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헤란로에서 하이힐을 꺾어 신고’에서 이어집니다.
일명 ‘코요태 사건’으로 통하는 그날 밤 이후, 나는 회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름 높은 경쟁률을 뚫고 들어간 회사에서도 근로 계약서는 구경도 못 했다. 기약 없는 기간 동안 내가 얼마나 잘하느냐를 보고 정규직 여부를 판단하겠다는 심보였는데 신자유주의 시대, 그런 기업을 가로막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윤을 많이 내는 기업은 구성원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일 좀 시켜달라는 이들이 줄을 섰기 때문이다. 노동 시장에서 청년 구직자들은 연체동물만큼이나 유연했다. 다행이라 해야 하나, 그래서 오히려 고민 없이 산뜻하게 회사를 관뒀다. 그리고 나는 마음의 고향, 홍대로 돌아갔다.
재취업을 하려면 또 몇 개월 발을 동동 굴러야 하는데 나는 당장 생활비가 급했다. 대학 입학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세대, 이력서에 고만고만한 대학 졸업 이력으론 어림도 없었다. 여기에 스펙이 몇 개 붙어줘야 될까 말까인데 그것은 곧 시간과 돈을 뜻했다. 의미도 없었다. 중고등학교, 대학교 영어를 10년 배웠는데 영어 학원을 또 다니라고? 그렇게 스펙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한편 엄마는 내가 대학만 졸업하면 삼성에 들어가는 줄 알았다. 괴리감이 컸다. 하지 않고는 미칠 것 같은 좋아하는 일이나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면 어떤 희생을 감수하고도 밀어붙였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없던 나는 그냥 대충 그냥, 그때그때 좋아하는 걸 하며 살기로 했다.
다시 돌아간 홍대 클럽가엔 황금기가 찾아왔다. 월드컵 특수와 클럽데이 문화, 늘어나는 외국인 관광객에 마포구까지 발 벗고 나섰다. 내가 일하던 아주 작은 클럽 사장님과 동네 다른 클럽 사장님들이 모여 한국 최초의 초대형 클럽 ‘엠투(m2)’와 ‘큐보(Q-vo)’를 오픈했다. 아예 건물을 하나 크게 올려 최첨단 음향, 조명 시설을 설치하고 해외 유명 디제이들을 불러 들썩이는 대형 파티를 이어갔다. 이 클럽에 입장하려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몇 시간씩 줄을 섰다. 이전의 홍대 클럽은 누구나 입장료 만 원을 내고 편편한 플로어에서 똑같이 놀았다. 대형 클럽에 돈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그 자유롭고 매력적이던 홍대 클럽가에도 계층 구분이 생겼다. 지하 클럽으로 내려가서도 따로 마련된 계단을 통해 한 층 위에 있는 중층으로 갈 수 있었다. 중층 입구엔 보완 요원들이 출입 자격을 상징하는 팔찌를 검사했다. 부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더 특별하고 편하게 놀았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연예인과 모델은 언제나 줄을 서지 않고 먼저 입장했고, 나는 이들이 프라이빗하게 놀 수 있도록 팔찌를 채워 중층으로 올려 보냈다. 이 중층 팔찌는 말 그대로 권력이었다. 이 팔찌를 얻으려고 사람들이 어떤 짓까지 하는지 상상도 못 할 거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곳에서야 내 언론정보학 전공을 십분 발휘했다. 온갖 방송사에서 홍대 클럽 문화 취재 요청이 쉴 새 없이 들어왔고, 드라마나 영화 클럽 씬 촬영으로 대관 문의도 잦았다. 나는 클럽의 홍보와 마케팅을 담당하며 클럽 건물 꼭대기 사무실에서 일했다. 해외 유명 디제이들의 내한 파티 보도 자료를 만들고, 외국인 프로모터 친구를 도와 번역일도 했다. 학교에서 배운 교과서 영어가 전부라 외국인 앞에 서면 ‘하우 아 유?’ ‘아임 파인 땡큐, 앤 유?’ 하는 식이었지만, 문법과 단어 위주의 문서 번역은 할 만했다. 한국에 생긴 최초의 대형 클럽이었고 클럽 파티 프로모터라는 업 자체가 생소한 시절이라 사수 없이 혼자 눈치껏 일했다. 정해진 직무나 역할이 없어 알아서 일하는 시스템, 아니 시스템조차 없는 자유로운 곳에서 음악을 매개로 뻔하지 않은 사람들을 만났다. 나를 존중해주고 내 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과 일한다는 것이 나에겐 대기업 인턴 자리보다 훨씬 나았다. 4대 보험이나 근로 계약서 같은 건 당연히 없었지만 그렇게라도 일하는 게 좋았다. 어차피 같은 조건과 환경이라면 코요태 노래 대신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원 없이 듣는 게 훨씬 행복했다.
평일엔 사무실에서 일하고 주말엔 클럽에서 VIP들을 관리했다. 한남대교를 넘어 외제차를 붕붕 대고 홍대까지 행차하신 부잣집 도련님들, 아가씨들, 유학생, 재미 교포, 연예인, 모델이 대부분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도 부모 잘 만나 몇 억짜리 차를 몰고 하룻밤에 수백만 원짜리 술을 마시는 아이들, 뭐 하나 조금이라도 입맛에 안 맞으면 안하무인인 어른들이 지천에 널렸다. 그에 반해 나는 최저 시급, 법정 근로 시간 같은 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선량한 근로자였다. 오전에 출근해 다음 날 새벽 퇴근하는 게 일상이었다. 열등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내가 걔들보다 못한 게 뭐 있다고. 그래서 한껏 자존심이라도 세워 보려 노력했다. 사람들은 내가 하는 일을 ‘3D 업종’이라 불렀다.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 대학 나와서 왜 그런 데서 일하냐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웃기고들 있다. 나에겐 밤새 탬버린 치며 음흉한 미소를 짓던 부장을 위해 코요태 노래를 부르던 게 ‘3D’였다.
홍대에서 아주 작은 구멍가게 클럽으로 시작했던 사장님은 벤츠로 차를 바꿨다. 가방끈 짧고 딴따라 가게나 한다고 예전에 사장님을 그렇게 무시했다던 사람들이 이제 그 앞에서 클럽 입장 좀 시켜달라고, 중층 좀 올려달라고 콧소리를 냈다. 연예인과 모델이 따라붙었다. 이 모든 걸 수년간 옆에서 지켜보자니 돈이 이렇게 재밌고 무섭고 강력한 거구나 싶었다.
수년간 밤낮 구분 없이 어두운 지하 클럽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관찰하고 경험하면서 나는 이곳에도 완벽히 섞이지 못할 거라는 걸 직감했다. 애가 탔다. 엄마의 걱정스런 눈빛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냥 남들처럼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일을 하고, 시집갈 준비나 하라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남들이 다 하는 게 나에겐 쉽지가 않은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와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어 더 자존심 상하고 다급해졌다.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를 평소 입에 달고 살았는데 나는 그 나이 먹도록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기만 하고 있었다.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서 가장 큰 문제이자 불만이었다. 나는 언제나 이도 저도 선택을 제대로 못하고 우물쭈물거렸다. 뭐 하나 제대로 화끈하게 해 본 게 없다. 다 이것저것 조금씩 기웃거리다 말았다. 이래서 못해 저래서 못해 핑계도 많았다. 나는 늘 그 이유를 엄마 때문이라고 갖다 붙였다.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는데 재능이 있었다. “하나가 예중에 진학하면 좋겠다”는 학원 선생님 말에 엄마의 대답은 ‘예체능은 돈이 많이 든다’였다. 그리고 나는 피아노 학원을 그만뒀다. 중학교 때 공부를 꽤 잘했다. 외고 진학을 권하는 담임에게도 엄마는 같은 말을 했다.
이런 이야기는 어디서든 누구에게든 잘하지 않는 편이다. 삼시 세 끼도 제대로 못 먹을 만큼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열심히 공부해 서울대 갔다는 신화 같은 이야기 때문이다. 실제로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딘가에 분명히 있다는 유니콘 같은 사람들. 그 앞에서 내 핑계는 비루했다. 물론 모든 게 부모님 탓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내 탓도 아니었다. 무기력해졌다. 가져본 적도 없던 것들을 빼앗긴 것 같은 이상한 상실감과 박탈감이 자연스럽게 함께 했다. 그때 내가 간절히 바란 건 수단 방법 상관없이 그저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는 거였다. 하고 싶은 것도 모르겠고, 할 수 있는 것도 모르겠고, 그냥 어떻게든 돈이라도 벌었으면 했다.
나를 오래 봐온 클럽 사장님이 사업을 제안했다. 나를 영특하게 여기며 늘 존중으로 대해주던 사람이었다. 나 역시 충성심과 책임감 같은 게 있었다. 인터넷 상거래 붐이 크게 일던 때였다. 자신이 꾸준히 서포트할 터이니 인터넷 쇼핑몰 사업을 해보자고 했다. 패션에 관심도 없고 또 잘 알지도 못하던 내가 그저 돈이나 벌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덜컥 인터넷 의류 쇼핑몰을 시작했다. 허나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투자금은 꾸준하지 않았고, 모든 일을 다 내가 알아서 해야 했다. 무식하게 열심히만 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동대문 시장에 가서 물건 사입하고 촬영하고 작업하고 배송을 했다. 자정에만 잘 수 있어도 행복했다.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고 열심히 하면서도 사실 나는 본능적으로 이게 잘 되지 않으리라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게 가장 힘들었다. 안 될 걸 알면서 꾸역꾸역 밀고 나갔다. 이대로 가면 낭떠러지가 나올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힘들다고 도와달라고도 말을 못 했다. 자존심이었다. 그렇게 3년을 버티다 결국 손을 들었다. 눈덩이처럼 늘어난 대출 빚 때문이었다.
지속적인 투자에 직원도 구하고 시스템도 갖춰 일해 보잔 말을 믿고 시작한 내가 바보였다. 그래도 시작은 했으니 오기를 부렸다. 잘 알지도 못하고 심지어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몇 년째 붙잡고 있었다. 이것마저 포기하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고 생각했다.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결국 그럴 줄 알았지.’ 엄마가 하지도 않은 말이 내 귓가에 들려왔다. 고정 비용 지출과 실적 저조에 몸과 마음은 점점 지쳐가고, 조금만 받아 구멍만 메우자 했던 카드 현금 서비스가 대부업 대출까지 이어졌다. 글로벌 금융 위기 시대였고, 은행의 저금리 대출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 대부업체 ‘법정’ 최고이자율이 49%였다. 이마저도 66%에서 낮아진 거였다. 나는 아둔함과 오만으로 이 늪에 빠진 거였지만,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비에 쓰려고 울며 겨자 먹기로 이 살인적인 이자율로 돈을 빌려 쓰다 스러졌다.
나는 이미 해피엔딩이 아닐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좀 더 일찍 손을 들었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어느 날 아침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순진한 꿈을 꿨다. 하루에 서너 시간 자면서, 걷다가 픽픽 쓰러질 정도로 건강을 해치면서도 이리 열심히 했는데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처럼 보상받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거두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안다. 그 말도 안 되는 이자율로 대출금을 갚아나가며 사업을 이어나간다는 것 자체가 미친 생각이었다. 허나 그때는 몰랐다. 그게 인생이다.
모든 걸 놓아버리자 감당할 수 없이 엄청난 수치심이 끝없이 몰려왔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원망하거나 핑계 대지 않고, 완전하게 철저하고 지독하게 나를 탓했다.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렸던 그 날이 잊히지 않는다. 엄마는 딱 하루 울고 괴로워하고 나에게 실망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나를 대했다. 엄마는 누구보다 강했다. 그리고 날 붙들어줬다. 결국 개인회생 절차에 들어갔다. 개인적인 허영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돈을 쓰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앞으로 이 빚을 어떻게 갚아나갈 건지 변제 계획을 세워 법원에 설명했다. 판결 이후 매달 정해진 날짜에 일정 금액을 갚아나갔다. 이후 5년 동안 단 한 번도 어김없이 약속한 금액을 변제했고 신용을 회복했다. 이후 대출은 물론 신용카드도 만들지 않는다. 대부업체 쪽으론 오줌도 안 눈다.
앞으로 내 생에 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때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무섭고 두려웠던 시간이었다. ‘여자 나이 서른이면 인생 끝이다’ 태어나 자라며 꾸준히 들어온 말에 나도 모르게 학습되어 있었다. ‘그런 소리 개나 줘버려’ 했는데 알고 보니 나는 그런 생각에 영향받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약해졌을 때 적절한 타이밍에 맞춰 비수처럼 파고들었다. 나는 내일모레 서른이었고, 직장도 없었고, 결혼도 못했고, 빚만 많았다. 내 인생을 누군가가 경제적 가치로 따진다면 반품도 환불도 사용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클럽에서 일한 경험은 내가 볼 때만 멋진 경력이었지 세상이 보기엔 그저 시간 낭비였다. 그나마 붙들고 있던 자존심마저 와장창 깨져버렸다. 내 인생의 가치를 액수로 환산하려 한 건 애초에 나였다.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내가 세상을 가지고 논다고 생각했지, 한 번도 이 세상을 어쩌지 못할 거란 생각을 못했다. 알고 보니 나는 밑도 끝도 없는 자존심만으로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자존감이 아닌 자존심이었다. 괜찮다, 괜찮다, 주변 사람 모두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며 속이고 있었다. 사실, 나는 괜찮지 않았다.
깊은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나쁜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내 방, 딱 세 걸음만 걸어 방문에 손을 뻗어 올리고 반 바퀴만 휙 돌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되는데, 그게 안 됐다. 몇 달 동안 방문 하나를 열지 못했다. 생각해보니 그 집에 살면서 단 하루도 집 밖에 안 나간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엄마 아빠가 맞벌이를 시작하면서 집에 혼자 있는 걸 온 맘으로 거부해왔다. 혼자 있는 집안의 정적을 견딜 수 없어서였다. 늘 왁자지껄한 걸 좋아했고 친구들과 어울렸다. 집에서 잠자는 시간 빼곤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에서 보냈다. 그런데 이젠 밖에 나가는 게 죽기보다 두렵고 무서웠다.
그제야 내 작은 방안에 쭈그리고 앉아 뒤죽박죽 하루살이처럼 살아온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내가 배운 세상에 대해서도 생각해봤다. 그리고 그 세상 속에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진정으로 고민해봤다.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정처 없이 여기저기 떠돌았다. 결론도 목적도 없이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전까지 신나게 보던 ‘이렇게 살면 성공한다’는 자기 계발서를 모두 치워버렸다. 맹목적인 성공만을 떠드는 이야기는 이제 적어도 내 것은 아니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실패와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이야기하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쓰인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위안을 얻었다.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은 무엇이든 옳다. 하여 끝내 가고자 하는 생의 방향을 찾는다면 정말 좋을 텐데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길로 간다. 그것이 이상적이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라 해도 체념으로, 때론 실수로, 때론 운명의 장난처럼 그 길에서 이탈하기도 한다. 내 작은 방에 앉아 ‘꿈’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데에 온 시간과 시간을 썼다. 노래나 영화, 책 등 온 세상에 도배된 단어인데 그 꿈을 먹고사는 사람들은 정작 내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꿈은 얼어 죽을, 다들 밥 먹고 살려고 하는 거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어 보였다. 왜 나만 예민하고 유난인지 자책했다. 아무도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란 생각에 지독하게 외로웠다. 외로움은 삶의 영원한 친구라지만 나는 어디서든 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스스로를 만듦으로써 그 감정을 애써 무시해왔다. 죽을 때까지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헌데 그제야 비로소 나는 스스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외로웠다고. 정말 외로웠다고.
내가 알아서 멈춰야 할 때를 알고 서지 못하면 세상이 나를 억지로 멈춰 세운다. 서른이 가까워져서야 비로소 멈추고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동안 잘했다, 애썼다 스스로 위로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 나는 마음을 많이 다쳤고, 그 오래된 상처가 크게 벌어져있었다. 상처를 스스로 인정하고 들여다보고 치유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다. 그래, 나는 실패했다. 그걸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리고 나와의 시간을 많이 가졌다. 내가 뭘 원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내가 뭘 하면 행복한지, 앞으로 뭘 하면 행복할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스스로에게 시간을 주고 대화를 많이 나눴다. 그저 나란 존재 자체만으로 감사이고 축복이고 사랑이란 말을 많이 들으며 살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런 유년 시절이 없었다면 스스로 자존감을 쌓아 만들어나가는 방법밖엔 없다. 그 자존감을 단단하게 쌓는 과정 없이는 어떤 인간도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커다란 빚이 따라오긴 했지만 이 외롭고 두려운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삶에 대해 꿈에 대해 업에 대해 진지한 고찰 없이 나머지 생을 또 ‘그냥’ 살았을 것이다.
나의 실패는 드라마틱하고 고되었지만 참 고맙고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 시간을 통해 나의 알량한 자존심은 묵직한 자존감으로 바뀌고, ‘내 인생에 실패는 없다’는 문장은 ‘실패해도 괜찮아’로 다시 쓰였다. 질식될까 피해만 왔던 삶에 대한 두려움과 무거운 의미를 마주하며 겸손을 배웠고, 삶과 인간 자체에 대한 본질에 집중하게 됐다. 삶에는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이 시간으로 인해 훗날 기자로서 세상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내가 들여다본 그들의 삶을 글로 옮겨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자극과 영감, 희망과 위로를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삶의 다양한 경험과 고민과 사유가 나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데에 얼마나 좋은 거름이 되었는지 모른다. 어떤 경험이든 이유가 있다. 그래서 나는 실패를 열렬히 응원한다.
젊은이들에게 적어도 서른까지 실패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서른까지 이것저것 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해보고, 여행도 많이 해보고, 사람도 많이 만나보고, 그러고 나서 천천히 서른 넘어 업을 정할 수 있었으면. 아니, 실패는 마흔에도 예순에도 할 수 있다. 그저 누구의 실패도 함부로 비웃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어차피 평균 수명도 앞으로 수십 년은 더 늘어날 텐데 굳이 생의 방향과 결론을 일찌감치 내릴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쓸데없이 서두르고 압박감을 느껴 발을 헛디뎌 생기는 삶의 부작용이 더 많다,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