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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섹스 앤 더 시티’ 캐리처럼 살 줄 알았지

by 조하나


‘4대 보험과 법카의 무게’에서 이어집니다









나는 ‘섹스 앤 더 시티’ 캐리처럼 살 줄 알았지


나는 운이 좋은 여자다. 마흔 가까운 나이가 된 지금까지 살아있기 때문이다. 역사엔 ‘만약’이라는 게 없다지만 내가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났다면 아마 운이 좋다는 타령은 안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할 필요가 없겠지.


초등학교 시절, 남자아이들이 고무줄을 끊거나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치마를 들추고 도망가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네가 좋아서 그러는 거야’ ‘네가 예뻐서 그러는 거야’라고 했다. 예쁘면 괴롭힘 당하는 거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어른들의 말은 여자아이들에게 순종과 체념을, 관심 있다면, 혹은 없다 해도 여자는 괴롭혀도 괜찮다는 어른들의 말은 남자아이들에게 평생의 정당성과 면죄부를 부여했다.


초등학교 담임선생이 여자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몸 이곳저곳을 조물딱 거렸다. 언제나 그렇듯 여자아이들이 예뻐서였다. 여고에선 학생주임이라는 작자가 걸핏하면 교실에 앉아있는 여자아이들 브래지어 끈을 뒤에서 불시에 잡아당겼다. 다 우리 잘 되라고 그러는 거였다. 인적이 드문 새벽 등굣길, 누군가 나에게 뒤에서 시간을 물었다. 시계를 한번 내려다보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난생처음 ‘바바리맨’을 만났다. 그는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자위를 하고 있었다. 20년이 지난 일인데도 나는 아직도 그날 아침이 기억 속에 생생하다. 우리 사회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바바리맨’은 언제나 희화화되지만 나는 결코 그 기억을 떠올릴 때 재미있거나 유쾌하지 않다. 학교로 정신없이 달려가는 길에도 다리가 풀려 몇 번을 헛발질했다. 눈앞이 깜깜하고 심장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교실에 들어선 나는 엉엉 울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모욕감이 느껴졌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내 잘못 같았고 내가 더럽혀진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할 때마다 느꼈던 기분이 바로 이런 거였구나. 이후 학교 가는 길은 지옥으로 변했다. 한동안 혼자서 길을 걸을 수 있는 자유를 잃었다. 한동안 비슷한 옷차림이나 형태만 봐도 나자빠졌다. 그 당시 여고 주변엔 각 학교를 대표하며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바바리맨’들이 있었는데 어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성폭력을 신고해도 받아주지 않는 경찰이었고, 피해자도 그걸 알기에 신고조차 하지 않는 시절이었다. 하여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고통받았는지 수치로도 알 길이 없다. 여자는 단지 여자라서 ‘가정’이라는 교과목을 배우고, 남자는 그저 남자라서 ‘기술’이라는 교과목을 배우던 때였다. 운동을 좋아하는 여자가 있을 것이고, 바느질을 좋아하는 남자가 있을 터인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가정’ 시간, 미래의 남편과 아이를 위해 맛있고 영양 가득한 음식을 요리하는 법은 배웠지만, 정작 성(姓)에 대해 배운 적이 없다. 어떻게 하면 피임을 할 수 있는지, 남자들이 원치 않는 성관계를 강요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성폭력을 당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정규 수업 과정을 통틀어 어른들은 단 1분도 우리들에게 할애하지 않았다. 그 사이 남자아이들은 불법 포르노를 통해 성을 배웠고, 여자아이들은 그런 남자아이들에게 배웠다.


여자아이들은 생리가 시작된 이후부터, 아니 태어나며 성별이 정해진 이후부터 성인이 되어서도, 그리고 죽을 때까지 성폭력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암암리에 애쓰며 산다. 본인 스스로 그걸 인지하든 못 하든 어쨌든. 자신이 피해자가 되고 안 되고의 선택권이 전혀 없다. 남자가 가해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를 선택할 때 자연스레 결정되는 것이다. 남자는 결정할 수 있지만 여자는 그럴 수 없다. 혼자 길을 걷는 나이가 된 이후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밤길, 이어폰으로 음악 쨍쨍하게 들어가며 편하게 걸어본 적이 없다. 앞, 뒤, 옆에서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는 가해자들이 숨어있는 도시에서 나는 그저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늘 숨죽이고 둘러보고 살펴야 했다. 내가 누구에게 원한을 사지 않고 평생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대도 상관없다. 이건 내가 의지로 막을 수 있거나 미리 준비할 수 있는 형태의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운이 좋다. 고등학교 등굣길에 만났던 ‘바바리맨’이 내 앞에서 자위만 했으니 망정이지, 그날 괜히 그의 기분이 나쁜 편이라 나를 해하거나 죽이기로 작정했다면 나는, 지금, 없다. 수없이 혼자 다닌 여행길, 낯선 곳에서 길을 물었던 사람들이 행여 딴 맘을 먹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 없다. 아침, 저녁으로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 몸을 더듬기만 했지, ‘묻지 마 폭행’으로 칼을 꺼내 그었다면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 없다. 마감 기간, 새벽 두세 시까지 원고 쓰다 겨우 몸을 욱여넣은 택시 안에서도 혹시나 택시 기사가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천근만근 감기는 벌겋게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감이 안 좋다 싶으면 깊은 밤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를 걸어 내내 통화하는 척을 해야 했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졸지도 못했지만 그저 운이 좋아서, 시선으로, 말로 변태처럼 괴롭히는 택시 기사만 만났지, 나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만나지 않아 다행히 나는 지금, 여기, 살아있다. 여자로 살아오며 듣고 보고 겪었던 온갖 성차별과 성희롱, 성추행이 언제든 자칫하면 더 큰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은 있었으나 다행히 운 좋게도 강간이나 살인으로 이어지지 않아서 나는 지금, 여기, 살아있다.


‘사는 게 다 힘들지.’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면 분명 남자일 것이다. 내 말은 여자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강간이나 살인, 폭력에 노출될 확률이 더 크다는 말이다. 더 기가 막히는 건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나에게 어떤 종류의 형태의 폭력을 가하는 남자가 막연히 좋은 사람이길 바라는 것밖에는. 밤길을 가다 나를 뒤에서 쫓아오는 사람이나 대낮에도 길거리에서 눈 마주친 저 사람이 나를 보고 웃을 것인가, 아니면 나를 죽일 것인가는 전적으로 그에 달려있다. 단지 그가 남자이고, 내가 여자라는 이유, 성별만으로 생사와 운명이 갈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사는 건 다 힘들지’라고 한다면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라고 외치는 사람 앞에서 ‘모든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의 선의를 바라며 모든 걸 운에 맡기며 평생 살아야 하는 것, 내 성별이 남자가 아닌 여자라서다.


그래서 어떤 여자들은 남자에 복종키로 한다. 가족을 위해, 혹은 목숨을 지키지 위해, 삶을 이어가기 위해. 나는 비난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고 학습한 결과다. 성폭행을 당한 사람들에게 ‘네가 행실을 바로 하지 않아서’라는 손가락질을 더 많이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지난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지만, 사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나는 이 사회에서 성장하고 어른이 되어가면서 항상 헛갈렸다. 세상은 나에게 여자로서의 여자다움과 아름다움을 강요했다. 그런데 예뻐지니 돌아오는 건 온갖 성희롱과 차별이었다. 눈 뜨고 하루를 시작했다가 내 침대로 돌아와 눈을 감을 때까지 끝도 없이 나의 옷차림과 화장, 나이, 능력 등 모든 걸 남자들은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평가해댔다. 나를 앞에 세워두고 “여자 나이에 ‘ㅂ’ 자가 들어가면 유통기한 끝난 거야”라고 으스대는 남자들 때문에 스물일곱이 되고 나서 한동안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한다며 자책했다.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듣고 보고 자란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영향을 미친다. 여자라서 예뻐지라기에 생리대에 화장품에 분위기 화사하게 만드는 옷을 사는 데 돈을 쓰는데도 남자들이 군대를 다녀와 월급을 더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놈의 ‘여자니까’라는 이유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였다. 남자들은 자기 편한 대로 남성과 여성을 잘도 갖다 써먹었다.


생리대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다. 20년 전 우리에게 ‘생리대’라는 단어는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되는 금기어 같은 거였다. 생리대를 사러 갈 땐 동네 슈퍼나 편의점 점원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부터 했다. 남자라 말도 못 꺼내고 못 사고 돌아 나온 경우도 있었다. 용기를 내어 남자 점원에게 생리대를 내밀고 계산을 하면서도 그 음흉한 눈빛을 참아내야 했다. 그러다 가끔 계산을 마친 생리대를 점원이 검은색 봉투에 넣어주면 ‘이 사람 센스 만점’이라며 감탄했다. 생리하는 게 죄였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고통에 한 달에 며칠씩은 산송장처럼 지내야 하는데 어쩌다 피가 새어 나오면 그걸 놀려대는 남자아이들에 시달리며 수치스러워해야 했다. 사회생활을 할 때도 남자들은 걸핏하면 여자들의 생리를 걸고넘어졌다. “어? 오늘 좀 까칠하네. 오늘 ‘그날’이니?”라는 질문은 요즘 하면 성희롱이지만, 예전엔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여자라면 꼭 들어야 하는 ‘머스트 해브 토크’였다. 늘 생리는 죄책감과 모욕감으로 느껴졌다. 여자라는 것 자체가 죄책감과 모욕감을 느껴야 하는 존재인 건지 혼란스러웠다. 애를 낳으라고 강요하는 사회가 생리를 해야 애를 낳을 수 있다는 기초 과학적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러면서 생리하는 걸 여자들이 일생일대의 치욕처럼 느끼도록 취급했다. 5년 넘게 4대보험 되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생리 휴가를 쓴 적은 단 하루도 없다. 회사를 박차고 나와 더 이상 눈치 볼 상사도, 동료도 없는 지금은 여자들의 생리를 걸고넘어지는 남자들에게 눈 부라리며 소리친다. “야, 너도 네 엄마가 생리해서 이 세상에 나왔어!”


세계 최초로 학생들에게 생리용품을 무상으로 제공한 스코틀랜드는 이제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로 범위를 넓혔다. 뉴질랜드 역시 여학생들에게 생리용품을 무료로 제공한다. 이런 국가들은 대부분 여성이 총리나 대표 자리에 있다. 남자들로 우글거리는 한국 같은 나라의 정부와 국회에서는 여전히 목소리를 높이는 여성 의원에게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고 혀를 찬다. 그들은 아마도 ‘생리 빈곤’ ‘생리 독립’ ‘여성 인권’ 같은 단어는 평생 들여다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들어볼 일이 없을 것이다. 국가적으로 벌어진 갖가지 성 비위 문제를 제대로 짚어내고 들여다보고 고치려는 권력을 가진 남성은 이 나라에 단 한 명도 없으니까.


대한민국 남자들의 성에 관한 뒤틀리고 어긋난 관념은 한국의 징병제 때문이다. 20대 초반 남자들을 폐쇄된 곳에 몰아넣으면 생기는 일을 생각해 보자. 이러한 특수 집단에서 여자는 언제나 ‘보상’의 의미일 뿐이다. 여자 한 명만 지나가도 괴성을 지르며 자신의 성기를 잡고 성행위하듯 앞뒤로 골반을 휘젓는 군인 한 무리는 정말 희한한 집단이다. 여자가 어떤 모멸감과 치욕을 느끼든 괜찮다고 자기 합리화를 한다. 자신의 금쪽같은 젊은 날 2년을 희생해 군대에 갇혀 여자들이 하지 못하는 조국 수호를 하고 있으니 그 정도 보상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한없이 약하고 소심한 보통 청년인데, 집단이 되는 순간 이들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괴물이 된다.


폭력적인 남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약한 면을 들키고 싶지 않아 더욱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군대’는 제대 후 남자들의 한평생 찬스로 쓰인다. 여자들이 생리와 출산, 육아, 성 평등에 대해 이야기하면 남자들은 “꼬우면 니들도 군대 가던가” 레퍼토리로 대응한다. 여자들은 나라 지킬 힘이 없는 연약한 존재니 집에서 밥이나 하라고 정한 건 애초에 여자들이 아니다. 더 오래전엔 정부, 내각, 국회엔 지금보다 여자가 더 없었다. 아니,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모든 중차대한 의사 결정은 남자들이 해놓고, 군대 갔다 온 게 왜 그리 벼슬인가 싶다. 깊이 확신하건대 군대 가기 죽도록 싫은 남자들도 많다. 내 주변에도 많았다. 어차피 머지않은 미래, 인구감소로 징병제도 힘들다. 모병제로 바꾸면 된다.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나라도 지키고 돈도 벌고 싶은 사람, 혹은 애국심에 불타는 사람들이 군대에 가면 된다.


그러면 외박이나 휴가를 나온 군인들이 우르르 홍등가로 몰려가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친한 친구들이 군대에 있었고, 사귀던 남자 친구를 군대에 보냈다. 입대 전엔 신고식이랍시고, 휴가나 외박엔 사기 진작이랍시고 그들이 성 매매하는 걸 당연히 누려야 할 대접처럼 행동하는 걸 가까이서 지켜봤다. 내가 다니던 대학 가까이엔 노란 간판에 빨간색 궁서체 두 글자 간판이 붙은 가게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골목이 있었다. 우리 동네 버스 정류장에도 있었다. ‘앵두’ ‘무정’ 같은 이름에 가게 유리문은 까만 필름지로 덮여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곳.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선배들은 신입생 환영회 한답시고, 군대 가기 전 기분 풀어준답시고 남자 애들을 거기에 데리고 갔다. 남자 선배와 동기, 그리고 후배들은 그곳을 ‘방석집’이라 불렀다. 남자들은 ‘방석집’을 통해, 그렇게 끈끈한 사회적 유대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방석집 방석 끄트머리도 구경 못 해본 내가 사회에서 그 남자들과 부대끼고 사는 게 쉬울 리 없었다. 학교에서 쌓인 그들의 유대감은 사회생활로 이어진다. 거래처 접대 자리는 모두 룸살롱에서 이뤄진다. 너도 나도 양팔에 여자를 하나씩 끼고 천문학적인 액수가 오가는 계약을 성사시킨다. “술 먹으면 그런 실수 좀 할 수 있지” 하며 서로서로 봐주는 문화가 끈끈한 한국 사회다. 조선소, 건설 현장 주변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코로나19 집단 감염이 퍼진다. 심지어 파고다 공원 주변에도 ‘바카스 아줌마’ 영업이 성행이다. 남자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성 산업에서 우위를 점하는 최고의 고객이다. 이러한 성 산업을 만들고 이끄는 것도 모두 남자다. 여자는 언제나 ‘주변’ ‘소모품’ ‘보상’ 혹은 ‘전리품’으로 쓰인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위안부 문제로 아파하는 나라의 아이러니다. 나는 정말 운이 좋아 일제 강점기, 힘없는 조선의 딸로 태어나지 않아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았다. 다시 한번, 역사엔 ‘만약’이라는 게 없다지만, 한국이 일본처럼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다면 우리는 그러지 않았을까? 필리핀, 태국, 베트남 가서 놀다 현지 여성 임신시키고 사라진 뒤 나 몰라라 하는 한국 남자들은 이미 유명하다.


역사 자체가 모두 남성들에 쓰였고, 모든 언어가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남성들이 전쟁을 결정하고 서로 힘겨루기하고 땅따먹기를 하며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씨를 뿌려왔다. 모든 게 인간의 본능과 자손 번식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됐다. 여성은 나약하고 아둔한, 경제 활동에 하등의 도움이 안 되는, 남성의 자손 번식의 수단일 뿐이었다. 남성 중심의 역사와 사회에서 여자들이 투표하기 시작한 것도 고작 백 년 조금 넘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우린 아직 한참 멀었다.


물론 예전엔 더 했다. 여자들은 자고로 성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 되는 세상이었다. 1998년 세상에 나온 미드 <섹스 앤 더 시티>는 그런 세상에 시원하게 어퍼컷을 날렸다. 내가 인터넷에 이 미드의 제목을 쓰면 블라인드 처리가 되던 시절이었다. 불법 유통되는 온갖 포르노와 섹스 테이프, 몰래카메라를 신나게 돌려보던 세상이 ‘섹스’라는 단어 하나 앞에서 갑자기 얌전을 떨었다. 정부 고위 관료, 판검사, 국회의원, 기업가 등과 연예계 스폰서 커넥션은 괜찮은데, 미드 제목에 ‘섹스’가 들어가는 건 괜찮지 않았다.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해 헛웃음이 나오는 세상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살아남기 위해 나는 적당히 남자들에게 매력 있어 보이면서 헤프다고 욕먹지 않을 정도의 아주 적당한 지점을 찾아야 했다. 적어도 멋모르던 이십 대 초중반, 내가 연애할 수 있는 상대의 남자들 대부분이 바라는 여성상은 대충 이랬다. 남자 친구가 고주망태가 되어 실수를 해도 다음 날 해장국 끓여 바칠 정도의 배려와 희생정신, 군대 가면 고무신 거꾸로 신지 않고 기다리는 지조, 자신 앞에서만 펼치는 섹시한 퍼포먼스에 능하되 다른 남자 앞에선 헤퍼 보이지 않게 조신하고 고분고분한 현모양처로 변신. 어렵지 않았다. 내 또래 대부분의 여자들이 영특하게 대응하며 살아남았다. 하지만 여자들이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와 사만다, 샬럿, 미란다처럼 한데 모여 남자와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진 않았다. 한국 여자들은 서로에게도 적이었다. 당시 여성들은 각개전투였다. 각자 살아남기 위해 때론 서로를 짓밟기도 해야 했다. 함께 모여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않으니 공감이 없고, 서로에 대한 연대나 지지도 없었다. 사실 지구 반대편 뉴욕이란 화려한 도시의 싱글 여자 넷도 실재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20여 년 전 그 시대, 그런 캐릭터를 가진 여성들은 전 세계 어느 도시에도 실존하지 않았다. 그래서 <섹스 앤 더 시티>는 더 인기가 높았다.


“남자 친구 있어요.” 대학 다니며 호프집 서빙, 바텐더, 홍대 클럽 스태프로 일했다. 나는 낮에 학교를 다니고 밤에 일하는 근면 성실한 이 나라의 일꾼인데 매일 밤 남자들의 온갖 성희롱과 성차별을 겪어야 했다. “남자 친구 있어요.” 남자 친구를 사귈 때나 아닐 때나 상관없이 주야장천 내가 외쳤던 말이다. 어떤 남자가 나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위해를 가하려 할 때 나는 또 다른 남자의 힘을 빌려서야 조금 안전해질 수 있었다. “남자 친구 있어요.” 이 얼마나 파워풀한 문장인가! 이 문장 하나면 남자들은 자신이 얼굴도 모르는 어떤 남자가 이 여자를 소유하고 있구나, 하고 물러난다. 정작 바로 눈앞에 있는 여자는 존중할 줄 모르면서. 사람들로 북적이는 홍대 클럽에서 일할 때 남자들의 더듬는 손이 느껴지면 나는 언제나 남자 친구 뒤에 숨곤 했다. 그러면서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결코 스스로 방어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인가?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새벽녘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 술 취한 남자들이 "한잔하자"라며 길을 막았다. ‘그래, 내가 밤새 일해 피곤해 죽겠는 걸 술 먹다 늦게 집에 가는 여자라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 생각하며 조용히 거절하고 지나가면 온갖 화려한 문구로 치장한 ‘XX 년’이라는 욕이 뒤통수에 꽂힌다. 다시 한번, 나는 운 좋은 여자다. 그때 내 뒤에서 욕을 내뱉은 소심한 남자들이 조금이라도 오기나 자존심을 더 부렸다면, 그래서 내 뒤통수를 욕이 아닌 주먹이나 흉기로 내리쳤다면 나는, 여기, 지금, 없다.


홍대 클럽에서 일할 때 항상 마주치면 웃으며 알고 지내던 디제이가 어느 날 술에 취해 돌변하더니 나를 심하게 괴롭혔다. 역시 오래 알고 지내던 클럽 사장은 그 소식을 듣고 난 다음 날 야구 방망이로 그 디제이를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죽지 않을 만큼 때렸다. 그래서 내 기분이 나아졌을까? 아니었다. 클럽 사장은 나를 생각하고 배려하고 보호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아끼는 직원이니 건들지 마라, 같은 건데 드라마에 미화된 로맨스도 뭣도 아니다. 그저 수컷들끼리의 권력과 서열, 위계질서를 짚고 넘어간 것뿐이었다. 여자로 태어나 학교에 다니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점점 더 나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점점 더 무기력함과 상실감에 시달렸다. 나는 스스로 나를 보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엄마는 여자가 결혼 안 하면 이 험한 세상 어찌 살아가려고 그러니, 그렇게 잔소리를 했나 보다. 당신 스스로 결혼해서 남자로 인해 인생이 나아진 것도 아닌데 그러는 걸 보면, 엄마도 나처럼 여자로서 이 세상에 어찌 살아남을지 고민을 많이 했나 보다.


잡지사 기자로 살면서 세상의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 했다. 특히 나 빼곤 모두 남자뿐인 남성 패션지 피처 팀에서 생활하며 나름의 생존 스킬을 터득해야 했다. 나는 나를 중성화시켰다. 친한 선배나 동료는 ‘오빠’ 대신 ‘형’이라 불렀다. 친근함은 높이면서 이들이 나를 어떤 의미로든 성적으로 보지 않길 바라서였다. 무언가 내가 바라고 원하는 일을 잘 해냈을 때 여자가 끼를 부려 남자의 도움으로 해냈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일했다. 퇴사 후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다이빙 강사로 일할 때도 한국인들이 있는 한인 숍을 피한 이유는 여전히 한국 다이빙 산업계는 어디든 ‘미녀 강사 XXX’라는 수식어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여탕’ ‘몸매’ 같은 단어가 한국 다이빙 커뮤니티에 여전히 차고도 넘치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자 강사들이 제 스스로 그런 타이틀을 갖다 붙이기도 한다.


남자들은 대부분 손 안 대고 코를 푼다. ‘여자는 여자의 적’이라고 여자들끼리 서로 적대시하고 혐오하고 폭력을 행사하며 남성 중심 사회를 굳건히 지켜왔기 때문이다. 제 남자가 바람을 피우다 걸려도 상대편 여자만 ‘걸레’고 ‘헤픈 년’이다. 자신도 여자인데 제 남자엔 면제부를 주고 그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며 다른 여자를 견제한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 근처에 홍등가가 있었다고 한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나갈 때면 업소에서 일하는 언니들이 나를 예쁘다며 만지려는데 그걸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엄마는 이미 업소에서 일하는 여자는 그렇지 않은 여자의 적으로 편을 갈라놓았다. 홍등가가 성업인 이유도, 그곳을 찾는 것도 남자들인데 그들이 비난받는 대신 거기서 일하는 여자들이 죄다. 여자는 또 다른 여자를 혐오하고 증오하고 업신여긴다. 장남인 아빠가 무남독녀 외동딸만 낳아 대가 끊겼다고, 할머니는 평생 엄마를 괴롭혔다. 둘째를, 그리고 아들을 낳지 않은 건 아빠와 엄마가 함께 한 선택이었는데 할머니는 아빠를 공격하지 않았다. 모든 건 엄마의 몫이었다. 이 세상의 엄마들은 삶에 전복되지 않기 위해 자식을 키우며 돈을 벌었다. 엄마들이 다닌 회사에는 내가 살며 겪어온 온갖 성차별과 성희롱, 성폭력이 더하면 더했지 없었을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엄마들은 나처럼 더럽다고, 못 해 먹겠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지 못했다. 그런데 그 이유로 엄마들은 세상의 모든 딸들로부터 돈 버느라 자식을 살뜰히 챙기지 못했다며 “엄마가 나한테 해준 게 뭐 있어!” 하는 원망이나 듣는다. 여자의 가치를 같은 여자가 존중하지 않는데, 남자들의 존중은 어찌 얻겠는가. 여자들이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와중에 팔짱 끼고 구경하던 남자들은 이제 와 ‘미투’와 ‘여성’ ‘권리’에 대해 아주 조그만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우리들에게 나대지 말라고 윽박지른다.


남자들의 혼란스러움도 이해가 간다. ‘남자답게’ ‘남자가 돼가지고’ ‘남자니까’라는 말을 태어나 평생 들으며 살았는데, 이제 와 모든 게 잘못되었고 틀렸다니 자신이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느낌일 거다. 평생 배운 대로 해왔고, 또 여태 아무 문제없었는데 이제 와 아니라니 답답하고 억울할 테지. 하지만 당신의 윗세대가 운 좋게 다 해 먹었다고 해서 당신도 잘못된 걸 알면서도 이어갈 순 없지 않은가. 뭘 어쩌긴 어째, 바꿔야지. 이왕 바꿀 거라면 멋있게. 지성과 유머를 대표하는 명성 높은 코미디언 <레터맨 쇼>의 레터맨도 ‘미투’ 영상에 나온다. 1987년, 레터맨의 토크쇼에서 게스트로 나온 여배우 테리 가(Teri Garr)에게 그는 말끝마다 ‘Honey’ ‘Babe’를 붙인다. 그러자 테리가 발끈해 그에게 이렇게 되받아친다. “Don’t HONEY me!(나한테 자꾸 ‘허니, 허니’ 하지 마!)” 최근 넷플릭스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토크쇼로 다시 돌아온 74세인 레터맨은 자신은 지금도 여전히 배우고 반성하고 바꾸려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쇼에서 카니예 웨스트와 ‘미투’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었다. 카니예가 이렇게 말했다. “미국 중년 남성들이 ‘미투’ 운동을 겪고 나서 “내가 지난 30년 동안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이러는 거지?” 하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라고. “‘미투’ 운동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는 것 자체가 ‘악’으로 치부되는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카니예에게 레터맨은 이렇게 답했다. “지난 30년 동안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여성의 공포가 더하지 않을까요?”


카니예가 자신 또한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고 했지만 그에 반대하는 의견도 표출되어 대화를 할 수 있는 분위기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엔 나 역시 공감한다. 여성과 남성이 연애 말고 대화를 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 남자들 역시 스스로 연약하고 두렵다는 걸 인정했으면 좋겠다. 사회가 남성에 지우는 역할에 대한 스트레스도 털어놔야 한다. 참지 말고 울어야 한다. 그리고 여자들의 이야기도 들어야 한다.


내가 연애한 남자들은 대부분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인기 없고 배고픈 인디 뮤지션을 만난 적이 있었다. 팬클럽 카페 관리부터 공연 기획까지 모두 도왔다. 그가 세상에 이름이 알려질수록 나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어딜 가든, 누굴 만나든 나는 내 이름이 아닌 ‘OOO 여자 친구’로만 불렸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예쁜지, 몸매가 어떤지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인터뷰에서 떠들어대는 말로 나라는 사람의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그와의 관계에 있어 내 역할이 정해졌다. 나는 내 이름을 잃고 내 목소리를 잃었다. 내 공적을 알아달란 게 아니었다. 나 때문에 그가 잘 된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내 이름으로 내가 불리길 바랐다. 그런 나를 남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무능하고 게으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의 도움과 노력은 크레딧에 포함되지 않았다. 내가 잘나고 당차고 센스 있고 스마트해서 좋다더니, 남자에 기대지 않고 독립적인 여자라서, 징징거리고 기대기만 하는 다른 여자와 달라 좋다더니, 어느덧 같은 이유로 나는 기 세고 부담스럽고 피곤한 여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나의 자아는 남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스스로 내가 진정 어떤 사람인지 깨닫는 데에 오랜 시간 돌아온 이유는 나를 혼란스럽게 하는 연애와 관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모든 연애와 관계 이전 온전히 나라는 사람에 대해 충분히 시간을 할애하고 집중하고 성찰하지 못한 내 잘못도 컸다. 나 역시 그저 사랑받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소녀였고, 어떤 것도 의심하지 않고 남들이 하는 대로 세상이 시키는 대로 따라간 것뿐이었다.


늘 연애의 주도권은 여자에게 있는 듯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남자에 있었다. 남자는 여자를 임신 ‘시킬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난 남자들은 ‘사랑’이란 단어를 남발하며 끝없이 섹스를 요구하면서도 콘돔 사용은 꺼려했다. 귀찮거나 느낌이 안 좋아서라고 했다. 성병의 위험과 임신에 대한 모든 책임을 나에게 미뤘다. 못난 놈들. 그런데도 어리고 어리석었던 나는 그걸 거절이라도 하면 혹시라도 관계가 틀어질까 전전긍긍했다. 남자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서의 역할을 사회로부터 교육받은 대로 학습한 대로 스스로 따르려 했다. 내가 원하는지는 상대에게도 스스로에게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점차 내가 섹스를 원한다는 느낌이 어떤 건지 잊게 됐다. 사귀던 친구와 이별할 때마다 생리가 조금만 늦어져도 오만가지 생각으로 혼자 고통받았다. 피임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는 연애 관계에서 남자와 동등한 입장이 될 수 있었다. 아프리카 여성들에게 피임약을 무상 지급하는 구호 단체가 있다. 아프리카의 여성이 자기 결정권 없이 팔려가듯 결혼하고 남편으로부터 끊임없이 학대받는 건 출산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남편 몰래 수십 킬로 미터를 걸어 구호 단체에 다다라 피임약을 삼킨다. 이것도 남편에게 들키면 죽음뿐이다.


나는 이제야 내 이야기를 글로 옮길 수 있을 만큼 당당해졌다.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고, 아무것도 부끄럽지 않다. 더 이상 남자의 욕망은 야심이고 여자의 욕망은 치욕 이어선 안 된다. 한편으론 나이가 들어가면서 조금 안심이 된다. 피곤하고 소모적인 눈치 게임에서 더 자유로워졌으니. 더 이상 내가 남들에게 성적으로 매력적이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보다 오히려 성폭력에 노출되는 확률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안도감이 더 크다고 해야 하나. 아니, 나이가 들어도 여자로서의 나의 불안과 무력감은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영화 <69세>에선 성폭력을 당한 69세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영화는 개봉 당시 영화를 보지도 않은 수많은 남성들로부터 평점 테러를 당했다. 그렇게 숨겨진 이야기와 목소리가 여전히 짓밟히고 있다.


‘태희 혜교 지현’의 시대에 대중은 섹스어필하는 여배우들에게 수녀 같은 사생활을 기대했다. 그 와중에도 ‘노브라’를 외쳤던 전도연을 비롯해 전희경, 이재은, 엄정화 같은 여배우들은 멋졌다. 백지영과 오현경이 그런 일을 겪고도 숨지 않고 포기하지 않아 멋지다. 조혜련과 김미화, 이경실은 ‘웃기는 여자들은 더욱 아무렇게나 취급당해도 괜찮다’는 남자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증거로 이용됐지만 그녀들 스스로 살아낸 삶으로 그게 틀렸다는 걸 증명했다. 왜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증명을 해내야 하나. ‘페미니즘’이란 단어조차 없던 시대, ‘남자는 딱 세 번 울어야 한다’고 해서 TV 드라마에선 남자들이 우는 모습을 절대 볼 수 없던, 남자와 여자가 같이 모텔에 들어가도 여자가 ‘헤픈 년’이고, 불륜을 저질러도 여자가 더 나쁘고, 잘난 남자를 만나면 여자가 ‘꽃뱀’이었던, 여자 고위 공직자는 단 한 명도 없던 시절, 그런 엿 같은 시대를 온몸으로 맞선 여자들이 있다. 이 중엔 우리 엄마도 있다. 나에겐 ‘태희 혜교 지현’보다 훨씬 멋진 여자들이다. 혼자 사는 내 친구는 여전히 온라인 쇼핑할 때 택배 받는 사람 이름을 ‘김힘찬’ 남자 이름으로 적어 넣는다. 사내 성희롱을 고발해 재판까지 간 후배는 결국 회사를 나왔고, 가해자 남성은 같은 회사를 잘 다니고 있다. 우리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페미니스트다. 페미니스트가 되고 말고의 선택권은 남성들에게만 있다. 우리는 모두 ‘생존자’다.


코로나19 글로벌 팬데믹을 멕시코에서 보낼 때였다. 봉쇄로 인해 수많은 학대에 시달리던 멕시코 여성들이 자신을 때리는 남편과 한집에 꼼짝없이 갇혔다. 전염병을 이유로 경찰도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때 내가 지내던 지역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이건 제 전화번호예요. 만약 당신이 언제든지 위급한 상황에 처한다면 이 번호로 전화해 수제 비누를 주문하는 척하세요. 그럼 내가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바로 경찰을 보낼게요.” 여자가 겪을 수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 헤아릴 수 있는 건 결국 여자뿐이다. 20년 전과 지금 달라진 게 있다면 여성 스스로 남성 중심의 문화를 더욱 견고히 하도록 도왔던 스톡홀름 신드롬에서 빠져나와 여자들이 서로를 적대시하는 대신 연대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이다.


아빠는 항상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에서 나는 그런 예를 아직 보지 못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박근혜만 해도 알아서 내려오는 대신 시민이 끌어내렸다. 타임라인 상 인과관계가 실시간으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아래에서 끌어내린 게 맞다. 하지만 아빠의 말이 맞는다면 여성들은 연대하고 목소리를 내야 하고, 권력을 가진 남성들이 여성들을 지지하고 이해하며 권력을 내려놓아야 한다. 성소수자의 인권 운동은 이성애자들의 서포트가 더해지면서 힘을 얻는다. 흑인의 인권은 백인이 ‘BLM’ 운동에 참여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장애인의 인권은 비장애인이 함께 함으로써 나아진다. 한국 노동 문제가 제 자리인 이유는 한국의 부자들이 노동자와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의 인권 운동에 남성이 참여한다면 다음 세대의 미래는 오늘보다는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


20여 년 전엔 뉴욕에 살며 파티를 즐기고 칼럼을 쓰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처럼 살고 싶었다. 하지만 살면서 경험치가 늘고 머리가 굵어지고 나만의 세상 보는 눈이 생기면서 캐리는 이제 다르게 보인다. 먼저 현실적으로 칼럼 쓰며 버는 돈으로 뉴욕에 집을 구할 수 없다. 명품을 휘감고 파티를 다닐 수도 없다. 캐리는 ‘금수저’가 분명하다. 그들이 즐기는 브런치는 내가 하루에 먹는 삼시 세끼를 합친 것보다 비싸다. 남자 없이도 가능한 독립적인 싱글의 삶을 외치던 캐리는 결국 미스터 빅에 인생을 바쳤다. <섹스 앤 더 시티> 속 네 명의 뉴요커 여성들 역시 꿈만 꾸다 현실로 돌아갔다. 모든 시즌을 찬찬히 여러 번 보다 보면 <섹스 앤 더 시티>는 다시 한번 여자들에게 헛된 신데렐라의 꿈을 심어주는 드라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세상 여자들이 신데렐라의 꿈을 잃지 않아야 패션 업계 명품 브랜드 매출이 늘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드라마 속 네 여자들의 우정도 판타지였다. 실제 <섹스 앤 더 시티>의 사만다를 연기했던 킴 캐트럴은 캐리를 연기한 사라 제시카 파커가 자신을 소외시키고 괴롭혔다며 이번에 새로 찍는 리부트에 출연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모든 게 혼란스럽고 무기력하고 절망적일 때 나는 모든 관계에서 빠져나와 온전히 나를 위해 시간을 쏟았다. 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남자 말고 나라는 사람부터 제대로 알고 싶었다. 내가 나라는 사람에 호감이 가야 시간을 갖고 관찰하는 것도 할 수 있는 건데 그동안 나는 그러질 못했다.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에만 시달렸다. 나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시간을 내어 관찰하고 공부하자 안갯속처럼 희뿌옇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닥까지 가라앉은 자존감을 찾아 끌어올리고, 타인의 사랑과 관심이 아니어도 나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여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은 나아졌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은 여자로서의 자존감도 품게 했다. 그것을 여태 다른 사람과 관계를 통해 얻으려고만 했는데 스스로 구하니 구해졌다. 나는 물과 빛, 꿀로 만들어졌으며 언제고 필요하다면 쓸 수 있는 매서운 향신료도 준비돼있다. 나는 소중한 존재이자 우주와 자연의 값진 구성원이다. 스스로 온전히 인생을 노래하고 춤출 수 있다. 나는 혼자서 외딴 정글을 헤매고, 도시의 밤을 만끽하고, 커피숍에 앉아 글을 쓴다. 나는 나를 위해 근사하게 차려 입고, 또 나를 위해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웃는다. 모든 것엔 사랑이 가득해야 하지만, 모든 것이 로맨스가 없으면 무의미한 것처럼 굴지 않는다. 온전히 나로서 매 순간에 존재하고 나로서 행복하다. 더 이상 나는 그 어떤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 캐릭터에 나를 대입시키려 하지 않는다. 나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존재다. 나는 스스로 아름답고, 또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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