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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파시스트인가?

괴물 엘리트를 키워내는 한국 교육.

by 조하나


나는 00학번 ‘밀레니엄 세대’다. 새천년이 열리는 동시에 대학생이 된 우리는 아주 잠시 ‘대한민국의 희망’이었다. 사회의 그 달콤한 추켜세움으로 당시 우리는 마치 뭐라도 될 수 있을 것처럼 잠시 우쭐댔다. 그리고 강압적이고 보수적인 우리 엄마, 아빠 세대와는 좀 다른, 아니 그보다는 좀 나은 어른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바람이 불었다. 우리 세대에겐 ‘평생직장’ 같은 건 더 이상 없다고 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없다고 했다. 비정규직과 계약직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겨났다. 오랜 군사독재로 노동운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나라에서 평범한 노동자의 일상이 철저히 외면됐다. 사회적 약자나 노동자를 돌아볼 시간 따위는 더욱 없었다.

나는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여전히 묻어있던 ‘국민학교’에 다녔다. 매일 아침 조회를 하며 ‘국기에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불렀고, 국민체조를 했다.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듣다 더위를 먹어 쓰러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 커다란 텐트를 치고 반공영화를 봤던 기억도 있는데, 북한군이 남침해 사람들을 끔찍하게 고문하는 장면을 보고 몇 날 밤 악몽을 꿨다. 지금이라면 아이들의 ‘인권’을 운운하며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섰겠지만, 대한민국의 90년대는 인권위가 만들어지기도 전이다. 그래도 한 동네 전체가 사는 형편이 다 거기서 거기라 학교 끝나면 또래 친구들과 해 질 때까지 신나게 뛰어놀았다. 그땐 학원에 가는 아이도 별로 없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우리 집은 부천에 새로 들어선 중동 신도시로 이사했다. 계속해서 오르는 전세가로 사정에 맞추다 보니 밀리고 밀려 그렇게 됐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고층 아파트로 넘쳐나는 동네에도 건물을 높게 올릴 수 없는 구역으로 지정된 빌라촌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거기에 살았다. 틈새시장을 찾은 것이다. 그때 중학교에선 여학생은 무조건 ‘가정’을 배우고 남학생은 무조건 ‘기술’을 배웠다. 여자는 여자다워야 했고, 남자는 남자다워야 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태어나 처음, 나는 계급사회를 피부로 느끼기 시작했다. 고작 열세 살 아이들이 서로 사는 아파트 이름으로 편을 나눴다. ‘중흥마을’ ‘은하마을’은 방 서너 개 이상에 욕실이 두 개 이상인 고급 아파트, ‘설악마을’ ‘한라마을’은 작은 방 두 개에 욕실 하나짜리 임대아파트 단지였다. 그중에서도 ‘은하마을’이라는 똑같은 이름의 아파트가 고급 단지에도 있었고, 임대 단지에도 있었는데, 아이들 중 누군가 “나 은하마을에 살아” 하면 고급 아파트 은하마을에 사는 아이가 미간을 찌푸리며, “어느 은하마을?”하고 묻곤 했다.

그 당시 부천은 비평준화 지역으로 고등학교에도 분명한 서열이 있었다. 학력고사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응시해 커트라인을 정해 학생을 뽑았다. 아이들이 “저 어느 학교 다녀요” 하면 성적이 어느 정도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고급 단지에 사는 아이들은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인 사교육을 시작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 되면 거대한 학원가에 늘어선 셔틀버스에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표정을 한 열다섯 아이들이 한숨을 내쉬며 짐짝처럼 실려 있었다.


엄마, 아빠가 맞벌이하고, 학원에도 안 다니고, 어느 아파트 단지에도 살지 않던 나는 학교가 끝나면 남아도는 시간을 나처럼 학원에 가지 않는 ‘설악마을’ ‘한라마을’ 친구들과 함께 보냈다. 그럼에도 내 성적은 최상위권이었는데 순전히 학교 선생님들을 잘 만난 덕이었다. 그리고 나는 당시 부천에서 가장 높은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는, 소위 ‘명문’이라 불리는 부천여고에 진학했다.


대한민국에서 ‘명문’의 의미는 아이들을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낸다는 뜻이었다. 입학 첫날부터 밤 9시까지 ‘야자’를 했다. 치맛바람 세기로 유명한 신도시 중학교마다 1, 2등 한다는 아이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여자 고등학교의 분위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중흥마을’ ‘은하마을’ 아이들은 따분하고 재미없었다. 기계처럼 공부만 하다 모의고사 성적이 나오면 매일 같이 붙어 다니던 친구도 서로 원수가 됐다. 한마디로 재수 없었다. 나는 그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아니, 그러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중학교부터 어울리던 ‘설악마을’ ‘한라마을’ 친구들과 말썽을 부리며 다녔다.


수학보다 언어와 문학에 재능이 있었고 관심도 많았지만, 고등학교 내내 누구와도 제대로 된 진로 상담을 할 수 없었다. 그땐 한 반에 학생이 50명이 넘어 선생님 혼자선 버거운 일이었다. 인터넷 세상도 변변치 않았다. 고3 담임선생님은 ‘문과는 법대’, ‘이과는 의대’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선생님은 각 아이들에 대해 잘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그때 선생님은 나에게 “인문계 대학에 진학한다면 평생 손가락을 빨 것”이라고 말했다. 엄마도 그랬다.

국어/영어를 잘하는 아이들은 죄다 판검사가 되고, 수학/과학을 잘하는 아이들은 죄다 의사가 되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는 걸까? 공부만 잘하면 비위가 약해 피만 봐도 구토한다거나 인간에 대한 윤리적 책임감이 없어도 의사가 될 수 있는 세상이라고 어른들은 말하고 있었다. 그 당시 반항심과 마이너 정신으로 똘똘 뭉친 나에겐 판검사의 삶이 너무 따분하고 고루해 보였다. 어떤 친구들은 엄마의 성화에 못 이겨 교대에 가서 선생님이 되겠다고 했다. “철밥통이래”가 이유였다. 그때 그렇게 말한 그 친구가 지금 선생님이 됐다면, 나는 내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서울대에 떨어져 재수로 연세대에 들어간 아빠는 그 자격지심 때문에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다고 고백했다. “동네 슈퍼를 해도 대학을 나온 것과 안 나온 건 다르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엄마는 고졸이다. 나는 엄마와 아빠 사이의 대학에 대한 간극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결국 나는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회과학을 전공하며 별로 배운 것도 없이 비싼 등록금만 축냈다. 대학가의 소수는 인문학의 위기를 외쳤다. 인문학을 등한시하는 나라의 미래는 암울할 거라 예언했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아빠와 엄마, 모두 틀렸다. 등록금 대출금을 잔뜩 빚으로 껴안고 대학을 졸업하자, 사회는 우리를 ‘88만 원 세대’라 부르며 마음껏 조롱하기 시작했다. 서울대를 나온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가 사회적 현상이 됐다. 그런데도 기성세대와 기득권은 자기들의 사기에 가까운 기만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고, 비정상적인 사회를 만든 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다. 그러면서 부동산 투기와 부정부패로 돈을 벌었고, 기울어진 운동장을 더 기울여 다졌다.


매해 수능 다음날이면 원하는 성적이 안 나와 자살했다는 수험생들의 뉴스가 나왔다. 대학가 OT 시즌이면 선배의 강압에 못 이긴 신입생이 술을 억지로 받아먹다 죽었다는 뉴스도 매년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였지만, 서태지와 아이들의 ‘교실 이데아’를 들으며 ‘그래, 우리 다음 세대엔 수능 볼 일이 없을 거야. 세상이 바뀔 거라고!’ 하는 희망을 품었건만, 그로부터 30년이 지나도록 대한민국의 교육은 더 강압적이고, 더 경쟁 중심으로 변했다.


딱히 가르치는 것 없이 거들먹거리기만 하는 교수에 잘 보여야 취업도 잘 되는 거라고, 대학 친구들이 말했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대부분의 친구가 전공과 관계없이 너도나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나처럼 공익에 대한 사명감이나 사회에 대한 책임감 없는 사람이 공무원이 되는 게 말이 돼?” 우리는 스스로 조롱하며 키득거렸다.

나는 대학 졸업 후에도 남들처럼 4대 보험이 보장되는 번듯한 정규직 직장을 갖지 않았다. 대학 시절 주말 알바를 하던 홍대 클럽 사장님과의 연으로 해외 디제이 내한 파티 마케팅과 프로모션을 맡았다. 이십 대를 서브컬처와 언더그라운드 문화로 가득한 홍대 길거리에서 보낸 경험이 바탕이 되어 서른이 넘어서야 작은 인디매거진 기자가 되었다. 그때 나를 고용한 편집장 역시 젊은 시절을 홍대 라이브 클럽에서 보낸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 학력과 나이 대신 경험을 쳐줬다. 한국 사회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기란 정말 드문 일이었다.


기자로 자리 잡고 나름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무렵 대형 상업잡지로부터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다. “한국에서 내가 인터뷰하고 싶은 아티스트가 더 이상 없어지면, 난 그만둘 거야.” 늘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나의 마지막 인터뷰이였던 노엘 갤러거를 만나고, 나는 회사에 사표를 내고 타국의 작고 외딴섬으로 떠나 스쿠버 다이빙 강사가 되어 10년 가까이 바닷속에 살았다.

나는 늘 한국 사회의 한쪽에 빗겨서 있었다. 나는 서브컬처를 사랑하는 사람이자, 언더그라운더이자, 아웃사이더다. 이게 내 DNA에 있는 건지, 한국 사회에서 자라며 만들어진 저항 심리인지, 이런 내가 좋아 스스로 만든 건지, 나는 아직 결론을 내지 못했다.


나는 또, 겁쟁이다. 이십 대까지만 해도 이런 내가 한국 사회에 어긋나서 사람들의 심기를 대단히 거스를까 봐 말하지도 못했다. 나는 사회에 대한 불만도 많고 비판 의식은 높지만, 용기가 없어 나서진 못하고 소심하게 글로만 끄적였다. 그리고 내 삶으로 나는 이 사회에 동의할 수 없다는 걸 표현하고 저항할 뿐이다.


나는 지금의 내가 좋다. 내가 만약에라도 법대에 들어가 고시에 패스해 판검사가 되었더라면,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공직사회에서 내 영혼은 썩어 문드러졌을 것이다. 나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끊임없이 궁금해하고 탐구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걸 십 대와 이십 대 내내 방황하고서야 알았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평생 한국 밖을 나가 책 속의 사람들이 아닌, 진짜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나만의 비좁고 편협한 세상을 벗어나 트랜스젠더와 게이, 러시안과 결혼한 우크라이나 사람, 문화적, 역사적, 경제적 우월감을 과시하면서도 끝내 스스로 알아채지 못하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서양권 사람들과 조롱당하고 착취당하는 동남아 사람들과 동시에 친구가 되었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차별금지법 제정에 찬성하고, 보다 진보적인 사회를 꿈꾸는 사람이 되었다. ‘-사’ 자 들어가는 사람이 되지 않아도, 그런 사람과 결혼해 팔자를 고치지 않아도, 나는 오롯이 나로서 가치 있는 사람이란 걸 오랜 시간, 한국 안과 밖에서 세상 사람들과 충돌하며 배웠다. 오랜 시간을 거쳐 자존심이 아닌 자존감을, 우월감이 아닌 연대를, 경쟁이 아닌 공존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이런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든다.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어 도망친 곳에서 수년을 살다 보니 그렇게 얄궂고 미웠던 한국에 연민과 안쓰러움도 생겼다. 동시에 분노도 치민다.


왜 우리는 서로에게 이리 빡빡할까? 왜 우리는 권력을 차지하려 애쓰거나, (끝내 자신이 권력을 차지할 수 없다는 걸 알아챈다면) 권력의 편에 서려고만 할까? 왜 우리는 죽어야 끝나는 게임으로 스스로를 몰아가는가? 앞으로 얼마나 더 죽어야 이 게임을 그만둘까? 왜 우리는 서로에게 방황하고, 고민하고, 탐구하고, 실수하고, 돌아가고, 또 배울 시간을 넉넉히 주지 못할까? 왜 우리는 백세시대와 AI시대, 인구 소멸의 시대에 10년 동안 죽도록 공부해 좋은 대학에 가서 판검사나 의사가 되어 사회를 지배하는 계층이 되는 데 집착할까?


결국 대한민국의 모든 학부모와 교육제도의 합작품으로 탄생한 그 잘난 판검사, 공무원 엘리트들이 12.3 내란을 일으키고, 그 이후에도 계엄이 합법적인 대통령의 통치 권한이라 주장하며, 오늘도 야금야금 이 사회를 혼란과 분열에 빠뜨리고 있는데?









한국인은 모두 파시스트인가?

괴물 엘리트를 키워내는 한국 교육


내가 한국 밖에서 사는 동안 더 절실히 깨달은 건 내 나라는 한국이고, 나는 한국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태어나고 자라 한국인 부모 밑에서 한국의 교육을 받고, 한국 사회에서 일했다.


내가 잘 아는 한국을 밖에서 들여다보며 품었던 수많은 질문에 대한 답을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소장인 김누리 교수의 책에서 얻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 한국의 수능을 없애고, 독일처럼 대학 등록금을 없애고, 대학 서열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해 왔으며, 1987년을 기준으로 대한민국은 군부독재 군사정권과 민주주의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전기 파시즘과 후기 파시즘 사회로 나뉜다고 말해왔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끊임없이 파시스트들이 재생산되고 있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한국의 교육을 꼽았다.

얼마 전 노무현재단 유튜브 채널에서 정준희 교수가 진행하는 토요 토론 ‘한국인은 모두 파시스트? 괴물 엘리트를 키워내는 한국 교육’이 공개됐다. <경쟁 교육은 야만이다>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등의 책을 펴낸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 소장 김누리 교수와 ‘서울대 10개 만들기’ 운동으로 한국의 교육 개혁에 앞장서 온 경희대 사회학과 김종영 교수의 대담이다.


이제 대부분 학부모가 된 또래 친구들인 밀레니엄 세대와 언젠간 부모가 될 Z세대, 우리 사회 구성원이 모든 걸 잠시 멈추고 꼭 나눠야 할 이야기라 여기에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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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엘리트

87년 헌법 체제를 뒤흔들고 있는 현재의 내란 국면은 ‘법을 가장 잘 안다’고 일컬었던 서울대 법대 출신의 검찰·법조 엘리트 출신 윤석열 대통령이 만들었다. 그의 동료인 법조 엘리트들이 만든 일이기도 하다. 이와 동시에 우리나라 군대 핵심부를 구성하고 있는 육사 출신의 이른바 ‘충암파 라인’이 이에 적극적으로 동조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것만이 아니다. 국무회의에 참여했던 각 부처 장관을 비롯한 수많은 참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내란을 막지 못한 채 기회주의적 변명과 심지어는 내란에 동조하는 듯한 모습까지 보이는 사람들 역시 우리 사회 최상위층 지배 엘리트의 구성원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지금의 여당인 국민의힘 국회의원 역시 우리 사회 여러 분야의 엘리트 출신이다.


이들이 현재 보여주고 있는 반민주적이고, 반헌법적이며, 심지어 극단적이고 반지성주의적 면모들은 과연 우리 한국 사회의 지배층을 구성하고 있는 이들의 본질이 무엇인가, 깊이 성찰하고 분노하게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 사회를 다시 그리는 로드맵의 한 지점에서 우리 사회의 지배 엘리트의 민낯을 낱낱이 해부해 본다.



대한민국 엘리트의 정의 및 특징

사회과학에서는 ‘엘리트’를 특정한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상위층을 대표하는 말로 쓰인다. 즉, 사회적 자원을 비롯한 권력, 지식 등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이다. 이번 12.3 내란 사태에서 우리가 보았듯 엘리트들이 견제되거나 통제되지 않으면, 그리고 민주적인 의식을 갖고 보지 않으면 어마어마한 사회적인 해악을 끼칠 수 있다.

지금 한국의 엘리트라 불리는 집단처럼 미성숙하고, 오만하고, 파렴치한 이들은 전 세계에 없다. 어느 나라나 엘리트 집단엔 부패한 자들이 많다. 권력에 가까이 있으니 부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한국은 부패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아주 특수한 엘리트가 지금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데, 이는 12.3 내란 사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 엘리트 집단은 아무리 나빠도 인정할 만한 능력이 있는 부류가 있고, 나쁜데 인정할 만한 능력조차 없는 부류가 있다. 대단히 미성숙하고 잘못 만들어진 존재들이 바로 윤석열의 12.3 내란 사태와 관련된 엘리트 집단이다. 그들은 하나의 새로운 유형의 인간 집단이다. 우리는 그 근원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지금 반드시 짚어야 한다.

한국의 엘리트 집단만큼 동질적인 집단은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른바 SKY 출신들이 정부를 구성하는 파워 엘리트의 50~70%를 장악하고 있다. 서울대 법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의 집단이 나라의 전체적인 경제와 법을 주무르는 나라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한국의 엘리트 집단은 굉장히 폐쇄적이고, 다른 나라의 엘리트 집단보다 ‘우리는 당신들과 완전히 다른 인종이다’까지, 어떻게 보면 인종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대한민국에 왜 이런 괴물 같은 엘리트 집단이 태어났느냐를 깊이 들여다보면 결국, 한국의 교육 자체가 괴물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12.3 내란 국면과 한국 사회의 파시즘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가 이뤄졌다’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지만, 한국 사회는 군사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넘어온 게 아닌, 전기 파시즘 사회에서 후기 파시즘 사회로 넘어온 것이다.


전기 파시즘은 제도로써의 파시즘이다. 그러니까 87년 체제 이전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부터 거의 40년에 걸친 전기 파시즘 사회가 지속됐다. 제도 자체가 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것이었고, 그런 자들이 나라를 지배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모두 세상을 떠나며 전기 파시즘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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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부터)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미국으로 도피해 삶을 마감한 이승만,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18년간 군부독재로 통치한 박정희, 군사쿠데타로 광주시민을 학살한 독재자 전두환과 노태우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 ‘그들이 32년 동안의 군사 독재 동안 남겨 놓은 태도로써의 파시즘이 과연 청산이 됐냐’는 것이다. 전혀 청산되지 않았다.


사실상 한국인들 대다수가 파시스트적 성향을 보인다. 특히 한국의 교육이 이런 파시스트적 성향을 재생산하고, 심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한국 교육을 잘 받고, 전교 1등을 하는 자들은 거의 90% 이상이 파시스트다. 전체주의적인 제도와 군사 독재 인물의 시대가 끝나고, 제도적으로는 나름대로 민주적 체제를 갖췄으나, 실제 민주주의 제도를 운용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파시스트인 것이다.

대한민국은 하드웨어적으로는 제도적인 민주화 국가가 되었으나 소프트웨어적으로는 여전히 파시즘적 사회다. 많은 사회학자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나름 40여 년 이어져 왔기 때문에 이 점을 간과했다. 그러나 12.3 내란 이후, 대부분의 학자가 뒤통수를 맞았다.





나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나는 파시스트가 아니다’, ‘나는 12.3 계엄 당일 국회 앞에도 나가고, 87년부터 내내 거리에서, 또는 시민 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라고 서운해할 것이다.


우리는 보통 상식적으로 파시즘을 ‘테러나 공포에 의한 독재적 반민주적 통치 체제’로 본다. 그러나 파시즘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이거다. 파시즘은 국가 기관을 통해 전체 구성원을 파시스트로 만드는 체제라는 것, 이게 무서운 거다.


‘파시스트’ 하면 우리는 무솔리니, 히틀러, 박정희 같은 인물을 떠올린다. 이들이 한 파시스트적 행태를 생각해 보자. ‘국민교육 헌장’ ‘국기에 경례’ ‘국기 하강식’ ‘조회’ 등을 매일 하면서 사회 구성원 전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일이 기본적으로 일어나는 곳이 학교, 그다음이 군대, 교회 등이다. 이런 곳을 통해 구성원들을 끊임없이 파시스트로 만든다. 하지만 본인들은 모른다. 자신들이 파시스트가 되어 간다는 걸. 사회 구성원 모두 아주 자연스럽게 파시스트가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파시즘의 근원, 교육


그래서 파시즘은 단순히 제도 몇 개 고쳐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바로 그 교육을 통해 파시스트가 아닌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만들어 내는 것이 파시즘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지금까지 우리에겐 그런 인식이 없었다. 우리는 독재자들이 사망하고, 그 시대를 넘어서면, 파시즘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고 믿은 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내면의 파시즘과 태도로써의 파시즘은 지금까지 우리 공동체에서 사회적 문제로 등장한 적이 없다.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대한민국 온 천지가 파시스트인 것이다.


분명히 민주적 실천 의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오랜 기간 누적된 한국 교육이나 문화의 효과로 자기 안에 파시즘적인 성향, 내지 지향성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부분을 인정하고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다.



제도가 아닌 태도로서의 파시즘


여전히 파시즘적 교육 요소가 다분한 대한민국 교육을 잘 받아 엘리트 집단이 된 사람들이 가장 투철한 파시스트가 될 가능성이 높다. 후기 파시즘 사회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한 철학자 집단인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아도르노가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파시즘보다 민주주의 속에서의 파시즘이 훨씬 위험하다.’ 바로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암약하고, 그 사회와 구성원에 내장되어 있는 파시즘, 결국 ‘태도로서의 파시즘’의 위험성을 말하는 것이다.


파시즘의 특성 첫 번째, 강자 동일시. 두 번째, 약자 혐오. 세 번째, 강박적으로 다수에게 동조하는 성향을 보이는 동조 강박. 네 번째, 폭력성과 공격성이다.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이 우연일까? 작가가 철저하고 집요하게 파고든 게 바로 일상의 폭력, 국가 폭력 같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폭력이다. 다섯 번째는 흑백 논리. 여섯 번째는 비겁함. 일곱 번째는 기회주의다. 비겁성과 기회주의를 추가하는 순간, 한국에서 윤석열의 세력이 보이는 행태 모두 전형적인 파시스트에 해당한다.


파시즘에는 세 가지 원리가 핵심으로 작동한다. 첫째, 경쟁이 자연스러운 세계의 질서다. 두 번째, 끊임없이 우열을 나눈다. 세 번째,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지배하는 게 자연의 질서다.


민주주의자에게 세계는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함께 사는 곳’이다. 우열이 지배하는 곳이 아니다. 다양성이 허용되는 곳이고, 지배와 복종의 관계가 없는 곳이다. 모두가 평등한 가운데 교류하고 협력하는 관계, 이게 바로 민주주의자가 보는 세계관이다.



다운로드.jpg 영화 <위대한 독재자>(1940), 찰리 채플린





파시스트를 길러내는 대한민국 교육


대한민국에서 초-중-고, 12년 교육을 받으면 파시스트가 될까, 민주주의자가 될까? 이게 바로 핵심 질문이다. 한국 교육을 지배하는 건 완전한 파시스트의 논리다. 그런 교육을 너무 잘 받아서 전교 1등을 하면 확실한 파시스트가 되는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서 교육의 부작용이 집중적으로 드러난 게 바로 내란우두머리 윤석열의 대통령 탄핵 과정이다.


앞서 말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은 인간에겐 우열 의식, 적자생존, 인종주의 같은 게 무의식적으로 내면화돼 있다는 것이다. 휴대폰의 오퍼레이팅 시스템은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무의식이고, 휴대폰에 깔린 애플리케이션은 눈에 보이는 제도라고 생각해 보자. 무의식 속에 파시스트적 오퍼레이팅 시스템이 깔린 사람에게서 문제를 꺼내어 비판하고 제거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윤석열이 평생 공부한 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민주주의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애플리케이션은 모두 민주주의 프로그램인데 오퍼레이팅 시스템이 파시즘이라는 것이다.


윤석열은 무의식적으로 내가 가장 잘났고, 내가 이 정글에서 최고의 성적을 거둬서 최고의 대학을 가고 최고의 엘리트 위치에 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가 교실에서 공부는 많이 했겠지만, 결국 민주주의 자체를 내면화시키지는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무의식적 욕망 속에는 우월주의, 인종주의, 강자 동조,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다는 파시즘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엘리트를 숭배하는 나라, 대한민국


수많은 한국 사람이 ‘저 사람은 서울대 나왔으니까’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파시즘적인 요소이다. 우리 국민 전체가 12년 동안 파시즘적 교육을 받았기에 그것이 문제라고 의식적으로 끌어내는 건 힘든 일이다.

현재 윤석열뿐 아니라 윤석열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국무위원들, 한덕수부터 최상목까지 대부분 60~70년대의 교육, 즉 전기 파시즘의 연장선에 있는 인물들이다. ‘일베’라 불리는 극우 파시즘 집단은 87년 민주화 이후에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후기 파시즘적인 교육 구조 안에서 자란 세대다.

사실 12월 3일, 윤석열의 내란 시도는 충격이 아닌 황당함이다. 12월 3일 이후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이 상황이 충격적이다. 87년 이후 40여 년 가까이 민주주의를 했다는 나라의 엘리트 집단 머릿속은 완전히 파시스트의 세계관으로 가득하다는 게 만천하에 드러난 것이다. 대한민국의 관료계, 법조계, 국민의힘이라는 정당을 구성하는 이들은 지난 40여 년 동안 과연 무엇을 배운 걸까?

현재 한국뿐 아닌 극우 파시즘이 전 세계적으로 강해지고 있다. 첫 번째로 반세계화다. 자본주의 역사상 지금처럼 이렇게 끔찍한 불평등을 야기한 자본주의가 없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사람들에게 어마어마한 좌절감을 표출하고 있다. 이것이 곧 반엘리트주의로 이어진다. 엘리트 집단이 세계화의 승자가 되어 언어와 지식을 독점하고 엄청난 부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트럼프의 재집권에 대한 마이클 샌델의 분석을 보면, 미국의 능력주의와 경쟁 교육으로 만들어진 엘리트 사회에 대한 반감이 트럼프라는 괴물을 등장시켰다.


현재 세계적으로 극우 파시즘 세력은 ‘반세계화’와 ‘반엘리트’를 표방하고 있는데, 한국의 극우 파시즘은 다르다. 오히려 엘리트를 숭배한다. 12.3 내란이 일어난 상황에서도 대한민국은 앞으로 다가올 대선을 앞두고 상속세 논쟁을 벌이고 있지 않나? 엘리트 집단을 더 부자로 만들어 주겠다는 정책이 논의되고 있다.


대한민국이 민주화되려면 경제 양극화와 교육적 불평등 같은 문제들이 먼저 사회적 아젠다로 나와야 하는데, 윤석열 대통령 탄핵을 주장하는 쪽에서마저 사회 대개혁을 주장하면서도 구체적인 정책을 말할 땐 엘리트에 동조하거나 엘리트를 위한 정책들을 내놓는다.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다. 이것은 바로 대한민국의 진보든 보수든 관계없이 엘리트와 동일시하는 강력한 경향성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파시스트적 특성 중 하나인 ‘강자 동일시’ 현상이다. 이렇게 엘리트를 숭배하는 현상은 다른 나라에선 볼 수 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파면된다 해도 대한민국의 사회적 내란 상태는 지속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건 구조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엘리트 집단과 대중의 빈부격차 통계를 보면, 상위 20%와 하위 20%의 자산 격차가 144배 정도 난다. 12년 전에는 한 70배 정도 났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구조적으로 엘리트 집단을 견제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구조적인 정책들을 토론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 대학의 문제점: 자본 독재의 하수인 양성

정치적 공론장으로 군사 독재 시대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한국의 대학들은 자본 독재 시대로 이행되면서 모두 제 역할을 잃었다. 대학들이 한국 사회를 더 민주화되고 성숙한 사회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 독재의 하수인들을 길러내는 자본 독재의 하위 기관으로 완전히 타락한 것이다.

한국의 대학은 기업에 노동자를 공급하고 기업의 연구를 해주고 지식을 공급한다. 대학 교수들은 자본을 위한 이데올로기 속에서 성숙한 지식인을 길러내지 못하게 됐다. 연세대 청소 노동자 시위 때 학생들이 노동자를 고발하고, 민사소송까지 냈다. 지구상에 이런 대학이 어디에 있나. 12.3 내란 이후 윤석열 탄핵에 반대하는 SKY 대학의 극우 학생 단체의 움직임도 우연히 벌어진 일이거나 갑자기 발생한 사고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잠복해 있던, 말하자면 자본 독재 시대, 또 다른 맥락에선 후기 파시즘 시대 대한민국 대학의 양상이 분출하는 것이다.

엘리트 대학이 배출한 인재들은 대한민국 각 분야를 독점하며 사회 불평등과 양극화를 끊임없이 재생산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사교육비는 27조에 달한다. 소득의 불평등은 교육의 불평등으로 이어지고, 이는 또 계급의 불평등으로 이어진다. 이 모든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제 엘리트 대학 출신들은 진보든 보수든, 더 이상 이 문제를 교정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 12년 동안 교육을 받으며 엘리트 대학에 들어가는 건 정당한 것이고, 사회의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내면화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현황과 과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민주화가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민주화를 이뤄야 할 분야는 먼저 정치, 그다음 사회, 경제, 문화, 이렇게 네 단계로 나뉜다.


한국의 정치 민주화는 상당 수준 올라와 있다. 그런데 정치를 구현하는 정치 집단이 너무 후진 것뿐이다. 후진 것뿐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집단이기도 하다.


지금의 국민의힘을 보라. 저런 보수가 세상에 어디 있나? 그들은 보수가 아닌 수구 세력이다. 민주당을 보라. 이런 진보가 세상에 어디 있나? 그들은 진보가 아닌 보수 세력이다.


지금 한국이란 나라는 수구(국민의힘)와 보수(민주당)라는 과두 지배 체제다. 서로 경쟁도 안 한다. 아니, 경쟁할 필요가 없다. 사실상 두 정당은 6:4, 아니면 4:6으로 조금씩 점유율만 바뀔 뿐이다.

대한민국은 사회 민주화가 되어 있는가? 예를 들어, 현재 중앙대 구성원은 누구인가? 학생, 교수, 교직원, 조교와 강사 등의 집단이 있다. 그들에 의해서 대학이 운영되는가? 지금 중앙대는 두산이라는 재벌이 운영한다. 두산중공업 이사장이었던 그가 중앙대 이사장이 되어 가장 먼저 한 일이 총장 직선제를 없앤 거였다. 이것이 중앙대만의 일일까? 심지어 국·공립 대학도 총장 직선제를 없애고 있는 게 현실이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사회 집단 중 사회적 민주주의가 이뤄진 곳은 거의 없다.

다음은 경제 민주화다. 독일의 경우, 기업의 최고 의사결정 기관인 이사회의 50%가 노동자 대표다. 이게 민주주의다. 우리에겐 아예 ‘경제 민주화’라는 의식 자체가 없다. 지금도 우리는 ‘삼성’ 하면 ‘이재용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 이재용은 3% 주식을 갖고 있는 주주에 불과한데 말이다. 이런 인식 자체가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

대한민국의 문화를 보라. 이렇게 권위주의적인 나라가 어디 있나? 이게 지금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실상이다. 파시즘이 등장할 수 있는 많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한국 사회가 다른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 결정적인 차이를 갖는 건 바로 ‘68 혁명’의 부재다. 현재 선진국 중 ‘68 혁명’의 영향이 없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한국은 ‘68 혁명’ 자체를 모른다. 1968년, 대한민국은 박정희 통치기였다. 그리고 우리는 베트남전에 지상군을 파병한 유일한 나라였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세계적인 반전 운동이자 탈권위주의, 반자본주의를 주장했던 ‘68 혁명’이 한국만 비껴간 것이다. 근본적으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는 성찰적 문화혁명의 시도가 없었던 대한민국은 사실상 ‘68 혁명’을 겪은 나라들에 비해 50~60년 이상 뒤처져 있다.





각성의 기회: 엘리트 내부의 균열과 시민들의 역할

대한민국은 교육 개혁에 대한 반감이 거센 나라다. 학교의 등급을 없애고, 서열을 없애자고 하면 진보든 보수든 반대하는 경향이 심하다. 전 국민이 12년 동안 서열 체제에 대해 교육받았으니 ‘서열을 없애자’고 하면 대부분이 동의를 못 한다.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특권을 빼앗긴다고 생각한다. 내가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 나와 사회적 특혜를 누리는데, 왜 그걸 뺏어가려고 하냐, 하는 태도도 있다.

그러나 이번 12.3 내란 사태로 많은 대한민국 국민이 깨달았길 바란다. 대한민국의 최고 엘리트가 저 정도 수준이다.

이번 계기가 어쩌면 대한민국의 사회 대개혁과 문화 대개혁을 이룰 수 있는 각성의 기회일 지도 모른다. 이번 기회를 통해 파시즘에 의해 주도된 대한민국 사회를 어떻게 뒤집을 것인가라는 인식에 출발점을 만들어야 한다. 이 기회를 놓치고 또다시 대한민국 사회가 엘리트주의의 논리를 보장한다면, 내란은 지속될 것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왜 이렇게 약할까?


대한민국처럼 위대한 민주 혁명을 연속적으로 이룬 나라의 사례는 세계적으로 많지 않다. 분명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4.19 혁명부터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에 이은 2016 촛불혁명까지 우리는 다른 나라는 한 번도 힘든 민주 혁명을 여러 번, 연속적으로 해왔다. 그런데 사실은 부끄러운 것이다. 시민의 혁명은 늘 군홧발로 다시 더럽혀졌다. 우리는 이제 다른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왜 이렇게 약할까?


대한민국은 광장의 민주주의와 일상의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괴리돼 있다.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던 사람이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서서히 변신한다. 집에 도착하면 평소의 가부장적인 아버지로 돌아간다. 다음날 학교에 가면 아이들을 들들 볶는 권위주의적인 교사로, 회사에 가면 갑질을 하는 상사가 돼 있다. 그럼, 민주주의는 광장에서만 하는 것인가?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어디서 결판이 날까? 투표장에서? 아니다. 12년 간의 교실에서 결판이 난다. 대한민국이 교육에서부터 성숙한 민주주의자를 기르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


OECD 국가 38개국 중에서 정치적 시민권을 완전히 박탈당한 교사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교사는 정치적 의사를 밝히는 것은 물론 학생들과 정치적 현안에 관해 토론할 수도 없다. 교실 안에서 정치 얘기는 금물이다. 아이들은 토론하는 법을 모른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정치 토론이 안 된다.


한국 교실을 입체적으로 보면, 파시스트의 경쟁과 우열 지배라는 원리에 따라 정치적으로 입이 틀어 막힌 교사가 아이들을 미숙아 취급하며 가르치고 있다. 그 누구도 교실의 아이들을 정치적으로 성숙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파시스트가 자라기에 너무 좋은 공간이다. 그런 교실에서 어떻게 민주주의자가 자랄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가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위협받는 것이다.





대한민국 교실이라는 아우슈비츠에서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야 한다


결국 대한민국의 공교육 체제 자체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혁명적 결당 없이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사교육 시장이 27조나 되는 대한민국의 교육은 공교육과 사교육으로 철저히 양분되어 계급에 의해 지배를 받는다. 세계 선진국 중 이런 나라는 없다.


1980년대 대한민국의 학생은 1천4백만 정도 됐다. 지금은 한 7백만 내외가 된다. 그리고 2040년경에는 4백만으로 준다. 60년 사이 천만 명이 줄어들었다. 통계 조사에서 학부모들에게 왜 아이를 더 안 낳냐고 물으면, 첫 번째로 꼽는 것이 바로 사교육 부담이다. 사교육비가 1%가 늘면, 출산율이 0.3% 줄어든다는 통계도 있다.


그리고 매년 150여 명의 아이들이 자살한다. 이태원 참사가 한국 교실에서 매년 벌어지고 있다. 대한민국 교실이라는 아우슈비츠에서 우리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야 한다.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트라우마로 가득한 대한민국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이 교실의 아우슈비츠를 끝낼 수 없는 이유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다.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내면화하지 못하고 파시즘의 교육을 받아온 우리가 이 사회의 교사, 학부모, 학생이 되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간수, 아이히만이 되어 수감자인 학생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독가스를 살포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대체로 한국에서는 ‘고등학교 시절이 당신에게 어땠어요?’라고 물으면 ‘전쟁터였다’는 대답이 가장 높다. 대한민국의 학생들은 같은 반 학생을 경쟁자로 인식한다는 게 대체로 80%를 넘는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다.


한국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거의 대다수가 일종의 전쟁 트라우마를 앓고 있는 전쟁 생존자라는 말과 같다. 그리고 그 트라우마는 평생을 간다. 그래서 한국 사회가 이렇게 병이 든 것이다.

그렇다고 한국 대학의 수준이 높은가? 이른바 선진국 중에서 학문 분야 노벨상이 하나도 없는 나라는 한국뿐이다. 대한민국엔 강박적으로 성실한 서울대생은 많아도 창의적인 아이들은 거의 없다. 대학생들은 교수가 한 말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다 받아 적어 시험 볼 때 그대로 써낸다. 이게 한국 대학의 현주소다.





엘리트 집단의 특권을 당연하게 여기지 말라


한국 사회엔 딱 두 부류의 인간밖에 없다. 승자와 패자. 승자들은 모든 부와 권력을 전쟁터의 전리품처럼 누린다. OECD 국가 전체에서 의사 수가 가장 적은 나라가 어디인가? 한국이다. ‘내가 어떻게 공부해서 의사가 됐는데? 어딜 감히 함부로 들어와?’라는 거다. 법조계도 비슷하다. OECD 전체로 보면 대한민국은 판사가 가장 적은 나라 중 하나다.


어마어마한 특권을 당연시하는 한국의 엘리트 집단 때문이다. 런데 사회가 그들의 권력을 함께 당연시한다. ‘의사’ ‘판사’ ‘고위 공무원’을 전쟁에서 이긴 자의 전리품으로 여기는 오만하기 이를 데 없는 엘리트 문화가 대한민국을 망쳤다.


바로 교실에서 이런 오만한 엘리트가 탄생한다. 99%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패배감과 열등감, 절망감, 심지어 좌절감을 느낀다.





대한민국엔 미래가 있는가?


인구 소멸의 위기를 맞은 대한민국은 전국의 학교들이 문을 닫고 있다. 조금 있으면 대학들이 문을 닫을 것이다. 경제 위기와 연금, 복지 문제도 시한폭탄 같은데, 내란 사태는 이런 대한민국의 구조적 위기에 또 하나의 엄청난 위기를 더했다. 사실 개혁을 하지 않으면, 지금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죽는다.

사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시민은 누구든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하며 ‘칼 한번 휘둘러 깨끗하게 정리해 줬으면 좋겠다’라고 해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 물론 투표도 중요하나, 그 외부의 영역에서의 비결정적인 수많은 참여로부터 민주주의는 싹튼다. 민주화가 되면 자연스럽게 개혁이 이뤄질 거라는 건 착각이다. 벌써 민주당이 세 번을 집권했는데 그동안 의미 있는 개혁은 없었다. 정치 민주화는 조금 이뤘을진 몰라도 사회적 민주화는 한 발짝도 진전이 없다.

국민이 깨달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제도가 민주화가 됐다고, 내가 선거를 한다고 바뀌는 게 아니구나.’


먼저 정치 지형을 바꿔야 한다. 누굴 찍어도 보수적인 정책밖에 없는 두 개의 거대 정당이 전부인 대한민국의 정치적 지형 말이다. 다음으로 선거법과 선거구제를 바꿔야 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국민의 의사를 왜곡하는 선거구를 유지하고 있다. 무조건 1등 하는 놈 하나만 뽑으니까 그 과정에서 거의 3/4의 민의가 완전히 사표가 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시민단체를 통해 시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하고, 전 세계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고, 전 세계에서 여성 차별이 가장 심한 나라다. 이런데도 대한민국에 교육 개혁에 반대한다면, 우리는 미래가 없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다.


교육 개혁은 대한민국의 피해 갈 수 없는 시대적인 명령이다. 상상할 수 없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상할 수 없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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