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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들의 전성시대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by 조하나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하버드대 정치학자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극단적 사상을 가진 소수가 어떻게 상식적 다수를 지배하게 되는지에 관해 분석하고, 민주주의 체제의 한계를 들여다봄으로써 민주 시민의 역할을 당부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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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6일, 선거 패배에 불복을 선언한 트럼프가 지지자를 선동해 국회의사당 폭동을 일으켰을 때 미국 표 대통령제와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공고한 역사와 자부심은 한순간에 무너졌고, 미국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2021년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의 국회의사당 폭동




“오랜 세월 공고했던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는 왜 위험에 빠진 것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된 이 책은 미국의 민주주의 붕괴의 원인을 민주주의에 충직한 척하지만, 민주주의 제도의 껍데기만 이용하는 정치인들, 그리고 극단주의 세력을 은밀히 지원하며 소수의 지지만으로 권력을 차지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민주주의 제도의 허점과 한계를 꼬집는다.


다양한 구성원과 각각의 의견이 공존하는 민주주의는 복잡한 현대 사회에 더 이상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신기루일까? 지금 세계 곳곳에선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며 소수만이 권리를 누리는 독재 국가를 향해 가는 나라가 많다. 오랜 일제강점기와 군사 독재 시대를 거쳐 겨우 40년 전에야 민주주의를 이룬 대한민국 역시 현직 대통령 윤석열의 12.3 내란을 기점으로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에 처했다. 지금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고 올바르게 대응하지 않으면, 더욱 끔찍한 미래를 마주할 수도 있음을 이 책은 경고한다.








표면적으로만 충직한 민주주의자

이 책의 저자들은 ‘표면적으로만 충직한 민주주의자’에 대해 경고한다. 겉으로는 민주주의자처럼 보이지만 극단주의 세력과 위험한 동맹을 맺음으로써 결국 극단적 소수가 상식적인 다수를 흔드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세 가지 기본 원칙을 지켜야 한다.

첫째, 선거 결과에 승복하고 패배를 인정할 것.
둘째, 권력 쟁취를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
셋째, 극단주의 세력과 동맹을 맺지 말 것.



이 세 가지 원칙 중 단 하나라도 어기면 민주주의 제도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현재 대한민국의 집권 세력인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이 이 세 가지 원칙 중 단 하나라도 지킨 것이 있을까?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평화롭게 권력을 이양하고, 정당한 경쟁으로 권력을 차지하며, 같은 진영이라 해도 극단주의 세력과 단호히 손절한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만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멀쩡한 얼굴로 넥타이를 매고 주류 정치계 무대에 나와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척하면서 뒤에선 극단주의 세력을 묵인하거나 은밀하게 지원하면서 민주주의 기본 원칙들은 하나씩 파괴해 간다.







역사는 반복된다: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 재현되는 1934년의 프랑스

1934년 2월 6일, 혁명의 나라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위협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프랑스는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특히 1933년 독일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프랑스의 극우 세력도 점점 더 강경해졌다.

‘1934년 2월 6일 위기’라 불리는 이 폭동은 ‘스타비스키 스캔들’로 인해 촉발됐다. 당시 정부의 비호 아래 거액의 금융 사기를 저지른 사기꾼이자 금융업자, 알렉상드르 스타비스키가 경찰에 의해 체포되기 전 수상한 정황 속에서 사망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정부가 그를 암살했다고 의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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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당파 및 극우 단체들은 이를 명분으로 반정부 시위를 조직했고, 극단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수만 명의 젊은 남성들이 프랑스 국회의사당을 습격해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은 의회를 해체하고 보나파르트파 정부의 복귀를 주장하며 의회에 난입했고,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15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는 유혈 사태로 번졌다.



이들의 정치 테러보다 치명적인 것은 당시 주류 정치인들의 반응이었다.
프랑스의 주요 정당인 공화연맹당은
습격에서 발생한 폭력을 가볍게 치부한 것을 넘어
폭도들을 ‘순교자’라 치켜세웠고,
조사위원회의 활동을 방해하며 조사 결과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조정했다.
명백한 정치 테러는 순식간에 정쟁의 대상이 되었고,
극단주의 세력의 폭력은 주류 정치권으로부터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결국 폭동을 주도한 극우 세력에 대한 본격적인 법적 처벌은 거의 없었다. 폭동에 참여한 극우 단체들은 활동을 이어갔고, 주요 지도자들 역시 대부분 법적 처벌을 피했다. 이들은 계속해서 반공주의와 권위주의적인 정치 활동을 이어가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비시 프랑스 정권과 협력하며 나치 독일에 동조하는 세력이 되었다.


자, 이제 91년 전의 프랑스 극단주의자들의 프랑스 국회의사당 폭동 사건에서 주어를 윤석열과 국민의힘, 그들을 지지하는 극단주의 세력으로 바꿔보자.


현직 대통령이었던 윤석열은 12.3 내란을 통해 대한민국의 헌정을 뒤흔들었다. 극우적 성향을 가진 소수 정치 엘리트들은 총선 결과에 대한 민의의 판단인 여소야대 형국을 인정하기는커녕 부정선거 음모론을 끝도 없이 제기해 왔다. 12.3 내란 이후 내란우두머리 윤석열의 체포 및 구속 집행 과정에서 윤석열과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은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하며 모든 것이 ‘불법’이라 지지자들에게 호소했고, 결국 1.19 서울서부지법 폭동으로 수많은 이들이 다쳤다. 이후에도 국민의힘과 극단주의 세력은 서부지법에 난입한 폭도를 ‘순교자’ ‘애국청년’이라 부르며 다음 테러의 대상과 장소를 암시한다.


2014년, 튀르키예의 에르도안은 민주적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처음에는 개혁적인 이미지로 국민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에르도안은 언론을 통제하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진영을 정치적으로 탄압했다. 2017년, 에르도안은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고, 의회의 권한을 축소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사실상 대통령 독재로 가기 위한 법적 절차였다. 이 개헌으로 대통령의 공식적인 임기는 5년이며 재선까지 가능하지만, 에르도안은 2014년부터 지금까지 3선째 대통령 자리에 눌러앉아 있으며 21세기 술탄을 꿈꾼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정부 역시 언론과 사법부의 독립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며 반대 세력과 시민 단체를 탄압했고, 급기야 선거 제도를 변경해 민주주의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약화하며 권위주의적인 독재 정부로 탈바꿈했다.


이러한 특징은 최근 남미와 유럽에서도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브라질의 보우소나루, 이탈리아의 멜로니, 프랑스의 르펜, 헝가리의 오르반과 같은 지도자들은 미국, 튀르키예, 헝가리와 유사한 전략을 사용하며 극우 포퓰리즘을 확산시키고 있다. 이들은 코로나-19 글로벌 팬데믹 이후 양극화된 경제적 위기와 페미니즘, 성소수자, 난민 문제 등 사회적 갈등을 이용하여 국민의 불만을 자극하고 있다. 건강한 정치 세력으로 건설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 제시하기보다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메시지로 국민을 분열시켜 사회적 혼란을 일으킴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극단적 소수는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조금씩 무너뜨린다


세상의 어떤 이상적인 제도도 이용하는 사람이 악용하고 망가뜨리고자 작정한다면 한계를 드러낸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여전히 권력은 소수 엘리트에게 집중된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 특히 대한민국에서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판검사를 지냈던 이들이 정치 엘리트 국회의원이 되고, 행정 및 경제 관료가 되고, 언론사주가 된다. 이들은 언론과 정보를 통제하며 여론을 조작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만의 세상 속 정교한 네트워크를 통해 기득권의 권력과 지배 구조를 유지하며 생태계를 확장한다.

민주주의는 대체로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 제도적 장치이지만, 극단적 소수가 오히려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이용해 합법적인 틀 안에서 다수결의 탈을 쓰고 민주주의를 약화하거나 전복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는 단 2인으로 방심위의 모든 의제를 상정 및 의결하고, 87년 민주화 이후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많은 거부권을 행사했으며, 30여 명이 넘는 정부 인사를 국회 청문 보고서 채택 없이 독자적으로 강행했다. 그리고 국회와의 합의가 어려울 것 같은 정책은 시행령으로 밀어붙였다. 이 모든 건 엄밀히 말하면 합법이었다.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조금씩 무너지는 민주주의를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잘못된 건지 알아챌 겨를도 없이 시스템 곳곳이 서서히 조금씩 무너져 간다. 결국 권위주의적 정권이 성립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져 권력을 가진 소수가 대다수를 지배하는 힘을 얻게 된다.




극단적 소수는 제도적 절차와 규범을 왜곡한다

민주주의는 선거 제도, 표현의 자유, 법치주의와 같은 제도적 절차와 규범에 의존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나온다고 명시된, 그 어떤 법보다 상위인 헌법도 있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주권을 위임할 국회의원과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을 선출한다. 선출된 권력은 유한하며 국민은 법치주의의 틀 안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견제할 수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제22대 총선에서 민주주의의 제도인 선거를 통해 폭주하는 대통령과 행정부를 견제하기 위한 거대 야당을 만들었다. 그러자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패배에 승복하기는커녕 부정선거 음모론을 제기해 온 극단주의 세력과 손잡으며 국민을 분열시키고 갈등과 혼란을 키웠다.

윤석열은 기어코 12.3 내란을 일으켜 부정선거를 명분 삼아 국회를 해산하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국회를 꾸릴 수 있는 비상입법기구를 설치해 튀르키예 대통령이나 헝가리 총리처럼 독재를 이어가려 했다. 권력의 황홀경에 취한 인기 없는 지도자가 권력을 연장하는 길은 오직 우물에 독을 타서 우물을 아예 못 쓰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윤석열과 국민의힘, 극단주의 세력은 그들이 그것을 진정으로 믿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이미 거대한 종교적 신념이 되어 버렸다. 이로 인한 사회적 분열과 갈등, 그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신경 쓰지 않는다. 이렇게 조금씩 꾸준히 장시간 왜곡되고 훼손된 민주주의의 제도적 절차는 결국 일반 대중이 정부의 실정을 인식하고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감소시키고, 소수의 권력 집중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정치적 의사결정도 점차 마비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부가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결정을 내리는데, 권위주의적이고 극단적인 소수가 권력을 장악하면 정부는 ‘강력한 지도자’에 의존하게 되며, 정책 결정 과정 역시 독단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민주적 논의나 의견의 차이는 무시되거나 억압되고, 이는 결국 정부의 정당성과 민주적 기초를 약화한다.




극단적 소수는 다양성을 증오한다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또 다른 요소는 정치적 다원주의, 즉 다양한 정치적 의견과 집단이 공존하는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의 의견을 들으며 충분한 토론과 숙고의 시간을 거치며 해결책을 모색한다.

‘당신은 나와 다르다’라는 문장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그러나 극단적 소수의 세력이 힘을 얻을수록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를 자신의 권위에 반하는 ‘적’으로 만든다. 이들은 언론을 장악하고 통제하며,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과 시민 사회를 탄압해 자신의 의견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확립하려 한다. 이는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목소리가 정치적 과정에 반영되지 못하게 하고, 결국 민주적 논의와 대화가 사라지게 만든다.


극단적 소수에 의한 극우적 담론의 목소리가 커지고 강화될수록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노동자, 외국인, 난민 등 소수자 집단이 직접적인 차별과 폭력, 혐오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극단적 소수는 사회를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하여 다수를 서로 경쟁하고 혐오하게 만들어 소수의 지배력을 유지한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독재 정권들이 민족과 계급, 종교 갈등을 조장하며 권력을 강화하고 유지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군사독재를 겪어온 대한민국에서 극단적 소수가 손가락질한 혐오 대상은 ‘북한 빨갱이’였다. 그 프레임을 그대로 대한민국 국내 정치에 적용해 정부를 비판하고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을 ‘종북 좌파’라 낙인찍고 혐오 대상으로 삼았다. 민주화 이후 더 복잡해지고 국제화되어 가는 21세기 현대 대한민국 사회에서 반공주의는 여전히 한국전쟁을 직접 겪은 70대 노인 지지층에게 잘 먹히는 가스라이팅이다. 하지만 지속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판단으로 위기감에 빠진 극단적 소수 권력은 여성 혐오와 반중 정서를 내세워 보다 젊고 오래 투표할 만한 지지층을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한다.



극단적 소수는 대중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극단적 소수 세력은 대중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정치적 혐오를 불러일으켜 시민들이 정치적 참여를 포기하게 만든다. 이는 권력을 이용한 언론 통제, 선동적인 메시지, 그리고 대중의 불만과 고통을 철저하게 외면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대중이 무기력감을 느끼면 정치적 반응이나 저항이 자연스럽게 줄어들고, 권위주의적 정권은 더 강력해진다.

윤석열 정부는 출범부터 국민과 소통하기 위해 대통령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긴다고 밝혔다. 조 단위의 국가 예산을 들여 기존의 군사 기관 시설에서 사람들을 내쫓고 대대적인 리모델링과 신축 공사를 진행했다. 보안과 안전에 취약해 결국 미국 정부의 도청 사실이 드러났지만, 대통령실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대한민국 군 통수권자이자 행정부 수반인 용산 대통령실을 도·감청하고 있는 나라가 어디 미국뿐일까.

애초에 윤석열 정부가 주장하던 국민과의 소통은 며칠 못 가 중단됐다. 첫째, 매일 정시에 출근하지 않는 대통령의 과음과 게으르고 무책임한 태도, 둘째, 기자들의 비판적인 질문을 단 하나도 견디지 못하는 대통령의 오만하고 속 좁은 태도, 셋째, ‘바이든 날리면’ 기사로 보기 싫은 MBC 기자를 매일 아침 마주쳐야 한다는 대통령의 언짢은 마음 때문이었다.

임기 내내 집권여당은 물론 상대 진영과 시민사회, 심지어 가까운 참모들의 올바른 조언에도 노발대발하던 윤석열 대통령은 여러 차례의 ‘입틀막 사건’을 통해 의견이 다른 이들을 차단했다. 이를 지켜본 수많은 대중이 불안과 공포로 침묵했고, 끊임없이 정부와 국민의힘으로부터 고소·고발 및 압수수색을 당해온 일부 언론사와 기자들은 외롭고 힘겹게 싸워야 했다. 반면 기득권 세력과 오랜 세월 결탁해 온 언론사들은 능숙하고 교활한 방법으로 아젠다를 선점한다. 이렇게 조작된 여론은 마치 극단적 소수의 의견이 사회 다수의 의견인 것처럼 착시효과를 일으킨다. 이렇게 되면 상식적인 사고를 하는 다수의 대중은 자신의 의견이 소수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침묵하게 된다. 여전히 수많은 수구 세력의 언론이 이런 방법으로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여론을 조작하며 지지층을 선동하고 결집한다.







다수는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극우 세력의 득세로 민주주의가 약화되면, 이를 회복하는 데 평균 30년이 걸린다고 한다. 민주주의 제도적 절차와 규범이 약해지면 시민들과 정치 집단은 사회 시스템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고, 그로 인해 민주주의를 복원하려는 의지와 노력도 약해지기 때문이다. 결국, 권위주의적 체제가 굳어져 민주주의는 돌이킬 수 없이 후퇴할 수 있다.

‘1934년 2월 6일 위기’ 이후,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파시스트 정권이 집권한 반면, 프랑스는 어떻게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 사건은 당시 프랑스 제3공화국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는지를 보여주지만 결국 좌파의 결집으로 프랑스에서 파시즘 세력이 확장할 가능성을 저지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의미가 깊다.

사실 이 극우 세력의 폭동으로 인해 당시 총리였던 카미유 쇼탕 내각이 무너지고, 후임으로 보수 성향의 가스통 두메르그가 총리가 되었다. 당시 유럽 전역에서 대두되고 있던 파시즘 세력에 프랑스 역시 잠식될뻔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프랑스 좌파 세력이 모두 연대하여 1936년 ‘인민전선 정부’를 출범시켰다. 결론적으로 ‘1934년 2월 6일 위기’는 프랑스에 파시즘이 정권을 잡을 뻔한 위기이자 이후 좌파 연대와 민주주의 수호의 계기가 되었다.

극단적 소수의 권력 독점을 막기 위해서는 사법부가 정치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 지금 윤석열과 극우 파시즘 세력은 재판관들을 사상 검증하고 자신과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마녀재판이나 다름없는 선동을 이어가고 있다. 반헌법적인 주장을 펼치는 이들의 대다수가 대한민국의 판·검사 출신이라는 게 개탄스러울 뿐이다.

나는 멕시코에서 반년가량 머무는 동안 대낮 편의점에서 딸아이와 음료수를 사다 총에 맞아 사망한 아버지의 시체를 봐야 했다. 지역을 접수한 카르텔의 총격전이었다. 그 도시에 살던 모든 현지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법치주의가 무너진 나라의 일상은 그랬다.

21세기 세계 10대 경제 대국 대한민국에서 여전히 삼성 이재용 회장은 법의 처벌을 받지 않는다. 명백한 내란죄를 저지른 현직 대통령이 검찰의 정치질과 장난질에 온갖 법 기술을 부려 행여라도 풀려나면 어쩌나, 온 국민이 불안해한다. 대한민국은 내란이 진압되고 나면, 검찰 개혁과 사법 개혁을 통해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한다.

어차피 <조선일보>를 비롯한 대한민국의 보수지는 태국 택배 안 완충재 신문지로 전락한 지 오래다. 발행 부수를 속여 지면 광고비를 부풀려 받던 시대도 이제 저물어간다. <조선일보> 폐간 촉구에 쏟을 에너지를 독립 언론과 시민 단체에 주자. 윤석열의 폭정 아래 입 다물고 말 잘 듣는 개가 되기로 한 숱한 언론사와 기자 중에서도 갖은 탄압과 고소·고발, 압수수색을 당하면서도 언론의 품격을 지킨 건 <뉴스타파> <뉴스토마토> <서울의소리> 같은 독립 언론이었다.

우리는 미디어와 정치적 선전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정보를 분석할 수 있는 비판적 사고 능력도 키워야 한다. 학교, 학원, 게임, 유튜브의 루틴만을 반복하며 극우의 선동적인 콘텐츠에 노출된 아이들에게 어떻게 민주 시민 교육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우열과 계급을 나누고 혐오와 조롱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극단적 소수가 갈라치기 전략을 사용할 때 우리는 어떻게 연대하고 협력할 수 있는지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야 한다.

선거 때만 되면 청년층을 표에 이용만 하고 버리는 나쁜 정당과 정치인은 퇴출해야 한다. 젊은이의 저항 문화를 극단주의 세력의 폭력 집회로 끌어들이지 말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더 이상 기성세대와 기득권 세력의 이간질과 갈라치기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은 여자가 죽어야 남자가 살고, 남자가 죽어야 여자가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모두가 함께 사는 곳이다.



스스로 단 하나의 질문만 해보라

윤석열의 12.3 내란 이후, 현재 대한민국은 계속해서 내란이 진행 중이다. 윤석열과 국민의힘, 극단주의 세력은 매일매일 지지자들에게 내란을 선동하고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휴전 국가이자 분단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내란을 일으키려는 세력의 목적은 국지전과 한국전쟁이다. 그냥 농담처럼 흘려보낼 일이 아니다. 인류 역사상 경제 대공황의 돌파구는 모두 세계대전이었고, 지지율이 바닥이었던 미국,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지도자는 모두 전쟁을 일으켜 위기를 돌파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이 순간에도 또 다른 한국전쟁을 코 앞에 두고 있다. 겨우겨우, 꾸역꾸역 윤석열을 체포하고 구속해 놓긴 했지만, 그를 제외한 모두가 여전히 국가 권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내란 이후 지금까지 내란 세력을 옹호하거나 애매한 양비론을 펼치는 사람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단 하나의 질문만 스스로에 해보라. 2024년 12월 3일 밤, 더불어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정의당이 만일 달려가야 할 곳으로 가지 않았다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라. 2024년 3월 22일 제22대 총선, 대한민국 시민이 집단 지성을 발휘해 거대 야당을 만들지 않았다면, 지금, 이 순간, 나는, 그리고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하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라.




김대중 대통령의 옥중 생활
다운로드 (2).jpg 윤석열은 대선 후보 당시 김대중 노벨평화상기념관을 방문해 "반대하는 분들도 포용하겠다"며 김대중의 통합 정신을 강조했다 ⓒ 천지일보





나는 이기는 길이 무엇인지, 또 지는 길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반드시 이기는 길도 있고, 또한 지는 길도 있다.

이기는 길은 모든 사람이 공개적으로 정부에 옳은 소리로 비판해야 하겠지만,
그렇게 못하는 사람은 투표를 해서 나쁜 정당에 투표를 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나쁜 신문을 보지 않고,
또 집회에 나가고 하면 힘이 커진다.

작게는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 된다.

하려고 하면 너무 많다.

하다못해 담벼락을 쳐다보고 욕을 할 수도 있다.


반드시 지는 길이 있다.
탄압을 해도 ‘무섭다’ ‘귀찮다’ ‘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해 행동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지고 망한다.

모든 사람이 나쁜 정치를 거부하면 나쁜 정치는 망한다.
보고만 있고 눈치만 살피면 악이 승리한다.


백성의 힘은 무한하고, 진 일이 없다.
저항하지 않고 굴복만 하면 안 된다.

농노들이 5~600년 동안 노예로 살았지만,
노동자들은 2~300년 만에 정권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이 각성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싸우는 자, 지키는 자의 것이다.

싸우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고
하늘에서 감이 떨어지길 기다려선 안 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언젠가는 온다.
행동하는 양심으로 하면 빨리 오고,
외면하면 늦게 온다.


2009년 6월 25일, 김 전 대통령이 6·15 남북공동선언 9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들과 자택 부근에서 오찬을 하며 한 말이다. 다수가 침묵하고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 소수는 더욱 강력한 지배력을 갖게 된다. 무엇이든 하자. 광장에 나가든, 글을 쓰든, 하다못해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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