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남동부 외딴섬에서 다이빙을 업으로 살면서도 여전히 한국 클라이언트들에게 연락이 와 글 쓰는 일을 한다. 가끔은 ‘급건’이라는 타이틀로 일이 너무 많이 들어와 짜증이 살짝 날 때가 있다. ‘아니, 이 사람들이 내가 여기서 노는 줄 아나, 다이빙 강사도 엄연히 풀타임 직업인데!’ 하며 씩씩거리다가도, 내가 7년 전까지 몸담았던 ‘잡지 바닥’ 생리를 너무도 잘 아는 탓에 이내 마음을 푼다. “네, 최대한 빨리해 드릴게요”라고 메시지를 보내면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눈물을 머금은 카톡 캐릭터 이모지가 함께 온다. “OO 씨가 무슨 잘못이에요, 나한테 이렇게 작업 의뢰가 많이 들어온다는 건 OO 씨도 그만큼 바쁘단 소린데…” 하고 답장했더니, 그동안 힘들었는지 쌓인 속마음을 나에게 털어놓는다. 일은 점점 늘어나고 인력은 없는데,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또 어떻게, 제대로는 하고나 있는지, 항상 반 정신이 나가 사는 것 같다고도 했다. “내가 그래서 결국 한국을 떠난 거거든요, 그걸 몰라서…”
10년 전 한국에서 에디터로 일했던 잡지사 동료 형(그 시절, 나는 회사 남자 선배에게 모두 ‘형’이라 불렀다)에게서 카톡이 왔다. “태국 좋냐?” 좋으니까 여태 있지, 그럼. 수년째 나 있는데 와이프랑 아들 데려온다 말만 하고 안 오는 형이다. 아니, 시간이 없어 못 온다. 뜬금없이 이리 연락이 와도 이상할 게 없는 형. 아직도 내가 떠난 필드를 지키는 형은 좋은 글이 필요한 일이 있을 때면 가장 먼저 나에게 연락한다. 몇 년 전 한국에 잠깐 들어갔을 때 가족 안부를 묻는 나에게 형이 그랬다. 사실은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부럽다고. 우리 대화는 그게 다였지만, 가장으로서 형의 어깨에 얹힌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형이 와이프를 만나기 전부터 만나는 과정, 결혼해 아이가 태어나고 커가는 과정을 모두 지켜봐 온 나였다. 이젠 어느덧 “형, 아들 나한테 보내, 스쿠버다이빙 배우라고 해” 할 정도로 형 아들이 현재 초등학교에 다닌다.
오늘, 형이 ‘급건’이라며 연락했다. 요즘 다이빙 코스 스케줄로 정신이 없는데 마감 일정이 너무 촉박했다. 그래도 사정 아는 처지에, 최대한 빨리해 보내겠다, 하고 “오늘, 하루 종일 다이빙이야” 했더니 형에게서 답장이 이렇게 왔다. “어, 나도 오늘 하루 종일 에버랜드에 있을 거라. 오늘 사실 나, 오프야.” 다이빙하며 살다 보니 날짜, 요일 감각이 없다. 폰을 보니 금요일이네. 금요일 연차를 내고 와이프와 아들과 함께 에버랜드에 놀러 가는 아버지가 된 형. 에버랜드 사파리 차 안에서, 아니면 기린이나 코끼리 앞에서 멈춰서 브랜드 담당자로부터 온 일 문자를 처리하고, 나에게 글을 의뢰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루하루 묵직하게 책임감이 쌓여 때론 그에 짓눌리지 않을까. 참고 참다 점점 안으로 썩어 무너져가는 가장이 이 세상, 어디 한둘일까. 남자는 남자라 사회가 부여한 책임감 때문에, 여자는 또 여자라 사회가 주지 않는 기회 때문에, 그렇게 우리 가장들은 어떤 형태로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침잠해간다.
도시에서 썩은 물 가득 고인 지하로 침잠할 바엔 차라리 바닷속으로 침잠하는 게 백번 천 번 낫다 싶어 캐리어 하나에 내 삶을 모두 눌러 담고 떠나온 나는, 형이 사는 세상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섬 같은 나는, 그 무거운 삶의 책임감을 짊어지기 전에 알아채기 두려워 내 가족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시도도 안 해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내가 한국어를 들을 수 있는 하루 일과 중 하나, 한국 뉴스 채널을 켰다. 이재명이 ‘주 4일제’에도 공을 쏘아 올린 모양이다. 기업의 편에서 생각하고 봉사하고 충성하는 국회의원과 언론은 그 공을 어떻게든 맞춰 떨어뜨리려 벌써부터 표창을 들고 섰다. ‘포퓰리즘’의 ‘ㅍ’도 모르는 사람들이 어디서 들어본 단어라고 잘도 갖다 붙인다.
어차피 태생부터 이익집단인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이재명을 뽑아 ‘주 4일제’를 하든, 윤석열을 뽑아 ‘주 120시간’을 일하든, 나는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 직장을 구할 일은 없을 테니 상관없다. 내가 정말 궁금한 건 한국에 사는,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이다. 왜 한국 사람들은 자신이 그 정도 쉬고 즐겨야 하는 존재라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왜 언제나 ‘고용자’가 아닌, ‘고용인’ ‘하수인’ 마인드로 살지? 자영업자가 되어서야만 ‘사장님’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자신이 ‘사장님’처럼 당당하고 독립적으로 일하는 마인드를 가지면 안 되나? 왜 우리는 항상 잘릴까 전전긍긍, 밑 보일까 전전긍긍, 평생 일만 하다 죽는 것도 서러운데, 왜 그리 우리는 언제나 전전긍긍하며 살까? 왜, 한국이란 나라에선 쉬면 죄책감이 들까.
7년 전, 이 섬에 처음 왔을 땐 중국 관광객이 들어오기 전이라 대부분이 유러피안이었다. 휴가가 짧은 한국인이 오기엔 여정 자체가 길고 고단한 섬이라 태국의 푸껫이나 방콕, 치앙마이처럼 비행기 한 번이면 오갈 수 있는 곳이 아니란 이유로 한국인도 별로 없었다. 이 섬을 채운 건 대부분 ‘갭 이어(Gap Year)’로 배낭여행 온 유러피안이었다. 친구들과 대화 중 그 단어 뜻을 몰라 구글 해 본 적이 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가기 전, 대학 졸업 후 취업 전, 1년 정도 쉬며 생각할 시간을 갖는 거다. 이 시간을 이용해 돈을 버는 친구도, 여행을 다니는 친구도,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친구도 있었다. 멋졌다. 그런 개념이 용인된다는 사회라는 게. 어릴 때부터 쉬는 법과 여유를 우선하는 법을 배운 유럽 친구들은 여전히 이곳에서 넘쳐나는 시간을 어쩔 줄 몰라하는 나에겐 부러움의 대상이다. 놀 줄 아는 것도, 그것도 죄책감 없이 뻔뻔하게 놀 줄 아는 법도, 배우고 해 봐야 아는 법이다. 유치원부터 초중고, 대학, 직장 내내 뭘 위해서, 왜 하는지도 모르고 경쟁하며 일분일초에 발을 동동 구르는 우리는 하루아침 바꿀 수 없는 몸에 밴, 아주 나쁜 습관을 가지게 됐다.
잡지 일을 하며 패션계, 연예계, 방송계, 예술계와 자연스럽게 일로 연결되다 보니 단 하루도 휴대폰을 꺼놓질 못했다. 주말도 밤낮도 없는 업계에선 주말에도, 자정에도 연락이 왔다. 주 5일제는 얼어 죽을. 마감엔 주 7일제나 다름없이 일하는데 추가 수당을 챙겨 받은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커피숍, 호프집부터 홍대 클럽을 지나 소상공업, 잡지 바닥까지 노동법에 콧방귀도 안 뀌는 업계에서만 있었고, 지금은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고 있는 나이기에 한국이 주 5일이 되건, 주 4일이 되건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이유는, 지켜지진 못할지언정 법이라도 그렇게 되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사회 분위기 자체로 차이가 엄청나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부 때 주 5일제 하면 대한민국 경제 망한다고 반대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 법이 있었기에 내가 회사 다닐 때 (마감이 아닐 땐) 그나마 주 5일 근무 흉내라도 낼 수 있었던 거다. 2003년 전까지 내 엄마, 아빠는 주 6일을 쉬지 않고 일해왔던 거였다. 내가 일을 덜 한다고 회사에 미안한 게 아니다. 회사는 여전히 내가 일해주는 걸 고마워해야 한다. 나도 이 사실을 한국에서 회사에 다닐 땐 몰랐다. 나를 써줘서, 먹고 자라고 돈을 줘서, 감사하며 굽신거렸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 보니 선명하게 보인다. 나는 회사가 후려치고 저평가한 나의 시간을 싼 값에 너무 많이 희생했다. 그 시간은 나에게 빛나는 젊음의 한 조각이었는데, 그 시간에 대한 가치를 너무 함부로 대했다. 북유럽은 학교에 부모가 애를 안 데리러 오면, 그 부모를 그 시간에 퇴근시키지 않은 회사에 책임을 묻는다. 그런데도, 우리나라가 일을 더 해야 한다고?
이 아름다운 섬까지 기어코 비집고 찾아들어와 ‘거지 같은 다이빙 강사들’이라 우리를 깎아내린 한국인 가족을 보며, 한국 뉴스에서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환경미화원 들으라고 아들에게 “너,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라고 했다는 아줌마의 소식을 듣는다. 뇌를 움직여 돈을 버나, 몸을 움직여 돈을 버나, 누군가에 고용돼 자신의 금 같은 시간 평가절하 받아 거진 공짜에 일하고 봉사하는 거나 다름없으면서, 그 와중에 ‘잘난 노동’ ‘못난 노동’을 가리는 한국 사회가, 예전엔 화가 많이 났는데, 지금은 그저 너무 안타깝다. 짓눌리는 책임감을 버텨내며 어떤 형태로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 스스로의 가치를 왜 깎아내리나, 왜 더 요구하고 주장하지 않나.
어린 시절, 아빠는 나와 시간을 최대한 많이 보내려 노력했다. 여의치 않은 사정이었지만 아빠가 노력했다는 것만큼은 안다. 아빠가 내가 어렸을 적 나와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고 지금의 내 모습이 달라졌을까. 내가 서울대 나와 삼성에 들어갔다면 지금 행복했을까. 내가 삼성에 들어가지 못해 못난 거라 생각하며 주눅 들지 않고 턱 치켜들고 살게끔 자존감 키우는 법을 가르쳐준 건 바로 아빠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가장으로서의 희생보다 자신의 삶을 즐겼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빠는 그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그게 술이든, 사이클이든, 등산이든, 암벽등반이든, 아빠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대신 자신의 삶을 누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아빠는 미치지 않으려고, 세상에서 튕겨나가지 않으려고, 그래서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거였다.
아빠는 내가 고등학교를 때려치우겠다고 할 때도, 대학을 휴학하겠다 할 때도, 회사 때려치우고 클럽으로 돌아가 일할 때도, 쇼핑몰을 차릴 때도, 그리고 망할 때도, 집에서 놀 때도, 갑자기 나이 서른에 잡지사 기자가 되겠다고 할 때도, 잘 다니던 잡지사 사표 쓰고 태국에 가서 다이버가 되겠다고 할 때도, 그랬다. “네 인생이니 네가 결정해.” 아빠는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엄마와 나를 외롭게 한다고 생각했을 땐 나도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빠는 도망치지 않았다. 하루하루 전쟁 같은 일과를 보내면서 버텼다. 엄마와 나를 위해.
이제 내가 나이가 들어, 우리 아빠 같은 사회의 가장, 그리고 ‘보통 사람’이 내 친구들이 되었다. 다들 결혼해(안 하기도 하고) 아이 낳고(안 낳기도 하고) 최선을 다해 좋은 ‘엄마’ 그리고 ‘아빠’, 혹은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그것뿐이다. 나는 그냥, 내 친구들이 좀 더 쉬었으면 좋겠다. 한국에서 글쓰기 의뢰를 하는 그 형이 가족과 더 자주 에버랜드에 놀러 가고, 아들과 달리기도 하고, 자전거도 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래서 형 아들이 이다음에 커서 자존감 높고 마음이 따뜻한 어른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래서 형 와이프가 자신만의 시간을 더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 아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가족 모두, 그리고 친구들 모두, 한 평생 책임을 져버리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성실하게, 묵묵히,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사는 사람들이 다 그랬으면 좋겠다. 자신의 삶의 가치를 스스로 드높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