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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열의 시대, 두 개의 달을 보는 청년들

이준석의 펨코 정치, 그리고 ‘빛의 혁명’

by 조하나


우리는 지금, 하나의 하늘 아래 두 개의 달이 뜬 시대를 살고 있다. 한쪽에서는 연대의 빛이 광장을 채우고 민주주의의 위기에 맞서 뜨거운 함성이 터져 나오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깊은 고립감과 냉소, 그리고 특정 집단을 향한 분노가 음습한 극단적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들끓는다. 특히 대한민국 사회의 허리이자 미래여야 할 2030 청년 세대 내부에서 이토록 극명한 균열이 관찰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단순한 세대론을 넘어선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12.3 내란 사태라는 미증유의 위기 앞에, 광장을 가득 메운 ‘빛의 혁명’의 주역으로 떠오른 2030 여성들의 용기와 헌신은 눈부셨다. 그러나 같은 시각, 통계가 증명하듯 수많은 2030 남성들은 광장에서 부재하거나, 혹은 그 함성에 등을 돌린 채 다른 세계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비극적 풍경의 이면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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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남성성과 ‘박탈감’의 역설


많은 청년 남성들이 호소하는 ‘박탈감’은 근본적인 문제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 감정은 역설적이게도 과거 남성들이 단지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누려왔던 사회적 우위를 반증한다. 원래 가진 것이 없었다면 박탈감을 느낄 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물론 현재의 2030 남성들이 그 기득권을 온전히 향유한 세대는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아버지 세대가 누렸던 경제적 안정과 계층 이동의 사다리가 치워진, 치열한 경쟁과 불안정한 미래 앞에 내던져진 첫 세대에 가깝다. 과거 아버지 세대는 가족 부양이라는 명확한 역할과 그에 따른 사회적 인정을 기대할 수 있었지만, 현재의 청년들은 그러한 '성공 모델' 자체가 붕괴된 시대에 놓여 있다. 치솟는 집값, 불안정한 일자리 속에서 ‘가장’이라는 역할은커녕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 현실은, 그들에게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깊은 무력감과 함께 기존의 모든 가치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과거의 ‘보장된’ 남성적 지위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그들은 실현 불가능해진 ‘가장’의 역할과 전통적 남성성의 무게에 짓눌리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낀다.


이러한 불안과 분노는, 안타깝게도 문제의 근원인 구조적 불평등이나 기득권층이 아닌, 가장 가까운 경쟁자로 인식되는 동년배 여성들을 향하는 경우가 잦다. ‘분노는 항상 아래로 흐른다’는 냉엄한 현실 인식처럼, 권력의 정점을 향한 저항보다 손쉬운 대상을 향한 적대감 표출이 선택되는 것이다. “여성이 성장한다고 해서 남성이 반드시 손해 보는 것은 아니다”라는 당연한 명제가, ‘제로섬 게임’이라는 왜곡된 프레임 속에서 힘을 잃는다.


이 과정에서 ‘남성성 위협’이라는 심리적 기제가 작동한다. 가정에서는 여전히 가부장적 DNA를 체득했지만, 문밖의 세상은 전혀 다른 가치를 요구하는 ‘인지부조화’ 속에서, 전통적 남성성의 붕괴는 곧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과장된 남성성의 표출, 혹은 니체가 말한 기존 가치 체계의 붕괴 후 찾아오는 ‘니힐리즘’적 태도로 변질되기도 한다.


여기서 니힐리즘이란, 철학자 니체가 언급한 개념으로, 우리가 오랫동안 절대적이라고 믿어왔던 가치나 도덕, 삶의 의미가 그 기반을 잃고 무너져 내렸을 때 찾아오는 정신적 공허 상태를 의미한다. 과거 남성들에게 ‘가족 부양자’, ‘강인한 지도자’, ‘사회적 성공’ 등으로 요약되던 전통적 남성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강력한 가치 체계이자 삶의 지침이었다. 그러나 경제 구조의 변화, 성평등 의식의 확산 등으로 이러한 역할 모델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거나 실현 불가능해졌을 때, 일부 남성들은 마치 인생의 나침반을 잃은 듯한 혼란에 빠진다. 앞서 언급한 경제적 불안정과 사회적 지위의 불확실성은 이러한 전통적 남성성의 이상과 정면으로 충돌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원적 질문 앞에서 깊은 심리적 공황 상태로 내몰리는 것이다.


이러한 니힐리즘적 태도는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하나는 수동적 니힐리즘으로, “어차피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식의 냉소와 무관심, 사회로부터의 철회로 이어진다. 세상과 자신에 대한 기대를 접고 깊은 무기력감에 빠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더욱 위험한, 능동적 혹은 반항적 니힐리즘으로 변질되는 경우다. 이는 기존의 가치가 무너진 공백을 파괴적인 방식으로 채우려는 시도로 나타난다. 모든 규범과 가치를 조롱하고, 사회적 약자나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혐오와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극단적인 언행, 혹은 현실에서의 도발적인 행동들은 이러한 뒤틀린 허무감의 표출일 수 있다. ‘어차피 의미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식의 위험한 자기 합리화가 작동하는 셈이다.


결국, 해소되지 못한 좌절감은 이러한 니힐리즘적 공허와 결합하여 냉소와 무기력을 넘어, 때로는 파괴적인 분노와 적대감으로 분출될 준비를 마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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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생태계, 누가 청년들의 분노에 먹이를 주는가


청년 남성들의 이러한 불안과 혼란은 결코 진공 속에서 배양되지 않는다.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 청년 세대의 정치적 우경화와 함께, 경제적 불확실성에서 비롯된 박탈감은 종종 특정 사회 집단을 향한 적대감으로 표출되곤 한다. 유럽이나 북미 등지에서는 그 대상이 이민자나 소수 인종인 경우가 빈번한 반면, 한국에서는 그 에너지가 페미니즘과 여성을 향해 집중되는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는 각 사회의 뿌리 깊은 편견과 더불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의 교묘한 선동이 자리 잡고 있다.


‘펨코’나 ‘디씨’, ‘일베’와 같은 극우 성향의 온라인 커뮤니티는 이들의 불만을 확대 재생산하고,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유머’와 ‘정당한 분노’로 포장하며 왜곡된 소속감을 제공한다. 익명성에 기댄 이 공간에서는 감정의 솔직한 표현이나 공감 능력의 학습 대신, 경쟁적이고 공격적인 문화가 조장되며, 억압된 감정은 종종 여과 없이 폭력적인 언어로 발산된다.


과거 MB 정권을 필두로 국가기관이 동원된 사이버 심리전이 이러한 극우 커뮤니티의 비방과 조롱 문화를 양성하는 데 일조했다는 의혹은 실제 수사를 통해 그 실체가 밝혀졌다. 이러한 조작된 여론과 혐오의 확산은 청소년기부터 게임의 서사에 익숙한 청년 남성들에게 현실의 복잡한 문제를 단순한 선악 구도나 적대적 관계로 환원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논리가 쉽게 스며들도록 토양을 마련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국정원의 선거 개입 댓글 공작과 선거 개입, 극우 커뮤니티의 배양에 관한 수사와 기소는 현재 내란수괴 피의자로 재판을 받고 있는 파면된 대통령이자 당시 검사였던 윤석열에 의해 이뤄졌다. 윤석열은 대통령 취임 이후, 자신이 수사하고 기소해 실형을 받은 사이버 심리전을 주도했던 범죄자들을 사면해 대통령실을 비롯한 정보 요직에 앉혔다. 현재 대한민국이 젠더갈등, 세대갈등을 비롯한 혐오와 배척의 문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건 단순한 개인적 일탈을 넘어선 구조적 배경을 가졌다는 걸 시사한다.


여기에 정치권과 일부 언론은 ‘프레이밍 효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기름을 붓는다. 특히, 스스로를 ‘새로운 청년 정치인’이라 칭하며 2030 남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나선 이준석과 같은 인물들은 이러한 프레임 전략을 매우 교묘하게 구사한다.


그는 먼저 ”여성이 얻으면 남성이 잃는다”는 ‘제로섬 게임 프레임’을 통해 젠더 갈등을 격화시킨다. 예컨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이나 일부 분야에서의 할당제 논의 등을 마치 남성들의 한정된 파이를 빼앗는 것처럼 묘사하며, 공정성에 민감한 청년 남성들의 경쟁 심리를 자극한다. 여성의 권리 신장이 곧 남성의 기회 박탈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복잡한 사회 문제를 단순한 성별 간의 파이 싸움으로 치환시켜 버린다.


다음으로, 그는 “우리는 군대도 가는데 역차별받는 피해자”라는 ‘희생자 프레임’을 통해 청년 남성들의 억울함과 박탈감을 증폭시킨다. 병역 의무의 부담, 치열한 경쟁, 그리고 앞서 언급한 전통적 남성성의 위기 속에서 느끼는 불안감을 ‘남성 역차별’이라는 구호 아래 결집시킨다. 이 과정에서 청년 남성들은 부당한 사회 시스템의 희생자로 스스로를 인식하게 되며, 이러한 감정적 유대는 특정 정치 세력에 대한 강력한 지지로 이어진다.


가장 위험한 것은, 이 모든 문제의 원흉으로 “여성(혹은 페미니스트)”을 지목하는 ‘공공의 적 프레임’이다. 이준석의 언어는 종종 페미니즘을 남성에 대한 적대적 이데올로기 혹은 사회 혼란의 주범으로 규정하며, 청년 남성들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회적 불만마저 그 탓으로 돌린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 끝도 없이 이어지는 데이트 폭력과 살인, 스토킹, 성착취 영상물 유통 등의 범죄마저 다 여성들이 잘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화재 현장에서 불을 끄려는 소방관에게 “당신 때문에 옷에 물이 튀었다”고 불평하는 것과 같은 논리적 비약이며,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는 위험한 발상이다. 여기서 그들은 여성들을 ‘피해자’로 인정하고 공감하고 연대하지 않는다. 그저 피해 여성들로 인해 자신들이 잠재적 가해자로 몰린다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누군가는 실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인데, 누군가는 피해의식에 휩싸여 스스로 고립을 자처한다. 이는 복잡한 구조적 문제를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로 손쉽게 치환하여, 정치적 불만을 해소할 가상의 적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자신은 그 ‘공공의 적’에 맞서 싸우는 투사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준석에게 묻고 싶다. 지난 10년 간 젠더 갈등이 점점 더 깊어지는 동안 그 청년 남성을 대변한다고 스스로 외쳐온 정치인 이준석은 어떤 대안을 내놓고, 사회 갈등 봉합을 위해 무슨 노력을 해 결과를 만들어냈는가.


결국, 이러한 정치적 프레임 전략은 청년 남성들의 불안감을 자극하고 그 분노를 손쉽게 정치적 에너지로 동원하는 데 악용된다. 유튜브와 SNS의 알고리즘은 이러한 편향된 정보를 끊임없이 공급하며 그들을 확증 편향의 감옥에 가두고, 정작 그들이 직면한 문제의 ‘진짜 적’인 구조적 불평등, 자본의 폭력, 그리고 이를 교묘히 이용하는 정치 세력으로부터 시선을 돌리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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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러 인마”가 드러내는 청년 남성의 위태로운 자화상


12.3 내란의 밤, 끝내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가 표결하는 대신 국회 담장 밖에서 “시끄러 인마”를 외친 이준석은 국회의원으로서 할 일을 저버렸다. 당시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응원봉을 들고 광장에 나선 2030 여성들의 자발적 참여를 “우리나라가 치안이 좋아서”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폄하하고 조롱했다. 동시에 남성들의 저조한 참여에 대해서는 “군대에 가 있어서”라는 피상적인 변명으로 일관했던, 자칭 ‘새로운 청년 정치’라 부르는 국회의원 이준석의 발언은 그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상황 오판이 아니다. 첫째, 이는 문제의 핵심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고 왜곡하는 기만적 술책이다. 청년 남성들이 광장과 유리된 진짜 이유 – 즉, 일부 극우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확산된 정치적 냉소주의, 극우 유튜버들의 선동에 의한 가치관의 왜곡, 그리고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을 넘어선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무관심 혹은 적대감 – 를 정면으로 다루는 대신, 손쉬운 변명으로 그들의 불참을 정당화하고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둘째, 그의 이러한 발언은 여성들의 주체적인 민주주의 참여를 의도적으로 폄훼하고, 성별 간의 위화감을 더욱 조장한다. 여성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안전한 치안 환경 덕분’이라는 시혜적 관점으로 격하함으로써, 그들의 자발성과 시민의식을 평가절하하는 동시에, 남성들에게는 ‘우리는 다른 이유로 참여하지 못했다(혹은 안 했다)’는 식의 자기 합리화와 더불어 여성에 대한 불필요한 경쟁의식을 심어준다. 만약 12.3 내란을 광장의 응원봉들이 진압하지 않았다면, 결국 젊은 남성들은 모조리 군대에 끌려가 무기한으로 연장된 복무 기간에 언제 터질지 모를 북한과의 전쟁에 아무 의미 없이 희생될 준비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셋째, 이준석은 청년 남성들을 ‘이해 가능한 피해자’로 위치시키면서, 동시에 그들의 각성과 연대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는 청년 남성들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건설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그들의 불만을 특정 대상에 대한 ‘분노’로 응집시켜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한다. 이 과정에서 청년 남성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구조적인 모순이나 기득권 카르텔, 혹은 그들을 선동하는 정치 세력 자체에 있을 수 있다는 비판적 성찰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여성/페미니스트’라는 허수아비 공격에만 몰두하게 된다. 이는 마치 카뮈의 <페스트>에서 의사 리유가 전염병이라는 거대한 부조리에 맞서 연대하고 싸우는 반면, 코타르 같은 인물은 혼란을 틈타 사익을 추구하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결국 이준석과 같은 인물의 가장 큰 위험성은, 그가 청년 세대의 건강한 문제 해결 능력을 마비시키고, 사회 통합 대신 분열과 혐오를 구조화하며, 그 결과로 그들을 더욱더 사회에서 고립시킨다. 이준석은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도모한다. 그는 청년들을 위한 진정한 해법을 제시하는 ‘솔루션 프로바이더’가 아니라, 갈등을 먹고 자라는 ‘갈등 브로커’에 가깝다.


이준석의 언어는 청년들을 각성시켜 연대하게 하는 대신, 그들을 더욱 고립시키고 편협한 세계관에 가두며, 민주주의의 근간인 상호 존중과 토론의 문화를 파괴한다. 이러한 인물이 ‘청년 대표’ 혹은 ‘새로운 정치’의 이름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현실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직면한 또 다른 위기이며, 이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경계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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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달, 서로 다른 길 – 연대하는 여성과 냉소하는 남성


이러한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12.3 내란 사태라는 민주주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희망의 빛줄기를 목격했다. 절망적인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선명하게 빛나는 별들이 있듯, 2030 여성들은 ‘빛의 혁명’의 가장 밝은 동력이자 핵심적인 참여자로서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그들의 분노는 단순히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한 저항을 넘어, 자신들의 삶과 직결된 다양한 사회적 쟁점 – 성평등, 소수자 인권, 사회적 안전망 등 – 에 대한 깊은 자각과 놀라운 연대 의식으로 승화되었다.


그들은 단지 모이는 것을 넘어,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이전에는 주변부로 밀려났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동등하게 공존하고 발언할 수 있는 포용적인 ‘광장’을 스스로 일구어냈다. 이는 온라인에서의 적극적인 정보 공유와 토론, 오프라인에서의 자발적인 역할 분담과 지지 네트워크 구축 등, 그들만의 섬세하고 끈질긴 소통과 조직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다른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진정한 민주주의는 바로 이러한 연대의 토대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성숙한 인식을 체화했음을 보여준다. 여성들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감정적 지지와 공감을 기반으로 촘촘한 커뮤니티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사회적 불안과 어려움에 공동으로 대처해 온 경험은, 이처럼 위기의 순간에 강력한 사회 참여와 조직적 행동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그들의 투쟁은 단지 ‘반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향한 구체적인 ‘지향’을 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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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같은 시기 청년 남성들의 집회 참여율이 20대에서 불과 3.3%에 그쳤다는 통계(12월 7일 탄핵 가결 표결 당시 서울시 집회 참여자 중 20대 여성은 18.9%, 30대 여성은 10.8%를 차지했으나, 20대 남성은 3.3%, 30대 남성은 5.3%에 그쳤다)는, 단순한 수치를 넘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심각한 질문이다. 물론 이것이 모든 청년 남성의 침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거대한 민주주의의 위기 앞에서 보인 이들의 집단적인 ‘관망’ 혹은 ‘냉소’하는 태도는 분명 하나의 뚜렷한 경향성으로 읽힌다. 여기에는 그들이 느끼는 깊은 ‘고립감’, 유의미한 사회적 지지 체계를 경험하지 못했거나 활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현실, 그리고 무엇보다 일부 극우 온라인 커뮤니티와 유튜버들에 의해 조장되고 학습된 냉소주의와 혐오 문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그들이 ‘광장’과 거리를 두는 이유는 무엇인가? 혹자는 그들이 민주주의라는 거대 담론보다 자신들의 직접적인 생존 문제나 ‘역차별’과 같은 개별적 불만에 더욱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혹은, 이준석과 같은 정치인들이 주입한 프레임에 갇혀, ‘빛의 혁명’과 같은 시민 저항 운동 자체를 특정 정치 세력의 선동이나 자신들의 이해와는 무관한, 심지어는 적대적인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어쩌면 그들이 느끼는 불안과 분노의 정당한 부분마저도 왜곡된 방식으로 해소되거나, 공론의 장으로 나오지 못한 채 그들만의 섬 안에서 맴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이 최소한 자신들의 목소리를 건강하게 낼 수 있는 통로나, 다양한 생각과 만날 수 있는 중립적인 대화의 장을 경험했다면, 상황은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이 남는다.


‘펨코’와 같은 커뮤니티에서 소비되는 혐오와 조롱의 언어는, 이성적 토론과 공감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사회적 연대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반(反) 지성주의적 태도를 강화한다. 이들에게 ‘광장’은 해방과 연대의 공간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거나 동참하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소음으로 치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공동의 문제 앞에서조차 그들은 각자의 섬에 갇힌 채, 혹은 그들만의 폐쇄적인 온라인 성채 안에서 냉소와 무기력, 때로는 왜곡된 분노만을 키워가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해야 한다.


이처럼 한 세대 안에서 나타나는 극명한 인식과 행동의 차이는, 우리 사회의 균열이 얼마나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다. 이제 우리는 이 ‘두 개의 달’이 드리운 서로 다른 길의 의미를 직시하고, 어떻게 하면 이 간극을 좁혀 함께 같은 하늘 아래서 공동의 미래를 꿈꿀 수 있을지 진지하게 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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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가?


체로키족의 오랜 전설 하나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두 마리 늑대가 존재하며, 이들은 끊임없이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한 마리는 어둠과 절망의 늑대다. 이 늑대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집합체로, 우리 마음속에 분노와 질투, 슬픔과 죄책감, 그리고 끝없는 자기 연민과 깊은 원한을 불러일으킨다. 이 늑대는 우리가 과거의 상처에 얽매이게 하고, 타인에 대한 불신과 적개심을 키우며,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결국, 우리를 무력감과 고립의 어둠 속으로 끌어내리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본다.


다른 한 마리는 빛과 희망의 늑대다. 이 늑대는 우리 안의 모든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힘을 상징한다. 이 늑대는 기쁨과 평화, 조건 없는 사랑과 꺼지지 않는 희망, 그리고 타인을 향한 따뜻한 친절과 세상을 향한 흔들림 없는 진실을 추구한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내고, 서로를 보듬으며,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도록 격려하며 이끈다.


이 두 강력한 늑대 중, 과연 어느 쪽이 싸움에서 승리할 것인가? 답은 바로 우리가 매일, 매 순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먹이를 주는 늑대’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그리고 청년들은 과연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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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남성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불안의 실체를 인정하되,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란 걸 설명하고, 동시에 그 분노의 화살이 왜곡된 방향으로 향하지 않도록 도와야 한다. ‘실현하기 어려운 가장의 역할’이라는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남성성을 모색하고, 아버지 세대와의 단순 비교에서 오는 부담감을 덜어주며, 미래 경제 속에서 ‘보람된 일’을 찾을 수 있도록 사회 전체가 지원해야 한다. 출생률 문제 역시 여성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양육 여건 개선을 포함한 포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사회적 지원 강화, 정책적 개입, 그리고 문화적 인식 변화라는 세 바퀴가 함께 굴러가야 한다. 남성들도 감정 표현과 공감에 익숙해지도록 돕는 교육과 긍정적 커뮤니티, 청년층의 경제적 불안을 해소하고 성별에 관계없이 심리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정책, 그리고 “남자는 남자다워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문화 조성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는 성별 간 대립을 조장하는 정치·미디어 프레임을 깨고, ‘여성과 남성이 공통으로 겪는 사회 문제’(취업난, 주거 문제, 노동 환경)를 함께 해결해 나가는 협력의 서사를 써야 한다. ‘페미니즘 = 남성 차별’이라는 오해를 바로잡고, 남성 역시 성평등의 수혜자가 될 수 있음(예: 유연한 노동 환경, 육아 참여를 통한 삶의 질 향상)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보여주어야 한다. 극단적 혐오 표현은 규제하되, 건전한 토론을 위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은 강화해야 한다.


변화는 한 걸음씩, 그러나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성별 갈등은 단기간에 해결될 수 없는 복잡한 문제이지만, 작은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 공통의 문제를 정의하며, 서로의 다름을 넘어선 존중과 이해를 쌓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두 개의 달’이 아닌 하나의 밝은 미래를 함께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길은 험난하겠지만, 포기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소명이다. 그 길 위에서, 우리 안의 ‘밝은 늑대’에게 먹이를 주는 지혜로운 선택들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당장 온라인에서 혐오 표현을 보면 용기 내어 반박하거나 신고하고, 주변의 청년들과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 없이 대화를 나눠보며, 다양한 관점의 글이나 책을 찾아 함께 토론하는 작은 실천부터 시작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러한 작은 행동들이 모여, 결국 어둠의 늑대를 몰아내고 빛의 늑대를 살찌우는 강력한 힘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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