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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의 문장을 써

by 조하나






‘저는 인디 출신입니다만’에서 이어집니다









너만의 문장을 써


내가 소규모 독립 매거진에서 버티다 대형 상업 매거진으로 옮긴 투박한 이유는 ‘치사하고 더러워서’다. 말이 좋아 ‘독립’이지, 이는 곧 제작비가 없다는 뜻이다. 아니, 돈이 있어도 안 쓰겠다는 의미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인터뷰하고 사진 찍는 기본조차 애를 써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촬영 전용 스튜디오나 포토그래퍼, 헤어, 메이크업 스태프 섭외는 꿈도 못 꾸니 잘 닦이고 잘 꾸민 사진 촬영 말고는 나서본 적 없는 사람들을 인터뷰이로 섭외하는 건 불가능했다. 섭외 전화를 걸어 잡지 이름을 대는 순간, 인기 스타의 매니저들은 “네? 어디라고요?” 하고 꼭 되물었는데, 전화 통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미간에 잡히는 신경질적인 주름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화려한 비주얼 대신 진중한 이야기를 책에 채우기로 했다. 글이 중요하니 인터뷰가 중요했고, 그러다 보니 인터뷰이, 사람 그 자체가 중요했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많은 글을 화보 사진 대신 채운 잡지는 다시 보지 못했다. 우리가 유일했다.


잡지 창간 후 얼마 안 되었을 때 평소 좋아하던 작가에게 매달 한 페이지 칼럼을 써줄 수 없겠냐 부탁했다. 이름이 알려진 작가라 고료가 적지 않을 거란 예상을 했지만 말 그대로 아무것도 몰랐던 ‘초짜 에디터’였기에 겁 없이 들이민 거였다. 작가는 단칼에 거절했다. 고료가 적다는 것이다. 그땐 글을 쓰는 나조차도 그런 마음이었다. ‘에이, 한 페이지 금방 쓰는데, 뭐 그리 까탈스럽게.’ 부끄럽고 경솔한 생각이었다. 몇 번을 매달리고 사정하자 작가는 나에게 이유를 설명했다. “내가 이 바닥에서 수십 년 글을 썼는데, 지금까지 수십 년 전 고료가 그대로예요. 내가 만약 기자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 고료로 글을 쓰면, 앞으로 후배들은 더 적게 돈을 받고 글을 써야 하잖아요.” 머리가 띵 했다. 왜 글 쓰는 사람에게 값을 제대로 치르지 못할까. 왜 우리가 누리는 문화에 제값을 매기지 못할까. 그 길로 편집장에게 달려가 고료를 제대로 맞춰주길 설득했다. 좋은 글을 우리 잡지에 싣길 원한다면, 적어도 우리라도 그에 대해 합당한 보상을 하는 게 옳다고.


잡지는 유명세를 탔고 멋지다는 환호도 많이 받았지만 해가 지날수록 한계가 느껴졌다. 여러 잡지사 기자를 한자리에서 만날 기회가 간혹 있었는데, 가끔 모르는 얼굴의 친구들이 볼을 붉히며 나에게 다가와 수줍게 “팬이에요”라고 했다. 그럴 때면 화끈거리는 얼굴로 괜히 딴 소리를 했다. 내가 얼마나 불경하고 나태한 마음으로 글을 쓰고 일을 하고 있는지 그대들은 모를 거야. 사실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부족한 인력이 장거리 마라톤을 뛰는데 물 한 병 못 마시고 있었다. 어디까지 얼마나 더 뛰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계속해서 앞으로 가라고만 하니 한계에 다다랐다. 다리에 경련이 오고 숨이 턱까지 찼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잡지 수익화의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아이돌을 커버로 쓰고 브랜드 협찬을 받아 사은품을 끼워 팔면 된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면 창간하면서 기존의 상업지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는 다짐을 은근슬쩍 뭉개야 한다.


우리는 책이 좋으면 팔릴 거라 생각했다. 순진했고 무모했고, 그래서 멋있었다. 그렇다고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을 자존심만으로 계속 낼 순 없었다. 계속되는 운영 적자의 희생양은 결국, 우리가 멋진 잡지를 통해 살리겠다던 인디 아티스트였다. 잡지에 실어준단 명목으로 아티스트에게 제값을 쳐 지불해야 할 사례를 모른 척하는 경우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매달 하루도 날짜를 어기지 않고 정해진 날에 한 권의 책을 꼬박꼬박 수년째 만들어온 단 두 명의 기자 중 하나로서의 박봉과 열악한 처우는 차치하더라도. 회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기자와 인디 아티스트에게 쓸 돈이 없었던 거였다. 우리가 창간 명분으로 내건 ‘인디 아티스트를 위한 멋있는 인디 매거진’은 오래가지 못했다. 돈이 없는 건 싫지만, 쪽 팔린 건 더 싫었다.


그 시절, 그 바닥에서 내가 경멸했던 건 스스로 시스템에서 소외된 소수자라, 열차의 꼬리 칸 사람이라 부르짖으면서도, 그 와중에 자기 양갱 하나 더 먹겠다고 같은 칸 사람을 열차에서 밀어 버리는 사람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게 해 주겠다며 젊은이를 무보수로 부려 먹고, 경험 쌓게 해주는 거라 생색을 냈다. 인디 씬 관련 산업계는 대부분 그랬다. 아니, 대한민국이 다 그랬다. 오래전부터, 어디든, 다들, 그렇게 해왔다는 ‘관행’ 때문이었다.


인디 레이블이 인디 아티스트들의 몇 푼 안 되는 공연비를 오랫동안 꾸준히 빼돌렸다. 벼룩의 간을 빼 먹는 사람은 어디든 있다. 한국 인디 씬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밴드도 공연비가 한 회에 백, 이백이 전부였는데, 가랑비에 옷 젖듯 수년간 빼돌린 돈이 몇천이었다. 이런 사기극이 알려지자 인디 씬의 수호자라도 된 듯 온갖 정의와 공정을 외치던 평론가와 레이블 관계자들이 죄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싹 닫았다. 이 문제가 공론화되면 이로부터 자유로울 인디 레이블, 관계자들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럴 땐 또 잘도 뭉쳐 서로 뒤를 봐주며 쉬쉬했다. 그걸 다 지켜보고 있으려니 신물이 올라왔다. 음악을, 문화를, 예술을 사랑한다는 이들의 암묵적 침묵 속에 나는 깊은 배신감과 절망감을 느꼈다. 대한민국의 인디 씬이 지금껏 잘 안되는 데엔 이유가 있고, 앞으로도 잘 안될 게 분명했다. 그때 책임을 져야 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 바닥에서 ‘인디’의 순수와 열정을 떠들며 꿀을 빨고, 또 거기에 기생해 긴 목숨 이어가는 평론가와 관계자는 끝없이 인디 씬에 대한 지분을 주장한다. 한국에 인디 씬이라는 게 있다면, 그리고 누군가가 가져야 할 공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앞뒤 재지 않고 순수하고 성실하게 무대를 채운 아티스트의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독립 매거진에서 일을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기자로서의 가치관과 목적, 이유, 직업윤리와 나아가야 할 방향, 이 모든 게 단단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토대가 되었으니까. 주류 시스템과 다수의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혹은 그들의 눈에 들 기회조차 없었다는 이유로 소외된 이들, 약한 이들, 다수가 아닌 이들에 시선을 두는 훈련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보이지 않는 곳 어딘가에서 노래를 지어 부르는 뮤지션의 가치도 화려한 K-팝 스타만큼 주목 받아야 한다는 것, 팔로워가 많지 않다고 해서 그것이 덜 가치 있는 사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것, 취향이라는 것도 꾸준히 배우고 가꾸고 다듬어야 하고, 그런 과정에서 스스로 되돌아보고 살피게 되며, 취향이 좋은 이들은 영혼에서도 향기가 난다는 걸 현장에서 직접 보고 배웠다. 자신이 좋아하는 인디 뮤지션의 휑한 공연장을 찾아 음악을 즐기고 박수를 보내고 앨범을 사는 이의 마음은 세상 그 무엇보다 선하고 순수하다. 노래 하나가 세상을 바꾼다는 건 결코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내 세상을 바꾼 노래, 영화, 그리고 수많은 아티스트가 있다. 기자, 또는 에디터라는 나의 직업은 언제나 그들을 향한 사랑과 존경을 표하는 일이었다.


대형 패션지로 자리를 옮기는 게 대단히 내키진 않았다. 인디 씬에서 없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갉아먹고 사는 모습에 진력이 났고, 나만의 동력도 떨어졌다. 아무리 피 터지게 써도 소속 기자에게 걸맞은 대우를 해주지 않는 회사는 잡지가 다루는 아티스트에게도 존경을 표하지 못했다. 자생 능력 없는 한국의 인디 문화 씬이 갖가지 부조리와 정치 싸움에 서서히 흐려져 가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선명한 적 없던 씬은 아이러니하게 그 씬의 아름다움과 중요성을 외치던 피리 부는 사나이에 의해 사그라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해서 인디 아티스트의 이야기를 썼다. 내 글이 실리는 지면의 힘이 조금이라도 더 생긴다면,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민망한 사명감도 있었다.


작은 독립 잡지사에서 대형 패션지로 자리를 옮긴 후, 나는 한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시간을 보냈다. 오랜 시간 대한민국을 관통해온 메이저 잡지사의 시스템은 생각보다 견고하고 경직됐다. 확고하게 서열화된 시스템에서 선배들의 권력은 막강했지만 정작 책임져야 할 땐 적당히 비겁하게 물러섰다. 대한민국 월급쟁이들이 모인 그저, 보통의 회사였다. 예상치 못한 건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사회에 온전한 나로 받아들여질 거란 기대도 없었다. 그래도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한국의 대형 상업 패션지, 그것도 남성지에서 내가 가장 고군분투했던 건 직장 내 성희롱이나 성차별이 아니었다. 그건 차라리 내가 나서 대들고 싸울 수 있는 문제였다. 사회생활 몇 년에 그 정도 내공은 있었다. 남성지가 보는 여성에 대한 인식. 이것이 내가 남성지에서 일하는 여자 에디터로서 알싸하게 피부로 느낀 벽이었다. 그 벽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조금씩, 아주 조금씩, 조금 더 차갑게, 두텁게, 높게 쌓아 올려 쳐다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배울 만큼 배웠다는 지적 허영에 패션과 스타일, 심미안까지 장착했다는 남성들의 욕망의 정점, 남성지였다. 그 세계를 엿보는 동안 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이들과 함께 벽 안에 서거나 벽을 넘어 저편에 서거나. 피처 팀엔 나를 제외한 모든 기자가 남성이었다. 각종 명품 브랜드와 대기업 패션 브랜드, 홍보 대행사, 방송국, 잡지사, 연예기획사, 유흥업소 등 모든 게 유기적으로, 또 효율적으로 굴러 돌아갔다. 그 거대한 톱니바퀴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대부분의 이슈를 선점하고 공론화 여부를 결정해 여론을 지배했다. 대부분 보이는 걸 안 보이는 척하거나 눈을 가렸다. 우리는 모두, 그저 돈을 좋아하는 월급쟁이였다. 천방지축 제멋대로 살아온 내가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듯했다. 비열한 어른이 되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이건, 나 혼자 싸운다고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촬영 다녀오겠습니다.” 사무실을 나서 스튜디오로 향할 때 대부분의 선후배 기자들은 “섹시하게 찍어 와!” 하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대체 ‘섹시’한 게 뭘까. 나에게 ‘섹시’는 비욘세다. 자신이 주도권을 확실히 갖고 있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고, 자신이 어떤 옷을 왜 입었는지도 알고 있고, 자신이 어떤 재능을 가졌는지도 알고 있고, 그걸 당당하게 이용할 줄 안다. 그만큼 스스로 가치 있는 여자라는 걸 제대로 인지하고 있고, 그에 대한 보상을 떳떳하게 요구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내가 함께하는 남자들은 대부분 ‘섹시’와 ‘섹스’를 구분하지 않았다. 여성은 대상화될 뿐이었다. 남성지는 세상 쿨한 척 사회, 경제, 정치, 문화 등 온갖 이슈에 대해 떠들지만, 여성 아티스트를 대하는 시선과 태도는 한없이 가볍고 얕고 저급하다. 아무도 그들의 예술과 자아에 대해 궁금해 하지않았다. 얼굴과 몸매, 남자 친구가 궁금할 뿐이었다. 회사는 나에게 최대한 벗겨서 찍어오라 했지만, 난 최대한 입혀서 찍었다. 인터뷰할 땐 일부러 그들의 작품 활동에 대한 질문만 했다. 여성지였다면 피부 관리법이나 화장법을 물었을 테고 남성지라면 어떤 남자를 좋아하냐고 물어야 했지만, 일부러 안 그랬다. 나름의 반항이었다. 인터뷰에서 여자 아티스트는 예상치 못했던 진지한 질문에 눈을 반짝이며 나에게 바싹 붙어 앉아 신나게 자신의 세계를 이야기했다. 여태 들어주는 이가 없었기에 하지 못했던 그녀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차고 넘쳤다.


대한민국 모든 잡지, 아니 모든 미디어 생태가 그렇듯 기자들의 명줄을 좌지우지하는 건 광고주다. 대형 상업 패션지에서 일하다 보면 내가 광고주를 위한 홍보사에 다니는지 잡지사 기자로 일하는지 헛갈릴 때가 있다. ‘작정하고 빨아주는’ 유가 기사로 대부분의 잡지사가 수익을 챙기니 브랜드가 원하는 이를 섭외해 마음에도 없는 인터뷰를 억지로 갖다 붙이기도 한다. 나 같은 피처 에디터는 사회 이슈에 대한 칼럼도 많이 썼는데, 정치적 발언은 특별히 조심해야 했다. 태생부터가 패션지였던 다른 이들은 이미 학습이 된 터라 괜찮지만, 나는 인디 출신이라 거친 편이었다. 당장 회사에서 잘리면 먹여 살릴 식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차피 제대로 처우 받지 않는 글 쓰는 직업에 목숨을 건 것도 아니라서 쓸데없이 당당했다.


대한민국 내로라하는 스타들에게 인터뷰 섭외 전화를 걸면 예전 인디 잡지 다닐 땐 “네? 무슨 잡지라고요?” 묻던 매니저들이 대형 패션지 타이틀로 건 섭외 전화엔 목소리를 싹 바꿔 “무슨 브랜드 협찬입니까? 얼마나 주나요?” 하고 물었다. 1시간 이상은 해야 슬슬 몸 풀고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기존의 내 인터뷰 방식은 포기해야 했다. 대신 인터뷰이들은 1시간 이상을 치장하는 데 썼다. 화보 촬영을 마치고 허락된 인터뷰 시간은 평균 30분도 안 됐다. 말이 안 되는 스케줄에 끌려다니는 그들도 안 됐고, 그래도 그들을 어르고 달래 한 줄이라고 쓸 거리를 만들려는 나도 안 됐다. 아이돌 인터뷰는 언제나 매니저가 옆에 앉아 무엇을 쓰고 무엇을 빼야 할지 훈수를 둔다. 어떤 여자 아이돌은 인터뷰 도중 몇 번이나 화장실로 뛰어나 속을 게워 냈다. 소속사에서 먹이고 있는 다이어트약 때문이라고 매니저 몰래 나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어른들의 탐욕으로 만들어진 세계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생각도, 말도 못 하고, 그렇게 말라가고 있었다. 광고주나 정치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인터뷰이와는 영혼 없는 말들이 오간다. 그렇게 나온 책이 떳떳하지 않았다. 말끔하게 포토샵으로 닦아낸 그들의 얼굴은 진짜가 아니었다. 글 역시 텅 비었다. 우주의 쓰레기를 만들지 않으려 노력하며 사는 데도 마음이 버거울 때가 많았다. 유명한 패션지에서 폼 나는 피처 에디터 일을 하는데 이 정도는 감수하라고, 적당히 타협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스스로 충고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두려운 건 나도 모르는 사이 그 거대하고 두텁고 차가운 벽을 쌓는 걸 내가 돕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었다.


정신을 차렸다. 턱을 치켜세우고 좀 더 곤조를 부리기로 했다. 멈추지 않고 비대해지는 아이돌 일색의 음악 시장에서 나만이 가진 카드는 인디 음악 씬의 수많은 친구들이었다. 좀 더 알려진 대형 상업 패션지에서 내가 교감하는 실력 있는 인디 아티스트를 소개하고 싶었다. 물론 아무도 보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음반 판매량이 갑자기 치솟거나 월드 스타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우리 잡지가 당신의 음악을 인정하고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라는 의미는 그들에게 절대 가볍지 않으니까.


편집장은 나를 언제나 “거리의 아이”라 불렀다. 이 단단한 메이저 시스템에 내가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빈정거림인지, 무엇에도 미련 없어 보이는 나의 자유를 부러워하는 건지 끝내 결론을 내리진 못했지만, 상관없었다. 꽤 맘에 드는 별칭이었다. 아이돌에 흥미가 없는 나를 잘 아는 편집장은 책 판매 부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기 아이돌 하나 인터뷰하면 내가 만나고 싶어 하는 인디 뮤지션 한 팀을 위한 지면을 만들어주겠노라, 귀여운 거래를 제안하곤 했다.


밴드 혁오가 갓 앨범을 내고 ‘수요일 밴드’로 홍대 라이브 클럽에서 공연할 때 무작정 라이브 공연장으로 뛰어갔다. 공연을 보고 너무 좋았던 나머지 나는 그들의 공연이 끝나자마자 바로 즉흥 인터뷰를 제안했다. 기획 회의는 이미 끝나 아이템이 모두 정해진 상태였다. 상관없었다. 자신 있었다. 나중에 편집장을 졸라서라도 없는 지면을 만들어낼 생각이었다. 배고프다는 친구들을 데리고 공연장 근처 양꼬치 집에서 인터뷰했다. 그들에겐 인터뷰 자체가 처음이라고 했다. 당시 친분이 있던 음악 레이블 대표를 소개해줬고, 정식 계약까지 이르렀다.


패션지 업계는 의외로 폐쇄적이고, 결과물이 보장된 안전을 추구하는 경향이 심하다. 대부분 에디터가 ‘끼리끼리 문화’로 포토그래퍼를 정했다. 나는 애초에 패션지에서 시작을 안 했으니 업계에 아는 패션 포토그래퍼가 하나도 없었다. 단순히 사진만 보고 좋으면 무작정 연락해 함께 작업해보자 제안했다. 당시 메이저 잡지에선 ‘너무 인디스럽다’는 이유로 잘 섭외하지 않던 포토그래퍼들과 주로 작업했다. 편집장을 설득해야 했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었다. 필름 사진을 러프하게 찍는 하시시박과 특히 작업을 많이 했다. 그만큼 우리는 ‘쿵짝’이 잘 맞았다. 촬영 후 언제나 나는 “포토샵으로 닦지 말아 주세요” 주문했다. 그녀도 나도 그게 더 좋았다. 당시엔 피처 에디터가 인물 화보를 그렇게 찍는 경우가 흔하지 않았다.


이 모든 걸 눈감아준 편집장에게 영광을 돌린다. 오랜 시간 동안 쌓인 ‘그들만의 리그’라는 견고한 시스템에서 아웃사이더로 살면서, 나만의 감각과 경험, 스타일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 느꼈다. 나는 그걸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어 욱여넣는 대신 펼쳐내 보이기로 결심했다. 부끄럽지 않으니까. 그동안 내가 살아온 방식의 결과이니까.


강남의 으리으리한 빌딩 패션지 사무실로 출근한 첫날, 속으로 ‘졸지 말자’ 하면서도 괜히 주눅이 들었다. 내가 일하는 잡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고 이름만 대도 사람들이 안다는 건 영세 독립 매거진에 있다 온 나에게 오히려 무서운 일이었다. 아무도 주지 않은 책임감을 혼자 느끼고 있었다. 막상 들어가 보니 별다를 게 없었다. 화려한 패션지 에디터의 생활은 공허했다. 수백, 수천만 원짜리 명품을 사라는 기사를 쓰면서도 정작 자신의 월급 통장에 찍히는 숫자에 자괴감과 허무함에 시달리는 이들로 가득했다. 그곳 역시 여느 다른 세상 못지않게 길을 잃은 사람이 많았다.


“너만의 문장을 써.” 나를 메이저 패션지로 스카우트했던 피처 팀 선배가 한 말이다. 패션지로 옮긴 직후 맞은 첫 번째 마감, 파랗게 질린 얼굴로 키보드 앞에 앉아 한 글자도 못 쓰고 있는 나를 눈치챈 선배였다. “하나, 네가 패션지 다른 에디터들처럼 쓰는 걸 기대했다면 우리가 애초에 널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야. 너만이 쓸 수 있는 문장이 있잖아. 그걸 쓰는 거야.”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삶의 스탠스를 정하는 것이다. 내 남은 생의 명분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 영세 독립 매거진은 거기대로, 대형 상업 패션지는 또 나름대로 문제, 한계, 병폐, 그리고 존재 이유가 있다. 그 안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오직 나의 스탠스다. 그리고 나는 정했다. 나만의 돌파구를, 나만의 방식을 찾기로.


어디서든 나만의 스타일을 찾아가면 되는 거였다. 그들이 원하는 톤이나 문체로 나를 바꾸지 않고, 내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담담하게 걸어가며, 메인 스트림에서 나름의 인디 정신으로 살면 되는 거였다. 자신감과 용기가 필요했다. 그동안 쌓인 경험 사이사이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나의 삶, 나의 인생, 나의 이야기, 나의 문장. 단단한 나만의 문장을 쓰려면 단단한 인생을 사는 게 우선이었다. 처음으로 인생을 ‘그저 살아보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게 됐다.


성실하게 경력이 쌓이자 메이저 잡지판에서도 “하나 기자님 기사는 달라요”라는 말이 들려왔다. 나도 실상은 사양길로 접어드는 잡지판에서 싼값에 일하는 에디터가 직업인 월급쟁이 중 하나였다. 그래도 신나고 재미있게 일했다. 스스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언제고 그만뒀을 일이었다.


온 세상을 통틀어 가장 멋지다 생각하는 아티스트 중 하나인 패티 스미스가 내한했을 때 대한민국에서 단 두 명의 기자에게만 인터뷰가 허락됐다. 하나는 나였고, 다른 하나는 내가 잡지 에디터를 꿈꾸던 시절, 내가 선망했던 김경 선배였다. 이미 인디 매거진에서 일할 때 내 글을 눈여겨보았다며 선배로부터 <바자> 칼럼 제의를 받은 적도 있었다. 선배의 칼럼 제의 메일에 “제가 잡지일, 하고는 싶지만 길을 몰라 답답해할 때 선배에게 무턱대고 메일 보내 이것저것 물었던 거 기억하시는지요” 물었더니 “물론”이란 답이 돌아왔다. 호들갑 없이 나와 선배는 연대의 미소를 나눴다.


선배와 얼굴을 직접 마주한 건 패티 스미스 인터뷰 현장이 처음이었다. 경 선배를 마주하던 그 순간, 잠시 세상이 내 편인 것 같았다. 소외되고 뒤처졌던 나를 지나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솔직하고 매혹적인 글은 나에게 영감이 되었다. 그녀가 걸어온 길을 따르며 내가 가진 글의 힘을 최대한 선하게, 옳게, 우아하게, 아름답게 쓰기로 다짐했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게, 그리고 비겁하지 않게 살며, 쓰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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