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늘 ‘Home’이라 부르는 그곳으로.
구글 세계지도에서 ‘현재 내 위치’를 누르면 한 5년 간은 태국 남동부 바다 한가운데였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그 위치를 멕시코로 옮겼고, 다시 한국, 그리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어마어마한 입국 서류와 호텔 자가격리를 마치고 힘들게 돌아온 태국 남동부 아담하고 외딴섬, 꼬따오. ‘꼬’는 태국어로 섬, ‘따오’는 거북이, 너비 3Km, 길이 7Km의 작은 바위섬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곳에 있는 게 삶에선 중요하다.
팬데믹으로 한국에서 스탠바이 상태로 작년 7월, 멕시코에서 입국한 이후 온전히 여름, 가을, 겨울, 봄, 사계절을 모두 보고서야 다시 꼬따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이빙을 시작하고부터, 해외생활을 하고부터 내 삶은 언제나 30Kg에 들어맞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게 되었고, 내 삶은 단지 트렌드여서가 아닌, 진정한 미니멀리즘과 가까워졌다. 한국에서 팬데믹을 보내는 동안, 다이빙 강사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면서 지난 5년 간의 해외에서의 삶이 아무것도 아니었나, 자존감이 낮아진 게 사실이다. 그럴 때마다 내 경험과 감정들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글로 풀어냈고, 다시 내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고 자존감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특히 이번에 꼬따오로 돌아오는 여정을 준비하면서 내가 5년 간 보낸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여러모로 느꼈다. 내가 다시 꼬따오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준 수많은 사람들. 함께 울고 웃고 부대끼며 다이빙했던 다이브 센터 보스와 동료들, 집주인 부부, 내가 다이빙을 가르쳤던 학생들, 내가 자주 가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친구들 등등 모두 나에게 안부를 물어왔고, 결국 이 섬으로 다시 돌아올 이유가 되어주었다. 엄마와 아빠는 언제나 그랬듯 나를 막지 않았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늘 뒤에서 밀어주고 소리 없이 박수를 보내는 고마운 사람들. 나는 참 복도 많지. 내가 살아온 삶은 결코 하찮지 않다.
내가 트로피컬 아일랜드로 돌아왔다는 징조들 여럿. 의자에 앉아 있으면 엉덩이에 땀이 찬다. 늘 애용하는 코코넛 오일이 한국에서와 달리 하얗게 굳지 않는다. 맨발로 사니 발이 건강해진다. 한낮에 싱크대나 욕실 물을 틀면 햇빛에 데워진 물탱크 물이라 온수 모드를 켜지 않아도 뜨뜻하다. 알싸하고 달콤한 스파이시 향 가득한 공기다. 태국 사람들은 언제나 숫자 ‘5’로 웃는다. 태국어로 5 발음이 ‘하’다. 한국 사람들이 ‘ㅋㅋㅋ’ 하듯 태국 사람들은 ‘555’로 웃는다. 넷플릭스에 접속하면 태국 내 인기 콘텐츠 TOP10에 한국 드라마가 늘 서넛 껴있다. 왕조현과 주윤발, 장국영의 시대를 지나 할리우드 영화와 배우들, 한국 영화를 지키자는 스크린 쿼터제 시대를 지나 <기생충>과 윤여정, BTS와 블랙핑크의 시대다. 태국 외딴섬 꼬따오에서도 태국 사람들과 미얀마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한국 드라마를 보고 있다. 한국에 대한 호감도가 높은 나라에서 산다는 건 확실히 큰 도움이 된다.
이제 막 들어온 태국, 그리고 꼬따오는 코로나 3차 대유행으로 금주령이 내려졌다. 레스토랑에선 식사만 가능하고 술을 주문하거나 마실 수 없다. 집에서도 2인 이상 모이면 술을 마셔선 안 된다는 규제가 시행됐다. 웰컴 투 타일랜드. 태국은 선거날이나 부다 데이, 왕족 생일 등 국경일에도 술을 팔지 않는다. 멕시코도 같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늘어져 선거를 안 하기 때문이란다. 한국 역시 모이지 말라는데 불법 영업 유흥업소에서 여자를 끼고 술 마시는 작자들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졌으니까. 술이 웬수다, 술이. 워낙 술을 잘 못 마시고 좋아하지도 않는 내 일상엔 크게 지장이 없다. 술 마시고 변하는 사람들 없어 더 좋다. 그래도 마실 사람들은 마신다. 이 더운 나라에서 밥 먹으면서 맥주 한 병 정도는 물 대신이니까 주문하면 다른 컵에 몰래 담아 준다. 언제나 어디에나 편법은 있다.
꼬따오는 워낙 외딴 작은 섬이라 태국이면서 또 태국이 아니다. 작은 무정부 국가, 아니 커뮤니티라고 해야 할까. 워낙 아담한 커뮤니티에 팬데믹으로 대부분 여기에서 장기 체류하던 외국인들이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여기 남은 사람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도우며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안다. 경찰들은 사람들을 괴롭히기보다 동네 홍반장처럼 이것저것 잡일을 돕는다. 몇 년 전 꼬따오에 큰 홍수가 난 적이 있는데, 꼬따오에 사는 유러피안들이 판잣집에 살다 큰 비로 갈 곳을 잃은 미얀마 사람들과 태국 사람들을 돕기 위해 쉴 곳을 제공해줬다. 팬데믹 초기엔 로컬들이 돈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료로 음식을 나누기도 했다. 정부의 힘이 크게 닿지 않는 이런 작은 커뮤니티의 거대한 힘에 나는 늘 감동했다. 사람이 몇 십억 짜리 좋은 아파트에 산다고, 몇 억짜리 좋은 차를 탄다고, 인격이 훌륭한 게 아니듯 어떤 커뮤니티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걸, 나는 이 섬에서 깨달았다.
물론 어두운 면도 있다. 다시 돌아온 꼬따오엔 예전보다 길거리를 배회하는 고양이와 개들이 더 많아졌다. 수많은 로컬들이 코로나로 떠나다 보니 버려지고 굶주린 아이들이 더 많아졌다. 꼬따오에 있는 ‘애니멀 클리닉’에서 일하는 수의사들은 모두 자원봉사자들이다. 꼬따오 커뮤니티 사람들이 모은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아이들을 먹이고 보살펴 해외입양도 보내고 있다. 나는 꼬따오의 이 모든 게 감동이다. 내가 꼬따오를 사랑하는 이유다.
한국에서 지내던 지난 열 달 동안 뉴스에선 끊임없이 ‘부동산’ ‘공정’ ‘정의’ 같은 단어들이 나왔다. 5년 전 짐을 싸서 한국을 떠나 꼬따오로 들어왔을 때 나는 이미 모두 흥미를 잃은 단어들이다. 꼬따오는 섬이 워낙 작아 차가 필요 없다. 오직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숙소 픽업 차량 말곤 모든 사람들이 스쿠터를 탄다. 그러니 벤츠나 맥라렌으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려야 할 수가 없다. 일 년 내내 무더운 곳이니 좋은 옷, 좋은 신발도 필요 없다. 플리플랍 하나, 그것도 없으면 맨발이면 족하고, 티셔츠, 반바지 몇 개면 충분하다. 대부분 이 섬의 여자들은 화장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화장하고 하이힐을 신으면 크게 주목을 받는다. 주로 중국인과 한국인 관광객들이 그랬다. 이곳은 휴양지와는 거리가 멀다고, 안 꾸미고 자연스러운 게 가장 아름다운 거라고 아무리 얘기해도 어쩔 수 없다. 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땐 그랬다. 문화는 문화다. 한국에선 내가 화장을 하고 멋진 옷을 차려입고 매장에 들어가야 직원들이 나를 응대했다. 이해한다. 문화와 정서가 이래서 무섭다.
나는 여기 한 달 30만 원짜리 월세를 산다. 자는 시간 빼면 대부분 바닷속에서 시간을 보내니 으리으리한 집이 필요 없다. 여기엔 화려한 집에 사는 이들이 없다. 그런 것 자체가 필요 없는 곳이고, 그런 삶을 바라서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꼬따오에 사는 외국인들 중엔 잘 나가던 기업가도 있고, 의사도 있고, 엔지니어도 있다. 하지만 여기선 다 똑같다. 한국에서 ‘억, 억’ 하는 집값 얘길 들으면, 괜히 내가 루저 같고, 온갖 투기와 사기, 거짓말을 해서라도 돈을 안 벌면 큰 일 날 것 같았는데, 여기 살면서 그런 인생의 큰 짐 하나를 덜었다. 정신건강도 더 좋아졌다. 한국에서 늘 끼고 살았던 편두통과 소화불량, 불면증도 사라졌다.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 지면 잠드는, 그런 평범한 일상이 이곳에서야 이뤄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탐구하는 작업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 하지만 맨 처음 그 답을 찾으려 5년 전, 머나먼 이 섬으로 꾸역꾸역 들어왔을 때와 이번에 다시 돌아왔을 때, 느낌은 확실히 다르다. 나는 보다 성숙해졌고, 또 안정적이다. 내가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를 타고 두둑한 통장 잔고가 있어서가 아니다. 나는 내적으로 보다 멋지고 자신감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건 겉으로 봐선 알 수 없다. 마음이 더 커졌다. 그리고 나는 이런 내 모습이 꽤나 맘에 든다. 여전히 어떤 삶의 질문이든, 답을 찾는 건 어렵다. 하지만 조급함과 부담감은 전에 비해 훨씬 덜 하다. 팬데믹 시대, 나는 다이빙 강사로 살기로 했던 5년 전의 선택에 후회나 의문을 품은 적이 없다. 언제나 그랬듯, 나는 못 먹어도 ‘Go’다.
그리 많은 사람들이 섬에 남아있진 않다. 오늘 꼬따오에서 함께 지냈던 친구 몇몇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니 나도 울컥, 그들도 울컥했다. 나는 친구들에게 “너희들이 진정한 ‘Survivor’”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이렇게 건강하게 만날 수 있게 되어 너무 좋다고 닭살 돋게 말했다. 내가 자주 들락거리던 꼬따오의 유일한 한식당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미얀마 친구들과 엄청 친했다. 꼬따오 대부분 상점들이 문을 닫아 불안한 마음에 점심을 먹으러 갔더니 다행히 그 친구들, 그 가게, 그대로 있다. 팬데믹으로 태국에서 일자리를 잃고 다시 미얀마로 돌아간 친구들이 많아 걱정했었다. 한국에서 미얀마 뉴스를 보면서 항상 어른거리던 얼굴들이었다. 내가 작년 초, 꼬따오를 떠날 때 더 이상 입지 않는 옷들을 그 친구들에게 선물로 주고 갔었다. 한국 문화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나에게 한국어도 많이 배웠다. 나도 친구들에게 미얀마어를 조금 배우기도 했다. 친구들은 문틈으로 들이민 내 얼굴을 보고 ‘꺅꺅’ 소리를 지르며 좋아했다. 마스크를 썼는데도 나를 알아봤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모두들. 만나자마자 미얀마 상황에 대한 유감부터 표했다. 우리도 40여 년 전 같은 일을 겪었다고, 아직도 그 주동자는 재판 중이며 처벌도 심판도 끝나지 않았다고, 앞으로 갈 길이 멀겠지만 힘내라고 말했다. 그 친구들도 한국 민주화 운동과 촛불 시위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친구들은 응원해주는 한국 친구들이 너무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미얀마 상황을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중국과 러시아가 너무 싫다고도 했다.
그렇다. 지금도 이 지구별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백신을 맞았다고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며 자랑한다. 누군가는 코로나 지옥에서 절규하고, 누군가는 여행을 하고, 누군가는 자가 격리를 하고, 누군가는 죽어간다. 이 시국에 비행기를 타고 자가 격리를 하고 검역을 마쳐 꼬따오로 돌아온 나 역시, 마음 한편이 불편하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멕시코에 무슨 짓을 했는지 지켜봤고, 또 한국을 봤다. 그리고 이제 태국을 본다. 조만간 백신을 먼저 맞은 미국인들과 유러피안, 중국인들이 다시 태국으로 올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는 똑같은 바이러스로 죽어갈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은 공평치 않다. 어쩌면 삶은 최선보단 차악을 피하는 선택의 연속일지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수많은 다이버들이 사라진 꼬따오 바다엔 돌고래들과 거북이들이 돌아왔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그동안 자신들의 집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생명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팬데믹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다. 인간이 좀 더 겸손해지고 이타적으로 변할 수 있는 기회. 나는 모든 걸 바다와 자연으로부터 배우는 이곳, 아름다운 섬 꼬따오로 다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