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가로서 펜을 칼로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다.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은 말과 글이 칼이 될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무심코 누군가를 베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더욱더 예민해지고, 배려해야 하며, 사려 깊어져야 한다. 완벽할 수 없더라도 말과 글을 다루는 사람은 매일매일 수양하듯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 나는 펜이 아니라 칼을 들기로 결심했다. 지난 10년이 넘도록 우리가 구역질 나는 위선으로 애써 눈감고, 역겨운 침묵으로 방조하며 살찌운 괴물을 죽이기 위해. 그리고 그 괴물이 어떻게 우리의 영혼과 미래를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려 하는지, 그 추악한 실체를 괴롭지만 마주하고 통탄하기 위해. 이것은 이미 괴물의 아가리 속에 절반쯤 들어간 우리 자신을 향한 마지막 절규이며, 이 시대를 뒤덮은 암흑에 대한 처절한 저항이다. 모든 위선과 가식을 찢어발기고, 오직 피와 살이 튀는 날것의 진실만이 필요한 지금이다.
대한민국 사회가 키운 괴물
2025년 5월 27일,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3차 후보자 토론회. ‘대통령 후보’라는 이준석이라는 자는 인간의 존엄성을 능멸하는 오물을, 그것도 공중파를 통해 전 국민의 안방에 토해냈다. 그의 주둥이에서 게워내진 “여성의 성기에 젓가락을 꽂는다”는 추악한 문장은 결코 순간의 실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로세로연구소’라는, 이미 수많은 이들의 영혼을 살해하고 사회를 병들게 한 극우 사이버 레카 시궁창에서 건져 올린, 가장 저열하고 악의적인 폐기물을 철저하고 치밀하게 가공하여 준비한 살인 예고와 다름 없었다.
이준석이 온 국민을 상대로 민주주의의 축제인 대통령 선거판에 난데없이 투척한 오물은 극우 커뮤니티에나 떠도는 사실 무근의 내용이었다. 이준석이 얼마나 비열하고 파렴치하냐면, 이 내용이 전혀 확인되고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라는 걸 스스로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기에 향후 형량이 무거운 낙선 목적의 허위사실유포 선거법 위반을 피하려는 비루한 계산 속에 교묘히 문장 속 주어를 생략했다. 그것도 이재명 후보가 아닌 권영국 후보에게 질문하는 형태로 상황을 비틀고 왜곡하며 공적 토론의 장을 더럽혔다.
나는 ‘내란 종식’이라는 시대 정신을 명확히 인식하고 절망과 희망을 우리에게 동시에 안긴 이 조기 대선에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온 후보들의 정책과 공약을 따져보기 위해 TV 토론을 시청하고 있었지, 이준석의 유치한 힘자랑이나 안쓰러운 나르시시즘의 발현을 게임이나 예능처럼 즐기려는 게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그 알량하고 치기 어린 승부욕 때문에 온 국민이 각 후보자들의 정책과 공약에 대해 알 권리를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이준석은 자신을 예뻐하는 레거시 미디어들과 정치 평론가, 이미 유착 관계가 드러난 특정 진행자와 프로그램을 믿었고, 이들은 여지없이 화답한다. 이렇게 주어 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려도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시스템은 그의 작전에 충실히 협조할 거란 걸 이준석은 지난 10년 간 학습하고 경험해 왔다. 대부분의 레거시 미디어는 언제나 그랬듯 양반 행세를 하며 기계적 중립을 취한다면서 대선 토론에 나온 모든 후보를 싸잡아 비판한다. 이준석이라는 괴물을 키우는 데 8할 이상을 일조한 레거시 미디어와 정치 평론가, 특정 프로그램 진행자는 대한민국의 언론 개혁 역사에 반드시 오점으로 남을 것이다. 만약 이준석의 발언이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선진국에서 전파를 탔다면, 그 나라의 언론들은 이준석이 가루가 되도록 비판했을 것이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은, 이 천인공노할 망언을 내뱉고도 그는 단 한마디의 사과조차 없이 “내가 도대체 뭘 잘못했냐”며 적반하장으로 되묻고 있다. 온 국민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후보 토론에서 그런 발언을 한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성폭력이었다고, 그리고 그 불특정 다수가 다름 아닌, 이 나라의 유권자이자 주권자인 국민이었다며 헤아릴 수없는 상처와 고통, 불쾌감, 트라우마를 호소하는데 이준석은 여전히 “내 발언의 어디가 혐오냐”고 되묻는다. 그리고 국민을 향해 “집단 린치를 하지 말라”고 겁박한다. 이준석과 ‘펨코’ 무리가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특정 집단이나 특정인을 향해 무법지대처럼 가해온 ‘집단 린치’에 대한 인식은 없다. 실제로 ‘펨코’는 수많은 사람들을 극단적 선택에 이르게 해 ‘살코(살인자 코리아)’라 불린다.
이준석이 그토록 신봉하는 외신을 보자. 영국의 유력지 <파이낸셜 타임스>에서는 이준석을 ‘안티 페미니스트’라 소개하며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의 안티 페미니즘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로 남성의 역차별을 조장한다는 이유로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해 온 인물. 2023년 성접대 의혹으로 당원권 정지 징계를 받아 국힘 대표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네오 나치즘을 신봉하는 일론 머스크와 비슷한 ‘재정 보수주의자’.” 요약하면, 특정 집단을 의도적으로 공략해 그들의 혐오 문화를 조장하고 사회적 갈등을 유발함으로써 정치적 이득을 얻는 ‘극우 포퓰리스트’라는 말이다. 이준석이 과연 <파이낸셜 타임스>도 무고죄로 법정 대응을 할지 지켜보겠다.
이준석은 지난 10년 간 한결같이 커뮤니티에 악플 달 듯 정치를 해왔다. 여전히 이준석과 ‘펨코’에게는 이 모든 것이 가상현실 속 게임이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전개되지 않는 것에 스스로 분노해 멸망의 길인 줄도 모르고 모두에게 오물을 투척한다. 동시에 이준석과 ‘펨코’는 현재 이 모든 상황을 즐기고 있다. 제 몸에서 나는 악취도 맡지 못할 정도로 온 감각이 도파민에 마비된 그는 울분과 고통을 토해내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자신에 관한 헤드라인 기사가 쏟아져나올수록 희열과 스릴을 느낀다. 사회는 그런 자들을 ‘가학적 변태’ ‘소시오패스’라고 부른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준석과 아무 관계도 없고 그에게 아무 관심도 없는 대한민국 국민과 대통령 선거 자체가 시궁창으로 같이 빨려 들어갔다는 것이다. 참담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인간이라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을 지껄이고도 일말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 뻔뻔함과 악마성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준석과 그의 추종자 ‘펨코’들은 툭하면 역차별을 들먹거리며 삐죽거리고, 여성이 왜 사회적 약자냐며 이죽거리고, 여가부를 폐지하면 남성의 권위가 올라갈 거란 해괴한 믿음을 광신하는 사이비 신도처럼 징징거리는데, 이번 토론에서 이준석은 대한민국에서 여성은 분명히 사회적 약자라는 걸 스스로 증명했다. 평온한 저녁, 내란 세력을 심판하기 위해 희망에 부푼, 대선에 한 표를 던지는 유권자로서 지켜보던 TV 토론에서 단지 ‘여성’이란 이유로, 무방비 상태로 성폭력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여성혐오자’ 이준석이 스스로 보여준 것이다.
이준석이 그 추악한 말을 공중으로 살포하는 순간, 나의 뇌리에는 고등학교 시절 새벽 등굣길에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알몸을 드러냈던 ‘바바리맨’의 그 더러운 기억이, 그리고 그 수치심과 죄책감이 수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지난 시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견뎌야 했던 수많은 성희롱, 성차별, 그리고 언어적 성폭력의 트라우마가 한꺼번에 나를 덮쳐 숨통을 조이는 듯했다. 그리고 이준석 덕분에 나는, 그리고 여성인 우리는, 2025년에도 여전히 대한민국 남성의 특권을 어떻게든 빼앗아 제 이익을 채우려는, 민주당의 힘에 기대어(민주당 역시 여성 인권에 대해 딱히 실질적인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호시탐탐 그 기회를 노리는 기생충 취급을 받고 있다. 여전히 이준석과 ‘펨코’들에게 여성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독립적인 유권자가 아니다.
나보다 더 끔찍한 성폭력의 지옥을 경험한 피해자들은, 그 순간 어떤 참혹한 고통과 절망을 느꼈을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준석의 발언은 단순한 정치적 공방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둡고 병든 심연, 이미 괴사 해버린 양심의 적나라한 증거이자, 대한민국이 얼마나 깊고 치명적인 질병에 감염되었는지를 전 세계에 폭로한 국제적 망신이다.
이준석은 여전히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냐”며 반복해서 그 발언을 레거시 미디어를 통해 재생한다. ‘펨코’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라는 시그널을 보내는 데 그는 또다시 ‘여성’을 수단으로 이용한다. 토론 이후, 그는 계속해서 이재명 아들을 검증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내용과 전혀 관계 없는 여성 아이돌 카리나의 사진이 들어간 가짜 뉴스를 인용하며 지치지 않고, 가열차게 ‘여성’을 희생양 삼아 생떼를 쓴다. 이준석과 ‘펨코’는 2차 가해, 3차 가해를 이어가며 점점 더 많은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낸다. 그들은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그동안 자기들끼리 밀폐된 공간에서 내재화 해온 여성혐오를 마음껏 분출하는 ‘혐오 범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들은 ‘범죄자’를 공격하는 거라 괜찮다고 우기지만, 결국 ‘남성’을 공격하기 위해 ‘여성’을 공격하는 비겁하고 저열한 겁쟁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게임 속 시뮬레이션 세상이 내재화된 이준석과 ‘펨코’는 문재인 정권 당시 대통령이 수많은 권장도서 가운데 하나로 <82년생 김지영>을 추천하고, 소수의 여성 장관을 임명했다는 이유를 들어 정부가 일방적으로 여성의 편만 들어준다고 ‘역차별’을 운운했다. 그러면서도 여성혐오 범죄로 수많은 여성이 집에 가는 길에, 심지어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여기는 자신의 집에서, 그것도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무참히 살해될 때마다, 그리고 제2의, 제3의 ‘N번방 사건’이 밝혀질 때마다 그것은 그저 한 정신병자의 일탈일 뿐 대한민국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대하지 말라고 쏘아붙였다. ‘펨코’들이 주장하는 논리는 정확히 이준석이 TV 시사 프로그램에 나와 떠드는 내용 그대로였다. ‘청년’을 대변한다는 정치인이라면 가장 먼저 보여줘야 했을 공감과 위로, 연대는 없었다. 이에 대응하는 여성들은 절망하며 의미 없는 말싸움 같은 토론을 거부했고, 이준석과 ‘펨코’들은 자기들이 논리로 이 게임에서 이겼다고 뿌듯해했습니다. 깊은 갈등은 그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동시에 이준석과 ‘펨코’는 더 폭력적이고 난폭하게 굴었다.
이준석이 대선 TV 토론에서 내뱉은 말들을 여성들은 온오프라인 공간 어디서든, 언제든 흔히 듣는다. 운이 좋아 정상적인 남성을 만나면 안 듣는 것이고, 운이 나빠 20대 남성 둘 중 하나라는 ‘펨코’를 만나면 듣는 것이다. 여성이 일상적인 성범죄에 노출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그저 운에 기대어 기도하는 것뿐이다. 이준석과 ‘펨코’는 언제나, 역시나 자신들의 권리는 주장하면서도 책임은 지지 않는다. 이미 대한민국 여성들은 남성에 대해 기대도 희망도 저버린 지 오래다. 여전히 OECD 국가 중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큰 나라에서 “대한민국은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고 공언한 윤석열 정권 이후, 여성들은 아예 입을 닫았다. 희망이 없어 그들과 더 이상 토론하기를 포기한 것인데, 이준석과 지지자들, 그들만 모른다. 그저 여성들이 논리가 약해 목소리가 작아진 거라며 자기가 이겼다고 뿌듯해한다.
문재인 정권에서나마 여성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흘러나올 수 있었지, MB나 박근혜, 윤석열의 시대엔 그 어떤 저항의 목소리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설령 목소리를 내도 언론과 사회가 외면했다. ‘눈치껏, 조용히 좀 하라’고 사회 구성원들 스스로 서로를 알게 모르게 검열했다. 사회의 다양하고 시끄러운 목소리는 본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관대한 사회 분위기에서 더 많이 흘러나온다. 이준석과 지지자들은 윤석열의 시대 내내 여대만 골라 우르르 몰려가 난동을 부리고, 폭동을 일으키며 “여성들이 이리 조용하니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가!”라고 외쳤다. 헌법과 민주주의를 아예 짓밟으려는 참칭 ‘보수’ 내란당 국민의힘에겐 조금의 도덕적,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하지 못하면서, 12.3 내란과 서울서부지법폭동을 칭송하면서, 민주 진보 진영엔 끝도 없는 도덕적, 정치적 올바름을 꼬치꼬치 따진다. 그리고 그들은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의 입을 틀어막은 이 사회 분위기가 영원하길 빈다. 하지만 끝나가는 극우 정권을 막을 힘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더 비틀어진 궤변과 가학적인 소시오패스 성향으로 스스로를 무장한다. 그 모습이 얼마나 유치하고 우스꽝스러운지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아는데 정작 당사자들만 모른다.
마지막 대선 토론에서의 이준석의 발언은 한 정신병자의 개인적 일탈이나 광기가 아닌, 대한민국 기득권과 내란 세력, 레거시 미디어가 지난 10년이 넘도록 ‘청년 정치인’이라는 위선적인 가면을 씌워 애지중지 키워낸, 바로 그 ‘시대의 총아’라는 괴물의 민낯이다. 상계동 지하 단칸방에서 시작해 과학고와 하버드를 거쳐, ‘박근혜 키즈’라는 낙하산으로 화려하게 정치판에 기생하기 시작했다는 그의 서사는, 학벌과 배경에만 눈이 먼 이 부패하고 천박한 시스템의 가장 추악한 수혜자였음을 증명할 뿐이다. ‘새로운 청년 정치’라는 이미지는 그에게 달콤한 독이 묻은 날개를 달아주었고, 결국 그 날개는 이카루스처럼 추락하며 그 자신뿐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씻을 수 없는 치욕과 절망을 안겼다.
괴물의 자궁: MB 정권, 국정원 댓글부대, 그리고 ‘일베충’의 창궐
똑똑히 기억해야 한다. 나와 이준석이 불과 두 살 터울로 십 대 후반과 이십 대 초반을 보냈던 시절, 김대중과 노무현 정부 아래 우리는 최소한의 상식과 이성이 통용되는 사회를 꿈꿀 수 있었다. 비판은 날카로웠지만 혐오로 변질되지는 않았고, 조롱은 있었지만 인간성을 파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역사의 퇴행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MB 정권이 들어선 직후부터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국민적 저항과 분노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국가기관인 군과 경찰, 국정원 댓글부대가 총동원되어 여론을 조작하고, ‘일베’나 ‘디씨’ 같은 극우 커뮤니티라는 구더기 양성소를 노골적으로 배양하고 지원했다.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인간 이하의 조롱과 혐오 밈, 그리고 입에 담는 것조차 죄악인 비하와 능욕이 바로 이 시기, 국가 권력의 비호 아래 조직적으로 자행된 여론 공작과 사이버 심리전의 더러운 결과물이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처절한 단식장 앞에서 피자와 치킨을 시켜 먹으며 낄낄대던 인간 말종들 모두 그곳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악마가 아니다. 바로 이 오염된 배설물 속에서 부화한 회충들이다. MB 정부 때 사이버 심리전을 주도한 국정원과 경찰, 군 관련자들이 재판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았고, 그들을 수사한 건 당시 검사였던 윤석열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사면해 대통령실에 최측근 참모로 고용한 건 대통령 윤석열이었다.
과거 이준석이 자신을 ‘노무현 장학생’이라고 공격하는 ‘일베’와 ‘펨코’ 지지자들에게 자신은 노무현 장학금을 받지 않았다고 게거품을 물며 부정하던 그 추한 몰골을 기억한다. 노무현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고, 서거 이후에도 조롱하고 능욕하기에 바빴던 부패한 기득권 보수정당에서 정치를 시작하고 지속해 온 그가, 12.3 내란을 일으킨 우두머리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남녀와 세대, 노동자, 이민자, 장애인, 성소수자를 갈라치며 혐오 문화를 키웠던 그가, 그 내란으로 치러지는 조기 대선에 후보로 나와서는, 파렴치하게도 ‘노무현 정신’을 참칭하며 자신이 “노무현 장학금의 수혜자”이자 그의 정신을 이을 유일한 후보라고 뱀 같은 말로 똬리를 틀었다.
이 기회주의적인 변태 행각 앞에서, 진정으로 노무현 정신을 기리던 이들의 분노와 경멸은 하늘을 찔렀다. 그러자 그는 한술 더 떠, 그들을 향해 “지하에 계신 노무현 대통령이 비통해할 일”이라며 사탄의 혀를 놀렸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극우 파시스트임을 스스로 인증했다.
“지하에 계신.” 이 능멸의 언어가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가? 바로 그 MB 정권 시절부터 ‘일베’와 ‘디씨’ 등지에서 10년 넘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조롱하며 사용해 온, 그들만의 은밀하고 추악한 낙인이자 암호다.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특종! 알고 보니 노무현이 죽지 않고 지하에 감금되어 예능인 생활을 강요받으며 수년 간 노예 생활을 하다 구조되었다!” 하는 식의 패륜적인 서사를 만들어 진짜 신문 기사처럼 보이게 제작해 퍼뜨렸다. 이 가짜 기사에 그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서민의 노래를 듣다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훔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을 사용했다. 그 인간쓰레기들의 언어를, 10년 이상 정치판에서 뒹굴었다는 자칭 ‘청년 정치인’이라는 자가, ‘노무현 정신’을 잇겠다는 자가, 온 국민 앞에서, 여전히 노무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시민들 앞에서, 눈 하나 꿈적하지 않고 지껄인 것이다. 대다수의 국민은 그의 ‘일베’와 ‘펨코’의 은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다행히도 그의 지난 10년 간의 행적들은 모두 인터넷에 박제되어 있다.
그들은 아직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일을 ‘중력절’이라 부르며 낄낄대고, 코알라와 고인을 합성한 혐오스러운 짤을 만들어 퍼뜨리며 노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바퀴벌레들이다. 얼마 전 이재명 대선 후보 유세장에서 한 초등학생이 그 코알라 필터를 켜고 촬영하다 경호원에 제지당한 사건은, 이 맹독성 바이러스가 이미 어린 세대의 영혼까지 좀먹기 시작했다는 걸 보여주는 섬뜩하고도 절망적인 증거다.
“시끄러 인마”로 대변되는 이준석과 펨코남
12.3 내란의 밤, 대한민국 ‘국회의원’ 이준석은 끝내 국회에 들어가지 않고 담장 밖 카메라가 모인 곳에 서서 한껏 얼굴을 찌푸리고는 연신 경찰들에게 반말로 호통을 쳤다. 차라리 이럴 바엔 국회 담을 넘어 들어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보좌진에게 “시끄러 인마”로 응수하며 무안을 줬다.
이준석과 ‘펨코’는 언제나 기성세대 정치인들의 권위주의 의식을 비난하고 조롱한다. 그렇다면 마흔 살의 초선 이준석은 왜 자신들이 비난하는 기성세대와 다를 바 없이 자신보다 나이 몇 살 어린 보좌관에게는 “시끄러 인마”라고 폭언하는가?
누구보다 자신이 윤석열이라는 악마를 잘 안다고, 이준석은 12.3 내란 이후 한결같이 윤석열을 공격했다. 윤석열 당선 직후, “자, 여러분! 대통령 하나 바뀌니 나라가 이렇게 좋아지지 않았습니까?”라고 외쳤던 자가 정치권력의 형세가 바뀌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 스스로 ‘양두구육’을 자인했다. 그러나 그는 교묘하게 사과와 반성처럼 보이도록 말을 가지고 놀았을 뿐, 정작 자신의 행태에 대해 국민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고, 물론 그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12.3 내란의 밤, 왜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가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느냐는 당연한 질문에, 누구보다 윤석열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는 이준석은 짜증을 내며 이렇게 답했다. 당시 민주당 의원들과 소통하며 이미 국회 안에 170명 이상의 의원들이 들어가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안심하고 경찰에 항의하며 국회 밖 담장에 남기로 했다고. 이것이 과연 국회의원의 생각과 언어인가?
그렇게 자신이 잘 안다고 자신한 윤석열이 모든 것을 걸고 저지른 내란이 만약 실패로 돌아간다면 2차 계엄, 3차 계엄을 할 거란 걸 이준석이 몰랐을까? 국회 본회의장에 모인 국회의원들을 윤석열이 군을 동원해 체포하고 국회를 폐쇄할 거란 걸 윤석열을 그렇게 잘 안다는 이준석이 예상하지 못했을까? 국회 담을 넘어 본회의장에 목숨을 걸고 들어간 국회의원들이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에 표결해 만장일치로 통과시켜 놓고도 2-3시간이 지나도록 윤석열이 비상계엄 해제 선언을 하지 않아 발을 동동 굴렀는데? 여전히 국회 안에선 계엄군의 본회의장 진입을 막기 위해 국회의원들과 보좌관들, 당직자들 모두 출입문을 막고 방어선을 쌓고 있었는데? 비상계엄 해제 결의안이 통과된 후에도 국회 안팎엔 여전히 무장한 계엄군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준석이 그토록 자화자찬하는 하버드 나온 머리로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을까? 그 간교하고 사악한 자가 거기까지 계산을 안 했을까? 극우의 망상에 찌든 자들과 궤를 같이 하는 이준석이 윤석열의 무지막지한 폭력성을 몰랐을까? 국회를 해산시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걸 몰랐을까?
그럼에도 이준석은 국회 밖에 경찰들과 안전하게 남기로 ‘선택’했다. 삶은 끝없이 이어지는 수많은 선택의 합으로 결정된다. 대한민국 국회의원으로서 그 상황에 당연히 해야 했을, 국회 본회의장으로 어떻게든 들어가 표결에 참여하고 2차, 3차 계엄 및 후속 상황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은 가볍게 무시하고 저버렸다.
왜? 만약 윤석열의 내란이 성공했든, 실패했든, 국회 담장 밖에서 경찰들과 함께 있는 게 그에겐 가장 안전하고 이득이 되니까. 그날 밤 내란이 성공해 국회 안에 모였던 국회의원들이 모두 잡혀가면 이준석은 내란당 국민의힘에 붙으면 되는 것이고, 내란이 실패로 돌아가면 국회 안에 모인 민주당 쪽에 붙으면 되는 것이다. 이준석이 여기까지 생각 못 했을까? 지난 10년이 넘도록 이준석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패하고 힘센 기득권 세력의 내란당 국민의힘에서 보고 배운 것이 지금의 이준석, 그 자체인데? 또한 지난 10년 간 ‘청년 정치인’을 주창하며 지금까지 그는 청년을 위한 어떤 정책을 내고, 또 어떻게 실행시켰나? 청년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라는 타이틀로 청년을 이용만 했지, 청년을 위해 무슨 결과를 냈나?
이준석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국회의원으로서의 전 국민적인 기억은 오로지 “시끄러 인마”와 “젓가락”으로 평생 남을 것이다. 자신의 역할과 지위에 따르는 책임은 늘 회피하고, 그에 따르는 특권만을 누리며 자신이 기성세대에 대해 꼬집고 비판하는 구태를 그대로 답습하면서도, 그런 자신의 모습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이 사회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펨코남’의 모습으로.
제도화된 일베 악마들: 이준석과 펨코, 그리고 우리 일상의 야만
이준석의 구역질 나는 말과 행동이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 10대, 20대, 30대 남성들의 정신세계에 어떤 치명적인 독극물을 주입했을까? 그는 ‘제도화된 일베’의 완벽한 결과물이자, 이제는 또 다른 이준석 같은 극우 좀비들을 대량 생산하는 숙주가 되었다.
대한민국 대선 후보 3차 토론이 끝나자, 예상했던 대로,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극우 청년 커뮤니티 ‘펨코’에서는 이준석이 드디어 이 사회의 오래된 ‘금기를 깼다’며 열광하고, ‘선택적 페미니즘을 주창하는 진보 정당과 이재명 후보를 동시에 능욕했다’며 만족감에 겨워 게걸스러운 찬사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일말의 반성이나 죄책감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그들만의 광란의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남성이 모든 것을 가졌던, 여성과 공정하게 경쟁하지 않아도 되었던 과거 권위주의로 물든 계층 사회로의 회귀를 꿈꾸는 청년 극우 커뮤니티 ‘펨코’는 자신들이 결코 발 끄트머리만큼도 따라갈 수 없는 진보의 정의로움과 도덕성에 대한 열등감과 피해의식을 ‘진보는 가식적이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공격한다. ‘펨코’는 그들의 키보드질로 수많은 사람들이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든 걸 훈장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적당히 때 묻고 부패하며 오래된 관행과 카르텔을 사랑한다. 그래서 그들은 정의로움과 도덕성에 과도한 발작을 일으킨다.
‘정치/외교’를 주제로 하는 대선 후보 토론에서 주어도 맥락도 없이 대뜸 ‘여성 성기’와 ‘젓가락’을 인용한 충격적인 네거티브 공격을 해놓고, 인간적으로 잠시 당황한 상대 후보에게 평소 여성과 사회 약자,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진보 세력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과 다름없다며 자기들끼리 정신 승리하며 자축하고 있다.
진보 세력의 위선을 드러내기 위해 한 발언이라고? 그래. 이 세상의 모든 환경주의자, 인권운동가, 진보 정치인들 모두 위선적이다. 단, 그 ‘위선적이기라도’ 한 쇼가 결국 세상을 바꾼다. 나 역시 완벽한 인간이 아니고, 여전히 실수와 방황도 많이 하지만, 내가 좀 더 정의롭고 나은 인간이기를 선언할 때마다 이기적이고 악한 언행을 하려는 순간, 나 스스로를 막아선다. 누가 꼭 알아주지 않아도, 나 자신이 알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그리고 언제든 내가 사회적 약자가 되어 억울한 상황에 처할 때 누군가 나를 돕길 바라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나는 지금 약자의 편에 서고 억울한 이들을 돕는다. 차라리 ‘위선’이라도, ‘쇼’라도 좋으니 내란 세력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이 정의로운 시늉이라도 하는 걸 보게 된다면 원이 없겠다.
‘펨코’는 PC 주의(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약자로,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를 차별하거나 억압하는 행태에 대해 저항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운동이나 철학)를 가식적이라는 이유로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세상을 딱 그들만큼의 시각으로만 본다. 미국의 네오 나치즘과 트럼프 세력이 극우 유튜브에서 떠드는 걸 그대로 믿는다. 세계 선진국이 PC 주의를 주창하는 건 순수하게 올바름에 대한 정치적 목적도 있겠지만, PC 주의를 실천함으로써 사회 갈등을 줄여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트럼프의 재집권으로 또다시 극심한 사회 갈등과 혼란에 빠졌고, 이로 인한 사회적 신뢰는 바닥을 치고,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비용과 범죄율은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12.3 내란에 대한 비판 글을 쓰고 한동안 ‘펨코’들의 집단 댓글 테러를 받은 적이 있다. 이들은 12.3 내란이라는 본질은 부정하고 무시하고 외면하더니, 나에게 되레 인문학 책 대신 경제학 책을 좀 보라고 훈계하며, 자신들이 그토록 경멸한다는 ‘꼰대질’을 했다. 그들은 내가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경제는 하나도 모르고, 돈 안 되고 쓸데없는 인문학과 감성을 내세워 주장한다는 허약한 논리와 함께 ‘펨코’들의 용어로 나를 마음껏 비하하고 조롱했다. 그들은 이어서 허무맹랑한 주장을 펼쳤다. 12.3 내란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없다고? 그래서 괜찮다고? 아무도 죽지 않았으니 내란이 아니라고?
경제와 재테크에 관심이 많아 오래전부터 주식과 코인에 투자해 온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투자 관련 커뮤니티나 텔레그램 채팅방에서 내가 목격한 그들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세계적 부호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경제 지식만 좀 안다고 해서 부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들은 어떠한 사회‧ 정치적 문제도 거시적으로, 입체적으로 바라보고 고민할 줄 모르는, 경제학적‧인문학적 소양 모두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내가 목격한 ‘펨코’의 극우 청년들은 지난 12.3 내란의 밤, 코인과 주식이 폭락했다고 쾌재를 부르며 ‘줍줍’ 했다. 코인이 오를 거라는 이유 단 하나 때문에 극우 파시스트이자 온갖 차별주의자인 트럼프의 당선을 기도하더니, 막상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어 관세 전쟁을 벌이는 통에 주식과 코인이 폭락하자 이제는 또 그렇게 욕하던 바이든이 그립다며 눈물을 뿌렸다.
그 어떤 정치적 철학과 신념에 대한 사유 없이 세금을 더 매기겠다는 민주당은 그들에게 그저 ‘죽일 놈’들이다. 그러면서 쓸 데 없이 대통령실을 이전하는 데 수조원을 쓴 윤석열 정부와 주가 조작으로 수십억을 번 영부인,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은 내란당 국회의원 아들은 비판하지 못한다. 자기 주머니에서는 한 푼도 나가면 안 되지만, 정부에서는 자신들을 위해 무조건 무언가를 내놓아야 한다. 이들은 마치 자신이 나라에 뭘 맡겨놓은 듯 행동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나라를 위해 나서서 하는 건 하나도 없다. 2년도 채 안 되는 시간, 군대 의무 복무? 취업에 사회 생활에 힘든 건 마찬가지인 여성들의 상당수가 의무 복무,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막상 그러면 ‘펨코’들은 여성이 군대에 가면 얼마나 쓸모없을지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를 들어 폄훼하고 조롱하기 바쁘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를 해결할 대안도 의지도 능력도 없으면서 이준석 식 불평불만, 갈라치기, 혐오와 조롱만 하다 문제와 갈등은 흐지부지된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과 토론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저 피곤해서 대화를 피하는 건데 ‘펨코’들은 자신이 논리로, 지식으로, 힘으로 이긴 줄 알고 자위한다.
한국 사회에 그리 불평불만이 많고, 자신들이 여성의 인권 신장으로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 외 다양한 요구사항이 있다면 자신들을 대표할 정당과 정치인을 선택해 지지하며 토론과 협의의 장으로 나와 건강하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요구를 하면 된다. 하지만 ‘펨코’들은 자신들이 엄청난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정치 고관여층이라고 자부하면서도 정작 이준석이라는 최악의 수를 선택해 스스로 정치에 대한 감각이 없음을 증명했다. 그렇게 그들은 스스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길을 선택했다.
반면 한국의 2030 여성들은 민주당을 정치적으로 잘 이용한다. 지난 10년 간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체득한 학습 효과 때문이다. 아무리 질투에 눈 먼 ‘펨코’들이 그들을 ‘개딸’이라 폄훼하고 조롱하고 무시해도 당원으로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당당하게 요구하며 당의 방향성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다. 12.3 내란에 2030 여성들은 맨 몸에 응원봉 하나 들고 나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당의 국회의원들과 함께 엄동설한 꽁꽁 언 아스팔트를 온기로 녹였다. 그들은 골방에 앉아 세상과 신세를 한탄하며 냉소에 젖는 대신 그조차도 사치라며 현실 세상으로 뛰쳐나와 실제 결과를 냈다. ‘펨코’ 따위의 혐오와 조롱에 그들이 끄덕 않는 이유는 실제 사람이 내뿜는 온기와 체온으로 지난 긴 겨울을 버티고 봄을 맞이한, 꽃과 노래, 빛으로 온갖 혐오와 폭력을 이겨낸 값진 경험을 체화한 전사들이자 경험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존폐의 위기에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한 데 섞여 설움과 고통과 울분을 나누고 연대하는 길을 선택했다.
‘펨코’들은 대한민국에 다시 전쟁이 나도 주식, 코인 떨어져 ‘줍줍’할 기회라고 좋아할 못난이들이다. 나라를 사랑했지만, 그래서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이완용처럼 산다. 그러나 12.3 내란이 성공했다면 자신들이 가장 먼저 군에 끌려가 무기한 연장된 군 복무에 계엄군이 되었을 거라는 생각에는 채 미치진 못한다.
이준석과 ‘펨코’의 세계관은 곧 가상현실의 게임 시뮬레이션과 같다. 모든 것이 통제된 상황에서의 게임과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인생의 실전이 다름을 그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현실 세계는 게임처럼 ‘리셋’한다고 모든 게 사라졌다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시작되지 않으며,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함께 사는 사람들은 쉽게 죽여 없앨 수 있는 게임 캐릭터가 아니다. 실제 살아 숨 쉬고, 뼈와 살이 붙어 있으며, 상처받고, 고통받고,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에게서 ‘펨코’들은 임의로 인간성을 삭제해 버린다. 이준석과 ‘펨코’들의 세계에서 상대방은 적이 되고, 마땅히 처단해 없애 버려도 좋을, 생명 따윈 없는 게임 캐릭터가 되어 버린다.
그렇게 그들은 사회에서 고립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점점 더 모든 것에 적대적이고 극단적으로 변한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모든 것에 불평불만은 많지만,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대안 제시도, 책임 있는 행동도 없다. 그저 경기장에 난입해 모든 것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사람을 죽이는 ‘훌리건’과 다를 게 없다.
2005년, MBC <음악캠프> 생방송 중 바지를 벗어 재낀 인디밴드 카우치 때문에 수많은 방송 관계자가 직장을 잃었고, 이후 대한민국 인디밴드들은 싸잡아 욕을 먹으며 공중파 방송 출연 기회를 모두 박탈당했다. 지금 이준석의 발언을 칭송하며 쾌재를 부르는 ‘펨코’들은 자신들의 교주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사태 파악도 못 할 정도로 그들 스스로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격리되어 있다는 걸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오랜 시간, 그렇게 동굴 속에 자기들끼리나 그러고 있을 거라며 사회가 애써 외면하고 무시했던 그 ‘험한 것’을 내란수괴 윤석열과 그 내란수괴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일조한 양두구육 이준석이 대한민국의 중앙 정치 무대로 꺼내 놓았다. 우리 사회를 더럽힌 극단적 소수에게 거대한 스피커를 가져다 준 윤석열과 이준석은 12.3 내란과 서울서부지법폭동이라는 치욕을 대한민국 역사에 기록했다.
며칠 전, 더불어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대구에서 선거 유세를 할 때, 20대 남성 둘이 모는 차량이 살인적인 경적을 울리며 유세를 방해하다 무고한 선거운동원들을 차로 들이받았다. 그들은 심지어 “중국 공안에 신고하지 말고 한국 경찰에 신고하라!”고 광분하며 외쳤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그 생명을 빼앗아도 된다는, 그 극우적 테러리즘이 현실에서 폭발한 것이다.
또한 얼마 전, 박주민 의원이 부산에서 선거 운동을 할 때 한 20대 청년이 다가와 “대학 어디 나왔냐?”, “호텔 경제학 아냐?”라고 시비를 걸며 공격적으로 물었다. 바로 이준석이 대선 토론에서 저열하게 물고 늘어진 주제였다. 이는 그 청년이 학벌주의와 능력주의의 더러운 노예이자, 이준석과 ‘펨코’가 서로의 극우적 망상을 현실에서 행동으로 옮기는 데 명분을 제공하는 추악한 공생 관계임을 극명하게 드러낸 예다.
최근 끊이지 않는 20대 남성들의 묻지마 살인과 야만적인 폭력, 데이트 살인과 잔혹한 스토킹 범죄가 정말 개인의 일탈이나 정신이상으로 치부될 수 있을까? 여성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고 약자를 짓밟아도 된다고 선동하는 ‘일베’, ‘디씨’, ‘펨코’ 같은 극우 바이러스 소굴의 역할은 없을까? 그리고 그들과 놀랍도록 똑같은 혐오와 증오의 메시지를 공공연히 발신하는 정치인 이준석과 과연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침내 이준석의 “여성의 성기에 젓가락을 꽂는다”는 발언이 공중파 방송을 타고 흘러나왔다.
당장 오늘부터 전국의 이대남들은 물론,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에게 ‘젓가락’을 들먹이며 성적 조롱과 혐오 발언을 경쟁적으로 쏟아낼 것이다. 입 밖에 내든, 뒤틀린 속으로 생각만 하든, 익명의 가면을 쓰고 SNS에 배설하든, 그 혐오와 조롱, 비하는 아이들의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깊숙이 각인될 것이다. 그렇게 오염된 영혼으로 자란 아이들이 결국 현재의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이대남이 되고, 미래의 잠재적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윤석열이 대통령 자리에 앉아 있는 동안 연설에서 ‘반국가세력’ ‘종북’ ‘빨갱이’를 언급하고 나면, 각종 포털과 소셜 미디어에서 언급량이 급격히 늘어났다. 그리고 그 혐오와 폭력의 언어는 온라인 세상을 넘어 우리의 일상을 침범해, 그동안 적어도 눈치라도 보며 속으로 그 말들을 삼키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이준석은 ‘여성’ ‘성기’ ‘젓가락’이라는 단어로 구성된, 얼마 전 ‘펨코’ 게시판에서 인기글이었다는 그 혐오의 문장을 기어코 우리 일상으로 가지고 들어왔다. 아이들이 소셜미디어와 게임 세상에서 익명 뒤에 숨어 똑같은 혐오 발언을 쏟아내며 “TV에서 어떤 대통령 후보가 그러던데?” 하면, 우리는 뭐라고 답할 수 있을까?
우리가 키운 악마, 우리가 맞이할 지옥
이준석은 제도화된 혐오 문화를 내세워 특정 집단의 공격성을 부추기는 ‘극우 포퓰리스트’이다. 이로 인해 혐오의 대상이 되는 집단은 사회에 대한 신뢰를 잃고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절망에 빠진다.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갈등의 피해와 비용에 대한 책임과 부담은 혐오 문화의 가해자와 피해자뿐 아니라 사회의 전 구성원에게 돌아간다.
그러므로, 이준석의 이 추악한 발언이 ‘여성 혐오’라는 틀 안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여성을 향한 폭력과 혐오로 교묘히 위장해 남성들을 더욱 자신의 편으로 결집시키려는 가장 저열하고 비열한 술수이자 기만이다. 예상대로, 이 발언에 대해 각종 여성 단체의 분노와 반발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이러한 격렬한 반응과 그로 인한 사회적 분열이야말로 이준석과 ‘펨코’라는 악의 무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바라는 것을. 그들은 이 갈등을 숙주 삼아 자신을 지지하는 2030 남성들을 더욱 광신적으로 결집시킬 것이고, 이미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깊어진 젠더 갈등의 골은 우리 사회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는 이준석 문제를 남성이든 여성이든 관계없이, 이것을 단지 ‘젠더 문제’나 ‘여성 혐오’라는 협소한 프레임으로 축소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물론 그 발언은 명백한 여성 혐오이자 인간에 대한 폭력이지만, 이준석의 진짜 의도는 그 너머에 있다. 전체 사회가 이 문제를 개인의 일탈이나 특정 성별에 대한 공격이 아닌, 공동체 전체를 파괴하려는 암적인 존재로 규정하고, 그를 정치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시켜야만 한다. 이것은 더 이상 사회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다.
이재명과 권영국, 상대 후보들이 대선 토론 당일, <뉴스타파>가 보도한 이준석의 명백하고도 추악한 성접대 리스트 증거와 의혹으로 그에게 똑같이 맞받아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그 토론을 어린 자녀들과 함께 지켜보는 국민들을 향한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이자 이준석이라는 인간에 대한 존중 때문이었다. 국민의 선택을 받으려는 대통령 후보로서 대한민국이라는 한 나라의 국격을 지키는 마지노선이었다. 그러나 이준석은 토론 상대와 유권자인 국민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예의, 그리고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마저 시궁창에 처박았다.
아무리 이준석이 노무현이나 이재명 같은 서민 출신 정치인을 이름으로도 안 부르고 자기들끼리 있는 자리에선 ‘XX 새끼, XX 새끼’ 한다는 국민의힘에서 정치를 시작했기 때문에 그가 평생 보고 배운 게 혐오와 비하, 조롱뿐이라 해도 이준석이라는 인간 자체의 본질적인 됨됨이가 바랐다면 아무리 나쁜 어른들이라도 그를 오염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괴물들이 모여 사는 지옥에서 키워진 또 다른 괴물일 뿐이다.
그가 토론을 마무리하며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토론과 합의로 정치가 바뀔 것이며, 자신이 대한민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달라고 고개를 조아렸을 때, 나는 소시오패스적 냉혈함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완벽한 무감각을 목도했다. 기본적인 인간성조차 없는 인간이 인간의 욕망과 이익을 협의하는 정치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 저급한 질문을 자신의 참모들과 오랜 시간을 투자해 함께 준비하며 키득거렸을 역겨운 모습, 그리고 토론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펨코’와 함께 스스로를 영웅시하며 만족감에 젖어있을 그 추악한 자화상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자존감이 있는 사람은 타인을 존중하지만, 뒤틀린 열등감과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자들은 타인의 피를 빨아 자신의 빈 껍데기를 채우려 발버둥 친다. 비열하고 추악한 어떤 짓이든 서슴지 않는다.
나는 이준석에게서 악마를 보았다. 10년 전부터 대한민국 사회가 길이길이, 그리고 정성스럽게 키워낸 악마를. 그리고 지금까지 이준석이 게워낸 독극물에 중독된 악마들이 계속해서 사회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어제의 그 ‘젓가락’ 발언을 들은 십 대 아이들이 10년 후에 어떤 끔찍한 괴물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게 될지, 감히 기대해 보라.
이것은 심각한 사회적 재앙이다. 지난 10년간 이준석이 어떤 인간인지 뻔히 알면서도 그에게 마이크를 쥐여주고 그가 대단한 인물인 양 신격화하며 키워준 썩어빠진 언론과 기득권, 그리고 하버드라는 학벌에 눈이 멀어 그의 모든 죄악을 칭송하며 자신의 자식 또한 어떻게든 서울대에 보내려 혈안이 된 위선적이고 기만적인 기성세대, 모두 그 죄과에 대해 역사의 심판대 앞에 무릎 꿇고 석고대죄해야 마땅하다.
지금은 어설픈 해결책을 논하거나 한가로운 대안을 제시할 때가 아니다. 우리가 지난 10년간 외면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했던 ‘청년 극우화’라는 망령, 아니 실존하는 악마에 대해, 이 사회 전체가 뼈에 사무치는 경각심을 가져야만 한다. 더 이상 외면할 시간도, 그럴 여유도 없다. 우리 모두, 이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악마의 연쇄를 끊어내지 못한다면, 우리가 발 딛고 설 이 땅은 폐허가 된 지옥, 그 자체가 될 것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용감하고 의로운, 이준석을 지지하지 않는 2030 청년들이 결국 이준석이라는 압도적 해로움을 몰아내고 스스로 정화할 거라 믿는다. ‘2030 청년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라는 이준석이 만든 프레임을 깨부수고 이준석과 ‘펨코’가 더럽힌 ‘청년 정치인’의 자리를 올바로 채울 거라 희망한다. 그게 바로 청춘이고, 젊음이기 때문이다. 단, 이준석과 ‘펨코’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해악성을 심각하게 인지하고, 2030 청년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건 우리들의 몫이자 책임이어야 한다.
‘펨코’에게도 말하고 싶다. 거기 춥다. 춥고 외로운 데서 그러고 있지 말고, 여기 따뜻한 데로 와라. 소외되고 억울하고 분노한 그 마음 충분히 알겠으니, 여기, 우리한테 와라. 아니, 우리에게 오지 않더라도, 당신에게 진정으로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이준석에게 상처받은 사람의 편에 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