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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위 달그림자? ‘그림자’도 처벌하는 게 내란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그대에게

by 조하나


호수 위 달그림자? ‘그림자’도 처벌하는 게 바로 내란죄다.

나는 행운아다.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던 어린 시절을 지나 인스타그램 없는 학창 시절을 보냈고, 김대중과 노무현의 시대에 대학을 다녔다.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완벽하진 않아도 제대로 쓸 줄 아는 정치인과 지도자를 만나면 올바른 방향으로 간다는 걸 나는 직접 경험했다. 살면서 그리운 정치인이 있다는 건 정말이지 행운이다.

한창 머리가 크던 시기에 대한민국 역사 최초의 민주 정부를 모범 사례로 두게 됐다. 이후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를 겪으며 나름 민주주의 마지노선을 긋게 됐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권한이 그토록 막강한지도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악한 사람이 권력을 가지면 민주주의가 얼마만큼 망가질 수 있는지,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작은 날갯짓의 폭풍으로 고통받는지 경험했다.

이명박은 군대와 경찰, 국정원까지 동원해 노무현과 민주 진영을 조롱하고 악마화하는 이미지와 뉴스, 댓글을 생산하고 유포해 여론을 움직였다. 이때부터 대한민국엔 뉴라이트, 극우, 일베, 친일 세력이 다시 고개를 들었고, 더 교활하고 더 뻔뻔해졌다. 21세기 대한민국에 또다시 불법 비상계엄이 선포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은 박근혜 정권 말, 대통령실에서 계획하고 미처 실행하진 못했다는 비밀 계엄 문건으로 확인됐다. 결국, 윤석열이 그때 만들어진 계엄 문건을 참고해 실행에 옮기는 일이 벌어졌다.


그럴수록 나는 김대중과 노무현이 더 그립다. 그렇게 거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민 눈치 볼 줄 알고, 부끄러운 줄 알며, 겸손할 줄 알고, 권력이 국민의 것임을 정확히 이해하고 실천하며, 대한민국의 역사와 민주주의를 지켰던, 이 시대의 기준이 되는 권력자였다.


왜 우리가 죽도록 싫어도 미국의 이라크 파병 요청에 응해야 하는지 구구절절 국민에게 솔직하게 설명하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왜 우리가 미국에 냉철해져야 하는지, 왜 우리가 일본에 당당해져야 하는지 논리적이면서 감성적으로 호소하는 대통령을 나는 노무현 이후로 대한민국에서 만나본 적이 없다.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은 권력자였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당시 대한민국의 기득권과 기성 정치인들은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 시절부터 뼛속까지 스며든 귀족주의와 계급화를 들이대며 “어디 감히 상고 출신에 빽도, 연도, 돈도 없는 게 인기 좀 얻었다고 까부냐”라고 대놓고 침을 뱉고 뺨을 때렸다. 공중파 TV에 나와서도 현재 국민의힘의 전신인 한나라당 의원들은 현직 대통령을 “노무혀이, XX 자식, XX 새끼”라고 불렀다. 빽도, 연도 없는 대통령이 힘까지 내려놓으니 정치검사 패거리와 한나라당은 개떼처럼 달려들어 노무현을 물어뜯었다.


대한민국 보수의 적통이라 자부하는 한나라당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국민의 지지와 인기였다. 오랜 기간 독재로 정권을 틀어쥐고 대한민국의 정치, 행정, 사법,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말 그대로 ‘해 쳐 먹어 온’ 세력은 김대중과 노무현을 조롱하고 무시하면서 그들이 단 한 번도 얻지 못했고, 앞으로도 영영 받지 못할 국민의 지지와 인기에 자격지심을 드러냈다.

폭력과 조롱에 노출된 국민도 조금씩 변했다. 처음엔 권력을 내려놓은 권력자라고 좋아하더니 나중엔 애초에 그가 가지려고 하지도 않았던 권력을 그에게서 빼앗으려 했다. 군사독재 시절엔 광장에서 최루탄에 몽둥이를 맞던 농민과 노동자가 노무현의 얼굴에 날달걀을 던지고, 자신들 쪽엔 눈길도 두지 않는 한나라당엔 ‘나라님, 나라님’ 하며 알아서 고개를 조아리던 사람들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노무현에겐 쌍욕을 퍼부으며 손가락질했다. ‘동네 개가 짖어도 노무현 탓’이라는 조롱 섞인 농담이 골목 구석까지 차올랐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시대에 자라면서 나는 자신을 반대하는 진영까지 품어내는 게 민주주의이고 지도자의 책임이라는 기준을 갖게 됐다.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라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에 뿌리 박힌 오랜 군사독재의 DNA를 없애는 건 김대중과 노무현의 집권 10년만으로는 어림없었다.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뽑으며 사람들은 “돈을 더 벌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을 장사 수단으로 이용해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이명박 정권을 지나며 노무현을 잃고도 박근혜, 그것도 악명 높은 독재자의 딸이 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을 때 김대중과 노무현이 세운 높은 민주주의의 기준은 오히려 나에게 독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시대정신을 잃었고, 나 또한 방황했다.


김대중과 노무현, 이명박과 박근혜, 문재인과 윤석열은 모두 똑같은 민주주의제와 헌법 아래 대통령이 되었다. 변한 건 사람들이었다. 시대가 변하고, 시대정신이 변해 지도자를 잘못 뽑는 건지, 잘못 뽑은 지도자가 시대정신을 흩트려 사람들을 변하게 하는 건지 여전히 헛갈리지만, “모든 국민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라는 말처럼 87년 민주화를 이룬 것도 대한민국 국민이고,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뽑은 것도 대한민국 국민인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나는 ‘맛집 다니는 배 나온 아저씨’와 ‘성형에 중독된 비쩍 마른 여인’의 모습을 보며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을 그대로 반영한 거라 받아들였다. 대한민국이 욕망과 물질의 좀비가 된 건 이미 오래전 일이고, 이명박과 박근혜의 시대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니며 자연스럽게 혐오와 폭력, 조롱과 무시, 끝이 없는 경쟁과 계급화에 익숙해진 세대가 투표권을 행사하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12.3 내란 이후 한 달을 넘게 버티다
겨우겨우 잡혀 탄핵 소추 심판을 받는 자리에 나와서도
그 모든 수사와 재판이 마치 “호수 위에 비친 달그림자를 쫓는 것 같다”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윤석열을 보며
오늘 밤, 나는 또다시 노무현을 그린다.




너무도 커다란 권력을 가진 자의 막중한 책임감으로 끝내 스스로 몸을 던진 사람과 너무도 커다란 권력을 더 갖기 위한 천박하고 어리석은 탐욕으로 한 나라를 불구덩이에 빠뜨린 사람을 나란히 역사의 페이지에 세워둔다. 한 사람은 역사에 길이 남아 추앙받는 달, 그 자체가 되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어두운 구치소 독방에 홀로 앉아 호수 위 달그림자를 쫓는 망상에 빠진 반역자가 되었다.




윤석열은 대통령 취임 후 단 한 번도 국민의 인기와 지지,
그리고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래서 한 손엔 소주병을 들고 다른 한 손엔 칼을 든
한 줌의 사람들이 외치는 ‘윤석열 각하’마저도 그에겐 황홀경이다.

그는 어쩌면 대통령이 된 이후로 지금,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도 사랑이 고프고 외롭고 고립된,
그리워할 사람 하나 없이 공허한 인간일 뿐이다.




아무리 윤석열이 “아무 일도 없었다”며 혼자만의 방에서 그 일을 지워버렸다 해도 대한민국 현실 세계에서 그가 대통령의 권력을 남용해 국헌을 문란케 하고 군사 반란과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그 독방에 홀로 앉아 있다는 실체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에서 내란은 결과에 상관없이 모의만 해도 성립된다.

‘호수 위 달그림자’? ‘그림자’도 처벌하는 게 바로 내란죄다.



그리고 그가 “아무 일도 없었다”라며 온몸으로 부정하는, 세계 10위 경제 대국 민주주의 국가에서 45년 만에 선포한 불법 비상계엄의 경제적, 사회적, 국제적, 문화적 비용은 앞으로 온 국민이 오랜 시간, 혹독한 희생으로 치를 것이다.


이미 끝장난 자신의 권력이 아직 살아있다고 우기며 차가운 독방에서 홀로 앉아 호수 위 달그림자를 쫓는 건 바로 윤석열 자신이라는 게 더욱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아주 달 밝은 밤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가 두껍고 지루한 헌법책 안에 화석 같은 게 아님을 나는 김대중과 노무현에게 배웠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이 아닌 나에게 있다’고 믿는 윤석열은 오늘 밤도 자신의 권력을 빼앗아 간 거라 믿는 반국가세력을 향해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다 잠이 들 테다. 그는 결국 ‘오늘은 뭘 먹으려나’ 궁금해하는 낙으로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지낼 것이다. 그를 사면하지 않는 것이 곧 국민 통합이고, 대한민국에서 또 다른 윤석열의 출현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김대중과 노무현에 진 마음의 빚을 조금씩 갚으며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 노력할 것이다.


12.3 내란 이후, 윤석열 덕분에 앞으로 내가 대통령을 선출할 때 기준 하나가 더 생겼다.




2024년 12월 3일, 그날 밤 당신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가족과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누고,
며칠간 입을 옷가지를 대충 챙겨 집을 나와
죽음을 각오하고 국회로 향했나?

아니면, 국회 정문에 서서 카메라를 바라보며
경찰을 꾸짖고 쇼를 하다 결국 집으로 돌아갔나?

아니면, 팔짱을 낀 채로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얼굴을 파묻고는
국회와 정반대 편으로 향했나?

아니면, ‘어찌 되든 나는 살 터이니’ 발 뻗고 편안히 잠을 잤나?

아니면, 호수 위 달그림자를 쫓는 망상에 빠져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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