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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로에서 하이힐을 꺾어 신고

by 조하나
‘새벽 5시 45분, 양화대교를 건넜다’에서 이어집니다.







테헤란로에서 하이힐을 꺾어 신고


대학 졸업장은 취업을 위한 간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우아한 상아탑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교수들은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고 연구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을 쥐었고, 큰 돈을 벌었다. 현실은 예상보다 더 쌉사름했다. 간판을 단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정작 데려가겠다는 곳이 없었다. 선배들은 졸업생보다 재학생으로 이력서를 써야 취업이 잘 된다며, 일부러 학점을 덜 채우고 수강 과목 하나로 한 학기를 연장하며 자발적으로 ‘코스모스 졸업’을 했다.


어릴 적부터 보고 들은 건 ‘평생직장’을 찾으라는 거였다. 내가 취업준비생이 되고 나니, 세상은 이제 그런 건 더 이상 없다고 했다. 한 직장을 오래 다니며 ‘보스가 곧 가장’이라 복종하던 시대가 저물고 있었다. 부모 세대까진 그랬다는데, 우린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대부분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전공이나 적성은 상관없었다. 친구들 스스로 ‘나 같은 애가 나라 행정 일을 하다니’ 조소하며 나라의 미래를 걱정했다.


일자리 시장은 더욱 유연해지고 비정규직은 합법이 됐다. 사람을 마음껏 자를 수 있고 기업의 이익에 최적화된 세상,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렸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많은 나라들이 ‘위 아 더 월드’가 되었다. 다국적 기업들이 날개를 달았고, 세계인은 ‘글로벌 시티즌’이라는 미명 하에 지구촌 이웃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한국에서 내가 보는 외국인은 방학 때 돈 쓰러 한국 들어온 재미교포나 유학생, 혹은 주한미군이 전부였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세계 시민과 거리가 멀었다. 경제적으론 거의 따라잡았을지 몰라도 이미 아무것도 안 보고 냅다 달려온 터라 생긴 부상에 후유증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하지만 모두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가 거셌다. 수업만 끝나면 아르바이트하러 가기 바빴던 내가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있다. 시위대와 전경의 대치로 내가 탄 마을버스가 출발하지 못하고 도로에 서 있었다. 나는 버스 맨 앞자리에 앉아 커다란 유리창으로 시위하는 대학생들과 이를 막아선 전경들의 대치 상태를 의지와 상관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긴장감이 팽팽한 가운데 갑자기 시위대 맨 앞에 선 학생이 전경 하나를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였다. 그러자 갑자기 시위대 모든 학생이 그 전경 하나를 밟고 때리기 시작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자기 진영으로 돌아간 그 전경이 우리 학교 학생이었다는 이야기가 다음 날 학교에 돌았다. 그때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 줄 몰랐다. 머리 터지게 치고받고 싸우는 건 결국 ‘우리들끼리’였다.


나는 우물쭈물했다.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뭘 좋아하는지도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아르바이트만 했다. 그것도 아주 열심히 했다. 세상이 자꾸 밖으로 나오라는데 나 혼자 버티는 기분이었다. 이것저것 뭐라도 해봐야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 터인데 경험이 없었다. 어학연수나 유학은 꿈도 못 꿨다. 인턴 자리를 알아봐도 기약 없는 시간 동안 아무 수입 없이 봉사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다른 사람들 다 그렇게 사니 유난 떨지 말라고 등 떠밀리는 느낌이었다. 정작 등을 떠민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혼자서 그렇게 느꼈다는 게 더 우습다.


나는 여전히 비겁했다. 모든 게 동의가 안 됐지만 그걸 깨부술 용기도 대안도 없었다. 아무리 잘난 척해도 결국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살겠지 싶다가도 여전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나서고 싶었다. 그때 나에겐 세상 모든 시간이 있었는데도 살면서 가장 조급했다. 서둘러 앞날을 결정해야 한다는 강박과 압박에 손을 들었다. 결국 나는 당시 모든 청년 구직자와 똑같은 이력서를 만들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성격은 ‘명랑, 쾌활’, 취미는 ‘음악, 영화 감상’이었다.


한 손을 턱에 괴고 따분한 눈빛으로 마우스를 굴리며 작은 광고회사 채용 공고를 찾았다.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봤다. 내가 얼마나 그 회사에 충성을 다할 수 있을지, 이력서에 나온 것처럼 내가 얼마나 명랑, 쾌활한지 최선을 다해 보여줬다. 뭘 하는 회사 인지도,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될지도 몰랐지만, 최선을 다해 미소를 지었다. 얼굴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어릴 때부터 20년 가까이 학습된 사회 기조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첫 월급 타면 엄마 아빠 내복도 사드리는 거라고, 그게 곧 나의 행복이 될 거라고 스스로 다독였다. 하지만 거짓말은 오래가지 못했다.


합격이었다. 내심 걱정하던 엄마 아빠가 한시름 놓인 표정이다. 아, 이젠 된 건가. 짧으면 3~4년, 길면 5~6년 버텨 대리를 달 거나 대리 달기 직전 결혼으로 퇴사할 때까지 잘 버티기만 하면 되는 건가. ‘밀레니엄 세대’란 말이 무색하게 당시 우리는 모두 그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고 경험으로 미뤄 짐작하고 있었다. 회사엔 나 말고 신입사원 서넛이 더 있었는데 내가 유일한 여자였다. 우리 모두 일주일 동안 배운 거라곤 전화 잘 걸고 받는 거였다. 몇 달간은 ‘인턴’이란 이름으로 다달이 몇십만 원으로 우리를 부리겠다 했다. 그러고 나서 정규직으로 전환할지 내쫓을지 생각해 본다고 했다. 그것도 감지덕지하란 식이었다.


임원이라는 어른들이 좋아하는 회식 날이었다. 말이 좋아 신입사원 환영 회식이지 대학 신입생 때 하던 짓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었다.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는 ‘술 취해서 그래요’라는 말이 요술 지팡이처럼 쓰였고, 집단적으로 술로 사람을 괴롭히는 문화가 너무 당연했다. 술 좋아하는 아빠를 어렸을 때부터 봐왔고, 술 먹고 부릴 수 있는 세상의 진상이란 진상은 이미 호프집, 바, 클럽 아르바이트로 다 본 터였다. 나는 술이 싫고, 안 먹고, 또 못 먹는다.


술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친구, 학교, 직장 등 한국 사회의 모든 커뮤니티는 술로 굴러가고 술로 유지됐다. 그놈의 술 때문에 사회생활은 글렀다고 이미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내가 술을 못 먹는다고 하면 남자들은 내숭 떨지 말라며 더 먹였다. 내가 왜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는 너희 앞에서 술 못 먹는 척하며 잘 보이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하느냐 따져 물으면, 나는 또 ‘피곤한 여자’가 되어버렸다. 내가 술에 취해 엎어지는 것만을 고대하는 인간들에 둘러싸여 나는 안간힘을 쓰며 버텼다.


“나는 코요태를 좋아하는데…”


부장이 신입사원 환영 회식 3차로 초대형 관광 나이트에 룸을 잡아 우리를 몰아넣고는 한 말이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대리와 과장은 노래방 기기에 코요태 노래를 줄줄이 예약했다. 많이 해본 듯 익숙해 보였다. 그 방에서 홍일점이었던 나는 밤새 하이힐을 신고 선 채로 탬버린을 치며 코요태 노래를 불렀다. 젠장, 코요태 히트곡은 왜 그리도 많은지 원망스러운 밤이었다.


부장은 지치지도 않는다. 노래가 시작하면 한 잔, 끝나면 한 잔, 안 끝나도 한 잔, ‘못 먹겠다, 안 먹겠다’ 하면 옆에 있는 과장, 대리가 얄미운 시누이처럼 눈을 흘겼다. 관광 나이트 룸에서 술을 받아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다 화장실로 뛰어가 속을 게워 내길 반복했다. 언젠가 올 거라 예상한 상황이었다. 막상 닥치니 덤덤했다. 화도 안 났다.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원래 늘 그곳에 오랜 시간 예전부터 이어져 온 시간과 공간, 사람들, 그리고 문화, 이제 내 차례가 된 것뿐이었다. 나는 그 밤, 그저 살아남기를 바랐다.


날이 샜다. 새벽 5시 영업을 마친 나이트에서 나는 절뚝이며 걸어 나왔다. 과장이 찜질방 가서 씻고 사무실로 출근하라며 만원을 쥐여줬다. 징그럽게 추운 겨울날이었다. 찜질방에서 대충 씻고 정신을 좀 차리니 스타킹은 이미 올이 다 나가 다시 신을 수 없는 상태였고, 힐을 신고 밤새 서 있던 바람에 발이 퉁퉁 부었다. 어쩔 수 없이 하이힐 발꿈치 부분을 꺾어 슬리퍼처럼 만들어 발을 욱여넣고, 스타킹도 없이 맨다리에 머리도 제대로 못 말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꼴로 테헤란로를 걸었다.


아이러니했다. 호프집에, 바에, 클럽에, 술이란 술은 종류별로 다 취급하며 아르바이트했는데 스태프 회식에서조차 나에게 이토록 술을 먹인 사람들이 없다. 직장이라는 조직의 ‘장’들에게는, 그리고 남자들에게는 암묵적으로 허락된 권력이 있었다. 부장은 내가 술을 거부하는 걸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언제든 손가락 하나 튕겨 나를 내쫓을 수 있었다. 부장은 단순히 나에게 술을 먹이고 노래와 춤을 시킨 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즐긴 거였다. 과장과 대리, 동기들은 훗날 부장의 자리에서 똑같은 짓을 할 예정이었기에 침묵을 지키고 방관했다.


나는 결국 회사로 가지 않았다. 맨다리에 하이힐을 구겨 신고 모락모락 김이 나는 머리카락이 꽁꽁 어는 동안 나는 한참 테헤란로를 걸었다. 내 자존감은 테헤란로에 버려졌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려고 섣불리 덤볐다간 결국 스스로 마음에 안 드는 모습이 되고야 말았다는 불안과 공포가 밀려왔다.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명랑 쾌활’이라는 성격을 반사적으로 써냈는데, 나는 진정 명랑 쾌활한 사람인지, 아니라면 나는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습만 중요했지, 내가 스스로 마음에 들지 않아 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직업인이 된다는 건 그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그 직업을 둘러싼 어떤 환경도 감내할 수 있어야 하는 거라고.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맞벌이해온 엄마와 아빠가 어떤 순간을 참고 넘기며 지금까지 왔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엄마, 아빠는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하기 싫은 걸 더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합리화라 해도 어쩔 수 없다. 어쭙잖게 ‘다들 그렇게 하니까’ 우물쭈물 휘둘려 가다 종국엔 아무도 내 행복엔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을 붙잡고 ‘저기요, 이건 말이 틀리잖아요’ 하고 따질 순 없었다.


비겁한 나는 세상에 동의하지 못하는 마음은 여전히 한가득한데, 한편으론 세상에 미운털 박히고 싶지도 않았다. 현모양처 이미지 관리를 하고 싶은 마음 반, 솔직하고 싶은 마음 반. 아무도 내 마음을 모를 거란 마음 반, 또 한편으론 이해받고 싶은 마음 반. 세상의 시스템을 비난하면서도 그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자책도 했다. 그때까지 내가 배운 세상은 인내와 고통 끝에 행복이 찾아온다고 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판타지와 개천에서 용 났다는 로또 같은 영웅담이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돼 달려 나갈 힘을 주던 때였다.


‘이걸 견뎌야 한다고?’


이건 아니었다. 버티고 견뎌서 결국 내가 얻게 되는 건 무엇인가? 그리고 그건 누굴 위한 것인가? 테헤란로를 걸으며 나는 그동안 내가 세상으로부터 배운 모든 것들을 의심했다.


대학 졸업반 취업준비생일 땐 세상 모든 시간을 다 빼앗긴 것 같았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사회의 시스템에서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니 또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올바른 사회인이 되기 위해 충분히 인내와 고통을 감내하지 않았다는 죄책감은 버리고, 로또 당첨 확률만 한 개천 용 영웅담을 믿지도 않기로 했다. 사람들은 다들 인생이 짧다는데 나에겐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새천년을 이끌 희망이랄 땐 언제고 신자유주의에 갈 곳을 잃은 밀레니엄 세대의 비취업자들을 사회는 ‘루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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