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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하나 Feb 05. 2021

삶이 엿 같은 음악을 틀어준다 해도

영화 <베이비티스>


이 영화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네가 내 세계로 뛰어들었다



<베이비 티스> 국내 개봉 포스터



장르 코미디

국가 오스트레일리아

러닝타임 117분

한국 개봉일 2020년 10월 22일

감독 섀넌 머피(Shannon Murphy)

각본 리타 칼네제이스(Rita Kalnejais)

출연 엘리자 스캔런 (Eliza Scanlen), 토비 월레스(Toby Wallace)

       벤 멘델슨(Ben Mendelsohn) , 에시 데이비스 (Essie Davis)

수상내역 2019 18회 마라케시 국제영화제(남자연기상)

                     17회 자그레브 영화제(관객상)

                     15회 취리히 영화제(특별언급)

                     76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2관왕 / 황금사자상 후보


                      <인디와이어> 선정 올해의 영화

                      <버라이어티> 선정 주목할만한 감독

                       <로튼 토마토> 지수 94%







<베이비 티스>는 동명의 연극을 바탕으로 한 리타 칼네제이스(Rita Kalnejais)의 각본을 바탕으로 내년 머피가 감독해 작년에 발표한 호주 성인 코미디 드라마 영화이다. 섀넌 머피는 배우 출신의 신예 여성 감독으로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BBC 아메리카의 인기 TV시리즈 <킬링 이브> 시즌 3의 에피소드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녀는 첫 장편 데뷔작 <베이비티스>로 ‘주목할만한 신예 감독’ 타이틀을 얻었다. <베이비티스>는 암으로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틴에이저 밀라가 우연히 약물중독에 아무렇게나 살고 있는 듯 보이는 모지스를 만나며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작은 아씨들>의 엘리자 스캔런과 넷플릭스 시리즈 <더 소사이어티>의 토비 월레스가 각각 밀라와 모지스를 연기했다.




<베이비티스> 스틸 / (c) 엠엔엠인터내셔널㈜




시한부 소녀의 뻔한 첫사랑, 순정파 이야기를 탈피하다



영화 <베이비티스>엔 의사가 나오는 장면이 단 하나도 없다. 병원에서 항암 치료로 사투를 버리는 밀라의 힘겨운 모습도 없다. 영화 내내 밀라가 정확히 어떤 암에 걸렸는지 관객들은 병명조차 모른다. 그저 관객은 여러 가지 장치들로  ‘아, 이 소녀가 얼마 못 살겠구나’ 정도 짐작만 할 뿐이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밝고 톡톡 튀는 비비드 색감을 이용한다. 영화 안에 작은 에피소드들이 시작하는 장면마다 비비드한 컬러로 들어간 타이틀도 감각적이다. 


다가오는 소녀의 죽음을 영화는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순간순간을 예쁘게 장식하는 의식에 더 가깝다. 밀라가 입는 옷부터 행동, 말투까지 누가 봐도 그녀는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고 눈치채기 어렵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그 어느 누구보다 살아있다.


<베이비티스> 스틸 / (c) 엠엔엠인터내셔널㈜



밀라의 삶에 뛰어든 모지스
모지스의 삶에 뛰어든 밀라

하지만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밀라를 둘러싼 세상의 모든 이들은 그녀를 마치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져 버릴 것처럼 대한다. 그녀의 삶에 우연히 뛰어든 모지스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 애초에 모지스는 밀라를 선택했다기보다 ‘돈이나 좀 뜯어볼까’ 하는 심산이었는데 밀라는 그 찰나를, 모지스를 꽉 부여잡는다.


약물중독에 홈리스인 모지스를 붙잡은 건 죽음에 대한 밀라의 반항심이 아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밀라가 선택할 수 있는 걸 보여준다. 죽음을 향해 가는 길, 밀라는 자신을 깨질 유리처럼 대하지 않는 모지스를 선택했다. 가끔 밀라가 카메라를 쳐다보며 찡긋하는 눈빛을 보내는 것도 어쩌면 밀라에게 관객(우리들) 역시 모지스처럼 그녀의 죽음에 깊이 개입되지 않을 대상이기 때문이 아닐까.



<베이비티스> 스틸 / (c) 엠엔엠인터내셔널㈜



평범한 모든 걸 반짝이게 만드는 것, 사랑


밀라와 모지스의 짜릿하고도 위험한 일탈 중 허름한 가라오케에서 넥타이 풀어헤친 직장인 아저씨가 무대 위에 올라 부르는 ‘Baby’, 여기에 맞춰 아무도 보지 않는 것처럼 아름다운 춤을 추는 밀라와 모지스. 나는 이 장면이 너무 좋았다. 아름다운 노랫말 가사는 전혀 연관 없는 가라오케 비디오 영상과 맞물리고 이를 배경으로 춤추는 둘은 그저 세상의 전부다. 어제도 내일도 없는, 그저 지금, 이 순간만 있다. 그게 사랑이고, 사랑의 힘이다. 앞으로 영원할 거란 약속 없이도, 과거의 거창한 히스토리 없이도, 지금, 이 순간을 가장 아름답고 반짝이게 만들 수 있는 것.





[ 베이비티스 OST 플레이리스트 ]


‘Baby’는 도니 앤 조 에멀슨(Donnie & Joe Emerson)의 올드 팝송인데 내가 워낙 좋아하는 노래라 이 장면에서 맘속으로 돌고래 소리를 질렀다(개인적으로 아리엘 핑크(Ariel Pink)와 히포 캠퍼스(Hippo Campus)가 커버한 ‘Baby’를 좋아한다). 


영화 장면마다 음악을 정말 잘 쓴다. 그리고 춤추는 장면도 많이 나온다. 삶을 노래하고 춤추는 영화의 낙관주의는 시한부 삶을 사는 소녀의 비극과 이상하게도 잘 닿아 떨어진다.



<베이비티스> 스틸 / (c) 엠엔엠인터내셔널㈜



죽음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사람들


밀라의 엄마는 프로로 활동했던 피아니스트 애나, 아빠는 정신 상담가 헨리이다.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이 가족은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그들이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은 오직 딸의 다가오는 죽음. 보이진 않지만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그들을 옥죄어오는 딸의 죽음 앞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절망과 무기력을 어떻게 겪어 나아가는지 영화는 너무 많은 설명을 하지 않지만, 또 너무 무심하지 않게 그들의 감정 역시 잘 담아낸다.


약도 챙기지 않은 채 모지스를 만나러 사라진 밀라를 찾아 헤매는 애나와 헨리는 크게 다툰다. 절망과 무기력과 외로움을 호소하는 애나를 헨리는 나무란다.


“지금 이건 당신에 대한 게 아니야! 당신 감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


무너져내리는 애나에게 소리치는 헨리가 밉지 않다. 그 역시 삶이 고통이다. 


영화는 말한다. 애나와 헨리의 감정, 떠나갈 사람을 보내는 걸 능숙하게 해내지 못하는, 무너져 내리고 당황하고 방황하는 애나와 헨리의 감정 역시 중요하다고.



<베이비티스> 스틸 / (c) 엠엔엠인터내셔널㈜



Not Enough


프로페셔널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던 애나는 피아노 연주를 멈췄다. 밀라가 어렸을 때 자신이 연주 활동으로 아이와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자책하기 때문이다. 밀라가 애나에게 함께 연주하자며 “어떤 곡을 연주하고 싶어”라고 한 질문에도 “난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져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딴 소릴 하고는 축 늘어지고 만다. 애나는 밀러보다 더 약해 보이는데 오히려 밀라를 늘 “Not Strong Enough”라며 걱정한다. 


헨리가 더 이상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삶에 무너져 내릴 때 앞집 여자 토비, 그녀가 고대하고 있는 새로운 생명, 그녀의 싱그러운 활력과 미소에 매료된다. 


애나와 헨리는 언제나 강하게 아이를 지켜내야 하는 부모의 자리이지만 약하디 약하다. 그들의 절망과 무기력을 밀라는 오히려 강하고 당차게 마주한다. 



<베이비티스> 스틸 / (c) 엠엔엠인터내셔널㈜



선택할 수 없는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걸 찾아낸 밀라



우리는 이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시한부의 삶에서 밀라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에 몰두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어쩌면 밀라는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 중 가장 용감하고 강하다. 


밀라와 모지스의 갈등이 극에 달할 때 그녀는 이렇게 소리친다.


“널 처음 봤을 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냥 넌 아무것도 신경 안 쓰는 것뿐이었어!”


밀라가 말하는 ‘가장 강한 사람’은 자신의 엄마 아빠처럼 자신의 죽음 앞에 어쩔 줄 몰라 무너져 내리는 사람이 아니다. 무심해도 좋으니, 자신의 죽음보다 자신의 생명을 봐줄 사람이 모지스라 믿은 거다. 


밀라는 결국 애나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하게 만든다. 그리고 어린 팅와에게 자신이 연주하던 바이올린을 건넨다. 


밀라가 떠나기 전날, 앞집 여자 토비의 아이가 태어난다. 그리고 밀라는 마침내 모지스를 다시 춤추게 만든다. 



<베이비티스> 스틸 / (c) 엠엔엠인터내셔널㈜



떠나는 아름다운 모습



영화는 밀라가 세상을 떠난 순간에 직접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밀지 않는다. 그저 그녀가 옆으로 돌아 자는 모습에서 그녀의 영혼이 하늘로, 새들의 곁으로 간 거라 보여줄 뿐이다.


어쩌면 밀라는 모지스가 강해서 붙잡은 게 아니라 그가 얼마나 약하고 상처 받은 존재인지 알기에 선택한 게 아닐까. 자신이 떠난 자리에 약하디 약한 사람들, 애나와 헨리, 그리고 모지스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어 살아가길, 그리고 자신을 추억해 주길 원한 게 아닐까.



<베이비티스> 스틸 / (c) 엠엔엠인터내셔널㈜




삶의 희극과 비극 사이 어디엔가



영화에서 애나가 틀어놓은 라디오에 클래식 방송이 흐른다. 진행자는 모차르트의 음악을 배경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이 이상하고 과장된 개성도 모차르트다워요. 비극을 표현하기에 아주 독특한 음악이죠. 늘 세상을 향한 호기심이 있고, 냉소적이지도 않아요. 어둡고 위압적일지 몰라도 본질적으로는 낙천적인 음악이죠. 모차르트는 전성기에 늘 걸작만을 쓴 건 아니지만 25번 교향곡 같은 걸작도 썼어요. 말로 표현하기도 힘든 비범한 곡이죠.”


이 영화의 메시지가 이 장면에 모두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가 정말 생뚱맞게 ‘코미디’ 장르인 이유 또한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삶은 비극인 듯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순간순간 희극일 때가 많다. 비극적인 시퀀스에서 항상 ‘현타’ 오는 유머와 희극 장면을 넣는 봉준호 스타일 영화처럼.


사랑스러운 밀라가 지어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표정,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면서 욕을 내뱉는 아이, 그녀는 그 누구에게도, 관객들조차 자신을 동정하길 원치 않는다. 그저 삶의 순간순간, 아름다운 춤을 출 뿐이다.




<베이비티스> 스틸 / (c) 엠엔엠인터내셔널㈜



삶이 당신을 무대에 올리고 엿 같은 음악을 틀어준다 해도



삶이 당신을 무대에 올려 세운다. 애초에 당신이 선택한 무대도, 당신이 맘에 드는 무대도 아니다. 당신이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세상에서 가장 멋진 춤을 추는 것이다. 아무리 삶이 무대에 오른 당신에게 엿 같은 음악을 틀어준대도 당신은 그저 뻘쭘하게 서있을 수만은 없으니까.


삶에 숨겨진 또 하나의 비밀은, 다른 사람에게 춤을 청해 함께 하면 더 아름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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