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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짝사랑을 한다

by 조하나


보이지 않는 사이 더 견고해져만 가는 계급 사회에서 한 계급 더 올라가 보겠다고 아웅다웅하다 제풀에 지쳐 이건 아니지 싶어 떠나온 한국 사회, 그리고 눈부시게 성장한다는 도시. 한국뿐인가. 세계 곳곳이 다 거기서 거기다. 중세 시대엔 대놓고 계급을 나누고 차별했지만, 현대 사회는 평등을 외치면서 계급을 나누기에 더 교활하다. 소돔과 고모라는 훨훨 타오르고 있는데도 그걸 보지 못하고, 발이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그곳에 들어가려는 사람들. 한동안 나도 그 무리에 끼어 있었지. 그때 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뭐에 홀리기라도 한 듯 남들이 정해놓은 목표를 내 것인 마냥 추앙하며 그때 나는 무엇을 위해, 대체 왜 그랬을까.


태국 남동부 외딴섬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다이빙으로 벌어먹고 살면서도, 여전히 한국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받아 칼럼을 쓰고 있다. 요즘 브랜드들은 하나같이 ‘지속가능’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동안 이 지구를 이용하고 쥐어짜고 마음껏 더럽히며 돈을 벌어온 기업이 약속이나 한 듯 정신을 차린 걸까. 기업이 정말 갑자기 환경을 걱정하기 시작한 걸까. 아니, 그냥 환경 이슈 자체가 요즘 돈이 되기 때문이다. 돈을 좇으면서 그 과정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뿐이다. 수년 전, 한국 패션지에 다닐 때에도 글로벌 브랜드들이 하나같이 ‘친환경’을 외치며 에코백을 만들어 팔았다. 각종 브랜드에서 선물 받은 에코백이 수십 종류가 넘었다. 환경을 생각하자며 만든 에코백인데, 이걸 만들고 유통하고 쓰고 또 버리는 동안 우리는 얼마만큼 지구를 더럽히고 못살게 굴었을지 상상도 못 하겠다.


그때, 나는 내 직업에 처음으로 환멸을 느꼈다. ‘자본주의의 꽃’이라는 잡지 에디터로 대접받고 폼 잡으며 내가 하는 일은 새로 나온 명품을 소개하고, 사라고 부추기고, 브랜드를 아름답게 꾸미는 거였다. 음악과 영화, 미술 분야의 신박한 아티스트를 대중에 소개하고 그들의 창작 활동을 지지하는 일이 주였으나 광고로 먹고사는 잡지사의 생태계에서 나는 까라면 까는 ‘을’이었으니까. 아무도 신경 안 쓰고, 누구도 뭐라 안 하는데, 스스로 자괴감에 시달렸다. 나는 그냥 이런 사람이다, 나를 기업에 사회에 끼워 맞추지 말고 생긴 대로 살아야지, 이대로 계속 가다간 병나겠다 싶었다.


그렇게 잘 다니던 잡지사 뛰쳐나와 다이빙으로 먹고살겠다고 태국 남동부 외딴섬으로 도망친 지 7년째. 이곳에서 한국 클라이언트와 브랜드의 의뢰를 받아 글을 쓰다 보면, 나와 연락하고 핸들링하는 담당자 역시 전 세계에 영향력을 뻗치는 글로벌 브랜드 대기업에선 어차피 ‘대체 가능한’ 인력이었다. 담당자에게 넘긴 내 글은 그의 상급자에게 전달된다. 최종 결정권자가 고개를 갸웃하면 내 글은 올라갔던 사다리 그대로 타고 다시 내려와 나에게 다시 전달된다. 어디가 어떻게 마음에 안 든다는 디렉션도 없이 그냥 고개만 갸웃했단다. 그러면 수정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나도, 담당자도 속이 뒤집어진다. 대기업 브랜드 부장, 과장 자리에 앉은 사람들 대부분 자기가 어떤 구체적인 디렉션을 내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10년이 지나도 이 바닥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 쿨한 사람들 가득한 ‘잡지 바닥’이 이렇다면 사회의 다른 분야도 여전하단 뜻이다.


아무리 이름만 대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는 대기업에 다닌다 해도 담당자나 나나 우리 모두 ‘을’이다. 가장 끔찍한 건 다 같은 ‘을’끼리 모여서도 계급을 잘게 나눠 서로 무시하며 우월감을 느끼려 하는 것이다. 이걸 지켜보는 기업 우두머리는 신이 난다. 모든 게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다. 서로 피 터지게 치고받으며 누군가 살아남아 자신 곁에 올라오면 충견으로 쓰면 된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우리는 삼성, 현대, LG를 짝사랑하도록 강요받았다. 좋은 대학에 가는 이유는 좋은 기업에 취직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내 기억을 더듬거려도 학교 선생 중 그 누구도 다른 이유를 주지 않았다. 누군가는 여전히 삼성을 짝사랑하고, 공기업 LH를 짝사랑하고, 청와대를 짝사랑한다.


며칠 전 다이빙하다 바닷속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물고기 고래상어를 만났다. 다이빙을 마치고 보트에 올라와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함박웃음이다. 잡지 생활을 하며 삼성, 현대, LG는 물론 세상 유명한 명품 브랜드 담당자나 대표들을 만나봤는데도 이런 행복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어차피 짝사랑만 하다 끝날 거라면 삼성을 짝사랑하다 그만둘 바에 바다를 짝사랑하다 마는 게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나를 알아주겠지,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없다. 바다를 짝사랑하며 살다, 소리 없이 사라져도 억울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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