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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의 외인구단

by 조하나



‘낭만의 밀도’에서 이어집니다.







공포의 외인구단



나에게 서른은 인간관계에 있어 큰 전환점이 되었다. 친구들은 홍해 갈리듯 ‘기혼 반’ ‘미혼 반’으로 나뉘었다. 결혼 후 워킹맘으로 독박 육아하는 친구들은 자연스레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겨우 10년 전이었는데, 그땐 그게 모두에게 너무 당연했다. 심지어 여자들끼리마저 당연했다. 가끔이라도 겨우 보는 친구들의 얼굴은 많이 상했다. 볼이 파이고 눈이 꺼졌다. 아이 때문에 얼른 집에 들어가 봐야 한다는 친구는 뜨거운 커피를 호호 불어 얼른 마셨다. 시간 뺏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괜히 짠한 마음에 ‘OO야-’ 하고 친구를 불렀는데, 갑자기 그녀가 울먹거린다. 언젠가부터 ‘△△ 엄마’로만 불렸지 자기 이름으로 불리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고. 이후 나는, 아이가 있는 여자들을 만나면 의식적으로 반드시 이름을 묻고 부른다.


다들 이미 시작한 무언가에 다른 걸 얹어가는 듯 보였다. 이십 대부터 다닌 직장, 교제해온 연인에 ‘결혼’이나 ‘출산’ ‘내 집 마련’ 같은 타이틀을 얹어 삶을 확장시켰다. 언제나 그렇듯, 이 세상은 나만 빼고 돌아간다. 하지만 괜찮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겐 맞질 않는다. 이유도 의미도 없이 남들이 그리 산다고 해서 나도 묻어가 버리면 재미없다. 어차피 나에겐 무언가를 더 확장시킬만한 것 자체가 없었다. 가진 게 없기 때문이었다. 말 그대로 ‘0’에서 또다시 시작이었다. 세상은 넓고, 해야 할 일도, 만나야 할 사람도 많다.


나이 서른에 글 쓰는 노동자가 되었다. 명함을 받았다. 내 이름 석 자 옆에 ‘Editor’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끝없이 자기 검열하며 온 생을 살아온 터라 남들이 괜찮다고 해도 스스로 자책을 만들어 한다. 이게 내 삶에 독이 되기도, 득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명함 한 장이 주는 안정감이 크다. 소속감도 있다. 불안감은 일시적으로 줄어든다. 이래서 사람들이 명함에 그리도 힘센 회사 이름과 직책을 집어넣으려 기를 쓰고 노력하지 싶다. 나는 그렇게 준비도 없이 에디터라는 타이틀부터 덥석 받았다. 잡지사 이름은 힘이 세지 않았다. 아직 창간도 안 한 잡지였다. 창간이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첫 직장 출근한 지 일주일도 안 돼 한겨울 새벽 테헤란로에서 퉁퉁 부은 맨다리로 하이힐을 꺾어 신고 회사로 복귀하는 대신 집으로 가겠노라 다짐했을 때, 내 평생 또다시 강남에 발붙일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굳이 따지자면 나는 강남보다 강북에 어울리는, 강북에서도 홍대에만 집착했던 아이였다. 그런데 이제 매일 왕복으로 강을 건너 압구정에 있는 잡지사로 출근하게 된 거다. 이상했다. 인디 아티스트와 스트릿 문화를 다루겠다는 독립 매거진 사무실이 강남에 있는 게. 수도권에서 강을 건너 회사에 출근했다가, 인터뷰를 위해 도로 강을 건너 홍대나 이태원에 갔다가, 다시 강남 사무실로 돌아갔다 퇴근해 또다시 강을 건너 집으로 가는 이상한 동선을 반복했다.


미스터리는 머지않아 풀렸다. 일찌감치 90년대부터 미국 힙합과 스트릿 문화, 일본의 펑크 문화 등을 한국으로 들여온 게 대부분 경제적으로 부유한 유학생들이었다. 그들의 한국 베이스는 강남이었고. 인디 문화를 다루는 잡지를 만들겠다는 발행인이나 회사 대표도 다들 강남 토박이들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스트릿 문화는 진정성보단 쇼윈도 형식에 가깝다. 역사도 짧다. 대부분 미국과 일본의 그것을 카피하는 데에서 출발했다. 그런 한국의 기형적인 스트릿 문화와 인물을 최대한 가깝게 들여다보고 글을 쓰는 건 여전히 멋진 일이었다. 어쨌든 내가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 사람들과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관찰하고 기록하게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한국의 인디 컬처 독립 매거진을 만들고 싶어 모인 발행인과 편집장 아래로 경력직 기자 하나와 신입 기자 하나가 뽑혔다. 짜고 친 고스톱처럼 경력직 기자로 온 선배의 이름은 ‘나하나’였다. 기자 경험은 전무하지만, 선배보다 나이 많은 신입 기자가 바로 나, ‘조하나’였다. 간혹 독자들이 잡지 크레딧에 오른 두 기자 이름은 의도된 필명이냐는 질문을 하기도 했다. 하나 선배도 나도, 본명이었다. 선배는 문창과 졸업 후 꾸준히 잡지계에서 경력을 쌓아왔다.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꺄르륵 소녀같이 웃는 선배는 늘 따뜻한 글을 썼다. 반면 나는 잡지 경험도 글쓰기 경험도 없이 홍대 스트릿에서 구르다 얼떨결에 에디터가 된 케이스였다. 까칠하고 시니컬한 쪽에 가까웠다. 선배는 뮤지컬 잡지 출신이라 공연과 배우 쪽을 맡았고, 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홍대 클럽 출신이라 음악과 라이브 공연 쪽을 자연스럽게 맡게 됐다. 이름은 같고 성격과 스타일은 극과 극인 두 ‘하나’가 한 권의 잡지에서 만들어내는 밸런스는 꽤 멋졌다. 편집장은 이미 다 계획이 있었다.


우리가 좋아하는 걸 사람들에게 알리는 잡지를 만들어보자고 했다. 순수하고도 순진한 창간의 변이었다. 잡지 경험이 전무한 나는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배움이었고, 재밌었고, 신기했다. 막상 창간지 준비가 시작되자, 달리는 일손에 기자 둘이 매달 책 한 권을 만들다 보니 작업량이 상당했다. 일을 따로 배울 시간이 없었다. 기획안부터 막막했다. 아이템 회의에서 ‘발제’는 뭐고, ‘꼭지’는 뭔지, 기본적인 잡지 출판 용어도 모르는 상태에서 나는 책의 반을 채워야 하는 책임을 맡았다. 인턴 기간 동안 일을 먼저 배우고 내 이름 박힌 기사를 쓰는 입봉은 한참 후에나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창간호와 동시에 입봉 하는 신입 기자라니! 정기자 명함 받으려면 이삼 년 어시스턴트 생활을 해도 될까 말까인데, 돈 없고 힘없는 신생 잡지에서 나는 되레 날개를 달았다.


잡지에 대해, 취재에 대해 조금도 몰랐던 도화지 같던 내가 낸 창간호 아이템은 이랬다. 당시 박웅현의 책을 읽고 있어서 박웅현을 인터뷰하고 싶다고 했고, <어둠 속의 대화> 전시에 다녀온 직후라 그 이야길 했고, 홍대 놀이터에서 매일 저녁 탭댄스를 접목시킨 라이브 밴드 공연을 하는 ‘사운드박스’라는 팀의 사연이 궁금해 또 그들 이야길 했다. 그랬더니 편집장이 모두 ‘오케이’ 해버리는 게 아닌가.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아직 창간도 안 한 잡지에서 인터뷰해달라고 요청하면 나라도 안 할 것 같았다. 의기소침해졌다. 거절당할 이유만 수십 가지를 생각하고, 한숨만 수십 번 쉬다가 결국 포털에 TBWA를 검색해 대표번호로 전화를 걸어 무작정 박웅현 선생님을 바꿔 달라고 했다. 그리고 아주 솔직하고 수줍게 얘기했다. 이제 갓 창간을 앞둔 독립 매거진인데, 선생님 책을 너무 잘 읽어 꼭 만나 뵙고 인터뷰하고 싶다고. 일면식도 없고 선생님 바쁜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내 기자 커리어에 있어 최초의 인터뷰이가 될 테니 시간을 내어주실 수 있냐고. 그는 흔쾌히 인터뷰를 수락했고 바쁜 스케줄에도 어렵게 시간을 쪼개 내어주었다.


인터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질문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사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기존의 한국 잡지의 딱딱한 문체와 어투, 거만한 애티튜드가 싫어 우리는 인터뷰를 그대로 살리는 구어체를 쓰기로 했다. 구어체를 그대로 옮기다 보면 ‘~했구요’라는 표현이 많은데 표준 맞춤법에 의하면 ‘했고요’로 고치는 것이 맞지만, 우리는 인터뷰 말의 맛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맞춤법을 어기고 이대로 책을 냈다. 인터뷰이와 인터뷰어가 서로 반말로 대화했다면 그대로 지면에 옮겼다. 최대한 현장감을 살리려 했고, 강한 펀치의 질문이 나오기 전후의 스토리 흐름도 인터뷰 기사에 실었다. 인터뷰하는 도중 자연스럽게 찍은 사진들을 썼다. 패션지가 쓰는 유광지를 쓰는 이유는 광고 상품과 브랜드 제품이 잘 나와야 하기 때문인데 글을 읽기엔 영 눈이 불편하다. 우리는 패션지가 아니고 광고도 그리 많지 않아 글이 많은 책에 좋은 종이를 썼다. 글을 읽기에 눈이 편했다.


기자가 되기 전까진 ‘언론은 객관적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는 말을 막연하게 받들고 살았는데, 기자가 되어 기사를 쓰면서 정반대로 바뀌었다. 인터뷰어가 던지는 모든 질문엔 자신의 가치관과 색깔, 방향,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이걸 억지로 숨기고 객관적인 척하는 것보다 자신을 드러내며 인터뷰이와 다른 생각으로 부딪히는 갈등, 함께 하는 공감이나 연대 역시 드러내는 게 좋은 기사라는 생각이다. 내가 독립적이고 독창적이며 나만의 스타일을 가진 기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편집장이다. 기획, 취재, 기사 송고, 모든 과정에 있어 그녀는 최소한 개입했다. 스스로 깨치며 단단해질 거란 믿음이 있어 그랬다고, 그녀는 몇 년 후 나에게 그 이유를 들려줬다.


기자 둘이 매달 책의 반을 나눠 채웠다. 기획하고, 취재하고, 섭외하고, 인터뷰하고, 사무실에 돌아와 인터뷰 녹취를 풀고, 기사를 쓰고, 사진을 고르고, 편집 디자이너와 머리를 맞대고 페이지 디자인을 고민하고, 3차에 이르는 교정까지 보고 나면, 충무로 인쇄소에 가서 감수까지 했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았다. 한 달 중 마감 일주일은 꼬박 밤을 새웠다. 수년 후 대형 패션지로 옮겨 일을 해보고 나서야 우리가 그렇게 일했던 게 미친 짓이었다는 걸 알았다. 대부분 잡지사엔 녹취해주는 인력도, 교정 인력도, 감수 인력도 모두 따로 있었다.


우리는 마치 ‘공포의 외인구단’ 같았다. 잡지는 하늘이 무너져도 매달 같은 날 나와야 했다. 끝내주게 멋진 잡지를 만들면 광고가 저절로 붙을 거란 순진한 기대는 곧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상업 패션지가 아닌 이상 어차피 인디 잡지로 돈을 벌 수 없다는 걸 우린 모두 깨달았다. 잡지로 돈을 벌려면 연예인을 섭외해 협찬 명품을 입히고 화보를 찍어 실어야 했는데, 그들은 우리 관심 밖이었다.


잡지사는 이벤트 대행으로 따로 돈을 벌어야 했다. 가난한 잡지사 기자들은 그 일도 도와야 했다. 각종 페스티벌 및 공연에 마라톤 행사까지, 신나게 전국을 휘젓고 다녔다. 백스테이지에서 진행을 돕다가 아티스트를 만나면 갑자기 인터뷰나 취재도 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 정말 재미있게 일했다. 인기도 없고 큰돈도 못 벌지만, 누구보다 멋진 일을 한다는 자부심이었다. 실전에서 부딪히며 일로 일을 배웠지만, 이십 대에 넘어지고 일어났던 많은 경험이 보호대가 됐다. 이십 대에 방황만 하며 채운 불안정한 경험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그로 인해 내가 기자로서 만난 이들과의 대화가 훨씬 깊고 단단해졌다.


이름 없는 잡지라고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우리가 만든 책이 쌓이자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잡지 업계의 다른 매체 에디터들도 늘 꿈꾸던 잡지가 드디어 나왔다고 응원을 보내왔다. ‘이 친구들, 꽤 멋진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야’라며 섭외에 흔쾌히 응해주는 이들도 많았다. 정말 만나고 싶은 인터뷰이를 섭외할 땐 지난 책들을 몇 권 추려 정성스럽게 쓴 손 편지와 함께 보냈다. 나는 이렇게 멋진 인터뷰를 하고 기사를 쓰는 사람이니 원한다면 인터뷰에 응해주세요, 하는 의미였다. 그럼, 언제나 긍정의 답이 돌아왔다. 진심은 배신하지 않았다.


홍대 밤거리를 정처 없이 헤맨 숱한 밤들,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로 바글거리던 홍대 길바닥에 혼자 앉아 숱하게 태운 담배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데 남들이 정신 차린 척하니 괜히 나도 무언가 깨달은 척했던 기만의 시간, 그 이유 없는 목마름과 방황, 실패엔 모두 이유가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 마음을 뜨겁게 덥혔다. 예술가로서의 방황과 고뇌와 슬픔과 절망에 공감할 수 있었다. 어느 지하 라이브 클럽, 듣는 이 하나 없어도 연주를 이어가는 밴드 공연을 보고 그저 노래가 너무 좋아 즉석에서 인터뷰를 청하기도 했다. 내 눈엔 그들이 누구보다 멋졌다. 머리 조금만 써서 계산기 두드려 보면 전혀 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선택한 삶, 그 삶으로 만든 노래에 대한 리스펙을 가지고 인터뷰를 시작하면, 누구 하나 마음을 열지 않는 이가 없었다. 상처받은 자는 다른 사람의 상처를 알아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연대뿐이었다.


2010년대에 이미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아이돌 문화 산업이 더욱더 몸집을 키우면서 인디 음악은 제대로 자리 잡을 기회조차 없었다. 흩뿌려진 물감처럼 홍대와 이태원 이곳저곳에서 음악을 하던 이들은 그저 제 할 일을 꾸준히 했다. 음악을 만들고 공연을 하는 일. ‘어차피 우린 안 될 거야’라는 무기력함과 잉여로움이 인디 음악의 캐릭터가 되어가는 게 나는 가장 못마땅했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폭력적이고 추하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큰 영향력을 가진 방송국 사람들은 끝내 한국 음악계를 아이돌로 채워버렸다. 직접 곡을 만들고 연주하는 인디 밴드와 비교했을 때 아이돌은 무대 만들고 MR만 틀면 끝이다. 콘텐츠 반응도 즉각적이고 이를 재가공해 해외 수출까지 할 수 있다. 들인 비용에 비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밴드 한 팀 음악 방송에 출연시키려면 사전 음향 준비부터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시간도 많이 들고 돈도 많이 들고 골치도 아프다.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이 들고 그에 비해 수입은 많지 않다. 투자 대비 이익, 철저한 경제적 논리만 적용된다. 게다가 방송국 사람들은 인디 음악 소개에 공을 쏟을 시간도 애정도 없다. 그렇게 대한민국 ‘HOT 100’ 리스트가 만들어진다. 음악 좋아한다는 사람이 자신의 취향을 발견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나 시간 투자 없이 ‘HOT 100’ 리스트를 플레이한다면, 나는 얼른 도망부터 가겠다.


애증의 나라 일본은 인디 뮤지션들이 <무한도전> 같은 프로그램에 나오지 않고도 인디 씬에서만 자신들이 하고 싶은 라이브 공연만 하면서도 생계유지가 가능한 음악 시장을 가졌다. 기본적으로 인구가 1억 이상은 되어야 인디 문화가 발전할 수 있단 이론에 ‘인디 음악 씬이 돌아가려면 우린 통일부터 해야겠구나’ 생각한 적도 있다. 문화에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하면서도 소줏집에 앉아 인사불성이 될 만큼 술을 들이부을 시간은 있는, 피곤하고 스트레스 많은 직장인이 많은 사회에 인디 음악 씬이 커질 리가 없다. 나 역시 문화 씬을 기웃거리는 게 업이 아니었다면 어려웠을 일이다.


음악이라는 예술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낭만도 존중받지 못한 시대가 되어 버렸는데, 아무도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문화를 탐닉하며 돈까지 벌 수 있다는 건 에디터의 특권이니 나는 이왕 하는 거 그 특권을 제대로 써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인디 뮤지션을 만나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답은 없지만 몇 년을 그렇게 떠들었다. 적어도 우리는 문제를 바라만 보다 체념해버리진 않았다. 계속해서 바락바락 소리 지르고 따지고 질문했다. 정작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뭐 그리 떠들기만 하냐 해도 어쩔 수 없다. 결국 모든 게 소용없었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래도 따지고 떠들고 끊임없이 시끄럽게 굴어야 뭐라도 바뀐다는 생각엔 변함없다. 그때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정말 멋있었다.


나는 늘 현장에 있는 에디터가 되고 싶었다. 내가 인디 씬에 있는 친구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그들의 노래를 듣고 계속해서 그에 대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그게 바로 내가 할 일이었다. 텅 빈 공연장에서 듣는 이 없이도 모든 것을 다해 노래하는 이들처럼 나 역시 내 글을 보는 이가 없더라도 책을 만드는 건 의미 있는 거라 마음을 다독이곤 했다. 정말 좋은 음악과 뮤지션이 있는데 알고도 안 듣는 것과 몰라서 못 듣는 건 엄연히 다르다. 적어도 좋은 음악을 몰라서 못 듣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게 내가 <파운드>라는 독립 잡지에서 음악 전문 에디터로 수년간 일하며 끊임없이 되뇐 명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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