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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에서 두 번째 친구를 잃었다

by 조하나


여느 날과 다름없이 다이빙 보트에 올랐다. 꼬따오에서 오랫동안 알고 지낸 James로부터 이상한 메시지를 받았다. “Everything OK with Kevin?” Kevin과 얼마 전 페이스타임을 한 터라 “당연하지, 잘 지내고 있어, 한 번 메시지 보내 봐” 하고 답장을 하고는 물속에 들어갔다. 다이빙을 마치고 나오니 James가 스크린샷을 보내왔다. 순간, 머리칼이 쭈뼛 서고, 식은땀이 났다. 태국인 이름 계정을 올라온 페이스북 포스팅에 Kevin의 밝게 웃는 얼굴 사진과 함께 “RIP Kevin”이라고 쓰인 글귀였다. 손이 덜덜 떨렸다. 바로 Kevin에게 전화했지만, 답이 없었다. 영국에 있는 Kevin의 딸 Emma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가는 몇 초가 몇 시간처럼 길었다. Emma가 전화를 받으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녀의 발랄한 목소리와 영국식 악센트가 들려왔다. 아, 우린 지금 너무 멀다. “하나, 너무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아빠한테 들었어. 다시 꼬따오로 돌아왔다며?” 나는 바다 한가운데 보트 위에 떠 있고, 방금 다이빙을 마치고 올라와 온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 모습으로 누군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하는 게 이상했다. Emma는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Kevin 소식 들은 게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으니, 매주 토요일 아빠와 통화하는데 어젯밤은 전화를 받지 않기에 바쁜가 보다 싶었다고, 오늘 다시 해볼 거라고 했다. 아, 역시 모르는구나. 나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며. “Emma, 잘 들어. 내가 스크린샷 하나를 보내줄 건데, 아직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어. 우리도 여기저기 알아보고 있으니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해줄래?” 그렇게 나는 태국에 있는 Kevin의, 지구 반대편 영국에 있는 딸 Emma에게 아빠의 부고 소식을 전했다.


Kevin은 2021년 4월 21일, 지난 금요일 밤, 잠이 들어 다음 날 깨어나지 않았다. 꼬따오에 다시 돌아와 Kevin과 페이스타임으로 대화를 나눈 게 며칠 전이다. Kevin은 오랫동안 꼬따오에서 지내다 여기서 만난 태국인 여자 친구와 함께 작년, 태국 북부로 터를 옮겼다. 내가 꼬따오에 다시 돌아온 걸 누구보다 기뻐한 그였다. 페이스타임으로 그는 자신이 현재 지내고 있는 집을 여기저기 보여줬다. 그리고 곧 새 집을 짓고, 농장을 가꿀 거라고 했다. 코로나 상황이 잠잠해지면 곧바로 나를 보러 꼬따오로 오겠다고도 했다. 나는 그 대화가 또다시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 되었다.


2015년, 나는 꼬따오에서 다이빙 프로 레벨 과정의 시작인 다이브마스터 트레이닝을 어디서 받아야 하나,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었다. 프로 과정이라 좀 더 신중해야겠다 싶어 꼬따오 여러 다이브 센터에서 펀 다이빙을 하며 전반적인 분위기나 스태프들을 보고 결정하기 위해서였다. 아시아 다이버스란 곳에 들어가 처음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한 게 Kevin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다이브마스터로 일하고 있었고, 내가 펀 다이빙을 하고 싶다고 하니 바로 나를 보트에 태워 다이빙 가이딩을 해줬다. 그전까지 꽤 많은 다이빙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토록 차분하고 편안하고 여유롭고 평화로웠던 다이빙은 처음이었다. Kevin과 다이빙을 끝내자마자 여기서 트레이닝을 받아야겠다 싶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Kevin 역시 나를 ‘환상적인 다이버’라 칭찬에 칭찬을 이어갔다. 이전 트레이닝까지 한국 샵에서 못 한다 욕만 먹다가 내가 꽤 괜찮은 다이버라는 걸 처음 알았다. 아시아 다이버스에도 한인팀이 있었기에 웨스턴팀의 보스였던 강사 Claude는 괜한 문제를 만들지 않으려고 처음엔 나를 꺼렸다. Kevin이 그런 Claude를 강력하게 설득했다. 결국 Claude는 나를 다이브마스터 훈련생으로 받아들였고, 내 인생 최고의 멘토 강사가 되어 15년 경험으로 축적한 모든 것을 나에게 전수했다. 웨스턴팀에서 유럽 각국에서 온 다이버들과 친구가 되었고, 다양한 경험을 하며 나는 프로페셔널 다이버로 성장했다. 다이브마스터가 되었고, 강사가 되었다. 사람 안 뽑기로 유명한 그 팀에서 나는 일자리 제안까지 받았고, Kevin은 내 비자와 워크퍼밋까지 손수 도우며 내가 꼬따오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해줬다. Kevin이 없었다면, 지금의 다이빙 강사인 나는 없다.


우리는 매일 아침 영국식 티타임을 가졌다. 그는 언제나 한국에 대해 물었다. 내가 한국의 문화, 정치, 사회에 대해 한 가지 말하면 Kevin은 영국에 관한 것 한 가지를 말했다. 이 맛도 없고 밍밍한 티를 대체 영국 사람들은 왜 마시냐며 얼굴을 찌푸린 나를 보고 자지러지게 배를 잡고 웃던 Kevin이었다. Claude에게 영국 악센트가 섞인 욕을 배워 Kevin 앞에서 써먹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수년 동안 거의 매일을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한국 일을 정리하러 몇 달간 꼬따오를 떠날 때 사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섰다. 한 짐을 싸가지고 항구에서 우울하게 앉아있는데 Kevin이 나타났다. 언제나 그랬듯 헐렁한 코끼리 바지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리고 보트 타는 내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주며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 때문에 결국 내가 다시 꼬따오로 돌아올 수 있는 용기를 냈다. Claude가 죽었을 때 패닉에 빠져 길바닥에 앉아 울부짖으며 제일 먼저 전화했던 건 잠시 가족들을 보러 영국에 가 있던 Kevin이었다. 그리고 그는 바로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꼬따오로 돌아왔다. 내가 아시아 다이버스를 떠나 좀 더 나은 환경의 다이브 센터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도 누구보다 기뻐하며 “넌 잘할 수 있을 거야” 응원하던 그였다. 작년 멕시코로 케이브 다이빙을 하겠다고 꼬따오를 떠날 때도 Kevin은 누구보다 나를 지지했다. 얼마 전 내가 다시 꼬따오에 돌아왔다 통화할 때도 차분하고 나긋하게 “내가 널 잘 알잖아. 너는 앞으로도 잘 해낼 거야.” 뜨거운 용기와 사랑을 주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꼬따오 아빠’로 섬겼고, 그 역시 나를 친딸처럼 대했다. 영국에 있는 Kevin의 친딸 Emma도 그동안 꼬따오에 여러 번 놀러 와 함께 시간을 많이 보냈다. 그는 모든 상식과 지식의 우물 같았고, 삶의 경험과 지혜를 우리들에게 나눠줬다. ‘영국 젠틀맨’이 이런 거구나, 나는 그를 통해 배웠다.


꼬따오에서 Claude에 이어 Kevin을 잃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어제 아침만 해도 덤덤했다. 죽음이란 것도 이렇게 익숙해지나. 앞으로 내가 겪어야 할 죽음들은 또 얼마나 남아있을까, 이런 희한한 생각이나 했다. 트레이닝을 하던 교육생들이 있으니 보트에선 표를 안 냈다. 저녁을 함께 하자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온라인으로 주문한 주방 수납 용품 배달이 와 있었다. 직접 조립을 해야 했다. 이것저것 다 끄집어내 바닥에 늘어놓고 부품을 조립하는데, 갑자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이처럼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이 섬이 떠나가도록. 전화기는 시끄럽다. 아시아 다이버스에서 함께 지낸, 지금은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있는 친구들로부터 온 메시지가 수북했다. 내가 Kevin과 얼마나 가까웠는지 알기 때문이다. Kevin의 페이스북으로 들어가 스크롤을 내렸다. 또 소나기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Kevin을 만난 후로 지금까지 그의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이며 다이빙 사진 모두, 내가 찍은 것들이다. 팬데믹으로 고위험군에 고연령자라 집 밖에도 제대로 못 나갔을 그였다. 영국에 있는 Emma는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듣고도 태국으로 들어올 수도 없는 상황이다. 나 역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배웅하러 태국 북쪽으로 여행하지 못한다. 슬프고 분하고 화가 난다. 이 망할 놈의 바이러스.


Kevin은 지금쯤 Claude를 만났을까. 둘이 못다 한 이야기를 하며 영국식 차 한 잔을 하며 내 얘길 하고 있을까. 다이버로서, 한 인간으로서, 지금의 내가 있게끔 한 최고의 친구 둘을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내가 꼬따오에 있을 때 모두 잃었다. 이 섬과 나는 어떻게 이어진 인연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Kevin의 인생은 충분히 가치 있었고, 아름다웠고,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남겼다. 죽음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기막히지 않고, 갑작스럽지 않고, 억울하지 않은 죽음은 세상에 없다. 내가 그를 잊지 않고, 기억하면 된다. 그의 아름다웠던 삶을 기리고 따르면 된다. 그렇게 나는 조금 더 자란다, 다른 이의 삶에 기적처럼 내게 준 관심과 사랑의 유산으로. 그리고 나는 내 삶을 소중히 여기고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하루하루가 우리에겐 선물이며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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