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까지 실패할 권리’에서 이어집니다.
낭만의 밀도
나의 서른 즈음은 대한민국 사회 곳곳, 청와대, 국회, 삼성, 엘지부터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오래되고 흉물스러운 도시의 후미진 골목 곳곳까지 모든 것이 더욱더 뚜렷하게 계층화되어가던 시대였다. 한국전쟁 직후 모두 다 똑같이 못 살았을 때는 안 그랬다. 한국 경제가 거침없이 성장하던 시대에도 삼성, 엘지 빼곤 다들 사는 게 거기서 거기였다. 그런데 딱 10년 새에 어중간하게 사는 우리 집 같은 사람들이 ‘벼락 거지’ 아니면 ‘벼락부자’로 나뉘었다.
계급 간 격차에 이어 세대 간 격차도 커져 갈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성별 간 대립이나 갈등은 터져 나오지도 못했다. 터져 나와야 할 문제들이 속으로만 곪아갔다. 그만큼 사회는 덜 성숙했고, 의심과 불신만 커졌다. 하지만 다들 돈, 돈, 돈, 하느라 아무도 그걸 신경 써 챙기지 못했다. 우리 밀레니엄 세대를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허우대 멀쩡하고 잘 먹고 잘 입혀 대학까지 보내놨더니,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 한다는 이유였다. 여기서 사람 구실이란 물론 돈을 잘 버는 거였다.
우리는 인류 최초로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세대가 되었다. 사회는 우리를 ‘88만 원 세대’라 이름 붙였다. 20대 상위 5%만이 5급 공무원이나 삼성 같은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고, 나머지 95%는 비정규직이며, 비정규직의 평균 월 임금인 119만 원에 성인에 대한 20대의 평균임금의 비율인 74%를 곱하면, 우리 세대의 월평균 임금은 88만 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책이 당시 불티나게 팔렸다. 기성세대는 그저 우리에게 참신한 별명을 붙이는 데에 재미를 붙이며, 우리 세대 이야기를 신파로 꾸민 책을 팔아먹고 신나게 돈을 벌었다. 유학까지 가서 석사에 박사까지 따고 오신 기성세대 양반들은 책 작명 센스만 좋았지, 그 누구도 아무런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으로 우리 사회는 정말 ‘청춘은 아픈 거’라 세뇌될 지경까지 이르렀다. ‘젊으니까 고생 좀 해도 돼’ 하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인식이 이 책을 통해 공식화됐다. 사회 전체가 집단 최면에 걸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 누구도 진심으로 누군가를 걱정하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리고 불안은 돈이 된다. 결국 새 천 년의 미래를 책임지리라는 기대와 축복을 받으며 대학에 입학했던 밀레니엄 세대는 갖가지 희망 고문으로 버티고 버티다 끝내 ‘잉여’가 되고 말았다.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가 히트했다. ‘88만 원 세대’의 무기력함과 잉여로움이 만나 일으킨 시너지이자 사회 현상으로 높이 평가됐으나 나는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장기하가 ‘서울대 출신’ 잉여가 아니었다면 달라졌을 이야기다. 한국 사회는 ‘잉여’를 하려 해도 서울대나 나와야 가능하다. 이 사회의 서울대에 대한 자격지심만큼이나 커다란 경외감과 애증은 장기하의 찌질함도 멋지고 키치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여전히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그래도 중요한 것 하나는 그 모든 불안이 늘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좀 더 채찍질해본다. 조금만 참아라, 희망이 올 것이다! 힘들어도 웃자! 좀 더 자신을 채찍질하고, 남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남들보다 더 늦게 자라! 고생 끝에 낙이 온다! 같은 방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썼을 법한 다 거기서 거기인 자기계발서를 읽어 내려가며 스스로 반성해본다. 얼마 살아보지도 못하고, 뭐 경험해본 것도 별로 없는데 반성이라니. 결국 신용 불량에 백수가 된 나는 결론을 얻었다. “젠장, 고생 끝에 암이 온다! 아픈 게 무슨 청춘이냐?”
서른이 될 거란 상상을 해본 적이 없다. 커트 코베인과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짐 모리슨처럼 스물일곱이 내 인생의 최대치라 생각했다. 스물일곱을 지나던 해에 나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삶의 궁핍과 허기, 외로움을 채우려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채우며 살았다. 그걸 들키기 싫어 더 기고만장하게 이십 대를 보냈다. 서른을 앞두고 나는, 결국 개인회생 절차를 밟고 있는 빚쟁이 백수가 되었다. ‘거봐, 그렇게 까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태어나 처음으로 조그만 방안에 자발적으로 들어앉아 스스로 실컷 비웃었다. 타인의 비웃음보다 스스로 비웃는 것이 더 쓰고 아프다.
서른을 몇 년 앞뒀을 땐 ‘서른’ 그 자체가 낭만이었다. 노래방에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안 불러본 사람이 있나. 하지만 막상 닥친 서른은 나에게 그 자체로 공포였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서른을 앓았다. 세상이 실패라 부르는 상황에서 맞은 나이이기도 했지만, 이 정도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서른을 맞게 될 거라 생각해본 적이 없어 당황스러웠다. 스스로조차 감추며 속이며 살아왔던 거짓과 모순과 맞닥뜨리고, 못난 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서른이라는 나이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는 거였다. 이 작은 삶의 비밀을 나는 이제 막 알았는데, 사회는 나를 다 큰 어른 취급해서 민망할 지경이었다. 나만 어른이 너무 늦게 되는 건 아닌가 자책도 해봤지만, 결국 세상 사람은 각자 저마다의 속도로, 그리고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어쩌면 나에게 속도를 내라 다그치는 네가 너무 빠른 건지도 몰라, 그래서 언젠가 너도 나처럼 어느 순간 두 다리가 땅에 달라붙어 멈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올 거야. 사람들은 저마다 속도도 드라마도 타이밍도 다르니까.’ 듣는 사람 없는 공기 속에 홀로 중얼거렸다.
이십 대는 온 마음으로 자유를 쫓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타인과 세상의 눈치를 많이 보며 갈피를 못 잡았던 시간이었다. 당당한데 착해야 했고, 섹시한데 조신해야 했고, 잘 놀지만 헤프지 않아야 했고, 독립적이면서도 여성스러워야 했다. 내가 원하는, 그리고 스스로 마음에 드는 모습과 타인과 세상이 나로부터 기대하는 모습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하루하루 어찌나 고단하던지. 오히려 서른을 넘기고 나서야 그런 관념에서 자유로워졌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지금껏 눈치 보고 살금살금 살았건만 남은 게 뭐지, 내 인생에 훈수 두던 사람들은 내가 신용 불량에 백수가 되었는데 다 어디로 가버린 거지? 여태 혼자 전전긍긍하며 지켜오던 사회적 관념에 수많은 질문을 품었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오랫동안 해온 거짓말이었다. 원치 않는 주사위 게임 도중 주사위를 테이블 밖으로 던져 버리는 사람이 진정한 승자다. 아니, 이기지 않으면 또 어떤가. 그러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서른이 가까워진 나에게 사람들은 더 이상 꿈을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때부터 사람들에게 꿈이 뭐냐고 묻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유가 있었다. 내 꿈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꿈이 없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꿈을 묻지 않는다. 내 꿈은 ‘삶에 진짜 이야기가 넘치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내가 태어나 살아온 시대를 관통하면서, 오직 나라는 사람만이 경험하고 선택해온 순간이 합이 된 압축된 이야기가 풍부한 사람. 다른 이의 문장을 인용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경험담을 빌려오지 않아도, 내가 살아온 삶 자체를 멋진 이야기로 채울 수 있는 사람.
나에게 꿈을 찾았다는 건 이제 겨우 인생의 방향키를 잡았다는 의미였다.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맹목적인 희망이 무엇이든 되어야겠다는 강박관념으로 변해갈 때, 밑바닥까지 떨어진 자존감으로 차갑고 시린 자괴감과 무기력함에 시달릴 때, 사람들은 모두 낭만주의자에서 현실주의자로, 냉소주의자로 변해갔다. 그 무렵 나는, 되레 나만의 꿈과 낭만을 찾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돈! 돈!’ 하다 이십 대에 가진 걸 싹 다 잃고 빚더미에 앉아 찾은 꿈과 낭만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는 게 이렇게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기분이었는지 돈을 쫓아다닐 땐 몰랐다. 돈과 낭만, 둘 다 가질 수 없다면 나는 언제나 낭만이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의 낭만은 더 밀도가 높다.
내 인생의 방향을 이리 잡았으니 이제, 길을 찾아야 한다. 사실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뭘 잘하는지도 몰랐다. 개인회생 절차를 밟는 동안 수없이 법원에 오갔다. 지나온 삶을 반성하며 한동안은 집에서 닥치는 대로 책만 읽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여다보니 재밌었다. 걸어서 세계 여행을 마친 한비야가 에세이 <그건, 사랑이었네>에서 인간 수명을 축구 경기 120분에 비유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가 오십이었는데, 자신은 이제 겨우 전반전 끝나간다며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제 서른 됐다고 앓는 소리 하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전반전 반 뛴 선수였던 나는 앞으로 남은 내 생이 너무 길다는 생각에 압도당했다.
한국 사회는 여자 나이 ‘서른’을 온갖 방법으로 모욕했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아름답고 소중한 서른에 감사하기 시작했다. 당시 패션지 <바자>의 피처 에디터였던 김경이 쓴 책 <뷰티풀 몬스터>가 나를 유혹했다. 한국판 <섹스 앤드 시티> ‘캐리’ 김경의 솔직하고 발칙하면서도 당찬 글이 매혹적이었다. 홍대 클럽에서 함께 일하며 내 이십 대를 함께 한 친구가 툭 던진 한마디도 폭발력이 있었다. “하나, 그거 알아? 너, 글 정말 잘 쓰는 거? 네 글은 항상 읽고 싶어진다니까.” 너무 가까워 이런 칭찬은 오히려 어색함을 불러오는 사이였다. 그것도 내가 싸이월드에 끄적인 일기를 보고 한 말이었다. 그 친구의 그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나는 글을 써볼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삶의 방향이 정해지니 의욕이 생겼다.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관심이 커졌다. 상대적으로 내 인생의 이야기가 미천하기 때문이었다. 직접 경험을 하고픈 마음은 간절했으나 용기가 없었다. 스스로 이미 늦었다 선을 그은 상태였다. 간접 경험을 위해서라도 책을 더 많이 읽었고, 영화도 더 많이 봤다. 직접적인 관계를 만들지 않고도 누군가의 인생을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오호라, 나는 알고 보니 그런 사람이었다.
태어나 지금껏 북적이는 무리를 떠나본 적이 없었다. 졸업 후 기계적으로 쓴 이력서 성격 란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명랑, 쾌활, 사교적’이라 채워 넣었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 마음에 들고 싶었고, 그게 내 삶의 큰 이유라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세상과 사람에 대한 거대한 호기심은 주체 못 하면서도 사람들과의 직접적인 관계로부터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완벽한 균형점이 나에겐 책이고 글이었다.
멋진 일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고 내 시각으로 쓴 글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닿게 된다는 건. 내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섬과 섬처럼 따로 뚝뚝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영원이 아닌 잠시라도 연결시킬 수 있는 다리. 내가 한비야와 김경의 삶이 담긴 글에서 한 부분을 떼어와 내 삶에 붙였던 것처럼, 운명처럼 만나야 할 사람과 사람이 만날 수 있게 해주는 다리. 그렇게 나는 잡지사 피처 에디터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서른을 앞두고, 태어나 처음으로 꿈을 가지게 됐다.
오래 헤매고 방황하다 힘들게 찾은 꿈. 나는 좋아 죽겠는데 사람들은 아니었다. 서른을 앞둔 나에게 가뜩이나 폐쇄적인 잡지 바닥은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잡지계는 일단 구인 공고를 내지 않기로 유명하다. 10년 전도 그랬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러하다. 대부분의 에디터 지망생이 대학 졸업하자마자 인턴도 아닌 어시스턴트로 시작해 1~2년은 기본으로 다달이 30십만 원 정도 받으며 일했다. 명목은 경험을 쌓고 일을 배운다는 거지만 대부분 에디터들 잔심부름이다. 그렇게 수년을 버텨도 결국 잡지사 이름만 여러 번 바뀌고, 여전히 어시스턴트로 퇴사하는 친구도 많았다. 그러다 정말 운이 좋으면 인턴 기자가 된다. 월급 몇십만 원 올랐을 뿐 비정규직에 비계약직으로 언제든 나가라면 나가야 하는 신세인 건 똑같다. 그렇게 또 몇 년을 버티다 운이 좋아 선임 기자 중 하나가 그만둬 자리가 생기면 마침내 정기자가 된다. 하지만 안 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잡지계의 현실은 에디터가 되고 나서 몇 년 후 대형 패션지 피처 에디터로 스카우트되어 가서야 알았다. 한동안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언제나처럼 조용히 사라진 이슈, 잡지사 어시스턴트 ‘열정 페이’ 사건으로 한창 떠들썩할 때였다.
내가 잡지 에디터가 된 건 기적에 가깝다. 지금 생각해도 운 말고는 설명이 안 된다. 잡지판에 관련된 경험은 전무후무했던, 서른을 바라보는 내가 에디터가 되다니. 나도 무모했지만, 나를 에디터로 만들어준 첫 잡지사 편집장에게도 큰 위험이 따르는 결정이었다. 나는 잡지판이 어떤지도 모르고(몰라서 더 용감했다), 잡지사 문을 두드렸다. 채용 공고도 안 내면서 대체 사람을 어떻게 뽑는지 궁금했다. 패션지 에디터의 매력을 한껏 발산해준 당시 <바자> 피처 에디터 김경에게 일면식도 없으면서도 메일을 보냈다. 에디터가 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냐고, 왜 잡지사들은 채용 공고를 안 내냐고.
김경 선배는 신기하게도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답장을 보내 행운을 빌었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김경이라는 사람의 글이 멋진 이유는 바로 사람이 멋지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훗날 내가 그녀를 실제로 에디터로 일하는 현장에서 직접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채. 잡지판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고 순진하게 보낸 이메일에 김경 선배는 얼마나 웃었을까. 딱히 에디터가 될 수 있는 공정한 방법이 없으니 조언도 힘들었을 테다. 그런데 그녀가 행운을 빈다며 보낸 답장 자체가 나는 정말 고마웠다. 시간을 내어 내 글을 읽고 또 시간을 내어 답장해준다는 건 분명 의미가 있는 일이다. 그래서 이후 에디터가 되고 나서 나에게 똑같이 묻는 후배들의 메일에 명쾌한 답은 없더라도 답장을 꼭 하곤 한다.
에디터가 되고 싶었으나 길은 몰랐던 나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부터 작정하고 썼다. 더 이상 나는 ‘명랑, 쾌활’한 성격에 ‘음악, 영화 감상’이 취미인 사람이 아니었다. 나란 사람이 가진 개성과 습성, 매력, 재주, 그리고 내가 겪은 실패에 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썼다. 내가 나란 사람을 스스로 인터뷰하는 형식의 글이었다. 내가 나에게 질문을 하고 답했다. 나이 서른 먹을 때까지 이력서에 내밀만한 그럴듯한 직장 생활 경험도 없고, 사업 실패에 빚도 많고 나이만 먹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사회가 씌운 프레임일 뿐, 나는 홍대 길거리에서, 쾌쾌한 지하 클럽에서 수많은 인생 선생을 많이 만나고 배웠다고, 나에게 서른은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는 나이라고 썼다. 진심이었다. 나는 이런 깡으로 일할 요량이 있으니 마음에 들면 나를 데려다 쓰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손해는 아닐 거요, 그런 마음이었다. 하여 이렇게 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잡지사 편집장에게 보냈다.
신기하게 몇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하지만 막상 면접을 보러 가면 다 마음에 드는데 나이가 문제였다. “하나 씨가 ‘선배’라고 불러야 하는 에디터들이 대부분 본인보다 나이가 어릴 텐데 괜찮겠어요?” 내가 괜찮다고 해도 다들 고개를 저었다. 그럴 거면 왜 물어보나. 자신들 같으면 그게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인가 보다. 나이 많은 어시스턴트가 들어와 어색해질 팀 분위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럴 거면 왜 불렀나. 나이, 위계, 서열 따지는 한국 사회는 내가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면접까지 보고서도 어시스턴트 자리 하나 못 구했다. 아, 나는 이제야 하고 싶은 걸 찾았는데, 너무 늦었다며 온 세상이 나를 타박하는 듯했다. 야속한 마음에 개인회생 절차 변제를 위한 파트타임 아르바이트라고 알아봐야겠다 싶어 구직 사이트 스크롤을 내리는데 한 잡지사 채용 공고가 눈에 번뜩 들어왔다. 손이 떨렸다. 창간 예정인 독립문화 잡지라 했다. 사기일 수도 있었다. 구인란에 쓴 글만 봐도 돈이 없는 회사란 게 티가 났다. 그런데 멋있는 걸 해보고 싶다고 했다. 순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있을 거란 본능적인 느낌이 들었다. 지원했고, 며칠 후 면접 보러 오란 전화를 받았다.
회사는 압구정동 주택가, 가정집이었다. 이거 사기인가, 망설였다. 대학 졸업 직후, 취업 사기를 당한 적이 있어, 또다시 상처받기 싫었다. 누군가의 절박함과 꿈을 가지고 장난치고 사기 치는 자들은 큰일 나야 한다. 그러다 올라간 사무실엔 편집장이 혼자 앉아 있었다. 아직 창간도 안 한 잡지에 돈이 많은 회사도 아니라며 멋쩍게 웃었다. 나는 안다고 했다. 그런데도 또 돈이 안 되는 잡지를 창간하려고 하니 이제라도 싫으면 자리를 떠나도 좋다고 편집장이 말했다. 나는 나이도 많고 잡지 경험도 없고, 글 써본 거라곤 싸이월드 일기뿐이라고, 괜찮겠냐고 물었다. 편집장 역시 안다고 했다. 작은 회사에 창간지에 독립 잡지라 기자는 딱 2명만 뽑을 거라고 했다. 경력직으로 들어올 선배 기자가 나보다 어릴 텐데 괜찮겠냐고 편집장이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나는 괜찮은데, 여러분이 괜찮겠냐고. 편집장은 이렇게 말했다.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았는데, 축복하고 기념할 일이지 걱정할 일인가.” 아직 창간을 안 한 잡지사라 뭐가 나올 줄 몰랐다. 무슨 일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마치 내 앞날 같았다. 강남엔 발도 들여 본 적 없는 내가 압구정에 있는 독립 잡지사로 매일 출근이라니. 그렇게 나는 창간을 앞둔 독립 잡지사 에디터가 되었다. 물론, 비정규직에 비계약직에 월급 60만 원이 전부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마음은 충만했으니까. 내가 돈이 없지, 낭만이 없나. 적어도 낭만은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