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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인디 출신입니다만

by 조하나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이어집니다







저는 인디 출신입니다만


잡지사 피처 에디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창간도 안 한 독립 매거진에 들어가 의도치 않게 음악 ‘전문’ 에디터가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음악을 많이, 또 발 빠르게 듣는 것뿐이었다. 뮤지션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음악, 그것이 나에겐 좋은 앨범의 기준이었다. 내가 글로 내 마음을 쓰듯 뮤지션들은 음악으로 자신을 찾아가고 있었다. 좋은 앨범을 찬찬히 듣다 보면 끝없이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게 앨범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면, 그 뮤지션의 라이브 공연을 직접 보러 갔다. 한국 인디 음악 씬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밴드들은 주로 평일 무대만 허락된다. ‘수요일 밴드’ ‘목요일 밴드’로 불리는 이들은 관객 하나 없는 텅 빈 공연장에서 공연하기 일쑤다. 그러다 관객이 열이 되고 오십이 되면, ‘금요일 밴드’ ‘토요일 밴드’가 된다. 적어도 인디 음악 팬들에게만큼, 아니 우리에게만큼은 록 스타였다.


당시 한국 문화계는 대형 음악 페스티벌과 라이브 공연이 시장 규모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한국 경제의 주 소비층 2030이 모이는 라이브 공연에 각종 브랜드의 마케팅 예산이 과도하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공연 아티스트 라인업을 띄우고 티켓 오픈부터 해놓고는 모객이 안 돼 취소하는 공연 사기도 잦았고, 질 낮은 공연 진행으로 관객의 빈축을 사는 일도 많았다. 한국의 경제 성장률과 문화 성장률은 비례하지 않았다. 페스티벌이나 공연으로 내한하는 해외 뮤지션들은 보통 음반 판매량이 높은 일본이 주 목적지였고, 한국은 지나는 길에 들르는 곳에 불과했다. 해외 뮤지션들이 볼 때 한국은 참 이상한 나라였다. 자신들 음반은 수치상 한국에서 전혀 팔리지 않는다고 나오는데, 막상 내한 무대에 오르면 ‘떼창’하는 관객을 만날 수 있다며 신기해했다. 한국처럼 획일화된 아이돌 일색의 ‘K-팝’의 나라에서 기대하지 못했던 반응이라며 의아해했다. 한국 문화계에도 양극화의 골이 깊어지는 시기였고, 대부분 방관하거나 이용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한국에 대중적으로 알려진 대형 팝 스타들은 대기업 협찬으로 엄청난 개런티를 받고 내한했다. 어차피 그런 팝 스타들은 대형 패션지나 공중파 TV 채널이 인터뷰를 독차지했다. 굳이 내가 만나 인터뷰할 필요가 없는 이들이었다. 체급도 맞지 않았고, 궁금한 것도 없었다. 덕분에 나는 평소 만나보고 싶었던 이들을 인터뷰하며 실속을 차렸다. 국내엔 크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외 인디 음악 씬에선 실력 있고 매력 넘치는 뮤지션들을 만나는 게 나만의 틈새시장 공략법이었다. 어떤 기자도 인터뷰를 신청하지 않는, 한국에서 인지도 없는 뮤지션들만 골라서 만나고 싶다고 하니 음반사나 에이전시가 오히려 이유를 궁금해한다. “앨범이 너무 좋아서요!” 정말 그랬다. 너무나 당연하고 본질적인 이유에서였다.


제작비가 많지 않은(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독립 매거진 에디터로서 내가 승부할 수 있는 거라곤 현장을 지키는 부지런함이었다. 사실 스튜디오나 헤어·메이크업 스태프, 스타일리스트 등을 섭외할 제작비가 없어 인터뷰 진행 도중 자연스럽게 사진을 찍어 다큐멘터리처럼 기사에 넣은 건데, 나중엔 그게 나름 우리 잡지만의 개성과 매력이 되었다. 하지만 비싼 옷을 입고 예쁘게 가꾸고 현란한 조명에 사진을 찍어 포토샵으로 닦아낸 화보에 익숙한 연예인들은 자기 민낯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유명하지 않은 잡지 이름에, 화보도 안 찍고, 브랜드 협찬도 없이 긴 인터뷰를 하겠다고 하니 일단 매니저 선에서 통과되기 힘들었다. 매체 이름에 힘이 없으니 무시하는 이들도 꽤 많았지만, 우리 잡지도, 나도, 그렇다고 기죽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나랑 인터뷰 못 하는 너희 손해지’ 하는 자존심 정도는 있어야 버틸 수 있는 순간도 많았다. 그런가 하면 인터뷰의 ‘인’ 자만 나와도 “감사하다” 말하는 아티스트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지면 한 토막에라도 자신의 이야기가 실리길,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나는 잡지판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직업 세계가 본질적으로 ‘사람’에 대한 일이라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하고, 연대하고, 삶에 활기를 불어넣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 말이다.


나는 신중하게 말하고 쓰는 사람이다. 적어도 기자라면, 에디터라면, 말과 글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그래야 한다. 나는 말과 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안다. 잡지판에서 일하다 보면 기자가 무슨 권력이라도 가진 양 말과 글을 무기로 이용하는 이들을 가까이 보게 된다. 그 칼에 베여 피 흘리는 사람들도 가까이 보게 된다. 어디 가서 적어도 글로 밥 벌어먹는다는 명함을 내밀려면 스스로 떳떳해야 한다. 자신의 이름 석 자로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사람은 책임감과 윤리 의식이 더욱더 필요하다.


처음 만나 통성명만 마친 사람에게 “부모님은 어디 사세요?”라고 물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저는 부모님이 없는데요” 일 수도 있다. 무심코 “여자 친구 있어요?”라고 물었는데 “저는 게이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올 수도 있다. 자신에겐 당연한 전제가 누군가에게 폭력일 수 있다. 몰라서 그랬다고 해도 나쁘다. 모르면 배우고, 고쳐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이가 나처럼 살지 않는다. 어림잡지 말 것, 예상하지 말 것, 아는 척하지 말 것. 내가 말과 글 앞에서 이리도 예민한 건,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글을 쓸 때 신중한 이유 또한, 상대 또한 나를 그렇게 대해 달라고 요구하는 의미이다.


영세한 독립 잡지에서 피처 에디터 일을 시작한 덕에 나는 갖가지 실험을 통해 나만의 인터뷰 스타일을 만들 수 있었다. 인터뷰 준비는 철저하게 한다. 인터뷰이의 호감을 얻으려면 그만큼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면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겨 즉흥적으로 전개하기도 한다. 인터뷰는 기본 1시간 이상은 해야 한다. 특히 인터뷰 시작 워밍업에 공을 많이 들이는 편이다. 이때 인터뷰어와 인터뷰이는 알게 모르게 기 싸움 같은 걸 하는데, 나는 초반에 일부러 주도권을 상대에 넘긴다. 그리고 내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 세상 어느 누가 방금 만난 사람에게 자신의 속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겠나. 더욱이나 안 좋았던 인터뷰 경험 때문에 기자라면 일단 경계부터 하는 인터뷰이도 있고, 인터뷰이 자체가 상대를 모욕하며 가지고 노는 걸 즐기는 성격인 경우도 있다.


막상 얼굴을 마주해보니 대중에 알려진 모습이나 내 예상과는 정반대인 사람도 있다. 그럼 준비해 간 질문지는 모조리 소용없어진다. 그래서 에디터에겐 순발력도 중요하다. 직업윤리도 절실하다. 인터뷰는 사람과 사람 사이 믿음을 천천히 쌓아가는 과정이다. 인터뷰이가 나를 믿어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안심하기 시작하면, 스스로 대화의 필터링을 멈춘다. 그래야만 진정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는 인터뷰가 끝나면 다신 안 보겠지만, 인터뷰 내내 세상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인터뷰 도중 인터뷰이가 이 이야기는 쓰지 말아 달라 말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쓰지 않는다. 그걸로 인터뷰어가 대중의 관심을 끌려고 사심을 부리면 안 된다. 나는 단 한 번도 인터뷰이를 배신한 적이 없다.


나와의 인터뷰에서 눈물을 보인 사람들이 꽤 있다. 함께 취재를 다니던 포토그래퍼가 내 인터뷰는 마치 심리 상담 같다고 했다. 특별한 기술은 없다. 인간은 이러나저러나 모두 외롭고 불안하고 불안정하니 나 역시 그렇다고 인정하고 공을 넘기면 언제나 상대가 화답했다. 대중적으로 인기 많고 잘 알려진 인터뷰이일수록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 편이지만, 진정한 공감으로 다가가면 오히려 금세 마음을 연다. 팔로워가 수백만이면 뭐하나, 막상 자신의 속마음을 어디고 얘기할 데가 없는데.


인터뷰에서 늘 내가 가진 또 다른 마음은 ‘리스펙트’였다. 내가 만난 인디 아티스트 대부분은 실용음악과에서 음악을 배우지 않았고, 회화과에서 그림을 배우지 않았고, 연영과에서 연기를 배우지 않았다. 나 역시 잡지와 글을 배우지 않았다. 그럼에도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그리고 잘 해내고 있다. 나는 그게 진짜 멋이라고 생각했고, 내가 만난 사람들의 삶과 예술에 대한 진심 어린 리스펙트를 표했다. 인간이 살아온 삶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존중과 애정이 마음에 살아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런 내 맘이 온전히 상대에 가 닿으면, 마법처럼 그들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나에게 삶의 비밀 하나씩을 들려줬다. 나이 서른에 시작한 늦깎이 에디터였지만, 그런 내가 꽤 마음에 들었다. 이후 에디터 지망생이라며 나에게 길을 묻는 이들에게 한결같이 이리 답한다. 많이 겪고, 많이 넘어지고, 많이 다치고, 많이 실패하고, 많이 듣고, 보고, 울고, 웃으라고. 삶의 어두운 순간에 누군가의 글이나 영화, 음악이 당신을 살렸다면, 그러한 문화에 대한 리스펙트를 갖고 에디터 일을 하라고. 그럼, 이 일을 절대 허투루 할 수 없을 거라고.


글을 쓴다는 게 딱 떨어지는 결론이나 객관적 수치로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어디만큼 왔는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밸런스를 잡기 힘들 때가 있다.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야 했다. 좋은 기자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그리고 누구를 위해 글을 쓸 것인가. 한 해, 두 해, 시간을 보내며 서서히 다다른 나의 결론은 한결 담백해졌다. 인터뷰이, 글 속의 주인공이 마음에 드는 인터뷰 기사를 쓰는 것. 시대를 꿰뚫는 본질을 담을 것. 내가 만난 사람들이 지키려는 ‘인디 정신’이 진정한 멋이라는 걸 알리고, 그것을 진심으로 지지할 것. ‘나는 늘 당신의 편’이라는 마음으로 인터뷰이를 대하고 글을 쓸 것.


인터뷰하다 보면 ‘이거다’ 하는 순간이 온다. 이 대화를 관통하는 힘 있는 메시지가 나오는 순간. 얼마나 짜릿하고 행복하고 보람된지 모른다. 그 메시지를 담은 인터뷰 기사를 인터뷰이 스스로 읽어보고는, 오랫동안 빠져나오지 못하던 슬럼프를 이겨내거나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았다는 피드백을 보내오곤 했다. 내 할 일을 제대로 해낸 기분이었다. 나는 사람을 살리는 인터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터뷰 기사를 보면 인터뷰어가 보인다. 그래서 인터뷰어가 누구냐에 따라 동일 인물인데도 전혀 다른 사람처럼 인터뷰 기사가 나온다. 좋은 대답은 좋은 질문에서 나온다. 그리고 좋은 질문은 좋은 사람만이 던질 수 있다. 당연하게도 좋은 사람이 좋은 글을 쓴다. 거대하지만 텅 빈 자아로 쓴 글은 폼만 잡다 만다. 금세 지쳐 떨어져 나간다. 기초 체력을 키워야 한다. 책도 많이 읽고, 음악도 많이 듣고, 영화도 많이 보고, 그림도 많이 보고, 아티스트와 공감도 하고, 사랑도 하고, 실패도 하고, 미친 짓도 해보고, 부끄러운 짓도 해보고, 웃고, 울고, 살아봐야 한다. 그 모든 경험이 비로소 세상과 다른 이들과 공감하는 능력이 된다. 그렇게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좋은 에디터가 된다.


인왕산 끝자락 집에서 만나 뵌 장사익 선생님은 인터뷰가 끝나고 책이 나온 뒤 당신이 직접 쓴 손 편지로 나에게 직접 감사의 마음을 전해왔다. 공연장 대기실에서 시작해 공연이 끝난 뒤 심야 영업하는 카페로 자리를 옮겨 대여섯 시간을 넘기며 진행했던 국카스텐 하현우와의 인터뷰는 여전히 수만 명이 찾아보는 글이 되었다. 인터뷰 절대 안 하기로 유명한 나얼은 사진 촬영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끈질긴 나의 인터뷰 제안을 수락했고, 인터뷰 도중 스스로 그 조건을 없애 사진 촬영을 허락했다. 그의 매니저, 회사 관계자들은 물론 팬들도 놀랐다. 나도 놀랐다.


‘홍대 여신’이라는 요상하게 비틀어진 여성 차별적 타이틀 아래, 한국 사회의 여성 뮤지션에 대한 관념을 깨보고 싶어 진행한 요조와의 인터뷰는 이후 여러 해 동안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당시 <라디오 스타> 고정 MC에 살인적인 예능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월간 윤종신>으로 매달 신곡을 발표하는 윤종신의 열정을 응원하고 싶어 어렵게 성사시킨 인터뷰 때문에 이후 여러 매체 기자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우리 매체에서 윤종신 씨 인터뷰하려고 연락했더니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은 모두 조하나 기자님 인터뷰 기사에 나와 있다고 하더라고요. 기자님 기사를 좀 인용해도 될까요?”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조정석, 빈지노, 넬, 이이언(MOT), 검정치마, 장기하, 최백호, 차승우, 이센스 등 많은 아티스트들과의 인터뷰는 순전히 나의 사심 어린 존경에서 시작됐으며, 10년 후 지금 읽어봐도 여전히 빛나는, 부끄럽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다른 이의 다양한 삶을 아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는 일을 하면서, 마침내 스스로 삶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먼저 찬찬히 살피게 됐다. 또 그런 내 모습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걸, 세상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다른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치 볼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전까진 머리로만 알았던 걸 비로소 실천하게 된 것이다. 세상으로부터 배운 거짓말 속에서 스스로 깨친 값진 진실이었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남들보다 느리다는 게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자존감이 높아졌다. 그러자 혼자 있는 시간이 더 이상 두렵거나 외롭지 않았다. 나를 들여다보고 나와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행복은 학습이다. 행복해 본 사람이 행복을 안다. 그렇게 점차 내 인생의 가치관과 방향이 단단하게 정해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글을 쓰는 일을 통해 나의 성장이 이뤄졌다.


자연스럽게 잡지판에 내 이름이 알려지며, 대형 패션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공개 채용을 하지 않기로 유명한 패션지 업계는 보통 이렇게 정기자 자리를 채운다고 했다. 2~3년 기본으로 어시스턴트 생활을 해야 인턴이 될까 말까에, 운이 좋아 자리가 나도 정기자가 될까 말까 한다는 그 패션지 피처 에디터 자리다. 내가 기자 일을 시작할 땐 나이가 많다고 받아주질 않던 그곳. 기분이 묘했다.


남성 패션지 <아레나 옴므 플러스> 피처팀 이우성이라는 기자 전화를 받았다. 휴대폰도 아닌 <파운드> 사무실로 걸려 온 전화였다. 일면식도 없지만 내 기사를 너무 잘 봤다며 <아레나>에 올 생각이 없는지 물었다.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이후 <아레나> 편집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알고 보니 우성 선배와 편집장은 서로 이야기 없이 각각 따로 나에게 연락한 거였다. 이리 뜨거운 ‘더블 콜’이라면, 나를 존중해주는 곳에서 내가 존중하는 아티스트들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릴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출발과 시작이 워낙 단단했기에 더 이상 두려움은 없었다. <아레나> 피처팀으로 출근하니 사람들이 물었다. “어디 출신이세요?” 대형 상업 패션지에서 이 질문은 어느 잡지 어시스턴트 출신이냐는 의미가 담긴 ‘그들만의 리그’ 스타일 질문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씩 웃으며 답했다. “저는 ‘인디’ 출신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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