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전부터 혐오의 사회에 길들여져 왔다. 10년도 훨씬 넘은 때부터 ‘한 줌도 안 되는 소수’, ‘저러다 말겠지’ 하다가 혐오의 폭력은 화장실 타일 사이에 낀 흰 곰팡이처럼 우리 사회 골목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었다.
인간성을 난도질하는 야만성
한국 사회에 나도는 정치 혐오 표현 중 내가 조금의 인내심도 발휘할 수 없이 가장 경멸하는 표현은 바로 ‘눈을 찢는 제스처’로 만든 밈이다. 이것은 단순히 특정 정치인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얼굴과 정체성을 난도질하는 야만적인 행위이며, 뿌리 깊은 인종차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 야만적인 조롱이 가진 역사적 무게와 더불어 내가 유난히 이 밈을 이용한 조롱과 비하, 혐오 문화에 분노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 동일한 제스처 앞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이중성과 위선 때문이다.
우리 안의 이중성
2018 월드컵을 떠올려 보자.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이 강호 독일을 꺾으면서, 멕시코가 극적으로 16강에 진출하게 됐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고마워요 한국!’이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고, SNS는 기쁨에 찬 멕시코 팬들의 감사 메시지로 넘실댔다. 그런데 그 순수한 환호 속에는, 우리를 당혹스럽고 분노하게 만든 뜻밖의 모습이 섞여 있었다. 많은 이들이 양손으로 눈가를 옆으로 찢는 포즈를 취한 사진을 함께 올린 것이다. 그들 나름의 ‘아시아인 표현’이라는 그 제스처는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건 고마움이 아니라 인종차별”이라는 한국인들의 격앙된 반응이 쏟아졌고, 언론들도 이 사안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비록 당시 많은 멕시코인들이 이 제스처의 인종차별적 무게를 몰랐다고 해명했고 멕시코 내에서도 비판과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지만, 그 무지가 의도와 무관하게 행위 자체가 가진 폭력성을 상쇄하지는 못했다. 눈을 찢는 제스처가 수십 년간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동양인을 조롱할 때 써온 상징이었음을, 동양인인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혐오의 모방
그런데 정작 놀라운 일은, 그렇게 타인의 행위에는 날 선 분노를 쏟아냈던 한국 사회가, 그 동일한 몸짓을 한국 사회 내부의 정치적 조롱을 위해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를 비하하기 위해 일부 극우 유튜버들과 온라인 커뮤니티 이용자들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표현은 ‘찢재명’이다.
이 악의적인 멸칭은 201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체적으로는 2012년, MB 정부 시절 통합진보당 관련 수사가 진행되던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에, 당시 성남시장이던 이재명의 소위 ‘형수 욕설 파일’ – 가족 간의 격한 통화 내용이 담긴 녹취록 – 이 유출되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누가, 왜 이 사적인 녹취록을 유출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검찰과 국정원이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당시 일부 언론, 특히 TV조선을 필두로 한 보수 성향 매체들이 이 녹취록을 ‘단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집중 보도했다. 이 과정에서 이재명이 형수에게 “XX를 찢는다”는 등의 폭력적인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이 부각되었고, 종종 맥락이 거세되거나 편집된 형태로 유포되며 그에게 ‘패륜’ 프레임을 씌우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후 ‘찢는다’는 자극적인 단어는 그의 외모, 특히 눈매와 연결되어, 일부 극우 성향 커뮤니티와 유튜버들을 중심으로 양쪽 눈을 손가락으로 찢는 야만적인 제스처 밈으로 시각화되었다. 특히 그가 정치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2016년 이후, 그리고 2021년 대선 국면에서 이 밈과 멸칭은 그를 조롱하고 악마화하는 도구로 더욱 기승을 부렸다.
혐오의 시대,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이 ‘형수 욕설’ 논란에는 언론이 잘 보도하지 않은 복잡한 맥락과 법적 진실이 존재한다. 이후 공개된 법정 기록 등에 따르면, 논란이 된 ‘찢는다’는 표현은 이재명의 형 이재선 씨가 먼저 모친에게 퍼부은 폭언이었으며, 이재명은 형수 박인복 씨에게 형의 발언이 사실인지를 격분하여 따져 묻는 과정에서 해당 표현을 반복했다는 정황이 있다. 실제로 형수 박 씨는 법정에서 “(이재명의 욕설이) 형수인 나에게 한 욕설이 아니다. 남편 이재선이 어머님께 한 욕설이다”라는 취지로 증언하기도 했다. 또한 이재선 씨의 정신병원 강제 입원은 이재명 시장이 아닌, 형수 박 씨와 조카딸이 직접 의뢰하여 진행되었다는 사실 역시 관련 서류를 통해 확인된다.
이러한 다층적인 배경과 사법적 판단들은 외면당한 채, 오직 ‘찢는다’는 단어의 폭력성만이 부각되어 정치적 반대자를 공격하고 혐오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어 온 것이다.
얼굴 없는 폭력이 겨누는 정체성
이 행위는 단순히 외모 비하나 우스꽝스러운 흉내 내기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얼굴, 나아가 그의 정체성 자체를 훼손하려는 상징적 폭력이다. 눈을 찢는 야만적인 제스처는 상대를 ‘우리’와 다른 이질적인 존재, 심지어 비인간적인 존재로 낙인찍어 악마화하고, 자신들의 혐오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와 맞닿아 있다. 역사적으로 특정 인종을 모욕하고 배제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그 폭력의 언어가, 한국 사회 내에서 정치적 상대를 공격하는 무기로 버젓이 소환된 것이다. 혐오가 혐오를 모방하며 가장 저열한 방식으로 증식하는 끔찍한 현실이다.
‘단일 민족’의 기괴한 부조리극
이 모든 행태가 더욱 기괴하고 씁쓸한 것은, 한국 사회가 그토록 오랫동안 내세워 온 ‘단일 민족’이라는 허울 좋은 신화 속에서 버젓이 벌어진다는 점이다. 외부인이 행하는 인종차별적 제스처에는 그토록 민감하게 분노하면서도, 정작 ‘하나 됨’을 강요하는 사회 내부에서는 외모의 미미한 차이조차 용납하지 못하고 서로를 조롱하고 배제하는 이 지독한 이율배반. 이 기괴한 부조리극이야말로, 혐오가 얼마나 자기 파괴적이며 공허한지를, 그리고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에게 얼마나 쉽게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뒤틀린 풍경을 마주할 때면, 혐오가 정말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진 떨쳐낼 수 없는 본성인지, 아니면 그저 우리가 학습하고 용인하며 키워온 괴물인지 다시금 깊은 회의에 잠기게 된다.
알고도 휘두르는 칼날은 의도된 범죄다
왜 동일한 행위가 타국인이 하면 인종차별이 되고, 자국인이 하면 웃음과 조롱의 도구가 되는가? 여기에 더욱 통렬한 지점이 있다. 멕시코 팬들의 상당수는 그 행위의 폭력성을 몰랐다고 해명했고,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국내에서 ‘찢재명’을 외치며 눈을 찢는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모욕적이고 잔인한 상징인지 애초에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혐오와 조롱, 비하의 밈으로 상대를 충분히 상처 입힐 수 있음을 알기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의도적으로 그 혐오의 칼날을 휘두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의도가 명확한 ‘범죄’라고 부른다.
‘그래도 되는’ 사람은 없다
문제는 행위 그 자체보다, 그것을 통해 허락되는 혐오의 구조다. 권력은 주권자로부터 잠시 위임받은 역할일 뿐이지만, 우리 사회는 종종 그 자리에 선 이에게 어떤 초월적인 자격 – 빛나는 학벌, 유력한 배경, 혹은 세련된 언행 같은 – 을 암묵적으로 요구한다. 그리고 그 기준에 미달한다고 여겨질 때, 사람들은 실망을 넘어 때로 노골적인 경멸감을 드러내며 조롱을 정당화한다. 약자에 대한 조롱이 ‘안전’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 비뚤어진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소위 ‘가진 자들’, 기득권 엘리트에게는 감히 잣대를 들이대기 두려워하면서도, 평범한 배경에서 출발하여 그 ‘특별한 자격’의 후광이 없다고 여겨지는 정치인에게는 ‘자격 미달’이라는 낙인을 찍어 마음껏 혐오를 퍼붓는 것이다.
이는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개인이 느끼는 불안과 좌절감을 가장 손쉬운 대상에게 투사하는 비겁한 방식이기도 하다. 더욱이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집단적으로 누군가를 짓밟으며 느끼는 비뚤어진 연대감과 해방감은, 이 저열한 행위를 멈추기 어렵게 만드는 중독적인 보상이 되기도 한다. 이재명이 그랬고, 노무현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손쉽게 ‘그래도 되는’ 존재로 전락한다. 정치적 혐오의 언어가 외모, 학벌, 출신, 장애 같은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집요하게 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공격받는 자를 항변조차 할 수 없게 만들기 위한 잔인한 심리적 지배 장치다.
허깨비 힘과 진짜 힘
혐오는 힘처럼 느껴지고, 질투와 폭력은 무기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허깨비 같은 가짜 힘이다. 진짜 힘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연대다. 온라인 공간을 떠도는 혐오의 말들에 ‘그렇지 않다’고 용기를 내어 댓글을 달거나, 소외된 이웃의 이야기에 조용히 귀 기울이며 그들의 아픔에 함께하는 마음이다. 혼자서는 약하지만, 서로에게 기꺼이 손 내밀어 기댈 언덕이 되어줄 때 발휘되는 따뜻하고 질긴 힘이다.
그것은 권태를 묵묵히 버텨내는 인내다. 혐오가 들불처럼 번져갈 때 즉각적인 감정의 폭발로 맞서는 대신, 한 걸음 물러서 상황의 본질을 읽어내려 애쓰는 시간이다. 변화가 더디고 때로는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지치지 않고 대화의 끈을 놓지 않으며 더 나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꾸준함이다. 매일의 평범함 속에서 혐오에 물들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는 묵묵한 성실함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객관화하며 수치심 너머로 나아가는 용기다. 다수가 특정 대상을 향해 손가락질할 때, 그 익명의 흐름에 편승하는 대신 잠시 멈춰 서서 ‘정말 그런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용기이다. 내 안의 편견과 비겁함을 발견했을 때 외면하지 않고 정직하게 마주하며 성찰하는 용기, 그리고 때로는 침묵하는 다수 앞에서 자신의 다른 목소리를 내는 두려움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깊은 자존감이다. 타인의 멸시나 조롱의 화살이 날아올 때 쉽게 부서지지 않고, 세상이 만들어 놓은 기준이 아닌 나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스스로 믿고 지켜내는 단단한 마음이다. 나의 부족함과 약점까지도 끌어안으며, 거친 비난 속에서도 인간의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내면의 노력이다.
이 진짜 힘들은 요란하지 않다. 조용하고 겸손하며, 홀로 설 수 없고 타인을 필요로 한다. 오래 걸리고 눈에 잘 띄지 않으며, 세상의 박수를 받지 못할 때도 많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직 그것만이 인간을 혐오의 수렁에서 구원하고, 깨진 거울 앞에서 서로를 할퀴는 대신 온전한 얼굴로 마주 보게 할 수 있다. 이 진짜 힘들은 광장의 거대한 함성만큼이나, 혐오의 댓글에 ‘좋아요’를 누르지 않는 작은 망설임 속에서, 나와 다른 의견 앞에서도 귀를 닫지 않으려는 인내 속에서, 편견에 찬 시선 앞에서 침묵하지 않는 용기 속에서, 그리고 비난 속에서도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려는 조용한 다짐 속에서, 바로 우리 일상의 순간순간에 조용히 발아하고 자라난다.
낯선 땅의 트라우마
그 야만적인 ‘눈 찢기’는 개인적으로 나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던 무렵, 수중동굴 탐사 다이빙을 위해 찾았던 멕시코에서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 편이 모두 끊겨버려 한동안 그곳에 발이 묶여 지내야만 했다. 바로 그때, 나는 믿을 수 없는 일을 반복해서 겪어야 했다. 멕시코 현지인들은 물론, 미국이나 캐나다, 유럽 등지에서 백온 인들, 심지어 다른 남미 국가에서 온 사람들까지도, 그저 길에서 나와 눈이 마주치면 다짜고짜 양손으로 눈을 찢는 시늉을 하며 낄낄거렸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경멸 어린 시선 앞에서 나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깊은 모욕감과 인간 이하로 취급당하는 듯한 모멸감을 느껴야 했다. 그것은 단순한 놀림이나 놀이가 아니었다. 언제든 물리적인 위협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실존적인 공포 그 자체였다. 그 끔찍한 경험들은 악몽처럼 남아, 한동안 나를 숙소 밖으로 한 발짝 나서는 것조차 두렵게 만들었다.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 낯선 땅에서 아시아인의 생김새를 가졌단 이유만으로 감당해야 했던 그 집단적인 조롱과 배척의 기억은 경험해 보지 않은 이는 결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사라진 사회
바로 그 낯선 땅에서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그 차가운 모멸감과 실존적 공포가, 오늘 한국 사회에서 특정 정치인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눈 찢기’ 제스처를 날리며 낄낄거리는 이들의 모습과 겹쳐 보일 때, 나는 타인의 고통을 상상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마지막 보루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던지는 조롱의 몸짓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한 인간의 존엄을 겨누는 칼날이 될 수 있음을, 바로 내가 겪었던 그 생생한 아픔을 통해 너무나 명확히 알기 때문이다. ‘찢재명’이라 조롱하는 바로 그들 자신이, 언젠가 낯선 거리에서 소수자의 입장이 되어 ‘칭챙총’이라는 말을 들으며 똑같은 제스처를 하는 사람과 마주칠 때 느껴야 할지도 모를 그 모욕감. 그것이 바로 오늘, 그들이 타인에게 무심코 던지는 폭력의 얼굴이다.
그런 직접 경험 없이는 결코 그것이 잘못된 것인지조차 깨닫지 못할 자들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회 곳곳에 내가 아는 얼굴을 넣으면
18세기 정치인이자 철학자인 에드먼드 버트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는 사실 하나의 계약이다. 일시적이고 필멸의 속성을 가진 총체적 동물적 실존에 대한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파트너십이 아니다. 때문에 사회를 경건히 바라봐야 한다. 사회는 모든 학문의 파트너십, 모든 예술의 파트너십, 모든 미덕과 모든 완벽의 파트너십이다. 그러한 파트너십의 목표는 수세대에 걸쳐서도 달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는 산자들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 죽은 사람,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사람 모두의 파트너십이 된다.”
우리는 우리가 속한 사회를 좀 더 소중하고, 경건하게 바라봐야 한다.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하는 말과 행동, 삶을 대하는 태도가 나아가 사회를 대하는 태도로 이어지고, 대다수의 사회 구성원이 사회를 대하는 태도와 품격이 곧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삶으로 되돌아온다. ‘익명성’이 혐오와 폭력의 편리하고 비겁한 도구가 된 시대, 우리는 익명으로 지워진 사회의 공백을 우리가 아는 이름, 우리가 아는 얼굴, 가족, 친구, 선생, 이웃 제각각의 이름과 얼굴로 끊임없이 채워야 한다.
수백만의 조상들이 내린 일련의 결정들로 인해 지금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의 결정도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점진적으로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적어도 한 번은 다른 누군가의 삶의 궤적을 아주 크게 바꿀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수도 있다.
혐오가 인간 본성의 어두운 그림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은 끔찍한 동시에 언제나 외면할 수만은 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비겁함과 부조리, 그리고 내 안의 상처까지 들여다보며 내가 도달한 믿음은 이것이다. 과거는 하나일지 몰라도 미래는 언제나 복수라는 사실이다. 우리에겐 미래에 대한 선택권이 있다. 내가 혐오와 폭력을 당했다고 해서 나 역시 누군가에게 맹목적인 혐오를 퍼붓는 건 정당화될 수 없고, 우리는 그들과 달리 혐오의 자리에 충분히 다른 것을 채워 넣을 수 있다. 우리는 하루의 생존을 넘어 미래의 삶을 돕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의 믿음과 감정마저 끊임없이 의심하며 객관화하려는 치열한 노력이며, 나의 한마디 말, 하나의 몸짓이 타인에게 어떤 상처와 영향을 남길지 먼저 깊이 헤아리는 섬세한 성찰이다.
혐오를 넘어, 인간다움으로
인간의 본성이 설령 혐오를 쉽게 허락하고, 사회가 그 혐오를 부추긴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그것을 넘어서려는 의지, 나와 다른 존재를 틀림이 아닌 다름으로 끌어안는 존중, 그리고 기꺼이 서로에게 손 내밀고 기댈 언덕이 되어주는 따뜻한 연대라는 놀라운 가능성이 있다. 혐오가 판치는 자리에 의식적으로 희망의 언어를 심고 가꾸는 적극적인 선택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것만이 깨진 거울 앞에서 일그러진 얼굴로 서로를 할퀴는 대신, 온전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며 함께 살아갈 내일을 만들어 가는 유일한 길이다.
어쩌면 혐오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새겨진 지울 수 없는 얼룩, 혹은 생존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얼룩을 우리의 전부로 착각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마저 뛰어넘도록, 그리하여 마침내 스스로 인간다워지도록 요구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혐오의 가능성 앞에서 연대와 존엄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 자신의 본성과 싸우며 만들어가는 위태롭고도 위대한 역사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별의 혐오가 아니라, 차이를 견디는 존중과 사랑, 그리고 함께 견디는 연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