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익숙하게 들려오는 말이 있다. “나는 정치적이지 않다.” 마치 개인의 취향이나 성향을 드러내는 가벼운 자기소개처럼, 혹은 섣부른 논쟁의 불씨를 피하려는 신중한 거리두기처럼, 이 말은 다양한 뉘앙스로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그러나 이 간결한 선언 뒤에는, 단순한 무관심을 넘어 우리 사회의 깊은 고뇌와 구조적 모순,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여정의 본질에 대한 묵직한 질문들이 숨겨져 있음을 우리는 얼마나 자각하고 있을까.
사람들은 왜 ‘정치’ 이야기 앞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때로는 언짢음과 긴장감마저 내비치는 것일까? 그 근원에는 우리가 정치를 대하는 방식, 그리고 대화를 풀어가는 방식에 대한 오랜 오해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종종 정치적 대화를 ‘문제 해결’의 과정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에 대해 명쾌한 답을 찾아내고, 당장의 해결책을 도출해야 한다는 강박. 그러나 현실의 정치란 좀처럼 단 하나의 정답을 허락하지 않는 복잡다단한 영역이다. 서로 다른 가치와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합의점을 모색해야 하는 고단한 과정이다.
이러한 ‘정답 찾기’에 대한 조급증은 한국 사회 특유의 토론 문화 부재와 무관하지 않다. 오랜 시간 일방적이고 주입식인 교육 환경에 익숙해진 우리는, 서로 다른 의견을 경청하고 그 차이를 조율하며 합의를 이끌어내는 민주적 소통 방식에 서툴다. 자신의 의견과 다른 상대방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혹은 설득되지 않더라도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에 대한 경험과 훈련이 부족하다. 독일의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건강한 민주주의의 필수 조건으로 제시한 ‘공론장(Public Sphere)’, 즉 시민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의견을 교환하며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이성적 소통의 공간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 이야기는 끝없는 평행선으로 치닫거나 감정적인 대립으로 번지기 일쑤고, 결국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짜증과 불쾌감, 나아가 무력감만을 남기곤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작동 원리 자체가 본디 ‘답이 없는 것을 찾아 끊임없이 토론하는 것’이라는 본질을 상기한다면, 이 과정에서 느끼는 지난함은 실패가 아니라 오히려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숨결 그 자체일 수 있다.
개인이 느끼는 이러한 무력감과 회피 심리는 단순한 기질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 근원을 깊이 파고들면, 이는 우리 사회가 겪어온 고통스러운 역사적 경험과 그로 인해 왜곡된 정치 및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이해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랜 식민 지배와 군사독재, 권위주의적 통치 아래에서 우리는 일방적으로 ‘정답’을 주입받고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시대를 견뎌야 했다.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며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는 민주적 ‘근육’을 키울 기회를 박탈당한 것이다. 심리학자 마틴 셀리그먼이 명명한 ‘학습된 무기력’처럼, 반복되는 좌절과 통제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경험은 개인에게 깊은 무력감을 내면화시키고, 결국 ‘무엇을 해도 소용없다’는 체념적 태도를 갖게 만드는 것이다. 그 결과,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고 합의를 이뤄가는 과정의 지난함을 견디기 어려워하며, 때로는 ‘속 시원한 해결책’을 단숨에 제시하는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위험한 향수를 드러내기도 한다.
더욱이, ‘정치 = 더러운 것’,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냉소와 혐오의 프레임은 마치 전염병처럼 우리 사회에 퍼져나갔다. 이러한 프레임은 시민으로서 당연히 참여하고 목소리를 내야 할 정치의 장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문학 작품 속 인물들이 거대한 시대의 흐름 앞에서 고뇌하고 무력감을 느끼듯, 개인은 정치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등을 돌려버린다. 그러나 그 냉소와 혐오의 안개가 걷혔을 때, 정치적 무관심의 가장 큰 대가를 치르는 것은 결국 시민 자신이라는 역설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여기에 더해, 식민 지배와 이념 대립, 전쟁과 독재를 거치며 형성된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뿌리 깊은 이분법적 사고와 생존 논리는 건강한 토론 문화를 질식시키는 치명적인 독소로 작용했다. 다름을 틀림으로 간주하고, 이견을 가진 상대를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하며 악마화하는 경향은 하버마스가 건강한 민주주의의 심장부로 여겼던 우리 사회의 공론장을 극단적인 대립과 혐오의 전쟁터로 변질시켰다. 상대의 의견을 경청하고 합리적인 지점을 찾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 상대를 굴복시키는 데에만 몰두하는 소모적인 논쟁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는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시켜 심리적 안정감을 줄지는 모르나, 결국 사회 전체의 지혜를 마비시키고 진정한 소통을 가로막는 견고한 벽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침묵과 냉소, 분열의 좌표 위에서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나는 정치적이지 않다”라는 말의 무게를 절감하며, 우리는 먼저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정치는 특정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과 직결된 공동체의 의사결정 과정이다. 토론은 정답을 찾는 시험이 아니라,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법을 배우며 더 나은 합의를 모색하는 창조적인 과정이다. 설령 합의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과정 자체가 중요한 민주적 가치를 지닌다.
권위주의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주입식 교육의 관성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고 질문하며 책임감 있게 참여하는 민주 시민의 역량을 키워나가야 한다. 냉소와 혐오의 프레임을 걷어내고, 정치에 대한 건강한 관심과 비판적 참여를 회복해야 한다. 무엇보다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감옥에서 벗어나, 다름을 포용하고 경청하며 건설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성숙한 토론 문화를 가꾸어 나가야 한다.
“나는 정치적이지 않다”라는 말은 때로 현실에 대한 깊은 절망과 무력감의 다른 표현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절망의 끝에서 새로운 희망을 싹 틔우는 것 또한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 침묵과 외면이 아니라, 용기 있는 참여와 성숙한 대화만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문제들을 치유하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나무를 더욱 건강하고 풍성하게 키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정치는 본질적으로 타인과 함께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인간의 고유한 ‘활동’이며, 이러한 참여와 행동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공적 세계를 창조하고 무기력을 넘어설 수 있다. 그 길은 분명 지난하고 더딜지라도, 우리가 함께 걸어야 할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