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섹스 앤 더 시티’ 캐리처럼 살 줄 알았지’에서 이어집니다
아빠는 청량리 시장에서 장사하는 할머니와 술 많이 드시던 할아버지 사이에서 3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북에서 내려왔고, 나를 많이 예뻐하셨다고 한다. 그땐 다 못 살았다지만 우리 집은 유난히 더 못 살았다고도 했다. 나는 너무 어려 모른다.
SKY에서 S를 노렸던 아빠는 재수 끝에 Y에 들어갔다. 대학을 술로 보내던 아빠는 S 대는 못 갔어도 군대는 최고를 가겠노라, 하며 해병대에 입대, 펜팔로 엄마를 만나 결혼해 나를 낳았다. 학사모를 쓴 아빠의 졸업식 사진에 내가 있다. 할머니는 장남인 아빠를 통해 생의 반전을 노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장남이 딸 하나에 이름까지 ‘하나’라 지으며 둘째도, 아들도 더 이상 없을 거라 선언하자 할머니는 뒤로 넘어가셨다. 시골 면장의 6남매 중 둘째이자 맏딸로 태어나 으리으리하진 않아도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엄마는 아빠 하나 믿고, 청량리 구석진 골목 허름한 집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시누이와 시동생과 가난과 함께 살며 나를 키웠다.
시골서 상경해 직장 다니던 엄마 역시 아빠가 대학 졸업만 하면 탄탄대로를 걸을 줄 알았단다. 엄마는 스물넷이었다. 새마을 운동과 88 서울 올림픽 사이에서 젊고 가난한 부부가 가질 수 있는 건 희망뿐이었다. 아빠는 토목건축을 전공하고 전국 현장을 누볐다. 그것이 아빠가 원하는 일이었는지는 할머니도, 엄마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경제개발로 대한민국 곳곳을 파헤치던 시절, 굶어 죽지 않을 직업군이었다. 엄마와 나는 아빠의 첫 현장을 따라 지방으로 이사했다. 아빠가 실현시키기 거부한 할머니의 야망은 독화살이 되어 비난할 곳을 찾고 찾다 끝내 엄마를 찔러 깊이 박혔다. 할머니 댁에서 나와 잠들었던 조용하고 평화로운 첫날밤을 엄마는 평생 잊지 못한다고 했다. 더 작고 더 허름한 집이었지만 시집살이에서 벗어난 엄마의 정신적 독립과 안정이 허락된 공간이었다. 아빠 역시 엄마가 도피처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 마시고 싸우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가난 때문에 그리 된 건지, 그리되어 가난해진 건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아빠 역시 도망치고 싶어 했을 거란 건 안다. 시댁에서 나와서도 할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엄마, 아빠를 놓지 않았다. 아들을 못 낳았다고, 아빠의 창창한 앞길을 막았다고, 돈을 많이 벌지 못한다고 엄마를 괴롭혔다. 아들을 가진 여자가 다른 여자에게 희한한 권력을 부리는 게 당연한 세상이었다. 그러면서도 할머니는 아빠에겐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빠가 한 치의 곁도 내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할머니는 보란 듯이 엄마를 더 깊게 찔렀다. 엄마의 마음도 조금씩 병들어갔는데 나중엔 엄마도 조금씩 할머니를 닮아 갔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땐 새 학기가 되면 호구조사라는 걸 했다. 그때 어른들이 얼마나 잔인하고 무심했냐면 집에 TV가 있는지, 냉장고가 있는지, 아빠의 직업과 수입, 학력을 구체적으로 적게 했다. 아빠는 대졸, 엄마는 고졸. 아빠의 ‘대졸’이 엄마의 유일한 희망이자 우리 가족의 자존심이었다. 우습게도 열 살도 안 된 내 마음에 아빠는 엄마보다 유식하고 유능하고 우월하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들었다. 엄마 스스로도 그랬다. 아빠의 학벌이라면 우리 세 식구는 대한민국 어딜 가든 굶어 죽진 않을 거라 생각했다. 엄마의 욕심은 소소했다. 그저 남편 잘 챙기며 애 하나 잘 키워 세 식구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 그런데 그 소소한 욕심이 정말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연탄을 갈아 불을 때는 옥탑방에 살았다. 옥탑방 계단이 하도 가파르고 높아 비 오는 날 꼭대기에서 1층 바닥까지 데굴데굴 구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낮에는 햇살이 가득 들어 좋았다. 어쩌면 옥탑방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예쁜 옷을 이리저리 갈아입고 애교를 부리며 엄마와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나는 행복하고 예쁘고 포동포동하게 웃고 있다. 그때, 햇살을 듬뿍 받은 엄마의 텅 빈 눈빛을 봤다. 엄마는 그때 겨우 삼십 대 초반이었다. 젊고 아름답고 생기로웠다. 엄마의 젊음과 아름다움은 나와 함께 옥탑방에 갇혀있었다. 엄마의 공허함과 우울감과 무력감을 그때 나는 이해할 수 없었을 뿐 온전히 느끼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의 감정을 먹고 자라니까.
어릴 때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생을 통틀어 내가 받은 유일한 사교육이었다. 집에 피아노 있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아빠는 언제나 “다음에 이사 가면 피아노 사줄게”라고 말했다. 이사 갈 집을 알아보고 옥탑 방으로 돌아온 엄마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데서 어떻게 살지….” 다세대 주택이 다닥다닥 모여 있는 동네 반 지하였다. 양귀자 작가의 <원미동 사람들>의 바로 그 동네, 원미동이었다. 화장실과 거실 겸 부엌을 합쳐도 피아노 하나가 꽉 차게 들어갈까 말까 한 집이었다. 이후 나는 피아노에 대해 더 이상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피아노를 갖는다는 건 피아노가 들어가고도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여유 있는 집에서 산다는 의미이며 예중, 예고, 개인교습을 위해 드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돈, 서포트가 있다는 의미라는 걸. 그래도 나는 그 동네에서 괜찮은 유년기를 보냈다. 쌀집 딸 선화와 우정 전파사 딸 영미와 친했고, 연기자 지망생이었던 옆집 의정 언니네 집에서 소방차 노래를 틀어놓고 춤을 추곤 했다. 수정 목욕탕에서 엄마와 목욕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마시던 삼각우유 맛은 최고였다. 엄마는 동네 작은 교회에 나를 데리고 나가 피아노 반주를 시켰다. 집에 피아노가 없으니 교회 피아노를 원 없이 쳤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만한 너비의 골목에서 나는 동네 아이들과 해 질 녘까지 롤러스케이트를 타며 무릎이 헤지도록 놀았다.
햇살 좋은 어느 날, 동네 아줌마들과 모여 수다 떨던 엄마가 경직된 표정으로 입을 뗐다. 하나 아빠 수입으론 도저히 안 되겠다며 일을 나가야겠다고 했다. 인형 눈 붙이기, 양말 재봉질 같은 부업으론 아빠가 벌고 아이 하나가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인데도 도저히 먹고살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 날을 아주 심한 복통으로 기억한다. 본능적으로 생긴 두려움과 불안, 반감이었다. 아빠는 지방 현장 생활을 하며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왔고, 엄마는 매일같이 야근이 잦았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엄마들이 저녁 먹으러 들어오라 소리치면 골목이 순식간에 텅 비었다. 나는 갈 곳이 없어 문 앞에 혼자 쪼그리고 앉아 엄마를 기다렸다. 열 살짜리에겐 집안의 고요함이 더 무섭고 끔찍했다. 정규방송이 끝나고 애국가가 나온 후 “삐-” 소리와 함께 컬러바가 뜨는 시간이 나는 가장 두려웠다.
너무 일찍 시꺼먼 외로움과 마주했다. 끊임없이 문단속을 하는 강박이 생겼고, 소리에 무척 예민해졌다. 너무 일찍 내가 원치 않은 자유가 주어졌다. 누구도 깨워주지 않는 아침엔 알아서 일어나지 않으면 지각이나 결석이었고, 숙제나 준비물을 스스로 챙기지 않으면 수업 자체가 날아가 버렸다. 나에겐 모든 게 테스트였다. 잘해도 본전이고 못 하면 나만 손해인 테스트. 잘 한 건 티가 안 나도 못 한 건 금세 표가 났다. 일하는 엄마 걱정시킬까 봐서라기 보단 엄마가 신경 안 쓰는 애들이 다 저렇지 뭐, 하는 말 안 들으려는 자존심 때문에 혼자서도 잘하려 애썼다. 그래서 스스로 점검하고 준비하는 습관이 일찌감치 생겨버렸다, 너무 과할 정도로. 엄마와의 유대감보다 적대감이 크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감정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다 너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려고 그러는 거야.” 엄마는 언제나 나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당장 오늘 나와의 시간을 포기하고 희생하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어린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설령 그때보다 더 가난해진다 해도 나는 엄마와 시간을 더 보낼 수 있는 방법을 택하고 싶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엄마는 운동회나 발표회에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운동회나 소풍날, 엄마는 김밥을 사가라며 오천 원을 쥐어줬고, 나는 친구네 가족 돗자리 모서리에 쭈뼛거리고 앉아 김밥 몇 개를 베어 물다 말아버렸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함께 하는 밥 한 끼로 마무리하는 평범한 하루는 허락되지 않았다. 평생 큰 트라우마로 남은 건 비 오는 날이었는데, 낮은 지대 반 지하집이라 해마다 장마철이면 화장실 하수구에서 물이 콸콸 솟아올랐고 골목길 허벅지까지 찬 물이 집안으로도 들이쳤다. 처음엔 너무 무섭고 기가 막혀 비에 홀딱 젖어 혼을 놓고 울기만 했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 온전히 나 혼자였다. 나를 집어삼킬 듯 들이치던 검붉은 흙탕물보다 혼자라는 사실 자체가 더 무서웠다. 아빠는 지방 현장에, 엄마는 회사에 묶여 있었고, 나는 뒤늦게 달려온 동네 사람들과 교회 사람들과 함께 물을 퍼냈다. 해보면 는다고 이후엔 요령이 생겨 비만 오면 스타킹으로 만든 모래주머니를 하수구에 틀어막고 조용히 거사 치를 준비를 했다. 지금도 여전히 비가 올 때마다 원미동 반 지하집이 떠오른다. <기생충>을 보며 속으로 얼마나 웃고 울었는지 모른다. 엄마 역시 트라우마로 이후 이사 가는 집마다 꼭대기 층에 세를 얻었다.
비가 그치고 물이 다 빠지면 비릿한 하수구 흙탕물 냄새와 엄마, 아빠의 싸우는 소리가 남았다. 집에 물이 차는 것보다 그걸로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게 더 싫었다. 엄마는 이 모든 걸 아빠의 무능과 무심함 때문이라 탓했다. 아빠는 그런 엄마를 제대로 상대하지 않으려 했다. 둘은 서로를 탓하다 결국 나를 탓하는 서사를 반복하고 있었다. 둘은 원래 안 맞는 사람들인데 가난을 핑계로 싸우는 건지도 몰랐다. 애초에 결혼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 애초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나, 젊고 희망찼던 부부는 원미동 반 지하 집에서 다시 일어날 힘도 없이 반쯤 주저앉았다. 나는 이 집에서 세상 모든 엄마들의 모성애는 같은 형질이 아니며 세상 모든 아빠들의 책임감도 그러하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 와중에 나는 똑똑하고 운동 잘하고 밝고 명랑하고 인기 많은 아이가 되었다. 혼자인 게 죽기보다 싫어서였다. 당시 ‘외동딸’은 애지중지 오냐오냐 귀하게 자라 버릇이 없고 안하무인이라는 걸 의미했다. 그럴수록 나는 더 털털하고 성격 좋고 독립적인 의외의 외동딸이라는 걸 보여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무리에 낄 수 없고, 그렇다면 나는 혼자가 되니까. 사람에 집착했고,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주위의 소곤거림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남들 눈치를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나의 예민함을 최대한 짓누르고 사회성을 극대화시켰다. 어린애가 뭘 아나 싶겠지만, 어린애의 살아남기 위한 자기 보호 본능은 무시하면 안 된다. 그에 비해 자존감 형성은 바닥이었다.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에 가득한 내 진짜 모습은 아무도 몰랐다. 엄마, 아빠도 몰랐다. 엄마, 아빠에게 잘 보이고 칭찬받고 응원받고 싶은데 그들이 나에게 관심을 안 갖는 이유는 모두 내 탓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은,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둘도 셋도 아닌 자식 하나에 시간을 온전히 쏟지 못한 건 적어도 내 탓은 아니란 것 정도는 알게 됐다. 더 이상 자책하지 않는다. 반대로 모든 걸 철저히 엄마, 아빠 탓으로 돌린 적도 있었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힘들었던 나의 지옥 같은 사춘기였다.
원미동을 떠나 중동 신도시로 이사했다. 중학교 진학 때문이었다. 치맛바람이 강남 8 학군 못지않은 신도시에 돈이 흘러들어 왔지만 우리 집은 항상 예외였다. 우리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 옆 동네 주택에 살았다. 중흥마을, 은하마을은 50평대 아파트 단지였고 한라마을, 설악마을은 20평대 아파트였다. “너 어디 사니?”라는 질문은 ‘너네 집 몇 평이니?’라는 의미였다. 그나마 내가 아파트에 살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한 건 이 때문이었다. 새로 생긴 중학교에서 나는 3회 졸업생이 되었다. 돈 많고 시간 많은 엄마들이 삶의 의미를 오직 아이에게 둔 것처럼 사교육을 시켜댔다. 나는 학교를 마치고 서둘러 이동해야 할 학원도, 나를 찾는 엄마, 아빠도 없이 밤늦은 시간까지 자유를 만끽했다. 그래도 중학교 때까진 공부가 재밌어 혼자서도 꽤 했다. 그리고 나는 비평준화 지역, 학력고사로 명문여고에 합격한 이후, 모든 것을 놓아버렸다. 각각 중학교에서 전교 5등 안에 드는 여자애들을 모아놓은 곳에 있자니 모든 게 두려워졌다. 무언가 핑계 댈 게 필요했는데 마침 잘 노는 친구들이 학교 밖에서 나를 원했고, 바쁘고도 나에게 관심 없는 부모, 남아도는 시간뿐이었다. 될 대로 되란 자포자기 반, 정말 될 대로 되면 어떻게 하지 불안함 반, 그렇게 아슬아슬 줄타기를 했다. 나는 더 이상 피아노를 치지 않는 아이가 되었고, 아빠에게 피아노를 바라지도 않았다. 나는 피아노가 갖고 싶었던 게 아니라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가족을 원했는데. 엄마, 아빠는 이미 서로를 놓았고, 이제 내 차례였다. 달랑 세 식구가 전부인 가족이 서로를 완벽하게 외면했다. 우리는 더 이상 여행도 함께 가지 않고, 밥도 함께 먹지 않으며 집을 그저 각자의 여관처럼 썼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게 서로 점점 더 편해지는 게 참 끔찍했다.
아빠는 엄마 덕에 유리했다. 한 달에 한번, 현장에서 집으로 돌아와 며칠 지내고 가는 아빠는 나와 일상을 부대끼지 않아 더 편하고 가까웠다. 아빠 또한 나고 자라며 아빠의 엄마, 아빠와 겪은 역사가 있기에 과오를 반복하지 않으려 했다. 아빠는 언제나 나를 동등한 인격체로 대했다. 나무라기보다 언제나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아빠는 언제나 내가 존중받는다고 느끼게 했다. 내가 방황할 때도 억지로 내 손을 끌어내지 않고, 인내심으로 나를 지켜보고 기다려줬다. 엄마에겐 참 별로인 남편이지만 나에겐 최고의 아빠였다. 한때 아빠가 경쟁자인 적도 있었다. 엄마는 내가 아빠보다 덜 가난하니 아빠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가서 더 멋진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더 멋진 삶이라는 게 뭔지 모르겠는 나에게 먹힐 리 없는 이야기였다. 아빠는 반대였다. 무엇이 멋진 삶이고 살아볼 만한 삶인가에 대해 내가 스스로 생각하길 바랐다. 그래서 엄마, 아빠는 나를 교육하는 방식을 두고도 서로 많이 싸웠다. 둘이 정말 사랑했다면 정말 나를 위하는 현명한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했을 텐데 둘은 나를 핑계로 서로 자존심만 가지고 으르렁댔다. 어린 나에게도 그게 보여 엄마, 아빠가 더 어리석어 보일 정도였다.
스물에 한 내 첫 문신은 아빠와 함께였다. 물론 아빠의 제안이었다. 이십 년 전, 대부분의 친구들은 작은 문신 하나만 해도 “나중에 결혼할 때 상견례는 어떻게 하려고!” 하며 등짝을 후려갈기는 부모님을 각고해야 했다. 그래서 더욱 나에겐 첫 문신의 의미가 깊다. 이후 회사에 들어갈 때도, 연애를 할 때도 문신이 문제 되지 않는 조직과 사람들만 만나면서 살게 되었으니까. 아빠와 함께 한 첫 번째 문신은 훗날 나의 두 번째, 세 번째 문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아빠 역시 이후 몇 개의 문신을 더했다. 아빠는 내가 어렸을 적부터 만약 내가 결혼하게 된다면 절대 내 손을 잡고 입장하지 않을 거라 묻지도 않은 선언을 했다. 네 결혼이니 네 신랑 손잡고 가라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친가 쪽 한분 남아계시던 어른인 작은할아버지마저 미국으로 떠났을 때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 집안의 모든 제사와 차례를 없애버렸다. 아빠가 장남으로서의 결정권을 행사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가난한 집, 공부 잘하는 장남으로 태어난 아빠가 사회로부터 얻은 건 허울뿐인 위선적인 역할과 굴레였다. 아빠는 그걸 시원하게 걷어찼다. 계집아이가 밤일한다고 손가락질하는 대신 아빠는 내가 일하는 바에 놀러 와 위스키 한 병 시켜 마시며 바텐더로서의 내 직업을 인정해줬고, 홍대 클럽에서 일하고 새벽에 끝나면 일찍 일어나 할 일 없다는 핑계로 아빠는 가끔 나를 클럽 앞까지 데리러 오기도 했다. 새벽 첫 지하철을 타고 혼자 건너는 양화대교보다 아빠 차에 몸을 푹 꺼뜨리고 아빠에게 그날 클럽에서 겪은 별의별 이야기를 조잘거리며 건너는 경인고속도로가 더 좋았다.
술을 고래처럼 마시던 아빠가 거나하게 취해 집에 오는 길, 언제나 한 손에 검은 봉지가 들려있었다. 술 냄새 풀풀 풍기며 한밤에 자는 나를 굳이 깨워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녹기 전에 어서 먹으라고. 술이라면 노이로제가 걸린 엄마는 자는 애는 왜 깨우냐며 한숨에 잔소리다. 오늘도 대판 싸움이 나지 않을까 싶어 나는 눈치를 살핀다. 엄마는 아빠가 자는 애를 깨우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돈도 많이 못 벌면서 술까지 마시고 늦게 들어온 걸 말하고 싶은 거다. 당신 하나 믿고 그 모진 시집살이와 가난을 견디며 살았다고도 말하고 싶은 거다. 엄마는 그저 그걸 알아달란 것뿐이었다. 아빠가 그걸 알고도 엄마를 다독이지 못 한 건지 정말 몰라서 못한 건지 모르겠다. 사랑도 배워야 는다. 아빠는 할아버지에게 술은 배웠으나 사랑은 배우지 못했다. 검은 비닐봉지에 담긴 건 언제나 투게더였다. 아이스크림 뚜껑을 열면 이미 물처럼 녹을 대로 녹아 흘러내렸다. 술 취한 아빠는 강남에서부터 그걸 사 가지고 딸내미 먹이겠다고 부천까지 들고 온 거였다. 가난한 집, 공부 잘하던, 자격지심이 강하고 표현에 서툰 남자는 그렇게 아버지가 되어갔다. 아빠는 여전히 학벌이 통하는 사회에서 덕을 보기도 했고 동시에 그렇지 않기도 했다. 수많은 회사를 때려치우고 다니고를 반복하다 삼성 같은 대기업에 다닌 적도 있었다. 아빠 같은 사람이 그 대기업을 견딜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다행이다. 아빠가 처자식 때문에 모든 걸 참아내고 견뎠다면 나 역시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금색 통에 담긴 그 특별할 것 없는 덤덤한 바닐라 아이스크림만 먹는다.
엄마는 오래전 개명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게도, 어린 마음에 굳이 엄마가 이름을 바꿀 필요가 있는지 의아했다. 일찍 결혼해 아이를 낳아 엄마 자신의 이름보다 ‘하나 엄마’로 더 오래 불려 온 사람이 왜 개명을 하려는 걸까. 살아 보니 내가 틀렸다. 엄마는 내가 열 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했다. 가끔 회사에서 잘리기도 하고 때려치우기도 했던 아빠의 방황과 반항도 딸로서 나는 이해하지만 당장 먹이고 재우고 입혀야 했던 자식이 있는 엄마는 그런 아빠가 참 밉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아빨 꼭 닮은 나도 밉고 원망스러웠겠지. 내가 보지 못한 엄마의 직장, 엄마만의 공간, 나 역시 엄마를 많이 원망하고 미워하고 이해하길 거부했던 그곳에서 나와 아빠가 모르는 내내 엄마는 ‘하나 엄마’가 아닌 엄마의 이름으로 오롯이 불렸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예쁜 이름으로 불리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생계 때문이 아니라 일 자체를 즐기고 원하는구나, 느낀 적이 있다. 그래서 엄마를 더 미워하기도 했다. 모든 것에 나를 우선시하지 않아 질투하며 엄마의 본분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엄마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엄마의 욕망, 엄마의 사치, 엄마의 삶을 누릴 권리를 나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엄마는 어딜 가든 당차고 똑 부러지는 대장이다. 엄마가 엄마로서 먹고살기 위해 삶에서 체득된 훈련의 결과다. 얼마 전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가 만약 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결혼을 안 하고 애도 없었다면, 지금쯤 엄마는 뭘 하고 있었을 것 같냐고. 엄마는 망설임 없이 교육자가 되었을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틈나면 봉사활동을 했다. 나는 늘 우리 집보다 나은 집 아이들과 비교하며 투정을 부렸는데, 엄마는 늘 우리보다 못 사는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고 했다. 어릴 때 난, 그 마음 가식이라며 그럴 시간 차라리 나에게 쓰지, 토라지기도 했다. 더 이상 받아주는 곳이 없어 풀타임 직장 생활을 할 수 없게 된 엄마는 요즘, 시골 다문화 가정 아이들도 돌보고 요양보호사 시험도 준비 중이다. 엄마는 쉴 수가 없다. 아니, 쉬어본 적이 없어 어떻게 쉬는지 모른다.
대학만 졸업하면 내 인생이 탄탄대로일 거라 생각했던 시절, ‘뭐라고 되겠지’ 하면서 그냥 언젠가 왠지 모르게 부자가 될 것만 같던 시절, 나에게도 희망 회로가 돌아가던 때가 잠깐 있었다. 좋은 집, 좋은 차, 아무 생각 없이 그런 게 내 삶의 목표인 적이 잠깐 있었다. “아빠, 나 이다음에 돈 많이 벌면 뭐 사줄까?” 물었더니 “할리 데이비슨”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모든 걸 정리하고 한국을 떠날 때도 ‘할리’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때 알았다. 아빠도 어릴 적 나에게 진정 피아노를 사주고 싶었을 거라는 걸. 가족 구성원이 서로를 경제력으로만 평가했다면 우리 집 세 식구는 오래전 이미 산산조각 났을 것이다. 엄마와 아빠와 나, 우리 모두 최선을 다 했을 뿐이다.
나는 이삼십 대 내내 방황했다. 아니, 내 인생 자체가 방황이다. 방황은 십 대면 충분하다 생각했는데, 대학을 졸업해도 방황이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흔들렸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스스로 충격적이고 당황스러웠다. 내가 스물이 되었을 때 엄마, 아빠는 겨우 마흔 중반이었다. 내가 자라며 방황할 때 엄마, 아빠도 방황 중이었다. 나에게 그렇듯 끊임없이 엄마, 아빠에게도 권태와 공허와 불안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을 것이다. 지금에야 안다. 엄마, 아빠는 너무 어리고 서툴렀다. 엄마, 아빠는 나를 키우는 와중에도 어른이 되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 모두 서툴렀고, 각자 나름의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엄마는 나의 사춘기를 외면했고, 나는 엄마의 갱년기를 외면했다. 우린 왜 이리 엇갈리나 모르겠다.
엄마와 아빠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또 벗어나고 싶은 건 뭐였을까, 꿈을 꿀 시간은 있었을까. 예상 못하고 맞닥뜨린 책임에서 어쨌든 도망치지 않은 사람들, 평생 사기 한 번 안 치고, 누구 하나 괴롭히지 않고 인생 고비고비마다 위태롭지만 한걸음, 한걸음 걸어온 사람들, 언제나 알고 보면 그 자리에 늘 있어줬던 사람들, 그 오랜 시간 동안 삶의 권태와 고비와 고단함을 이겨내고 꿋꿋이 이어온 엄마, 아빠의 삶을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누가 하나. 엄마, 아빠의 삶을 내가 글로 쓰지 않으면 누가 쓰나. 나는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만큼 엄마, 아빠의 삶을 지켜본 증인이다. 엄마, 아빠는 결코 삶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시대가 그들에게 지운 역할은 성실히 이행하면서도 나에게 이어질 나쁜 관행과 전통은 온몸으로 막아섰다. 나는 그런 엄마, 아빠 덕분에 대를 잇지 못하는 무남독녀로 태어나서도 당당하고 자유로웠다. 엄마, 아빠 덕분에 언제나 수저를 물고 살 수 있었던 걸, 그런데도 나는 금수저, 흙수저 타령하며 스스로 비교하고 비하할 궁리만 했다는 걸, 이 세상에서 직접 밥을 벌어먹어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엄마, 아빠 힘을 빌어 노력 없이 공으로 받은 건 없지만 그렇다고 억울하게 빼앗긴 것도 없다. 나는 엄마, 아빠 덕분에 온전히 스스로 꿈을 찾았고, 그 꿈을 위해 도망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온다면 우린 좀 더 잘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오랜 시간 사랑도 못 하고, 그렇다고 용서도 못 하고 서로 오래 외면했다.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는, 풀려고 하면 할수록 더 불어나는 커다란 실타래처럼. 내가 ‘가족’이라는 단어를 포기하고 한국을 떠난 사이, 엄마는 엄마의 엄마와 아빠가 계시는 고향에 돌아와 집을 지었다. 외할머니가 심은 매화나무가 여태 해마다 꽃을 피우는 곳에. 살다 보니 이런 날이 오는구나. 엄마와 아빠가 이제라도 집을 찾아 다행이다.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와 엄마가 직접 지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집에 들렀다. 강아지 한 마리가 새 식구로 들어와 있었다. 엄마에게 이름을 물으니 “콜라”라고 답한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콜라는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던 어릴 적 내가 기르던 강아지 이름이었다. 직장 다니랴 살림하랴 신경이 곤두섰던 엄마 때문에 우리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던 아이였다. 콜라를 잃고, 강아지 한 마리도 감당할 수 없던 우리 집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엄마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30년이 지나서야 엄마의 삶에 강아지 한 마리 들여놓을 여유가 생겼다. 마음이 시큰하다.
삶에서 어떤 일은 이리도 돌고 돌아 자연스레 천천히 이뤄지기도 한다. 팬데믹으로 잠시 한국에 들어와 지내는 동안 태어나 처음으로 엄마와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며 삼시 세 끼를 함께 먹었다. “내가 너 어렸을 때 밥을 잘 못 해줘서….” 엄마는 그렇게 참회하는 마음으로 내 그릇에 밥을 꾹꾹 눌러 담는다. 그리고 돌아서면 5분도 안 돼 여전히 우리는 싸우고 오해하고 서로 생채기를 못 내 안달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떠난 후 후회를 반복하겠지. 엄마와 나는 정말 궁합이 안 맞아 떨어져 살아야 정이 붙는다. 너무 닮고, 또 너무 달라서다. 너무 사랑하고 또 증오해서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완전히 사랑할 순 있다. 집을 찾는 여정, 그 자체인 인생에서 삶에서 나는 여전히 내 집을 찾으려 이리도 세상을 헤매는데, 어쩌면 처음부터 내 집은 엄마, 아빠였을 지도 모르겠다. 이 세상에서 우리 셋만 그걸 모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