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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화된 권력, 내려와 국민 앞에 서라

피의자와 룸살롱에 다니는 대한민국 판검사들.

by 조하나


법의 이름으로 정의가 유예되고, 상식이 몰각되는 풍경이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시대. 우리가 발 딛고 선 이곳, 대한민국의 ‘법치’는 과연 안녕한가. 한때 정의의 최후 보루로 믿었던 사법부는 이제 정치적 논란의 한복판에 서 있으며, 그 저울의 공정성은 끊임없이 의심받고 있다. 법복의 권위는 바래고, 판결문 너머로 불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다.


대한민국 사법 시스템이 직면한 위기의 본질을 냉철하게 응시하고, 그 뒤틀린 권력 구조의 민낯을 드러내며, 나아가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사법, 국민으로부터 신뢰받는 사법으로 거듭나는 데 있어 시대의 양심을 향한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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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로 전염된 사법의 정치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 룰라에서 탄핵까지>는 기득권과 손잡은 사법 카르텔기 정치적 의도에 따라 어떻게 한 나라의 민주주의를 잠식할 수 있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브라질의 전직 대통령 룰라가 사법 기득권 카르텔의 ‘세차 작전’이라는 기치 아래 진행된 표적 수사로 정치적 생명에 치명타를 입고 투옥되는 과정은, 사법 시스템이 정치적 반대자를 제거하는 도구로 전용될 수 있다는 섬뜩한 가능성을 드러냈다. 여론을 등에 업은 검찰의 공세와 의문투성이의 재판은, 훗날 일부 판결이 뒤집히고 수사의 편파성이 인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라질 사회에 깊은 상처와 불신을 남겼다.



이러한 모습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특정 정치인을 둘러싼 사법적 공방과 기묘하게 겹쳐 보인다. 제1야당 대표이자 유력한 대선 후보인 이재명을 향한 수사와 기소, 재판은 그 실체적 진실과 별개로, 이미 그 과정 자체가 극심한 정치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검찰의 기소 독점과 기소 편의주의, 검찰권 행사의 방식, 언론의 보도 행태, 그리고 재판 진행 과정에서 불거지는 여러 논란은 사법 시스템의 중립성과 공정성에 대한 국민적 의구심을 증폭시킨다. 특정 세력에게는 정의 구현의 과정으로, 다른 세력에게는 명백한 정치 탄압으로 인식되는 이 극단적인 대립은, 사법이 정치적 중립성을 잃고 정쟁의 도구로 전락할 때 민주주의가 얼마나 위태로워질 수 있는지를 경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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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는 ‘신성불가침’이라는 허상

대한민국 사법 시스템이 유독 정치적 논란에 쉽게 휩쓸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배경에는 청산되지 못한 과거의 유산과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특정 문화적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법의 이름으로 자행된 반인륜적 범죄와 민족적 배신 행위에 법조인들은 깊이 관여해 부역자로 남았다. 해방 이후, 과거사 청산은 미완으로 그쳤고, 특히 사법 영역에서는 일제 부역 경력이 있는 법조인들이 ‘인력 부족’이라는 현실적 명분 아래 다시 법복을 입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이 정략적인 이유와 기득권층의 반발로 좌절되면서, 대한민국 사법부는 그 출발부터 정의의 토대를 온전히 세우지 못했다. 이처럼 시작부터 드리워진 어두운 유산은 이후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사법부가 정권의 시녀 역할을 하며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결과를 낳았고, 국민들의 가슴에 사법 불신의 씨앗을 깊이 심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 위에서 한국 사회는 법과 사법부에 대해 일종의 경외심과 동시에 불신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키워왔다. ‘법대로’라는 구호는 때로 모든 비판을 잠재우는 권위로 작동했고, 사법부의 독립성은 비판조차 용납하지 않는 ‘성역’으로 인식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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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한민국 사회의 특유한 ‘룸살롱 문화’는 엘리트 카르텔의 윤리적 해이와 부적절한 유착 관계를 조장하는 온상이 되어왔다. 영화 <내부자들>에 나왔듯 정치, 경제, 언론, 법조계 인사들이 밀실에 모여 벌이는 향응과 밀담은 단순한 사교를 넘어선다. 폐쇄된 공간에서 함께 일탈적 행위를 공유하며 형성되는 그들만의 ‘동지 의식’은 외부의 감시와 내부의 양심을 무력화시킨다. 서로의 약점을 공유하고 암묵적인 이해관계로 얽히면서, 그들은 공적 책임을 망각하고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카르텔을 공고히 한다. 이러한 부패의 고리는 사법 정의를 잠식하고, 국민의 신뢰를 근본적으로 파괴하는 부식성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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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제받지 않는 권력의 자화상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사건은 대한민국 사법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와 ‘제 식구 감싸기’ 관행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례다. 그보다 더 명백할 수 없는 증거와 국민적 의혹에도 불구하고, 수사와 기소, 재판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결정들이 반복되며 결국 김학의 전 차관에게 면죄부를 준 결과는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실망을 넘어 분노를 자아냈다. 이러한 과거의 기억은, 현재 새롭게 불거지는 의혹들에 대해서도 국민들이 냉소와 불신을 먼저 떠올리게 만드는 학습 효과를 낳았다.






‘내란’이라는 국가적 중대사를 다루는 재판을 맡은 지귀연 판사가 고급 룸살롱에서 부적절한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의혹에 직면한 지금, 국민은 과거 김학의 사건에서 목도했던 ‘제 식구 감싸기’와 ‘유권무죄’의 악몽을 즉각적으로 떠올리며, 이번에도 진실은 은폐되고 정의는 외면당할 것이라는 냉소와 체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개별 법조인의 윤리 문제를 넘어, 사법 시스템 전체의 자정 능력 부재와 뿌리 깊은 도덕적 해이를 의심케 하는 심각한 징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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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법원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이 다른 곳에 있는 정의의 여신 ‘디케’와 달리 눈을 가리지 않고 칼도 없는 모습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피의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판결이 다르며, 처벌도 달라진다’라는 묘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전통적으로 정의의 여신상은 눈가리개를 통해 어떠한 외부적 영향이나 선입견 없이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판단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반면, 눈을 뜬 우리의 여신상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겠다’는 적극적인 의지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법의 정치화와 사법부 자체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만연한 지금, 혹자는 ‘사람을 가려가며’, ‘상황을 봐가며’ 판단하는 사법부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닌지 씁쓸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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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박충흠, 정의의 여신상, 1995, 청동, 100 × 100 × 180cm / 대한민국 대법원 앞 (우) 정의의 여신 '디케'





더욱 근본적으로 우리는 ‘법관의 판단은 절대적으로 옳다’는 낡은 신화에서 벗어나야 한다. 법복을 입었다고 해서 그들의 결정이 오류 없는 진리일 수는 없다. 판사 또한 인간이기에 개인적 가치관, 사회적 편견, 혹은 법리에 대한 오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들의 법 해석과 사실 판단에는 언제나 불완전성과 오류의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 따라서 사법부의 판결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숭배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는 사회적 관심 속에서 합리적으로 의심받고 비판적으로 검토되며, 투명하게 견제받아야 마땅하다. 이러한 건강한 긴장과 철저한 검증이야말로 오히려 사법 정의의 질을 높이고, 역설적으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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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산지석(他山之石)

그렇다면 이 깊은 불신의 터널을 벗어나,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면서도 그 투명성과 공정성, 상식을 담보할 길은 정녕 없는 것일까? 세계 여러 민주주의 국가들은 이 지난한 과제 앞에서 우리보다 먼저 혹은 더 깊이 고민하며 나름의 해법을 모색해 왔다.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부역이라는 뼈아픈 과거사를 청산하는 과정에서, 사법부 역시 그 역사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준엄한 자기반성 아래 시스템을 개선했다. 특히 ‘최고사법위원회’의 구성과 역할을 통해 법관 임명 및 징계 과정에 민주적 정당성과 외부적 통제를 도입하려 노력했다. 이 위원회는 대통령이 의장을 맡고, 법관 및 검사 대표뿐만 아니라 국회에서 선출된 위원, 국참사원에서 지명된 위원, 그리고 변호사 등 법률 전문가를 포함한 외부 인사들이 참여한다. 이러한 다양한 구성은 사법부 내부의 논리나 관행에만 매몰되지 않고, 사회 전체의 다양한 시각과 가치를 반영하여 법관을 임명하고 그들의 활동을 감독함으로써, 사법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유리되거나 독선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려는 중요한 제도적 장치로 기능한다.


캐나다는 사법부 독립성이 매우 높은 수준으로 보장되는 동시에, 국민의 사법부 신뢰도 또한 높은 국가로 꼽힌다. 이는 연방 판사 임명 시, 정부가 독립적인 ‘사법자문위원회’의 추천을 중요하게 고려하여 정치적 입김을 최소화하고 법관의 질을 높이는 노력에서 비롯된다. 또한, 사법행정 정보를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국민을 위한 사법 교육을 강화하며, 판결 시에는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이유를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판결의 예측 가능성과 설득력을 높인다. 엄격한 법관 윤리 강령과 독립적인 징계 절차 역시 신뢰의 기반이 된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은 세계적으로 높은 법치 수준과 정부 및 사법부에 대한 국민 신뢰를 자랑한다. 법관 임명 시 정치적 영향력을 배제하고 능력과 경험을 중시하며, 사법 정보의 폭넓은 공개와 재판 과정의 투명성을 보장한다. 강력한 권한을 가진 옴부즈만 제도는 사법부 활동에 대한 시민의 고충 처리와 시정 권고를 통해 외부적 통제 및 시민 권리 구제에 기여하며, 사회 전반의 낮은 부패 수준과 높은 윤리 의식은 신뢰받는 사법부의 굳건한 토대가 된다.

독일 역시 법관의 높은 전문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면서도, 그에 상응하는 책임성을 강조한다.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 선출에 의회가 참여하고, 판결에는 매우 상세한 법적 논거와 이유가 제시되어 학문적 검토와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이는 사법의 질을 높이고 자의적인 판결을 견제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각기 다른 역사와 문화를 지녔지만, 공통적으로 법관 임명 과정의 다원화와 투명성 확보, 사법 정보의 적극적인 공개, 판결의 질 제고와 책임성 강화, 그리고 사법부의 독립성을 존중하면서도 권력 남용을 방지할 수 있는 건강한 외부 견제 장치 마련에 힘쓰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노력은, 사법부의 독립이라는 가치가 결코 국민에 대한 책임과 분리될 수 없으며, 오히려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와 끊임없는 자기 성찰, 그리고 외부와의 건강한 긴장 관계를 통해 더욱 강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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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제1조의 정신으로 모든 권력을 심판하라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간결하지만 장엄하게 선포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땅의 모든 법과 제도, 모든 국가기관은 바로 이 두 문장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해야 한다. 사법부 또한 결코 예외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이 자명한 진리를 망각하거나, 혹은 스스로 그 권리를 내어주는 우를 범하곤 한다. 혹자는 우리 국민이 유난히 권력 앞에 약하고, 소위 ‘엘리트’라 불리는 집단에 대해서는 비판적 거리 두기보다 맹목적인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것이 오랜 유교 문화 속에서 ‘윗사람’에 대한 예우가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응으로 변질된 탓인지, 아니면 식민지와 권위주의 시대를 거치며 힘 있는 자에게 기대고 순종하는 것이 생존의 방식처럼 각인되었기 때문인지는 더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이러한 수동적인 태도가 결국 엘리트 집단의 오만과 부패를 키우고, 국민 스스로 주권을 포기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누군가에게 권력을 내어주고, 그 권력이 우리를 배반할 때에야 뒤늦게 분노하는 패턴을 너무 많이 반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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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단호히 그 고리를 끊어야 한다. 당연하게 여겨왔던 모든 것들을 의심하고,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 믿었던 제도와 관행들조차 그 근본부터 ‘뒤집어 볼’ 용기가 필요하다. 모든 권력은 국민의 위임에 기초하며, 그 위임은 언제든 철회될 수 있다는 주권 의식을 가져야 한다.

국회가 사법개혁을 시도할 때마다 일부 기득권 세력의 편에서 주장하는 ‘입법 독재’라는 비판은, 주기적인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직접적인 심판을 받는 입법부와 달리,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고 내부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사법부의 민주적 정당성 부족이라는 본질을 가리는 허울 좋은 수사이다. 적어도 국회는 4년에 한 번씩 선거를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지만, 사법부는 대법원장 한 명이 전국 판사들의 임명권과 인사권을 쥐고 흔든다. 사법부의 독립성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그 독립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특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주권자는 단순히 투표하는 존재를 넘어, 국가 운영의 모든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그 결과를 함께 책임지는 존재다. 결정도 국민이 하고, 그 책임 또한 국민이 함께 져야 한다. 사법부를 포함한 모든 국가 시스템은 국민의 끊임없는 감시와 비판, 그리고 참여를 통해 비로소 헌법 제1조의 정신에 부합하는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다.


오랜 시간, 조금씩 꾸준히 비틀어진 사법 권력을 바로 세우는 길은 험난할 것이다. 사법 카르텔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깨어있는 시민들이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용기 있게 목소리를 내며, 헌법이 부여한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당당히 행사할 때, 변화는 시작된다. 이 땅의 주인은 법복을 입은 소수가 아니라, 바로 우리, 국민이다. 그 자명한 진리를 되찾는 여정, 이제 우리 모두의 손으로 그 첫걸음을 내디뎌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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