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기 위한 여정의 막이 올랐다. 거리마다 함성이 넘실대고, 저마다의 미래를 향한 열망들이 뜨겁게 교차하는 시절이다. 수많은 약속과 비전이 공중을 떠도는 가운데, 때로는 가장 소박해 보이는 순간에 시대정신의 본질이 응축되어 있음을 발견하곤 한다. 얼마 전,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전국 ‘경청 투어’ 중 강원도의 한적한 산골 지역 시장의 한 장면이 바로 그러했다.
한 귀촌 청년이 이재명 후보에게 막연한 어려움을 토로하며 “지원을 많이 해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 후보는 먹고 있던 시장 음식을 내려놓고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더니 아주 오래전부터 그의 정치 여정 내내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아 온, 작은 수첩을 어김없이 꺼내 들었다. 그 수첩에 차곡차곡 쌓인 시민들의 일상과 하소연, 기쁨과 눈물의 세월이야말로 정치인이란 결코 홀로 만들어지거나 고립되어 성장하는 존재가 아님을, 바로 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길어 올린 지혜와 고뇌를 통해 연단되고 함께 커나가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가장 생생한 증거다.
그는 그 수첩을 펼치며 이렇게 물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 구체적으로 무엇이 불편한지, 어떤 걸 개선했으면 좋겠는지 말해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러자 당황한 청년은 “어… 그게… 음…” 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이 후보가 이렇게 말했다. “오늘 집에 가서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정치인들에게 그냥 뭉뚱그려서 ‘지원해 주세요’, ‘잘해주세요’ 하면 정치인들이 그 예산 나라에서 받아다 자기에게 이익을 갖다 주는 정책에 다 써버려요. 그러니까 시민들이 더 구체적으로 요구하고, 그게 실행되는지 끝까지 감시해야 돼요.”
시민 주권, 교과서에서 현실 정치로
이 대화가 그토록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대한민국 정치 현장에서 “시민이 더 똑똑해지고, 더 적극적이고, 더 책임감 있게 현실 정치에 요구해야 한다”라는 말을 정치인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이 실로 드문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는 선거철만 되면 보여주기식으로 하다 마는 단순한 민원 청취를 넘어 시민을 국가 운영의 진정한 파트너로 존중하고 그 주체적 역량을 일깨우려는 리더십의 발현이었다.
존 듀이는 민주주의가 단순히 제도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소통을 통해 살아 숨 쉬는 ‘삶의 방식’ 그 자체여야 한다고 했다. 정치인은 고립되어 혼자 잘 나서 저절로 크지 않는다. 시민의 구체적인 요구와 날카로운 감시가 있을 때 정치인은 성장하고, 정치는 발전한다.
이재명 후보가 청년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구체적이고 명확한 요구’를 주문한 것은 위르겐 하버마스가 역설한 건강한 ‘공론장’이 그 작은 지역 시장 한가운데에서도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모호한 구호가 아닌, 이성적이고 명확한 근거에 기반한 시민의 목소리가 정책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될 때 비로소 민주주의는 실질적인 힘을 갖는다.
또한, 토크빌이 강조했던 ‘시민적 덕성’의 발휘를 요청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민주주의 사회의 주인으로서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권력을 감시하는 책임감 있는 시민이 되어 달라는 호소다. 단순한 권리 주장을 넘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져야 할 책무를 일깨우는 것이다.
나아가, 이 후보가 청년에게 일방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신 스스로 문제를 깊이 성찰하고 구체적인 목소리를 내도록 이끈 것은, 청년 스스로가 자신의 삶과 공동체의 문제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고, 정치인과 ‘대등한 위치’에서 함께 해법을 모색하는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는 파울루 프레이리가 말한 ‘비판적 의식화’와 ‘대화’를 통한 해방의 교육과도 맥이 닿는다.) “무엇을 어떻게 해드리면 될까요?”라는 정치인의 시민을 향한 질문은, 시민 개개인을 단순히 정책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해 나가는 파트너로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동반자’의 약속, 함께 성장하는 민주주의
강원도 산골 시장에서의 짧은 대화는 이재명이라는 정치인이 추구하는 정치적 철학과 정치적 지향점, 그리고 그가 시민과 맺고자 하는 관계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정치인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슈퍼맨’이 아니라, 시민의 잠재력을 믿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함께 책임지고 함께 성장하는 ‘동반자’가 되겠다는 약속으로 읽혔다.
사리사욕과 권력 놀음에 빠진 정치인은 시민이 똑똑해지는 걸 두려워한다. 시민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부러워하고 두려워하길 바란다. 하지만 이재명이라는 정치인은 시민들과 동등해지고 싶어 한다. 그리고 시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질수록 정치인으로서 자신 또한 성장한다고 믿는다. 그럴수록 정치인은 더 나은 정책으로 응답해야 하며, 훌륭한 정치인은 다시 시민의 정치 참여 의식을 고양시킨다. 이 선순환이야말로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성숙한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12.3 내란 이후, 오월 광주가 던지는 오늘의 질문
이재명 후보의 그 작은 수첩에 담긴 것은 단순한 민원이 아니다. 12.3 내란에 맞서 싸웠던 민주 시민들의 염원, 부패한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려는 시대정신, 그리고 마침내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약속의 기록이 되어야 한다. 이번 선거는 그 약속을 현실로 만들고, 위기의 대한민국을 구하며, 시민의 힘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로 돌리는 위대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그 길에 이재명 후보의 리더십과 함께, 깨어있는 시민들의 강력한 연대가 함께 하리라 믿는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오월 광주의 영령들이 있었기에, 그 피로 새긴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불의에 굴하지 않는 저항 정신이 이 땅의 역사 깊숙이 새겨졌기에, 2024년 12월 3일, 또다시 헌정질서가 유린당하던 그 내란의 밤에도 우리는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용기를 얻었다. 많은 이들이 말하듯, 오월 광주가 남긴 투쟁의 기억과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이, 마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밝히는 등대처럼, 그 위기의 밤길을 걷던 우리를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고, 결국 다시 한번 시민의 힘으로 새벽을 불러올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렇다. 오월 광주가 현재의 우리를 살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이번 대선을 통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다음 질문은 명확하다. 오월의 광주가 현재의 우리를 살린 것처럼 수십 년 후 대한민국의 이름 모를 누군가를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살릴 것인가? 역사 앞에,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들로 남을 것인가? 상상이 되는가? 2070년, 이 나라의 청년들이 “그거 알아? 2025년 우리나라 사람들이 K-팝 응원봉을 들고 내란을 막고 민주주의를 지켰데!”라며 현재의 우리에게서 위안을 얻고 현재의 우리와 정신적으로 연대하는 것.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처절하고도 진실된 여정이 바로 이번 선거의 진정한 의미이자, 미래 세대를 향한 우리의 가장 절실하고도 뜨거운 약속이 될 것이다.
그리운 사람들 투성이인 우리들
물론,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우리의 여정이 마냥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혐오와 갈라치기, 테러 감행도 모자라 온갖 기득권 카르텔을 앞세운 불법, 편법으로 이 대선 판을 뒤집어 구차한 목숨줄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가려는 악의 무리가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혐오와 폭력을 퍼뜨린 자들은 부메랑처럼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 혐오와 폭력에 결국 스러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대정신을 읽지 못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갈라파고스의 늙은 거북들처럼, 그들은 더욱더 도태되고 고립되어 끝내 역사의 뒤안길로 소멸할 것이다.
제주와 광주의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없이 많은 무명씨들, 김대중, 노무현, 노회찬, 그리고 우리 곁을 일찍 떠나버린 신해철까지, 우리에게는 그리운 사람들 투성이다.그리움의 한을 혐오나 증오가 아닌 아름다움으로, 세상을 끌어안는 따뜻함으로,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불멸의 의지로 승화시킨 사람들의 그 강인함과 오롯함을, 어찌 저 내란 세력의 빈약한 철학과 상상력으로 감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우리는 손을 잡고 어깨를 걸고 연대하여, 때로는 춤추고 노래하며 신나게 싸워나갈 것이다. 이미 이겨 놓고 치르는 싸움에서, 우리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마침내 가장 우아한 방식으로 승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