 보낸다는 걸. 은근히 자길 닮았다 기대했을 아빠에게 고등학교부터 적응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으로 실망만 준 것 같아 의기소침해 있었다. 당시 하늘을 뚫을 정도로 높았던 아빠의 자존심이 밉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스물을 넘기고서야 어쩌면 아빠도 자신이 원하지 않은, 의도치 않은 삶을 어쩌다 보니 살게 됐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가능해졌다. 아빠도 실수를 하고 후회를 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아빠라는 사람을 객관화할 수 있게 됐다. 그만큼 내가 조금은 성숙해지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헤아리게 되기 시작했단 의미였다.
아빠 차가 홍대에서 서울의 서쪽 위성도시 부천으로 가는 경인고속도로를 내달리면 서서히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빠는 언제나 내가 일하며 겪은 일과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줬다. 아빠와 인간 대 인간으로서 신뢰가 깊이 쌓여간 시기였다. 나는 성장하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가출한 딸에게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그 딸이 여전히 요란스럽게 찾고 있음을 아빠는 알고 있었다. 아빠의 학창 시절엔 어쩌면 허락조차 되지 않았던 시간을 딸에게는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맘껏 방황할 시간을. 나의 성장기는 곧 아빠의 성장기이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한 건 “동네 구멍가게를 해도 대학 나온 사람이랑 안 나온 사람이랑 틀리다” 노래를 부르던 엄마 때문이었다. ‘고졸’로 세상을 살아온 사람이 하는 말이었다. 엄마 말은 사실이었다. 아니, 나는 여전히 비겁했다. 의미 없는 대학 생활을 과감하게 때려치우지도 못하면서 조금이라도 내 처지가 불리해지면 ‘대학생’ 찬스를 썼다. 바텐더로, 클럽 크루로 일하면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아무도 내가 대학에 다닐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 말썽 피우고 사고 치던 내가 명문고 학생이라는 걸 아는 순간 사람들 태도가 달라졌다, 좀 더 좋은 쪽으로. 초면에 바로 묻는 나이와 학력, 출신 지역. 그걸 바탕으로 상대를 줄 세워 평가하는 방법밖엔 모르는 어른들이 대부분이었다.
졸업 후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대학 이름을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출신 학교를 말할 만한 조직에 있어본 적이 없거나, 학벌이 필요한 일을 해본 적이 없어서다. 하지만 대학 졸업장이 없었다면 기자 단 2명 있는 작은 독립 매거진에서 맨 땅에 헤딩하며 쌓은 실력으로 그 바닥에 입소문이 나 대형 메이저 잡지사에서 스카우트가 들어왔을 때 기본 입사 조건에 걸려 못 들어갔을 거다. 요즘은 ‘블라인드 테스트’로 학력, 나이, 성별 안 보고 뽑는다지만 우리는 다 안다, 세상이 그렇게 순수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한국 사회에서 대학 졸업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출입증이다. 암암리에 한국 사회 모두가 직업군만으로 출입증의 유무를 짐작할 수 있다. 보여주지 않아도 말이다. 있는 사람은 모르지만 없는 사람은 큰 차이를 느끼는 투명하고 얄팍하고 비싼 출입증이다.
20년이 지난 지금, 누군가가 “대학을 꼭 가야 하나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네. 한국에서 살고 싶다면”이라고 여전히 답하겠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나는 대학 대신 그 돈으로 세계여행을 했을 거다. 확신은 없더라도 자신감만으로 나를 좀 더 믿었을 거다. 유학도, 어학연수도 아니요, 세계를 돌아보고 다양한 문화를 접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 경험하고 배웠을 것이다. 그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걸 하면 행복한지, 아니, 행복이라는 건 뭔지 좀 더 일찍 배웠을 거다. 내 인생의 가장 비싼 4년이 오히려 나를 더 우물쭈물하게 만들었다. 위축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시차가 큰 게 인생이라는 것도 안다. 어쨌든 시간이 흐른 후 결국, 나는 세계를 여행하며 다양한 문화에서 온 사람들과 어울려 살고 있으니까.
홍대는 어린 나의 지리적 자격지심을 채웠고, 클럽은 나의 문화적 결핍을 채웠다. 그 당시 나에겐 많은 사람들로부터의 영감과 자극과 경험이 절실했는데, 홍대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은 대한민국에 없었다. 나에게 홍대는 ‘인간 도서관’ 같은 곳이었다. 교과서로만 배우던 영어를 네이티브 스피커에게 처음 말해본 곳도 홍대였다. 대부분 클럽에서 진상 부리는 미군 손님을 쌍욕으로 내쫓거나, 세상에서 난폭한 단어란 단어는 죄다 엮은 미국 랩 가사를 따라 부를 때였지만, 토익 영어보다 팝송과 미드로 배운 영어가 실제론 더 잘 먹혔다.
길거리 구석구석엔 자유와 반항의 기운이 넘쳤다. 다양한 나이, 성별, 문화, 취향, 성격 등 저마다의 삶들이 내 앞에 형체를 가지고 부딪혔다. 아무도 내 고향이나 출신 학교를 묻지 않았고, 나의 촉망받지 않는 미래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대졸이 아니어도 멋지게 반짝이는 사람이 많았고, 고학력에 부유한데 불행한 사람도 많았고, 남자의 모습이지만 여자의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도 많았다. 폭력적인 사람, 비겁한 사람, 우스운 사람, 웃긴 사람, 음악 하는 사람, 춤추는 사람, 그림 그리는 사람, 글 쓰는 사람, 몸이 아픈 사람, 마음이 아픈 사람, 언어가 다른 사람, 생각이 다른 사람 등 인간의 다양한 캐릭터가 하나하나 내 앞에서 살아 움직였다. 모든 게 아름다웠던 것만은 아니다.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가진 자들의 반칙,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끊임없이 노출되는 폭력, 홍대 후미진 골목 안 가려진 민낯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경험치를 최대로 끌어올린 시간이었다. 가치 판단은 나중이었다.
‘청춘은 젊은이들에게 주기 너무 아깝다.’ 조지 버나드 쇼의 말이다. 내가 시간을 낭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 시간을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고 아름답게 낭비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때도 여전히 나는 헤매고 있었지만, 그런 내가 싫지 않았다. 시야가 넓어질수록, 경험이 많아질수록 어떻게 하면 자존감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방황하며 답을 찾는 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막연하게 내가 아무리 싫다 해도 결국 대학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해서 애 낳고 사회에 충실한 구성원으로 성실하게 살겠지 싶었다. 그게 잘못된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내가 그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 가출해서도 교복을 챙겨 들고 학교는 꼬박꼬박 갔던 것처럼 나는 언제나 비겁하고 소심하게 반항하고 방황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보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아빠의 암묵적 지지가 더해져 막연하게나마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지 않아도 비교와 경쟁 없이 스스로 특별하다면 괜찮다고, 다른 사람과 같은 길을 가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매일 새벽 양화대교를 건너며 ‘어쩌면 내 인생이 남들 출근할 때 출근하지 않고 남들 퇴근할 때 퇴근하지 않는, 조금 다른 형태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노동의 가치를 처음 알았다. 고등학교 내내 사고치다 대학에 들어가면서도 나는 절대 몸으로 일하는 사람이 되지 않고 머리로 일하는 엘리트가 될 거라 생각했다. 거만하고 오만했다. 머리로 일하는 엘리트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가장 큰 오류였고, 몸을 쓰며 일하는 것을 비하하는 사회의 시스템에 멍청하게 동화되고 있었다. 대다수의 사람이 출근하는 시간 나는 퇴근했다. 밤새 개워낸 도시의 토사물을 치우기 위해 이미 출근해 일하는 환경미화원을 보면서 내 평생 결코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지 않겠다 다짐했던 시절이었다. 밤새 클럽에 서서 일하며 번 돈이 금수저에 학벌 좋은 변호사, 의사가 버는 돈에 비해 가치 없다 생각한 적 없다.
엄청나게 시끄럽고 요란하게, 또 다른 나만의 사춘기를 아무도 모르게 겪고 있었다. 내 젊음과 방황은 불안하고 불안정해서 더 아름다웠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겨우 스물둘이었는데 뭘 그리 나지도 않는 결론을 내려고 했나 싶다. 딱히 갈 곳도 없으면서 택시 기사에게 빨리 가달라고 생떼 부리듯 왜 그리 조급해하고 스스로를 괴롭혔는지. 그때 내가 받은 상처는 모두 내가 스스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조차 괜찮았다. 그때 본 세상이 이후 내가 살아가는 삶에 대한 태도와 방향성을 제시했다. 나는 인생의 대부분을 학교 밖에서, 그리고 길거리에서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