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사람의 인격을 담는 그릇이다. 문체를 보면 사람이 보인다.” 나는 오랫동안 이 말을 믿어왔고, 내 이름 석 자와 소속을 걸고 세상과 소통해 왔다.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이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던 무렵, 잡지사 기자로 일했던 나는 온라인 공간에서의 활동 역시 현실 세계의 연장선이라 여겼다. 내 계정은 곧 나의 얼굴이었고, 내가 하는 말과 글에 대한 책임감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 작정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세상을 파괴할 목적으로 쓰레기 같은 말을 배설하는 이들의 존재를, 나는 오랫동안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그러하듯, 타인들도 자신의 말에 최소한의 무게감을 느끼리라 믿었던 것.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함이라 해도 나는 내 신념을 저버릴 생각이 없다.
세 가지 얼굴의 혐오
얼마 전, 이제 막 시작한 나만의 작은 영화 비평 유튜브 채널에 브라질의 사법 쿠데타를 다룬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 룰라에서 탄핵까지>에 대한 해설 영상 콘텐츠를 올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특정 극우 커뮤니티에서 좌표를 찍고 몰려온 이들이 집단적으로 악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난 10년이 넘도록 잘 다듬어지고 시스템화된 일베와 다름없는 펨코 같은 곳에서 활동하는 이들은 놀랍도록 똑같은 혐오와 조롱의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의 논리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12.3 비상계엄은 ‘내란’이 아닌 ‘계몽령’이라는 극우 파시즘적 주장. 둘째,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시도는 잘못되었지만, 그런 원인을 제공한 민주당 또한 똑같이 잘못했다는 기계적 중립을 빙자한 교묘한 내란 옹호. 그리고 셋째, 영상 속 내레이션 목소리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너는 여자 주제에 뭘 아느냐?”는 식의 노골적인 인신공격과 여성 혐오 발언이었다.
목도리도마뱀의 ‘토론 배틀’
유튜브라는 새로운 생태계에 발을 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나는, 순진하게도 그 모든 악플에 일일이 답변을 달며 토론을 시도했다. 그들이 내 말에 귀 기울여 줄 것이라,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중을 가지고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하리라 기대한 것이다. 실로 순진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었다.
그중 한 명은 마치 자신이 정의의 사도라도 된 듯, 비장한 문체로 나에게 ‘토론 배틀’을 신청한다며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끝을 볼 수 없다면 시작도 하지 말라”며 목도리도마뱀처럼 제 몸을 한껏 부풀려 기선 제압을 시도했고, 만약 자신과의 토론에서 내가 패배한다면 그에 ‘굴복’하여 영상을 내리고 사과 영상을 올리라는 조건까지 내걸었다. 나는 그에게 ‘토론’이란 승패를 가르는 싸움이 아니며, 대화를 통해 서로의 다름을 확인하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해 가는 과정, 그 자체라며, 상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렇게 위협적이고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차분히 대응했다.
그리고 물었다. 나와 똑같은 다큐멘터리를 리뷰한 다른 채널 운영자에게도 이렇게 무례한 방식으로 협박을 한 적이 있는지, 만약 내 채널 프로필 사진이 우락부락한 근육질 남성이었고 내레이션 목소리 또한 AI로 변조된 남성의 것이었다 해도, 지금처럼 안하무인 격으로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겠느냐고. 물론, 그는 그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고, 이후 두 번 다시 내 채널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개인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린 잘못된 소통 방식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번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에는 진정한 의미의 ‘토론’ 문화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했다. 언제나 내가 옳고 네가 틀리거나, 혹은 그 반대인 ‘제로섬 게임’의 극단적인 결론만을 빠르고 쉽게 단정 지어버리는 것을 토론이라 착각할 뿐. 민주주의의 기본인 건강한 토론 과정은 답답하고 더디다는 것, 거기에 토론 당사자의 인내는 물론 무엇보다 상대방에 대한 인간적인 존중과 배려심 자체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는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실명’이 약자가 되는 세상
시간이 흐를수록 악플러들은 더욱 노골적으로 선을 넘기 시작했다. 끝내 “중국으로 가라”, “북한으로 가라”는 맹목적인 비난은 물론, 내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입에 담기 힘든 혐오 단어들을 동원해 조롱하고 비하했다.
간혹 인터넷 세상에서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악플들이었지만, 그것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내게 직접 향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어쩌면 나는 세상을, 혹은 온라인이라는 공간을 너무 믿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는 ‘익명’과 ‘실명’이 마주쳤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소통하는 ‘실명’의 존재가 오히려 더 약자가 되어버린다는 뼈아픈 현실을 깨달았다.
처음엔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모욕감으로 떨리는 듯했다. 심장이 터질 듯한 분노와 함께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치밀어 올랐다. 그들의 저열한 단어들이 뇌리를 떠나지 않고 밤새도록 나를 할퀴었다. 당장이라도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그들의 억지를 조목조목 반박하고 싶었다. 문득, ‘이대남’을 참칭하며 집단적인 악플 테러를 자행하다 고발당한 이들 중, 경찰서에서 대면한 실제 모습이 초등학생이거나 중년의 남성이었다는 인터뷰 기사가 떠올랐다.
나는 지금 누구를 상대하고 있는 것인가. 그들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 정말 내가 만든 콘텐츠를 비판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단지 내가 싫은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 사회를 향한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할 손쉬운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일까. 혹은, 이 세상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은 절망감의 발로일까. 아니면 그 반대로, 누군가의 지독한 관심을 갈구하며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길 바라는, 절박하고도 폭력적인 방식의 기괴한 몸짓일까.
온라인 세상에서 ‘익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칼처럼 벼른 혐오의 말로 상대를 베어내며 희열을 느끼는 이들이, 어쩌면 내 주변, 우리 사회와 일상 곳곳에 아무렇지 않게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자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그들은 토론도, 대화도 원하지 않았다. 오직 조롱과 비하, 혐오를 통해 내 영상과 나를 그들의 배설 창구로 이용하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받는 상처는 너무나 깊고 생생했다.
30분의 반전, 여론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루, 이틀, 며칠을 그들의 악플에 진지하게, 인간적인 예의를 갖춰 ‘선생님’이라는 호칭까지 써가며 대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깊은 ‘현타’가 밀려왔다. 그때,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는 평소 꾸준히 활동하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없었기에, 무작정 민주 진영의 한 유명 커뮤니티에 글을 올려 내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나의 물음에, 돌아온 답변은 단호하고 명쾌했다. “링크를 올리시오.” 그 한마디에 내 영상 링크를 공유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커뮤니티 회원들이 내 영상으로 몰려와 응원의 댓글을 달아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극우 악플러들의 댓글 하나하나에 논리적으로 반박하며, 12.3 비상계엄이 왜 명백한 ‘내란’인지, 기계적 양비론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한 작은 채널을 골라 집단적으로 괴롭히는 행위가 얼마나 비겁하고 비열한지를 통렬하게 지적했다. 그들은 “유튜브는 야생의 정글과 같으니, 멘탈이 약하면 댓글창을 아예 닫아두는 편이 낫다”는 현실적인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흥미로운 상황이 전개됐다. 불과 30분 만에 댓글창의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되었다.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온 민주 진영의 목소리 앞에, 극우 악플러들은 썰물처럼 줄행랑을 쳤다. 이러한 극적인 경험은, 앞서 내가 절망했던 그 악플 지옥의 이면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한국 사람들은 특히 분위기에 주도되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영상을 보고 댓글을 훑어볼 때 이미 특정 극우 커뮤니티에서나 볼 법한 거친 언어들이 댓글창을 뒤덮고 있으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은 더욱 기세등등하게 가세하여 목소리를 높인다. 반면, 다른 생각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과격함과 획일적인 분위기에 질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조용히 자리를 떠나버리기 일쑤다. 그렇게 소수의 극단적인 목소리가 마치 다수의 여론인 것처럼 부풀려지고, 이것이 곧 그 공간의 ‘언론’이자 ‘여론’의 지형인 양 왜곡되는 것이다. 이번 도움은 그러한 일방적인 분위기를 일시에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온라인 공간의 여론이 얼마나 쉽게 한쪽으로 쏠릴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 여론과는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실감하게 했다.
익명의 가면을 쓰고, 나를 잃어버렸다
너덜너덜해진 댓글창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문득 기묘한 호기심이 고개를 들었다. 악플러들의 인간 심리가 궁금해졌다. 나도 유튜브 익명 계정을 하나 만들어 댓글을 달아보기로 했다. 상대도 익명, 나도 익명. 그렇게 ‘익명 대 익명’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와, 그곳은 정말이지 끝없이 서로 선을 넘나드는 싸움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샘솟았다. 내가 그 어떤 천박하고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더라도,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나를 대담하게 만들었다. 한순간, 나는 거침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표현은 점점 더 과격해져 갔다. 그러나 그 짜릿한 해방감 뒤에는 더 큰 공허가 밀려왔다. 내가 무슨 말을 누구에게 쏟아냈는지, 불과 5분이 지나자 기억조차 희미해졌다. 마치 검은 연기처럼, 나의 말들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결국, 두어 시간 동안의 익명 계정 활동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속이 텅 비어버린 듯 허했고, 영혼은 피폐해지고 가난해져 있었다. 한 줌의 재만 남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런 나 자신을 용인할 수 없었다.
혼돈의 끝에서 마주한 ‘자존감’이라는 열쇠
그때 깨달았다. 이 모든 혼란과 상처, 그리고 나 자신의 변화를 관통하는 핵심에는 결국 자존감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익명의 가면 뒤에서 점점 더 난폭하고 공격적으로 변해가는 나 자신을 알아채고 그것에 제동을 걸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내가 나 스스로를 ‘합리화’하기보다 ‘객관화’하여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은 다름 아닌 ‘자존감’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끊임없이 나 자신을 살피고 성찰하는 것.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문화를 향유해 사유의 깊이를 더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 공감과 연대의 감각을 쌓아가는 인문학적 일상의 실천과 소양들이야말로 건강한 자존감을 길러내는 자양분임을 절감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타인을 향한 배려와 친절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굳이 타인을 깎아내리거나 조롱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부각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내면에 깊은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향해 날을 세우고, 타인을 비하하고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왜소한 존재감을 확인하려 든다. 익명의 그늘에 숨어 쏟아내는 그들의 날 선 언어들은, 어쩌면 내면의 깊은 결핍과 불안이 만들어낸 처절한 비명일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했던, 허세를 부리며 토론을 빙자한 싸움을 걸어왔던 그 악플러의 모습이야말로 낮은 자존감과 선택적 분노, 그리고 건강한 토론 능력이 부재한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시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설정한 ‘만만한 상대’에게만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정곡을 찌르는 질문 앞에서는 한없이 비겁하게 침묵하며 사라져 버렸다.
익명이라는 가면, 그 빛과 그림자 아래
결국, 익명성의 문제는 곧 자존감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다시 우리 사회의 빈곤한 소통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익명이라는 가면은 낮은 자존감을 가진 이들에게는 자기혐오와 공격성을 무한정 분출해도 되는 면죄부처럼 작동하지만,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이들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말과 행동에 더욱 신중을 기하게 만드는 성찰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온라인 공간은 이미 현실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곳에서 무분별하게 자행되는 혐오와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각자의 내면에 단단한 자존감의 기둥을 세우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스스로를 존중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진정한 의미의 토론에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개인들이 만들어 가는 건강한 공론장이야말로, 익명의 그늘을 걷어내고 우리 사회를 좀 더 따뜻하고 인간적인 공간으로 만들어갈 수 있는 희망의 씨앗이 될 것이라 믿는다.
침묵의 대가를 넘어, 나의 목소리를 내다
댓글 테러에 시달리는 것은 정말이지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나 역시 ‘왜 내가 사서 고생인가, 차라리 침묵의 늪에 발을 담글까’ 하는 생각도 잠시 스쳤다. 유튜브 채널 운영을 포기할까도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침묵은 때로 암묵적인 동조가 될 수 있음을. 결국 이 사회가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는 생각으로 지난 10여 년간 일베와 디씨, 펨코 같은 혐오의 온상을 침묵으로 방조한 결과가 오늘날의 이준석 현상과 펨코 같은 극단적 커뮤니티의 확산으로 이어졌음을. 그리고 그들의 왜곡된 말과 행동에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직간접적으로 상처받고 고통받고 있음을 말이다.
만약 그들이 두려워, 혹은 그들의 저열함이 더러워 내가 여기서 나의 목소리를 거둔다면, 나 역시 이 사회의 병리 현상을 키우는 데 일조하는 것이며, 기자로서, 한 명의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다름없다. 나는 내가 지난 시간 동안 정성껏 쌓아 올린 내 삶의 결을, 그리고 그 속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다듬어온 나의 신념과 생각을, 저들 ‘극단적 소수’에 의해 함부로 재단당하거나 그들의 어둠 속에 내 목소리가 묻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