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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이라는 이름의 유죄

12.3 내란 이후 대한민국 사회는 단호한 가치 판단이 필요하다.

by 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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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강물 위에 떠오른 ‘중립’이라는 유령


2024년 12월 3일, 명백한 내란이자 육사의 군사반란이자 친위쿠데타의 시도였던 내란수괴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령 선포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시계추를 수십 년 전으로 되돌리려 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외침과 응원봉의 빛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간신히 제자리를 찾은 듯 보였다.


그러나 시간이 망각의 강물을 흐르게 하는 동안, 그 수면 위로 스멀스멀 ‘중립’이라는 이름의 유령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반헌법적 내란 행위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며 두둔하는 목소리, “양쪽 다 똑같다”는 냉소적인 양비론, 심지어 “이제는 통합해야 한다”며 섣부른 화해를 종용하는 기만적인 ‘중립’까지. 카뮈의 <페스트> 속 의사 리유가 경고했듯, 페스트균은 결코 사라지거나 죽지 않고, 어느 날 다시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 가구와 리넨 속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민주주의를 좀먹는 바이러스는 그렇게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중립’은 단순한 견해 차이를 넘어, 우리 사회의 도덕적 나침반이 고장 났음을 알리는 위험 신호이다. 과연 헌정 질서가 유린된 명백한 불의 앞에서 진정한 ‘중립’은 가능한가? 아니, 그것은 과연 허용될 수 있는 자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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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마련되어 있다.” 시인 단테 알리기에리가 <신곡>에서 지옥의 문턱, 그 어떤 편에도 서지 못하고 자신만의 이익만을 좇았던 나태한 영혼들을 위해 예비된 공간을 묘사하며 던진 이 말은,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 우리에게 서늘한 경고를 보낸다.


단테에게 중립은 객관적 현명함이나 신중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선과 악의 투쟁 앞에서 자신의 영혼을 걸고 어느 편에 설 것인지를 선택해야 할 절체절명의 순간에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함이요, 도덕적 파산이었다. 불의가 명백한 상황에서 “나는 그 누구의 편도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은, 결국 고통받는 약자의 절규를 외면하고 강자의 폭주를 암묵적으로 용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 침묵은 진실을 질식시키고, 정의의 칼날을 무디게 하며, 역사의 퇴행을 부추기는 공범자의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우리는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신음했던 수많은 희생자들을 기억한다. 나치 독일의 광기 어린 홀로코스트 앞에서 침묵했던 독일 시민들의 ‘무관심’과 ‘방조’가 아우슈비츠의 가스실 문을 열었고, 제국주의 일본의 조선 강점과 수탈에 동조했던 일본 국민의 ‘방관’이 수많은 조선 민중의 피눈물을 자아냈다. 그들의 ‘중립’은 결코 중립이 아니었다. 그것은 악에 대한 적극적인 복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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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내란, ‘중립’의 일곱 가지 가면과 그 민낯

2024년 12월 3일 이후, 대한민국 사회에는 다양한 형태의 ‘중립’이라는 가면이 등장했다.


기계적 중립의 허상

“양쪽 다 잘못했다”며 헌정 파괴라는 사태의 본질을 희석하는 태도다. 이는 불법 내란을 시도한 가해자와 이를 막아선 피해자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결과적으로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교묘한 논리다. 작가 김훈은 이렇게 말했다. ‘칼로 사람을 벤 자와 그 칼에 맞은 자를 어찌 같은 무게로 논할 수 있단 말인가.’

전략적 중립의 위선

특정 정치적 이해관계를 위해 ‘중립’을 표방하며 은밀히 내란 세력을 옹호하거나 그들의 복권을 시도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갈등을 봉합해야 한다”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속내는 불의와의 야합을 통해 얻을 반사이익을 꾀하는 것에 불과하다.


무관심과 냉소의 갑옷

“정치는 원래 더러운 것”, “내가 나선다고 바뀔 것은 없다”며 정치 혐오와 냉소주의 뒤에 숨는 태도다. 이는 시민으로서의 책임과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이며, 결국 소수의 불의한 자들이 사회를 좌지우지하도록 방치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헤밍웨이의 소설 속 무력한 개인들처럼, 역사의 격랑 앞에서 스스로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공포와 무력감의 그림자

불이익에 대한 두려움, 혹은 거대한 불의 앞에서 느끼는 개인의 무력감으로 인해 침묵을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심정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엘리 비젤은 이렇게 말했다. “중립은 언제나 가해자를 돕지, 희생자를 돕지 않는다. 침묵은 언제나 압제자를 격려하지, 고통받는 자를 격려하지 않는다.” 비겁한 침묵이 모여 불의의 성벽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망각을 강요하는 ‘통합’의 논리

“이제는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며 섣부른 ‘통합’을 외치는 목소리다. 그러나 진정한 통합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역사적 교훈에 대한 공유 없이는 불가능하다.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덮어버리면 곪아 터질 뿐이다.


전문가를 가장한 회피

“법률적으로 따져봐야 한다”, “아직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다”며 가치 판단을 유보하는 전문가 집단의 모습이다. 물론 신중함은 필요하나, 명백한 헌정 유린 앞에서 전문가적 양심마저 중립 지대에 숨어버린다면, 그 지성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피곤함’이라는 이름의 도피

반복되는 정치 공방과 사회 갈등에 지쳐 “이제는 좀 조용히 살고 싶다”며 눈과 귀를 닫아버리는 태도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저절로 지켜지지 않으며, 시민의 끊임없는 관심과 참여라는 자양분을 필요로 한다. 그 ‘피곤함’이 민주주의의 질식을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여기, 가장 교묘하고 어쩌면 가장 서글픈 ‘중립’의 가면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역사적 익명성’이라는 망토다.


오늘은 광주가 피로 민주주의를 부르짖었던 5.18 민주화운동 45주년이 되는 날이다. 역사는 윤상원, 박관현 열사처럼 불의에 목숨으로 맞선 이들의 이름을 찬란한 별로 기록했다. 그들은 삶의 모든 가능성을 품은 미래를 박탈당하는 대신 영원한 명예를 얻었다. 동시에 학살의 책임자 전두환이라는 이름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를 새겼다. 그는 죽고도 묻힐 곳을 찾지 못해 저승으로 가지도 못하고 영원히 고통받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것이다. 그 참혹했던 1980년 5월, 총칼 아래 스러져간 주검들을 외면하고, 신군부의 학살 명령에 침묵하거나 암묵적으로 동조했던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과연 역사의 심판에서 자유로운가?

12.3 내란 앞에서 “나는 중립이다”라고 외치는 이들 역시, 역사의 기록부에 자신의 이름이 오르지 않기를, 그리하여 잊히거나 묻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적극적인 저항이 가져올 고통도, 적극적인 가담이 남길 치욕도 피하려는, ‘역사적 익명성’이라는 가장 깊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 숨어 비겁한 안식을 꿈꾸는 것이다. 그들은 이름 없이 사라짐으로써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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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이라는 안락한 감옥

왜 인간은 이토록 ‘중립’이라는 안락한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려 하는가? 때로는 심리적 안정을 찾기 위함이고, 때로는 교묘한 계산이 숨어 있기도 하다.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은 권위자의 부당한 명령에도 쉽게 굴복하는 인간의 나약함을 폭로했고, 달리와 라타네의 ‘방관자 효과’는 다수의 침묵이 어떻게 개인의 책임감을 마비시키는지를 증명했다. 솔로몬 애쉬가 보여준 ‘동조의 압력’, 레온 페스팅거가 분석한 ‘인지 부조화의 자기 합리화 기제’는 모두 불의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쉽게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도피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그러나 하워드 진이 갈파했듯,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일 수는 없다.” 불법과 폭력이란 이름의 기차가 민주주의의 선로를 이탈해 질주하고 있을 때, 그 위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은 기차의 폭주를 묵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을 통해 경고했듯,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고 시스템에 순응하는 ‘생각하지 않음’이야말로 거대한 악을 키우는 온상이 된다. 2024년 12월 3일의 불법 계엄령 앞에서 “나는 모른다”, “나와는 상관없다”며 눈감았던 모든 ‘평범한’ 침묵, 그리고 지금 “나는 중립이다”라고 말하는 그 익명성의 그림자 속에 숨은 욕망이야말로 그러한 악의 씨앗에 물을 주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 ‘중립’은 개인에게 잠시의 심리적 평온과 익명성의 환상을 줄지언정, 사회 전체에는 정의의 실종, 민주주의의 퇴행, 그리고 더 큰 폭력의 망령을 불러오는 독배(毒杯)가 될 뿐이다. 역사는 침묵한 자들의 이름까지는 기록하지 못할지라도, 그 침묵이 만든 결과를 똑똑히 기억하고 평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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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칼날을 다시 벼리며, 빚진 자들의 책무를 묻다


2024년 12월 3일의 불법 비상계엄령은 단순한 정치적 해프닝이 아니라, 대한민국 헌정사의 명백한 오점이자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근간을 뒤흔든 중대한 국가 범죄이자 반헌법적 국가 폭력이다. 진실은 명확하며, 책임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러한 엄중한 역사적 사실 앞에서 ‘중립’이라는 단어는 그 어떤 설득력도, 정당성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역사의 죄인이 되는 길목에 놓인 달콤한 유혹이거나, 비겁한 자기기만의 알리바이일 뿐이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이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 끼치는 침묵이었다.” 우리는 이 ‘소름 끼치는 침묵’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망각과 냉소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 각자의 자리에서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작은 목소리라도 내어 불의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지키는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 ‘잊히는 것’이 아니라 ‘기억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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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가 예비한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불의에 침묵하고 방관한 자들을 위한 곳이지, 그 불의에 맞서 싸우다 스러진 이들을 위한 자리가 아니다. 부러진 민주주의의 칼날은 시민들의 뜨거운 함성과 연대의 눈물로 다시 벼려져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나는 중립이다”라고 안온하게 속삭이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당신들이 발 딛고 선 이 땅의 민주주의, 당신들이 당연한 듯 숨 쉬는 자유의 공기는 결코 저절로 주어진 특혜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어둠의 시대에 한 줄기 빛을 갈망하며 자신을 불살랐던 수많은 이름 없는 영웅들의 피와 땀과 눈물 위에 힘겹게 세워진, 그러나 여전히 위태로운 기념비다.


나치 독일의 철권통치에 맞서 싸웠던 이름 모를 레지스탕스들, 얼어붙은 만주벌판과 상해의 뒷골목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수많은 투사들, 1980년 오월 광주에서 계엄군의 총칼에 스러져가면서도 “독재타도”, “호헌철폐”, “민주주의 만세”를 외쳤던 학생과 시민들, 그리고 불과 얼마 전, 2024년 12월 3일 총구가 국회를 겨누던 그 절체절명의 순간, 두려움을 무릅쓰고 국회 앞으로 달려 나갔던 시민들, 손에 쥔 응원봉 하나로 불법 권력에 맞서 내란을 일으킨 대통령의 파면과 체포, 구속이라는 역사를 만들어냈던 청춘들. 바로 그들 덕분에 우리는 오늘의 자유와 권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중립이다”라고 말하는 당신들은, 그 고귀한 영혼들 모두에게 빚을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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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숭고한 헌신과 희생 앞에서, “나는 중립이다”라는 말은 얼마나 공허하고도 이기적인 자기변명인가. 그것은 마치 힘겹게 쌓아 올린 제방 아래서 시원한 강물을 마시면서도, 제방을 쌓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노고와 희생은 애써 외면하는 것과 같다. 민주주의는 완성된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 아니라, 매 순간 깨어있는 시민들의 치열한 관심과 참여, 그리고 때로는 모든 것을 걸고 맞서는 용기 있는 저항으로 간신히 지켜내야 하는, 살아 숨 쉬는 투쟁의 역사 그 자체다.


오월 광주의 영령들이 그러했듯, 역사의 준엄한 심판대 앞에서, 그리고 미래 세대의 맑은 눈망울 앞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기록될 것인가? 지금, 여기, 우리의 선택에 그 답이 달려 있다.


이름 없이 잊히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정의의 빚을 기억하고 행동함으로써 당당하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채우는 존재가 되어 미래 세대를 도울 것인가. 침묵의 안락함을 박차고 나와, 행동하는 양심으로, 깨어있는 시민으로,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책무를 다할 때만이, 우리는 비로소 그 숭고한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가 아닌, 역사 속에서 당당하게 빛나는 자리를 예약하는 유일한 길이다. 앞서서 나갈 용기가 없다면, 따르기라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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