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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5천만 시간을 배신한 대한민국 대법원

9일의 판결로 드러난 사법 카르텔의 오만과 아집.

by 조하나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 하여 언어의 미세한 떨림, 단어 하나의 선택이 갖는 무게, 그리고 문장 구조가 만들어 내는 사유의 흐름이 한 인간의 인식과 한 사회의 풍경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는지를 온몸으로 느낀다. 그러하기에 대한민국 사법부, 특히 법원의 판결문에 담기는 표현과 언어 선택, 그 이면에 깔린 사고방식과 논리 구조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가히 막대하다는 것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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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의 언어는 사회의 거울이다

법원은 단순히 유무죄를 가리고 분쟁을 해결하는 곳만이 아니다. 법원은 오랜 시간 동안 대한민국 언어의 품격과 기준을 제시하고 다듬어 온 주체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의 잔재로 여전히 우리 언어생활 곳곳에 숨어있는 일본식 표현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잘못된 외래어 표기나 표현법을 바로잡으며 언어를 순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가령, 과거 권위주의 시절 ‘내란수괴(內亂首魁)’와 같은 한자어 표현 대신 순우리말인 ‘내란우두머리’ 사용을 권장하고 실제 판결에 사용했던 사례들은, 법원이 단순한 법 적용 기관을 넘어 우리말의 독립성과 명료성을 지키려 했던 노력을 보여준다. 이러한 법원의 언어 사용은 그대로 사회의 표준이 되고 시민의 언어생활에 깊이 스며든다.


대한민국 법관의 판결문은 법률 전문가만을 위한 문건이 아니다. 판결을 원하는 원고에게도, 판결을 받는 피고에게도,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국민 모두에게 공정해야 하며, 가장 정제되고 신중하게 고른 언어여야 한다. ‘인간은 언어로 사유한다’는 자크 라캉의 성찰처럼, 법원의 언어는 그들이 세상을 인식하고 정의를 구현하는 방식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러므로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문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 사회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 언어가 투명하고 공정하며 따뜻할 때, 사회의 영혼 또한 건강하게 빛날 수 있다.

그러나 최근, 이 거울에 금이 가고 탁류가 덮치는 듯한 불안감이 우리를 휩싼다. 법의 최종 보루라 여겨졌던 사법부를 둘러싼 논란들, 특히 국민의 삶과 국가의 운명에 직결된 중대한 결정들에서 드러나는 상반된 태도와 언어는 ‘과연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며, 우리는 누구의 언어를 믿어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법원의 언어가 사회의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라면, 지금 그 거울에 비친 모습은 신뢰가 무너져 내리는 위태로운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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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출 권력의 책임: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사법 권력은 국민의 직접적인 선거로 선출되지 않는 비선출 권력이다. 정부나 입법부와는 달리, 사법부의 정통성은 오로지 헌법과 법률에 대한 충실한 해석과 적용, 그리고 국민의 기본권 수호라는 책무를 다함으로써 확보된다. 민주주의를 만들어낸 주체인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리를 ‘잘’ 행사하고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이 ‘잘’에는 단순한 법 기술적 정확성을 넘어선, 시대정신에 대한 이해와 국민에 대한 책임감이 포함된다.


최근 국민들이 사법부를 바라보며 느끼는 괴리감과 불신은 특히 최고 사법기관인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특정 결정들에서 드러나는 상반된 태도와 언어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사법부의 독립성이 곧 민주주의의 생명선임에도 불구하고, 그 최고 정점에 선 이들이 어떤 사건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국민적 신뢰는 출렁인다. 같은 법정에 서 있지만,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국가의 근간을 살피는 일과 개별 형사 사건의 법리를 다투는 일은 그 무게와 책임감의 결이 다를 수 있다. 이 상이한 맥락 속에서, 두 기관이 국민적 신뢰를 어떻게 대하는지는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일례로, 헌법 수호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 심판을 다루었던 방식을 되짚어볼 때, 우리는 비선출 권력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퇴임 후 밝힌 소회처럼, 탄핵 선고까지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주권자인 국민을 설득하고 통합하고 판결에 대한 반론의 여지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심사숙고하며 판결문 한 문장, 한 문장을 고치고 또 고치는 심사숙고의 과정이 있었다. 이는 단순히 법리적 완결성을 넘어, 공동체의 분열을 최소화하고 결정에 대한 국민적 수용성을 높이려는, 즉 법의 권위를 법정의 위압감이 아닌 국민적 수긍에서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국민의 원성을 사면서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심도 깊은 고심 끝에 나온 선고 후 국민들이 파면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었음을 보여준다.


“판사들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한 일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법관들은 동료와 선후배들이 학교와 거리와 일터에서 민주화 운동을 할 때 골방에 틀어박혀 공부만 했습니다. 판사들은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라는 문형배 재판관의 성찰처럼, 사법부의 권력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책임성이 누구를 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잊지 않은 태도가 이러한 결과를 가능케 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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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최근 이재명 경기도지사에 대한 대법원 파기환송심 판결은 단 9일의 짧은 숙고 기간과 함께 충격적인 결과를 내놓았다. 헌법 수호의 의무를 저버리고 국민을 배신한 이유로 파면당한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 10명은 이재명을 유죄로, 문재인 전 대통령이 임명한 대법관 2명은 이재명을 무죄로 본 것은 단순한 법리 해석의 차이라고 보기 어렵다. 극명하게 엇갈린 이 판결을 통해, 마치 각 재판관들이 임명권자에 따라 극렬하고 노골적으로 정치색과 정치적 입장을 드러낸 듯한 깊은 의구심을 자아낸다.


최고 사법기관의 내부에서조차 서로 설득하거나 이견을 좁히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큰 문제로 다가온다. 헌법재판소가 통합을 위해 시간을 들였던 것과 달리, 대법원의 이 판결은 오히려 국민 분열을 가중시키고, 사회를 혼란케 하며, 국민을 설득하기는커녕 자신들만의 특권을 과시하고 오만하게 남용함으로써 국민 주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우를 범한 것임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검사의 공소장을 복사한 듯한 인상, 국민적 의구심 해소 노력 부재, 어려운 법의 언어 뒤에 숨어버린 사법부의 태도는 법이 소수의 전문가 집단이나 특정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불길한 경고처럼 느껴진다. 이는 비선출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잘’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한다.



신뢰의 균열, 내부의 경고음

이러한 외부의 비판적 시각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은 바로 법원 내부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이다. 최근 대법원의 이재명 파기환송심 선고 이후, 현직 판사들이 스스로 실명을 걸고 법원 내부망을 통해 이번 판결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들은 대선 임박 시점의 이례적인 속도와 그 절차의 무리함이 가져올 ‘정치적 편향성 비판’과 ‘사법부 신뢰 잠식’을 직접적으로 경고했다.

대법원장이 전국 판사들의 인사권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법부 구조 속에서, 자신의 실명을 밝히며 최고 사법기관의 판단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정말 용감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사법부의 핵심 구성원들조차 이번 결정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외부의 비판이 단순한 오해가 아님을 방증하는 강력한 신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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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신뢰 앞에서 국민은 스스로 법을 찾는다

이러한 충격적인 현실 앞에서 국민은 좌절하는 대신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12.3 내란 사태 이후, 상당수 대한민국 국민이 헌법과 형사법 관련 서적을 찾아 읽으며 법을 공부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단순히 법 지식을 쌓는 행위를 넘어선다. 최고 사법기관마저 정치적 오염 의혹과 엘리트 아집으로 신뢰를 잃은 상황에서, 주권자인 국민이 스스로 법의 원칙과 근간을 이해하여 오염되지 않은 정의의 기준을 내면에 세우려는 지극히 민주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이다. 법을 전문가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자각, 법의 진정한 주인은 국민이라는 깨달음이 낳은 행동이다. 이는 무너진 신뢰의 시대에 국민 스스로가 법의 주체가 되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현상이며, 사법부에 보내는 조용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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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법조 카르텔과 정치의 그림자

이러한 소통의 부재와 단절은 사법부 내부의 구조적 특성, 특히 특정 학벌이나 배경으로 집중된 인적 구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비판이 존재한다. 오랫동안 ‘서울대 법대 카르텔’이라 불리며 견고하게 형성된 그들만의 세계는, 때로 외부의 목소리에 귀 닫고 자신들만의 논리적 성채 안에 갇히는 오만과 아집을 낳는다는 비판이다. 이러한 동질성은 사법부의 다양성을 저해하고, 복잡다단한 국민의 삶의 현실과 괴리된 채 엘리트주의적 시각에 갇히게 만들 위험을 내포한다. 특히 전통적인 법원 조직의 정점에 있는 대법원에서 이러한 문화가 더 강하게 작용하며, 국민과의 단절과 어려운 언어 사용, 그리고 때로 오만한 태도로 이어진다는 비판적 시각이 존재한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와 맞물려, 법관의 임명 과정에서부터 시작되어 주요 판결에까지 미치는 것으로 의심되는 ‘정치적 오염’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법부의 독립은 민주주의의 생명선이자 공정한 재판의 전제 조건이다. 그러나 최고 사법기관의 구성원들이 정치권력의 입맛에 따라 좌우되는 듯한 인상을 주거나, 주요 정치 사건의 판결에서 일관성과 공정성을 잃고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판단을 달리하는 듯한 모습은 국민을 경악케 한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사법 처리 과정이나 결과에서 드러나는 듯한 불공정성 의혹과 이중 잣대에 대한 비판은 사법부의 중립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들며, 이는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대비되는 모습과 함께 국민적 불신을 증폭시키는 핵심 요인이 된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는 역대 정권마다 사법부 고위직 인선을 두고 정치적 편향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특정 대학, 특히 서울대 법대 출신들이 사법부 요직의 상당수를 차지해 온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이러한 인적 구성의 편중이 사법부의 경직성이나 특정 가치관으로의 쏠림 현상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는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주요 정치 사건의 판결 시점이나 내용이 정치적 국면과 맞물리면서 사법 판단의 독립성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된 사례들도 반복되고 있다. 대법원 판결의 절차적 투명성 부족이나 충분한 설명 부족에 대한 비판 또한 이어지고 있으며, 공정성에 대한 국민 신뢰도 조사에서 사법부가 다른 국가기관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는 것은 이러한 구조적 문제와 정치적 논란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또한, 헌법재판소는 그 성격상 헌법과 기본권에 대한 판단을 주로 하기에 국민과의 접점이 다르고, 구성 방식이 대법원과 달라 조직 문화나 판단 성향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국회, 대법원, 대통령이 각 3명씩 지명함으로써 구성되는 헌법재판소와 달리 대법원 대법관 전원(현재 13명)은 대법원장이 제청한다. 대한민국 대법원장은 전국 일반 판사의 최종 임명권과 이들에 관한 강력한 인사권을 모두 가지며 막강한 사법 권력을 행사한다. 그리고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의 이러한 차이가 국민들이 인식하는 두 기관의 태도 차이로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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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 정치화의 대가: 무너지는 법치주의

사법부의 정치화는 단순히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에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결과를 낳는 것을 넘어선다. 그것은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국민과 국가를 연결하는 신뢰의 끈을 끊어내며, 결국 민주주의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한다.

그런데 의문은 깊어진다. 법의 최종 보루라 불리는 최고 사법기관이 왜 이토록 무리한 결정을 강행한 것일까? 단 9일이라는 전례 없는 짧은 숙고 기간, 스스로의 논리적 허약함을 드러내는 듯한 판결 내용, 그리고 국민적 저항과 거센 역풍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을 터인데도 감행된 특정 정치적 사건(한덕수 총리는 대법원 판결 1시간 뒤 대선 출마 선언을 했다)과 묘하게 맞물린 선고 시점은, 상식적인 사법부의 판단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이는 이성적인 판단이라기보다는, 어딘가 궁지에 몰린 이들의 극단적인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읽힌다. 마치 자신들이 구축해 온 세계가 흔들린다는 초조함 속에서 성급하게 방어막을 치려는 듯한 모습이다.

혹자는 이를 오랫동안 한국 사법부를 지배해 온 특정 학벌(서울대 법대) 중심의 엘리트 법조 카르텔이 자신들의 기득권과 특권이 위협받는다고 느끼면서 이성을 잃은 결과로 해석한다. 그들만의 견고한 성채 안에서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자신들의 논리와 이해관계만이 절대적인 진실이 되는 오만에 빠졌다는 것이다. 국민의 목소리, 시대의 변화는 그들에게는 불편하거나 무시해야 할 ‘소음’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자신들이 쌓아 올린 지위와 명예, 그리고 그를 통해 누려온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는 원초적인 두려움이, 법과 양심이라는 사법부의 근본 원칙마저 뒤로하고 무리수를 두게 만들었다는 비극적인 진단도 나온다. 사법부의 최고 정점에 선 이들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신성한 권력을 오직 자신들만의 안위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순간, 법치주의의 기둥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이는 단순한 판결의 오류를 넘어, 사법부의 영혼이 병들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슬픈 징후이다. 엘리트 아집과 정치의 오염이 결합될 때, 법은 더 이상 정의의 도구가 아닌, 특정 집단의 특권을 수호하는 방패막이나 정적을 공격하는 칼날로 변질될 위험에 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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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목소리, 정의를 향한 외침

나는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 여부를 떠나 대한민국 정치인 누구든, 아니 대한민국 국민 누구든 이번 대법원의 정치적 졸속 판결과 같은, 적법 절차를 모두 무시하고 사법부의 권력을 밀어붙여 내린 판결을 받는다면, 똑같이 분노하고, 그를 위해 목소리를 낼 것이다. 이는 진영을 떠나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를 수호하려는 윤리적 투쟁이다. 법이 특정 정치 세력의 칼날이 되는 것을 막고, 만인에게 공정한 정의의 저울이 되게 하려는 의지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시민 정신이다. 진영 논리에 함몰되어 불공정한 절차와 편향된 판결을 자신의 정치적 유불리로만 계산하려는 유혹은 민주주의를 병들게 하는 독이다. 법이 특정 세력의 방패와 무기가 될 때, 국민은 어디에서도 정의를 찾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법은 누구의 것인가

지금이야말로 사법부 스스로 깊이 성찰하고 환골탈태해야 할 때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오직 헌법과 법률, 그리고 양심에 따라 공정하고 투명하게 행사하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소통의 문을 열고 국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딱딱한 법률 용어 대신 국민이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언어로 판결의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그리고 시민들은, 정치적 진영 논리를 넘어 사법부의 공정성과 독립성이라는 원칙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감시해야 한다.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무너진 신뢰의 성채를 다시 세워야 한다. 이는 단순히 비판을 넘어, 법이 다시금 국민의 것이 되도록 만드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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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우선, 사법부의 구체적인 판단과 과정을 적극적으로 ‘알아야’ 한다. 이미 헌법과 법의 기본 원리를 스스로 탐구하는 국민들이 늘고 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단순한 언론 보도의 단편적인 사실을 넘어 최근의 주요 판결문 원본을 찾아 읽고 그 논리 구조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법원의 판결문은 사법부 전자도서관 등을 통해 공개되고 있다. 어려운 법률 용어에 좌절하지 말고, 시민의 눈으로 그 내용을 해석하고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만 피상적인 비판을 넘어 사법부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내고, 변화를 요구할 단단한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

둘째, 목소리를 내고 연대해야 한다. 혼자 어렵다면 뜻을 같이하는 시민단체나 커뮤니티와 함께해야 한다. 사법 개혁을 촉구하는 서명운동에 참여하거나, 국회의원들에게 사법부의 투명성 강화나 임명 절차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 법원 내부 통신망에 용기 있는 비판의 목소리를 낸 판사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의 지지를 보내는 것도, 그들이 고립되지 않도록 지키는 중요한 행동이다. 집단적인 시민의 목소리는 사법부를 움직이는 강력한 동인이 된다.


셋째, 제도 개선을 끊임없이 요구해야 한다. 해외의 모범 사례를 참고하여 우리 사법 제도의 개선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부 국가에서는 중요한 재판 과정을 온라인으로 중계하거나, 시민 배심원 제도를 확대 운영하고, 사법부 감시를 전문으로 하는 시민단체 활동이 활발하며, 법관 임명 과정에 대한 정보 공개와 시민 참여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을 바탕으로 우리 현실에 맞는 제도적 개선 방안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고, 입법부와 사법부에 지속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투명성과 국민 참여 확대는 신뢰 회복의 필수 조건이다.


넷째, 불의에 저항해야 한다. 특정 판결의 유불리를 넘어, 그 과정과 절차가 민주주의 가치와 정의 원칙에 부합하는지를 냉철하게 비판하고, 불의한 판결에는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한다. 이는 법치주의의 수호이자 시민 주권의 가장 기본적인 행사이다. 법이 특정 세력의 무기가 되려 할 때, 깨어있는 시민의 저항만이 법을 다시 국민의 품으로 되돌릴 수 있다.


무너진 신뢰의 성채는 저절로 복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비판, 연대, 그리고 실천적인 행동을 통해 비로소 다시 세워질 수 있다. ‘사법의 정치화’라는 어둠 속에서도, 원칙의 등불을 높이 들고 나아가는 이들이 있기에 희망은 존재한다. 문형배 헌법재판관과 같이, 기득권의 안락함보다 국민 속으로 향하려 했던 이들의 양심과 성찰이 모여, 법이 다시금 국민의 것이 되는 그날을 향해 함께 걸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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