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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보험과 법카의 무게

by 조하나
‘너만의 문장을 써’에서 이어집니다









4대 보험과 법카의 무게


대형 상업 패션지로 자리를 옮기니 세상 팔자 좋아졌다. 난생처음 법인카드가 내 손에 들어왔다. 어시스턴트와 인턴들이 눈을 반짝이며 “선배, 어떤 걸 도와드릴까요?” 항시 대기 중이다. 독립 매거진에 있을 땐 두세 시간 인터뷰하고 돌아와 녹취 파일 다시 들으며 타이핑하고, 기사 쓰고, 사진 고르고, 디자인 잡고, 교정 보는 일까지 모두 혼자 했는데, 상업 패션지엔 녹취해주고 자료 조사해주고 홍보대행사 전화 돌려주고 교정 봐주는 스태프가 각각 따로 있다. 잡지 인지도가 있으니 섭외도 쉽고, 취재 현장이나 행사장을 가도 명함 한 장 바뀌었을 뿐인데 홍보대행사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런데 나는 이 좋은 팔자에도 행복하고 즐겁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하고 부대꼈다.


생애 처음 연봉 협상이란 걸 하고 고용 계약서라는 걸 썼다. 그리고 4대 보험에 들었다. 국가가 나를 사람 취급하며 꼬박꼬박 세금을 떼어갔다. 영세한 독립 매거진에서 일할 때와 비교하자면 훨씬 안정적인 수입이었다. 그런데 마음은 점점 더 불편해졌다. 그땐 이유를 잘 몰랐다. 그저 나란 사람은 안정과 행복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 조금 알겠다. 한결 편해진 환경에서 행여 나의 깐깐함과 까칠함과 예민함이 사라질까 불안했던 거다. 좋은 게 좋은 거지, 이 정도는 눈 감고 넘어가지, 나란 사람의 성향이 둥글둥글하게 변하진 아닐까, 스스로에 대한 경계와 의심 때문이었다. 내가 늘 고깝게 보아오던 상업 잡지판의 오만한 습성에 물들지 않으려 정신을 바짝 차렸다.


나 같은 사람이 월급쟁이로 살기에 잡지사 에디터라는 직업은 판이 크고 작고를 떠나 어쨌든 잘 맞았다. 적당히 개성을 내비쳐도, 또 적당히 개인적이어도 괜찮은 조직이었으니까. 그나마 잡지 바닥이었으니 나의 비딱하고 예민한 성격이 나만 쓸 수 있는 글에 재능으로 잘 쓰였다. 동시에 늘 내가 몸담은 조직과 사회, 그리고 스스로에게서 모순을 발견했다. 선 곳이 달라지면 풍경도 달라지는 법이다. ‘핫’한 전시, ‘핫’한 공연, ‘핫’한 브랜드, ‘핫’한 습성을 찾는 것이 삶의 낙인 서울 사람들이 머리 모양도 입는 옷도 먹는 음식도 똑같아지는 것에 나 또한 크게 일조하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렇게라도 소속감을 느끼며 언제나 허기진 배를 채우며 사는 외로운 사람들을 더 부추겼다. 그게 늘 내 마음을 긁었다. 이렇게 나는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을 수도 없이 오갔다.


자본주의 시대에 문화 역시 인간의 욕망과 허영의 분출구로 변했다. 한국 문화 씬의 최전방에서 고급스러운 취향을 가꾸는 것처럼 보이는 자본가들은 그저, 있는 돈 뿌려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아는 이름의 팝 스타를 불러 무대에 세워 자신을 과시했다. 음악 전문 기자로서 그들의 대형 프로젝트를 함께 하며 목격한 밑천 없는 취향과 비열한 애티튜드는 늘 부끄러웠다. 하지만 대체 누가 그런 걸 신경 쓴단 말인가. 사람들은 앨범 한 번 산 적 없는 그 팝 스타의 공연에 가서 찍은 인증샷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그만이었다. 공연장에 가면 뮤지션 공연보다 스폰서 기업의 광고를 더 많이 보지만 그래도 모든 게 괜찮은 시스템이었다. 돈으로 처바른 취향이 어느새 권력이 되었다. 기업가는 세계 어디에서든 ‘넘버원’이다. 마음만 먹으면 미국과 한국 같은 나라에선 대통령도 될 수 있다. 나 빼곤 아무에게도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의 문화는 돌이킬 수 없이 상업화됐다. 기업가에 대한 무조건적인 선망과 존경이 너무 커져 버렸다. 좋은 영화, 드라마, 음악, 공연, 책, 심지어 신문, 잡지, 뉴스 같은 언론 미디어 역시 따지고 올라가 보면 기업이 만든다. 잡지사 에디터로 화보 촬영을 할 때면 늘 절망에 빠졌다. 연예인마다 급이 있고 급에 따라 브랜드 협찬 가격 상한선이 있다. 패션지의 화보 사진 하단엔 언제나 브랜드 이름과 가격이 적혀있다.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이 사람은 이 가격만큼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나 역시 누군가에 의해 연봉으로 몸값이 매겨진다. 누구지? 대체 누가 어떻게 내 가치를 매긴단 말인가.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기업의 목적은 이익 추구다. 기업에는 예술도 사업이고, 마케팅이고, 이익 추구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오직 ‘+’만을 추구하도록 디자인된 조직이다. 기업은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나 예의를 갖출 수 없다. 모든 게 숫자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태어나 죽을 때까지 ‘+’만 외칠 수 없다. ‘-’도 있고 ‘0’도 있어야 한다.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음악이 기가 막히는 뮤지션에겐 그래서 입힐 옷이 없다. 브랜드가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협찬을 꺼리기 때문이다.


기자는 더 이상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실력 있는 예술가를 소개하지 않는다. 브랜드에 잘 보이기 위함이다. 결국 아무도 ‘인디’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악순환이다.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거쳐 사회에 나가서도 개성 있고 다양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없는 한국인의 숙명이다. 사회에서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교복을 입고 편을 가르며 스스로, 그리고 서로를 알아서 규제한다. 인디와 마이너가 없다. 멋지고 단단한 마이너가 많아야 사회가 다채롭고 재밌어진다. 마이너를 메이저로 가기 위해 짓밟고 오를 디딤돌쯤으로 취급하거나 메이저만 추앙받는 사회는 한국처럼 병약하고 모순투성이인 사회가 된다. 한국은 세계에서 알아주는 무한 경쟁 국가이며, 경제적으로 높은 성장을 이룬 만큼 수많은 사람이 여전히 큰 희생을 치르는 서글픈 사회다.


이런 세상에서 어른이 된다는 건 주로 경제적인 힘과 관련된 의미로 대변된다. 사람들은 자본주의를 진리처럼 떠받들며 성과주의, 능력주의를 자연스럽게 개인 각자의 삶에 녹여냈다. 태어나 자라며 보고 배운 게 그거니 당연하다. 돈 밝힌다고 흠이라도 잡힐까 봐 눈치를 보던 시절도 내 기억엔 분명히 있었는데, 그 사이 돈의 힘은 사람의 힘보다 훨씬 강해졌다.


사회는 최소한의 자정 능력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의 장래희망이 죄다 ‘부자’다. 요즘은 누구나 주식을 한다. 부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 뛰어든 주식시장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그 이익 때문에 윤리와 양심, 정의를 져버린다. 어떤 기업이 아무리 나쁘다고 해도, 그 기업의 이익 추구 때문에 약한 사람이 많이 죽어 나간다 해도, 내 주식만 오른다면 괜찮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노동자의 죽음을 외면하거나 해로운 걸 알면서도 맹독성 물질을 제품 원료로 쓴 대기업 CEO와 투자자의 인식과 다르지 않다. ‘개미’라는 선량한 단어를 수식어로 붙여도 나에겐 거기서 거기다. 그 사람들은 나와 함께 전철을 타고 식당 옆자리에서 밥을 먹고 같은 관에서 영화를 본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데 나에겐 너무 버겁다.


진짜 서울 사람이 되어보겠다고 서로 눈치 보며 서로서로 쫓느라 서로 가랑이가 찢어지는데 알고 보면 사실 그중 누구도 진짜 서울 사람이 되지 못한다. 모두 타지에서 흘러들어 서울에 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것뿐이다. 시나브로 우리는 괴물이 되어간다. 그 우스꽝스럽고도 소모적인 레슬링에 엉겨 하루를 죄다 보내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내 그림자가 참 서글펐다.


나는 또다시 길을 잃었다. 혼자서만, 이미 한참 늦어버린 느낌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처럼 ‘부자’로 방향을 정하고 전력 질주하기엔 돈의 허무함과 공허함을 이미 겪은 후였다. 여전히 내 마음속에 부대끼는 것들과 나는 화해도 타협도 하지 못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피터 팬처럼 살아갔다. 늘 마음이 허해 나와 마음이 맞고 처지가 비슷한 몇몇 친구들과 홍대 뒷골목 허름한 지하 술집에서 뮤직비디오나 보며 밤새 떠들었다. 정치와 사회, 철학, 예술에 대해 아무렇게나 떠들었다. 나의 세계에서 그 숱한 밤들은 유일하게 자본주의에 때가 덜 탄 대화로 가득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잡지는 한때 ‘자본주의의 꽃’이라 불렸다. 지금은 다양한 채널로 세분된 권력을 오직 잡지만이 쥐고 있을 때가 있었다. 잡지는 마치 패션 브랜드들이 ‘친환경’을 외치며 끊임없이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탓에 결과적으로 환경을 더 망쳐버린 에코백과도 같았다. 영세 독립 매거진에서 대형 패션지로 자리를 옮긴 후, 첫 해외 출장으로 떠난 발리에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와, 나만 빼고 다들 여태껏 이렇게 살아왔던 거야?” 출장 일정을 함께 한 다른 매체의 기자는 이런 호화 출장에 꽤 익숙해 보였다. 발리의 고급 휴양 리조트 룸에 제공되는 샤워 가운을 자기 슈트케이스에 집어넣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거 가져가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묻는 나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며 “수영장에서 몰래 오줌 싸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아빠가 늘 하던 얘기가 이거였구나. 회사의 법카와 회식, 출장, 접대 등 나의 돈도 아닌, 너의 돈도 아닌 ‘눈먼 돈’이라는 게 있다고, 이 사회는 그렇게 돌아간다고. 나만 빼고 다 어른이 되어 이 견고한 시스템에 녹아들었구나. 그렇지 못한 나는 외로웠으나 거기에 끼고 싶지도 않았다. 소위 잘나간다는 패션지 기자들은 여태 이런 대접을 받으며 보도자료 받아 손도 까딱 안 하고 지면을 채워왔던 거구나. 독립 매거진에선 두 페이지를 알차게 채우려 몇 날 밤도 새웠는데. 속이 뒤틀렸다. 나는 천천히 깨달았다. 내 삶의 스탠스는 곧 죽어도 ‘인디’라는 걸. 대우나 처지가 넉넉지 않아도, 아무도 인정하고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당당한 게 더 중요했다. 그리고 그날, 세월호가 침몰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생생하고도 비현실적인 기억. 휴양지 발리의 호화 리조트 출장으로 한국 대형 매체 기자 몇몇과 일정을 함께 하고 있었다. 식당에서 하하 호호, 점심을 먹고 있는데 대형 스크린에 침몰하는 배가 나왔다. 자막에 ‘한국의 세월호’라고 했다. 그리고 바로 ‘전원 구조’라는 뉴스가 이어졌다. 우리는 다행이라며 또다시 하하 호호, 식사를 마쳤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티브이를 켜니 커다란 배가 시꺼먼 바다에 집어삼켜지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고 있었다. 비현실적이었다. 배 안에 갇힌 수백의 사람의 영혼이 떠나가는 모습을, 아주 오래, 그것도 한국서 멀리 떨어진 발리에서 지켜봤다.


‘하인리히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대형 사고는 반드시 사고 발생 전 그와 관련된 수많은 경미한 사고와 징후가 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한국 사회는 여러 번의 징후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결국 사달이 났다. 희생자는 아이들이었다. 크고 작게 늘 투덜거리긴 하지만, 큰 말썽 없이 나름 성실하고 소신 있게 살아온 내가 한국이라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가장 큰 상처를 받은 참사였다. 시간이 지나도 세월호는 여전히 나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JTBC에서 세월호 사고 수습 보도를 맡아 팽목항에서 먹고 자던 기자 친구도 트라우마에 결국 일을 그만두고 한국을 떠났다. 못 볼 걸 보고, 못 들을 걸 들어서다. 그 친구의 소셜미디어 아이디엔 ‘304’라는 숫자가 꼭 들어간다.


우리는 모두 세월호 참사를 통해 한국의 밑바닥을 봤다. 우리는 끝도 없이 모래성을 쌓아 올리고 있었고, 언제고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다. 유가족을 대하는 정부와 사회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이미 너무 늦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회가 참사를 처리하는 과정은 너무나 무능하고 사악해서 지켜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모두 구제 불능이었다. 언제까지고 나 역시 피해자처럼 사회 탓만 하며 팔짱 끼고 있을 순 없었다. 어쩌면 바로 내가 이 모든 것을 방관한 가해자 중 하나일지도 몰랐다.


과연 내가 이 사회의 어른 자격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이 사회의 다른 어른들과 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답을 찾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안산 분향소에 들러 아이들에게 작별과 사죄를 건네고, ‘가만히 있으라’ 배지를 만들어 침묵시위에 나가 사람들과 나눴다. 그 집회에서 목청 높이다 경찰에 붙들려간 대학생 용혜인은 어느덧 시간이 흘러 국회에 들어갔다. 이후 수년이 지나도록 유가족은 여전히 국회 앞 찬 바닥에서 먹고 자며 국회의원에게 허리를 숙인다. 왜, 도대체 왜. 이 사회는 여전히 바닥이다. BTS와 <기생충>, 삼성, 화려한 경제적 수치로 아무리 치장해도 감출 수 없는 시꺼멓고 깊은 구멍이 있다.


법카는 펑펑 잘만 쓰고 다니던 잡지사 기자들은 어시스턴트와 인턴의 ‘열정 페이’ 폭로엔 침묵했다. 폭로가 터지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대형 잡지사들은 가장 먼저 기존의 어시스턴트와 인턴들을 모두 내보냈다. 잡지사 정기자 자리 하나 기다리며 몇 년을 보낸 친구들은 ‘너 때문에 그나마 있던 기회마저 사라졌다’며 내부 고발자를 원망했다. 그렇게 원망의 대상이 어긋나면서 사회의 진정한 가해자들은 피해자끼리 서로 물어뜯어 죽이는 걸 보고 즐긴다. 모든 대형 잡지사는 서로 쉬쉬하고 뒤를 봐주며 똘똘 뭉쳐 결국 일을 덮었다. 어차피 들춰져 봤자 서로 좋을 것 없는 처지에 피어난 참으로 아름다운 파트너십이다.


대형 잡지사들의 오랜 관행상 정기자의 99%는 수년간의 어시스턴트와 인턴을 거쳐야 했다. 그렇지 않은 1%는 나였다. 항상 우리 팀 어시스턴트와 인턴들에게 나는 “지금, 당장 도망가”라고 조언했다. 이상하도록 오랫동안 견고하게 이어져 온 관행을 깨뜨린 경험이 전부였던 내가 후배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었다. 이건 분명 잘못된 거라고, 잘못된 걸 따르지 말라고, 네 길을 찾으라고.


하지만 수년이 지난 지금도 이 관행은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처우에도 불구하고 잡지에 꿈과 로망을 가진 젊은이들이 줄을 선다. 관행과 제도와 시스템을 바꾸지 못한 젊은이들의 탓일까, 시스템을 더 공고히 만들어 ‘갑’과 ‘을’의 격차를 더욱 크게 벌리고, ‘을’의 조건에 처한 사람을 이용해도 괜찮다고, 모두 그런 과정을 거쳐 결국 ‘갑’이 되는 거라고 가르치고 강요하는 어른들의 탓일까. 여전히 ‘하인리히의 법칙’이 작동하고 있다.


삶이라는 게, 시대라는 게 살면 살수록 나아져야 하는데, 그 반대다. 나의 시대의 어른들은 우리를 한 달에 88만 원도 못 버는 세대라 부르며 ‘루저’에 걸맞은 마케팅으로 우리의 지갑을 털어갔고, 인류 최초로 자식 세대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세대라며 부모님의 지갑도 털었다. 어떤 시대든 20대는 가장 연약하고 불안하고 흔들린다. 젊은 세대를 향해 떵떵거리는 어른들은 당신이 겪은 이십 대가 지금의 이십 대와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한다. 당신은 이십 대를 겪었지만, 2020년의 이십 대는 겪지 못했다. 70, 80년대의 이십 대가 2020년대의 이십 대보다 쉬웠을 거라는 게 아니다. 적어도 같진 않다는 말이다. 그러니 무조건 ‘나도 버텼으니 너도 버티고 견디라’는 건 틀리다. 버티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줬어야지, 버티며 살아온 게 뭐 자랑이라고, 다음 세대에까지 물려주려고 하나.


매일같이 콩나물시루 지하철을 탔다. 쉴 새 없이 내 엉덩이와 가슴을 만지고 아닌 척 먼 산을 바라보는 남자들에 둘러싸여 위성도시 부천에서 서울 강남까지 왕복 3시간을 넘게 보냈다. 사람들은 서울에 집을 사고 차를 사면 된다지만, 그건 대출금 상환까지 은행과 노예 계약을 맺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내가 얻게 될 집과 차의 가치는 내 자유에 비하면 어림도 없었다. 우리 모두 자기 것이 아닌 걸 제 것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지향하는 삶, 지양하는 인간형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퇴근길 지하철 창밖으로 보이던 서울 한강 아파트 불빛이 더 이상 아름답고 낭만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생태에선 악하고 잔인하고 무뎌질수록 욕망에 가까이 간다지만, 애초에 도시의 욕망 자체가 없는 나는 이 모든 걸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른이 되면 마이크를 쥐게 되지만 정작 목소리는 사라진다. 사회와 조직에서 나는 언제나 대체 가능하기에 가치 절감된 연봉에 나를 꿰맞추며 살지만, 나는 확실히 저평가됐다. 나는 이 세상에서 대체 불가능한 가치를 가진 사람이다. 하여, 더 이상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지 않기로 결심했다. 윗세대에 대한 불만과 다음 세대에 대한 어설픈 책임감 사이에서 방황을 끝내기로 했다. 선배, 혹은 어른으로서 내가 이 사회에서 가져야 할 조금의 책임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내가 먼저 행복해지는 것이다.


나에게서 회사 이름과 직함이 적힌 명함을 빼면 무엇이 남을까. 이 명함은 과연 내가 원하는 것이었나, 나는 이 명함에 얼마나 집착하고 연연하는가, 나는 이 명함이 가져다주는 4대 보험과 법카를 가진 대신 그 대가로 무엇을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가. 내가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삶을 이어가며 회사에 다니며 쓰는 시간, 에너지, 그리고 마음에 비하면 보수는 턱없이 적었다. 감히 숫자로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소중한 삶 순간순간이 안타까웠다.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은 경제적 가치와 기회비용을 꺼내겠지만, 나는 철학과 인문학을 가져오겠다. 이 세상엔 분명,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맥시멀리스트’의 대명사인 화려한 패션지에서의 경험은 나를 ‘덜 존재하는 삶’으로 안내했다. 덜 벌고, 덜 쓰고, 덜 일 하고, 덜 만나고, 덜 경쟁하고, 덜 여행하고, 덜 가르치고, 덜 배우고, 우주의 쓰레기를 덜 만들어내는, 덜 존재하는 삶. 결과를 많이 내지 않아도, 늘 성장하지 않아도, 욕심부리지 않아도, 자아에 많이 힘주지 않아도 자존감 높은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부끄러운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내 삶의 스탠스를 정하고 지향점을 찾은 이후, 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노엘 갤러거’ 인터뷰하면 기자일 때려 칠 거야”라고 말하고 다녔다. 오아시스가 상징하는 한 시대가 저문다는 의미였지, 실제로 이뤄질 일이라 생각도 안 했다. 그런데 말이 씨가 됐다. 노엘 갤러거 단독 인터뷰였다. 록 페스티벌로 한국에 온 노엘 갤러거의 백스테이지 대기실에 걸린 맨체스터 시티 깃발을 보는 순간, ‘내가 피처 에디터로서 할 일은 여기까지구나’ 생각했다. 노엘 갤러거와의 단독 인터뷰를 마치고, 나는 회사에 법카를 반환했다. 4대 보험이 적용된 내 인생 유일했던 보통의 직장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표의 변은 이랬다. 시대적 가치에 따라 경제적 가치와 기회비용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여전히 내 인생은 그보다 더 값어치가 나간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두 나의 용기에 감탄하며 부러워했다. 하지만 나는 용기로 퇴사를 결정한 게 아니었다. 늦게 자란 어른으로 비로소 정립한 자존감 때문이었다.


나를 대형 패션지로 스카우트했던 우성 선배가 내가 잡지 바닥을 떠나는 날, SNS에 이런 문장들을 남겼다.


“조하나가 아레나를 떠난다. 에디터를 그만둔다. 이해할 수 없다. 하나에게서 아직 열망이 느껴지는데… 그건 무엇인가 포기한 자가 가진 감각이 아닌데… 하나는 어느 먼 나라의 물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돌아올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하나는 피가 다르다. 나는 하나가 뮤지션 인터뷰에 관한 한 정점에 있다고 믿는다. 하나는 논리로 설득하지 않는다. 논리로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 너무 많다. 하나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에디터다. 논리보다 자기 안의 영혼에 기댄다. 그게 하나의 사상일 것이다. 나는 오만하고 방자해서 몇몇 에디터들을 편애한다. 인간적으로 싫어하지만, 장우철의 비주얼 감각, 좋다. 좋아했었다. 하나가 그걸 넘었다. 우철 선배도 피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신윤영 선배의 유머도 좋다. 신기주 선배의 단문도 좋다. 이우성의 얼굴도 좋다. 하나가 떠나는 게 나로선… 좋아하는 에디터를 한 명 잃는 것과 같아서 슬프다. 타고난 감각이 다른 에디터들이 점점 줄어든다… 돌아온다, 조하나.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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