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룸살롱 카르텔’과 침묵의 공모자들

아무리 술에 녹여도 사라지지 않는 진실이 있다.

by 조하나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 하나가 있었다. 가혹한 현실에 짓눌린 그 아이는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떠나 밤의 세계로 흘러 들어갔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아가씨’를, 대한민국의 밤거리는 집으로 돌려보내기는커녕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어느 날, 나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나이 많은 술 취한 아저씨들 비위 맞추며 어찌 그리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느냐고.

“그거 알아? ‘여자’가 ‘룸방’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가씨’가 되는 것뿐이야. 너는 잘 모르겠지만, 나이 많고 돈 많은데 마누라나 자식한테 인정 못 받는 외로운 아저씨들이 우리 앞에서 애교 부리는 게 얼마나 귀여운 줄 아니?” 친구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 미소의 잔상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 기억을 파고든다.

그 친구는 어린 나이부터 그곳에서 별의별 남성들을 다 지켜봤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의 얼굴과 이름, 목소리는 같은 공간을 채웠던 그 수많은 남성들, 즉 ‘구매자’들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고 외면당하는 현실을 매일 같이 경험해야 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그 아이의 슬픈 미소가 오늘따라 유독 선명하게 떠오른다.

최근 법조계의 룸살롱 접대 스캔들이 ‘또다시’ 터져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세상은 이토록 조용한가. 언론은 왜 쉬쉬하는가. 그 비난받아 마땅한 접대의 자리에 기자들은 없었을까? 판검사와 기자가 그렇다면, 경찰은? 국회의원은? 더 나아가, 이 땅의 수많은 평범한 아무개들은 과연 이 문화와 무관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침묵과 외면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질문들을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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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경고

내가 갓 회사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평생을 토목건축업에서 일하며 현장 소장으로 전국을 누비던 아빠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법카의 쾌락에 너무 빠지지 마라.” 나는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무심한 듯한 아빠의 한마디 속에 얼마나 깊은 세상의 이면과 인간적 고뇌가 담겨 있는지 절감하게 되었다. 아빠의 그 한마디는, 어쩌면 우리 사회가 마주한 추악한 ‘밀실의 문화’에 관한 최초의 복선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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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동 옥상의 시크릿 파티

그 ‘법카의 쾌락’이 암시하는 비밀스러운 세계의 편린을, 나는 잡지사 기자로 일하던 시절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회사 사무실이 신사동 간장게장 골목 뒤, 사무실과 빌라가 어지럽게 섞인 동네의 한 건물로 이전했을 때였다. 우연히 올라가 본 옥상에는 생뚱맞게 작은 바가 있었다. 그 기괴한 공간의 정체에 대해 당시 선배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그 일대가 바로 기업과 법조계 인사들이 외부의 시선을 피해 은밀한 성상납 접대를 벌이는 아지트였고, 기밀 유지가 생명인 그들은, 평범한 거주 공간으로 위장한 건물의 옥상에 그들만의 비밀스러운 향락의 공간을 경쟁적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강남에 그런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는 했다.

당시 배우 장자연이 성상납의 고통 속에서 비극적인 선택을 했고, 김학의 전 차관의 별장 성상납 사건이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충격과 분노 뒤에도 결국, 유력한 가해자들은 모두 사법부에 의해 면죄부를 받았고, 처벌받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이 사회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평범한 도시의 풍경 뒤에 숨겨진 이러한 공간들은, 부패한 권력과 뒤틀린 욕망이 얼마나 깊숙이, 그리고 처벌받지 않는 현실 속에서 은밀하게 작동하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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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와 ‘공급자’가 합법적으로 용인되는 사

룸살롱이라는 밀폐된 공간의 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이 가장 먼저 실종되는 비극을 본다. 그곳에서 여성은 인격체가 아닌, 술과 함께 소비되는 ‘상품’이거나 대화의 윤활유를 위한 ‘안주’로 전락한다. 웃음과 교태는 정교하게 매겨진 가격표를 달고, 여성의 신체와 감정은 ‘접대’라는 미명 하에 공공연히 거래된다. 그리고 사회는 이를 ‘남성의 본능’이라며 너그럽게 용인한다. 이는 단순한 성적 대상화를 넘어, 인간을 철저히 도구화하고 물화(物化)하는 야만적 행태다.

그리고 이 야만의 시장에는 익숙한 얼굴들도 있었다. 군에서 휴가를 나온 내 남자 친구들 몇몇은 마치 통과의례처럼 여자가 있는 술집을 찾거나 성매매 업소의 문을 두드렸다. 결국 나에게는 돈을 받고 남성을 접대해야 했던 어린 여자 친구와, 그렇게 돈을 주고 여성을 사는 남자 친구들이 모두 있었던 셈이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사회가 소년과 소녀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 부조리한 성적 각본에 길들여지도록 강요하고, 또 그것을 외면해 온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여성’은 상품화된 역할을, ‘남성’은 소비자 혹은 착취자의 역할을 무비판적으로 학습하게 되는 현실 말이다. 이들을 그저 대한민국 경제 시스템의 부속품처럼 ‘사용자’와 ‘공급자’라는 건조한 이름표로만 분류하고 외면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뒤에는 각자의 상처와 결핍, 그리고 사회가 강요하거나 혹은 방조한 뒤틀린 욕망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 시장을 찾는 또 다른 ‘사용자’들. 내 친구가 말했던 ‘외로운 아저씨들’의 ‘귀여운 애교’라는 표현은, 실상 그들 내면의 깊은 공허와 왜곡된 권력욕의 비루한 자기 연출에 다름 아니다. 그들은 가정이나 사회에서 얻지 못한 인정과 위안을, 돈으로 구매한 일시적 복종과 왜곡된 친밀감 속에서 찾으려 한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관계의 부재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며, 타인의 존엄을 짓밟음으로써 얻는 그릇된 만족감은 스스로의 영혼마저 좀먹게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밤의 권력’을 누리며 자아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제 돈 대신 ‘법카’를 쓴다. ‘비즈니스’ ‘접대’라는 허울 좋은 명목 아래, 여성은 남성 중심적 권력 구조의 액세서리로, 혹은 그들의 유흥을 위한 일회용 소모품으로 취급될 뿐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진정한 소통이나 인간적 교감은 애초에 불가능하며, 오직 천박한 자본의 논리와 왜곡된 성 의식, 그리고 기만적인 자기 위안만이 그곳을 지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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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녹이는 뇌물

아빠가 경고했던 ‘법카의 쾌락’은 당신이 한창 현장을 누비던 대한민국 토목건축 붐 시절에도 이미 깊숙이 존재했다. 아빠에게 ‘뇌물은 어떻게 오가느냐’고 물었을 때 돈이나 물건 대신 사람들은 뇌물을 ‘술로 녹인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 핵심에는 룸살롱 접대가 있었다.


더욱 나를 섬뜩하게 만든 것은 그 유착의 방식이었다. 각자 여자를 끼고 마주 앉아 술 취하며 추해지고 더러워진 모습을 서로 공유함으로써 끈끈하게 묶이는 것. 이것은 단순한 접대를 넘어선, 일종의 추악한 의식이다. 서로의 가장 비루하고 방탕한 모습을 목격하고 공유함으로써, 배신할 수 없는 공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다. 누가 먼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폭로는 곧 자기 파괴를 의미하기에, 그들은 서로의 약점을 담보로 한 ‘끈적한 유대’ 속에 더욱 깊이 함몰된다. 이 밀실에서 오가는 눈빛과 술잔 속에, 부정한 청탁과 은밀한 거래, 그리고 배신에 대한 암묵적인 협박이 함께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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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돈도, 네 돈도 아닌 ‘눈먼 돈’

결국 아빠가 말한 ‘법카’의 의미는 ‘내 돈도, 네 돈도 아닌 눈먼 돈’으로 귀결된다. 이 모든 추악한 연회를 가능케 하는 실질적인 동력은 바로 기업의 법인카드에서 흘러나오는 ‘눈먼 돈’이다. 하룻밤에 수백, 수천만 원이 허공으로 흩뿌려지지만, 그 돈의 출처가 불분명하기에 책임감은 실종되고 도덕적 해이는 극단으로 치닫는다. 내 돈이라면 결코 할 수 없을 무모한 지출이 ‘회사 돈’이라는 익명성 뒤에 숨어 정당화되고, 이는 곧 죄의식 없는 ‘법카의 쾌락’으로 이어진다.


이 ‘눈먼 돈’의 향연은 룸살롱과 그 변종 공간들을 살찌우는 주된 자양분이다. 그것은 접대하는 자에게는 ‘비용’이라는 편리한 명목을, 접대받는 자에게는 ‘공짜로 즐기는 권력’이라는 달콤한 유혹을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돈의 가치는 왜곡되고, 인간관계는 철저히 계산적으로 변질된다. 결국 이 ‘눈먼 돈’은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건강한 시장 경제를 교란하며, 사회 전체의 투명성을 저해하는 보이지 않는 독소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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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일탈인가, 구조의 문제인가

대한민국의 ‘룸살롱 문화’는 단순한 유흥업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성차별적 구조, 부패한 권력의 단면, 비뚤어진 기업 문화, 그리고 인간 내면의 그릇된 욕망이 응축된 병든 사회의 거울이다.

사회 각계각층의 룸살롱, 성접대 의혹이 터져 나올 때마다, 어떤 이들은 이를 두고 ‘한 개인의 일탈’이라며 문제의 본질을 축소하거나, 사건 자체의 선정성에만 매몰되어 그 구조적 배경을 외면하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한두 사람의 예외적인 행동으로 치부될 수 없는, 한국 사회 전체에 만연한 시스템의 문제다. 내 친구의 슬픈 미소와 신사동 옥상의 시크릿 바, 배우 장자연의 폭로, 김학의 전 차관 사건, 판검사들의 룸살롱 접대 스캔들 등에서 드러난 정의의 부재가 증명하듯, 은밀한 접대와 착취, 그리고 그에 대한 면죄부의 고리는 사회 곳곳에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며, 특정 계층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기제로 여전히, 버젓이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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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방의 현자들, 밀실의 꼭두각시

골방에서 밤낮없이 공부해 기어이 사회의 선두에 섰다는 이들, 스스로를 ‘공정’과 ‘정의’의 수호자로 자처하며 ‘카르텔’이라는 이름으로 그들만의 성채를 더욱 견고히 쌓아 올리는 소위 ‘엘리트’라는 작자들에 대해 생각한다. 대중 앞에서는 추상같은 목소리로 원칙을 논하고, 자신들의 권한을 마치 신이 내린 것처럼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포장하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발길이 어둠 속 밀실로 향하는 순간, 밤새워 탐독했던 고전의 지혜와 냉철한 법리(法理)는 간데없이, 그 모든 위엄과 허울은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그곳에서 그들은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찰나의 쾌락과 뒤틀린 지배욕을 충족시키는 대가로, 이름도 얼굴도 목소리도 지워진 여성들의 술잔 속에 자신들의 도덕성과 자존감을 함께 따라버린다.


스스로 가장 이성적이고 통제력이 뛰어나다고 믿는 그들이, 실은 가장 원초적이고 천박한 욕망에 휘둘리며, 치맛자락 안에서 자신들이 그토록 경멸하던 방식으로 타락해 가는 희극을 연출한다. 그들은 자신이 진정한 권력, 즉 스스로를 통제하고 타인에게 진정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도덕적 권위를, 바로 그 밀실의 여성들 앞에서 속절없이 내어주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 역사 속에서 우리는 종종 권력자들이 가장 사적이고 은밀하다고 믿었던 공간에서 어떻게 그들의 공적인 명예와 권위를 한순간에 잃어버리는지를 목격해 왔다. 그들의 ‘신성불가침의 권한’이란 이토록 허망하고 위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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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향한 희망

더 이상 ‘필요악’이나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이 추악한 문화를 우리 사회가 용인해서는 안 된다. 여성의 존엄성이 존중받고, 기업 윤리가 바로 서며,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어둠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물론, 그 길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견고한 침묵의 카르텔과 기득권의 저항은 생각보다 강력하며, 일상 속에 깊이 스며든 왜곡된 인식을 바꾸는 데에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우리는 길을 찾아야 한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목소리를 내는 용기다. 그리고 그 목소리들이 모여 거대한 연대를 이루고, 일상에서의 작은 거부들이 쌓여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만들어 내야 한다. 부당함에 눈감지 않는 시민들의 힘이 절실하다.


어둠의 권력자들의 밀실 속 연회를 끝내야 한다. 그 자리에는 인간의 존엄과 사회 정의라는 빛이 나야 한다. 외면하지 않고, 침묵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직시하고, 함께 분노하며, 변화를 위한 실천을 모색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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