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으로 출발했던 아빠와 엄마는 딸 하나 낳아 키우면서도 맞벌이로 평생을 살았다. 얼마 전 아빠 옆에 앉아 뉴스를 보다 덤덤하게 질문을 던졌다. “아빠, 엄마는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우리는 왜 그리 힘들었을까?” 아빠는 “종잣돈이 없어서”라고 했다. 다행이었다. 개천에서 난 용이 못 되어 내심 미안했는데 아빠는 그런 나를 이해하는 것만 같았다. 내가 어렸을 적 살아온 환경이 경제지표에서 정확히 어떤 계층에 드는지는 모르겠다. <기생충>처럼 비만 오면 물이 차던 반 지하 방에도 있었고, 눈 오는 날 미끄러워 굴러 떨어진 옥탑 방에서도 살았다. 한우는 아니어도 삼겹살은 먹고 싶을 때 먹었다. 아빠, 엄마는 하나뿐인 딸 곁에 있어주지 못할 정도로 늘 바쁘게, 그리고 열심히 일했는데. 어쩜 그리 꾸준히도 못 살았는지, 대단할 정도다.
결혼은 당시 어렸던 아빠, 엄마에게 모두 ‘탈출’이었다. 고졸인 엄마에겐 연대생 아빠가 탈출구였다. 결혼을 하고 보니 아빠는 재산 증식엔 관심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결혼으로 가난한 집 장남에 대한 기대와 역할로부터 탈출을 시도했다. 처자식을 위해 회사는 다녔지만 좋아서는 아니었다. 애초에 서로 목적이 다른 탈출이었다. 아빠도 엄마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많이 자주 다퉜다. 서로를 존중치 않는 언어와 행동은 일상이 되었고, 나중엔 싸우지 않으면 불안하고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처자식을 위해 더러운 꼴도 좀 참고, 상사 밑에서 죽는시늉도 좀 하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레퍼토리의 대부분이었다. 그래도 우리 집 형편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못 살아도 화목한 집이 있고 잘 살고도 불행한 집이 있다는데 우리 집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애매했다.
우리 집은 끝내 ‘인 서울(IN SEOUL)’ 하지 못했다. 아니, ‘아웃 서울’이라고 해야 하나. 청량리 허름한 동네에 친가가 있었는데, 아빠는 대학 졸업 후 취업과 동시에 처자식을 데리고 독립했다. 지방 곳곳을 돌다 결국 교과서에 ‘위성도시’라 소개되는 서울 주변의 인구 밀도 높은 신도시에 자리 잡았다. 윗집과 아랫집이 언제 먹고 언제 씻는지 알 수 있을 만한 다세대 주택에서 오래 살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신도시 아파트 단지 이름으로 평수가 가늠 잡히는 동네였다. ‘중흥마을’ ‘은하마을’은 학교 운동장만큼 넓은 부자 아파트였고, ‘설악마을’ ‘한라마을’은 집 전체 크기가 앞집들 거실만한 곳이었다. 그렇게 친구들은 나뉘었고 나는 늘 중간에 있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과외 한 번 안 하고 전교 3등까지 했다. 공부하는 요령이 있었고, 재미도 있었다. 비평준화 지역이라 고등학교 진학을 시험 성적으로 결정했다. 나처럼 각 중학교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아이들이 모인 명문 여고에 진학했다. 내 생애 ‘명문’이라는 타이틀을 가져본 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입학 첫날부터 10시까지 납작 엎드려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시험 시즌 때면 거품 물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시험 문제 하나에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며 서로를 물고 뜯는 걸 보면서, 값비싼 과외에 치여 사는 아이들을 보면서, 진한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이것저것 바리바리 싸다 선생님에게 바치는 엄마들을 보면서, 나는 안 되겠다 싶었다. 하고 싶지도 않았다. 목적도 이유도 못 찾았다.
고등학교 내내 학교 밖 친구들과 어울렸다. 대부분 중학교 때 어울리다 성적 커트라인 때문에 모두 다른 학교로 흩어진 아이들이었다. 도통 학교에 적응을 못해 의무 자율학습에서 도망쳐 친구들을 만나 밖으로 돌았다. “너 그러다 대학은 어떻게 갈래?” 담임의 말에 난 늘 이렇게 답했다. “저 예체능으로 갈 거예요, 대학. 레슨 받고 있어요.” 거짓말이었다. 선생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SKY에 갈 아이들이 줄을 섰다. 대학 말곤 나에게, 아니 모든 아이들에게 관심 없던 선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집은 늘 비었고 컴컴했다. 내가 길을 잃은 건 분명했는데 그땐 아빠, 엄마도 길을 잃은 듯 보였다. 그렇게 꾸역꾸역 학교를 다녔다. 밤에 집엔 안 들어가도 교복을 싸가지고 나와 다음 날 학교엔 갔다. 나는 그랬다. 애매했다. 화끈하게 놀지도, 화끈하게 공부하지도 못했다. 딱히 다른 것도 없었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로 세상을 부유했다. 방황하던 나에게 아빠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며 한 말이 있다.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당장 학교 때려치우고 시작해라. 미용사가 되고 싶으면 미용 학원에 가고, 엔지니어가 되고 싶으면 기술을 배우고. 그게 아니면 학교로 돌아가라.” 나는 학교로 돌아갔다. 얼마나 치욕스러웠는지 모른다. 하고 싶은 걸 안다는 건 어떤 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왜 나는 그런 게 없는 건지, 왜 인생은 이렇게 시시하고 답답하고 재미없는 건지. 답이 없는 내가 한심했다.
대안이 없어 결국 수능을 봤다. 내신이 바닥이라 수능 점수만 반영하는 특차로 대학을 가야 했다. 조금 무리하면 서울에 소재한 여대도 갈 수 있다는 담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한 성별만을 모아놓은 학교는 시대착오적이라 생각했다. 내 인생 ‘여고’ 한 번이면 충분했다. 그렇게 인천에 있는 인하대에 입학했다. 공대만 유명했지 다른 건 별 거 없는 애매한 대학이었다. 전공을 골라야 했다. 당시 수능 점수 만점이 400점이었는데 360점을 받았다. 40점 모두 수학에서 잃었다. 꼭 이럴 때만 내 인생은 극단적이다. 당시 입시제도는 총점 반영이었다. 문과가 수학을 잘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못 하면 치명적이었다. 1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기가 가능했고, 수능 성적표에는 전국 백분위 %가 표기됐다. 입시 제도를 관리하는 나라 입장에선 더할 나위 없이 효율적이고 간단한 시스템이었다. 고등학교 때 직업 적성 검사 같은 걸 몇 번 했으나 쓸데없는 짓이었다.
세상은 나에게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되고 싶은 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역설적으로 그때처럼 앞이 캄캄했을 때가 없었다. 막연하게 심리학이나 철학을 배우고 싶단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세상에서 가장 돈 안 되는 전공이라 스스로 제외했다. 엄마, 아빠는 내 전공 선택에 딱히 관심도 간섭도 없었는데, 저 말은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신자유주의 물결이 일렁이던 시대였고 돈 못 버는 인문학의 몰락과 돈 잘 버는 뉴미디어 관련 학과의 출현이 드라마틱하게 오버랩됐다. 나름 ‘서태지의 시대’에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런 입시 교육의 희생양도 우리가 마지막 세대일 거라 생각했다. 순진했다. 고졸인 김대중 대통령 정권 아래 고등학교를 자퇴한 서태지의 ‘교실이데아’를 들으며 살아온 나에겐 괴리감이 컸던 현실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한 게 없다.
대학에 진학할 때도, 전공을 고를 때도 나는 애매했다. 대안이 없어 의미도 목적도 흥분도 호기심도 없이 결국 가장 폼 나고 돈 잘 벌 것 같은 언론정보학과를 선택했다. 신문방송학과가 밀레니엄 시대에 발맞춰 이름을 바꾼 거라고 했다. 뭘 배우고 뭘 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같은 학부에 속해있던 정치외교학과에 더 관심이 있었는데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곳이라고 했다. 막연하게 한국과는 다른 문화, 다른 사고방식에 호기심을 가졌던 것 같다. 전교 3등이던 중학교 시절엔 외교관이 꿈이라고 적곤 했는데 어떻게 하면 외교관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길은 없었다. 내신이 바닥이던 고등학교 땐 그저 대학에 가려고 수능을 보고 점수에 맞춰 전공을 골랐다. 아무도 나에게 그 이상의 관심과 시간을 들여 나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 이전 세대들이 그랬듯 나 또한 암묵적으로 촘촘히 짜인 사회 시스템의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그 길에서의 이탈 시도가 성공했다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그렇게 나는 새로운 세기의 얼떨떨함과 당혹스러움을 희망으로 둔갑해 서로를 속고 속인 시대의 산물, 00 학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