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한 시민의 함성은 묻히고, 검붉은 낙인이 찍힌 혐오와 저주의 언어들이 시퍼런 칼날이 되어 허공을 가른다. 이성의 숨통을 끊어놓는 고함 소리는 마치 괴물의 포효처럼 도시 전체를 잠식하고, 법치주의의 상징인 법원은 성난 군중의 발길에 짓밟혔다. 야당 정치인을 향한 테러 시도와 살해 협박이 공공연한 뉴스가 되고,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시민을 향한 무차별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작금의 현실은, 참담하고 위태롭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덧 이에 무감각해지고 있다.
‘우월한 우리’라는 착각: 뒤틀린 자기애, 극단주의의 검은 심장
모든 균열의 시작점에는 종종 ‘나’ 혹은 ‘우리’만이 옳고 우월하다는 도착적인 자기 인식이 독버섯처럼 자리하고 있다. 건강한 ‘자존감’이 타인에 대한 존중과 따뜻한 공감을 동반하는 반면, 극단주의를 추동하는 ‘자기애’는 병적인 자기 집착과 함께 타자를 향한 배타성의 칼날을 벼린다. 그렇다. ‘자기애’는 칼과 같은 것이다. 자신을 지키는 방패가 되기도 하지만, 타인을 향하면 무서운 흉기가 된다. 그 칼날이 ‘우리’라는 이름으로 벼려질 때, 광기는 집단의 얼굴을 하고 거리를 활보한다.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맹목적인 공격성은 낮은 자존감이 아니라, 오히려 ‘위협받는 우월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통찰한다. 이는 특히 대한민국 일부 극단주의 세력의 행태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이나 가치관, 혹은 지지하는 정치 세력만이 ‘절대선(絕對善)’이라 강변하며, 이에 동조하지 않는 모든 존재를 ‘척결해야 할 악(惡)’으로 규정짓는다. 이러한 흑백논리의 감옥 속에서, 자신들의 허약한 우월감이 티끌만큼이라도 도전받는다고 느끼면, 마치 생존의 위협을 느낀 맹수처럼 극단적인 언어폭력과 물리적 공격성으로 발톱을 드러낸다. 실상 그들의 요란하고 과장된 위협과 공격성은, ‘겁먹은 개가 더 크게 짓는다’는 옛말처럼, 자신들의 입지가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깊은 불안감, 혹은 내면의 허약함을 감추기 위한 방어기제의 발로이다.
이러한 ‘자기애적 상처’와 ‘우월감에 대한 집착’이 우리 사회에 유독 깊게 뿌리내린 데에는, 역사적, 사회문화적 맥락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숨 가쁘게 달려온 압축 근대화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물질적 풍요라는 열매를 맛보았지만, 그 이면에는 무한 경쟁과 승자독식의 냉혹한 칼바람이 개인의 삶을 끊임없이 옥죄었다. IMF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파도는 사회 전체에 깊은 불안정성의 트라우마를 남겼고, 각자도생의 절박함 속에서 타인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권위주의 시대의 낡은 유산은 비판적 사고의 싹을 자르고 수평적 소통의 길을 막으며, 맹목적인 추종과 배타성을 강화하는 비옥한 토양을 제공했다. 이 척박한 땅 위에서, 개인들은 만성적인 불안과 정체성의 위기라는 폭풍우 속에서 쉽게 ‘위협받는 우월감’을 느끼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더욱 날카롭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됐다. 과거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칼을 뽑았던 귀족들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왜곡된 ‘정의’를 수호한다는 망상 아래 서슴없이 폭력의 칼춤을 춘다.
집단적 나르시시즘과 ‘희생양’ 찾기: 고립된 영혼들의 위험한 동맹
개인의 뒤틀린 자기애는 특정 이념이나 정치적 지향을 공유하는 집단 속에서 ‘집단적 나르시시즘’이라는 더욱 강력한 괴물로 변모하여 확산된다. ‘사회 정체성 이론’이 밝혀냈듯, 인간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려는 뿌리 깊은 동기를 지닌다. 한국 사회의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는 이러한 내집단 편애를 극단으로 몰아가며, 상대 집단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증폭시키는 용광로가 된 것이다.
특히, 차가운 현실로부터 소외감을 느끼거나 깊은 좌절감, 불안감에 휩싸인 평범한 개인들은 이러한 극단적 이념의 달콤한 속삭임에 쉽게 매료된다. 그들에게 극단주의 집단은 상처받은 자존감을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손길처럼, 복잡다단한 세상사에 대한 명쾌한 (그러나 위험하게 왜곡된) 해답을 제시하는 현자의 목소리처럼, 그리고 무엇보다 강력한 소속감과 정체성이라는 안락한 담요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달성에 실패하거나 사회적 고립감이 깊어질 때, 이들 집단은 그 책임을 특정 정치인, 언론, 혹은 반대편 지지자들에게 전가하며 이들을 ‘희생양’ 삼아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정치인을 향한 테러 위협이나 특정 집회를 향한 폭력 사태는, 이러한 병리적 집단 심리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 우리 사회의 안전망을 찢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집단의 익명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자신의 도덕적 책임감을 손쉽게 내던지고, 집단적 광기에 휩쓸려 더욱 극단적이고 파괴적인 행동을 감행하게 된다. 익명성에 기대어 가장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어지는 것이다.
‘정의’라는 가면 뒤의 폭력: 극단주의의 추악한 민낯과 뒤틀린 심리적 보상
극단주의 세력은 자신들의 날 선 공격성을 ‘정의 구현’이라는 그럴듯한 가면으로 포장하고, 특유의 선동적인 수사학과 과격한 행동 양식을 통해 세를 과시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장한다. 그러나 그 가면 뒤에는 단순히 굳건한 이념적 신념만이 아닌, 뒤틀린 심리적 보상 기제가 똬리를 틀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판과 온라인 공간을 뒤덮은 막말과 혐오 발언은 단순한 말실수가 아닌, 치밀하게 계산된 정치적 선동의 일환인 경우가 허다하다. 극단주의 지도자들과 그 추종자들은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언어를 통해 반대 세력을 비인간화‧악마화하고, 지지자들의 감정을 격앙시켜 맹목적인 지지를 유도한다. 이는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경고했던 권위주의적 성격, 즉 비판적 사고의 마비와 맹목적 복종을 조장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선동과 막말은 추종자들에게 일종의 심리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현실의 불만과 억눌렸던 분노를 특정 대상에게 투사하고 공격함으로써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좌파 빨갱이’, ‘반국가세력’, ‘페미 X’ 등과 같은 낙인찍기는 이성적 토론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동시에, 그 말을 내뱉고 동조하는 이들에게는 일종의 ‘정의 실현’에 동참한다는 착각과 함께, 적을 공유함으로써 형성되는 강렬한 집단적 유대감, 나아가 공격성을 통해 얻는 도착적인 쾌감마저 선사한다. 분노를 터뜨리는 순간, 그들의 동공은 미세하게 확장되고,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타인을 파괴함으로써 느끼는 그 짧고 강렬한 해방감, 그것은 금지된 열매를 베어 문 듯한 도착적인 쾌락과 다르지 않다. 이는 마치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검투사의 피를 보며 환호하던 군중 심리와도 맞닿아 있으며, 극단주의의 중독적인 속성을 더욱 강화할 뿐이다.
극단주의 세력의 자기애적 우월감은 종종 법과 질서에 대한 노골적인 무시와 도전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정의’를 외쳤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고, 입에서는 저주가 흘러나왔다. 정의는 명분일 뿐, 본질은 배설되지 못한 욕망이었다.” 헤밍웨이의 문장으로 그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할 수 있다. 극단주의 세력은 자신들의 주장만이 정의롭다는 확신에 사로잡혀, 사법부의 판단이나 민주적 절차를 부정하고 물리력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려 한다. 내란수괴 윤석열의 구속영장 심사 과정에서 서울서부지법 앞에서 벌어졌던 극우 세력의 폭력 시위와 법치주의 유린 행위는, 법원 앞에서 ‘법치 수호’를 외치며 경찰 버스 유리창을 깨부수는 블랙 코미디적 풍경을 연출하며 이러한 위험성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이들의 행동 저변에는 ‘우리 편은 항상 옳고 무죄여야 한다’는 맹목적 믿음과 함께, 기존 질서와 권위에 대한 반항 심리가 깔려있다. 법치를 조롱하고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들에게 자신들이 기존 시스템을 뒤흔들 수 있을 만큼 강력한 존재라는 자기 효능감을 심어주며, 집단적 힘을 과시함으로써 얻는 짜릿한 흥분과 만족감을 제공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위험천만한 착각에 빠져 있으며, 이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디지털 감옥과 광기의 확산: 온라인 극단주의의 그늘과 개인의 취약성
대한민국의 드높은 인터넷 보급률과 활발한 온라인 소통은 역설적이게도 극단주의 사상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재생산되는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그들은 자신만의 ‘비밀의 방’에 갇혀 산다. 그 방의 벽은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로만 도배되어 있고, 창문은 바깥세상을 향해 굳게 닫혀 있다. 그 방 안에서는 거짓도 진실이 되고, 혐오도 용기가 된다.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 등은 검증되지 않은 ‘가짜뉴스’와 특정 집단을 겨냥한 ‘음모론’이 무차별적으로 유포되는 온상이 된 지 오래이다. 이러한 정보들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필터 버블’과 ‘에코 챔버’ 내부에서 전염병처럼 확산되며, 사용자들의 기존 편견을 강화하고 현실 인식을 왜곡시킨다. 인지 부조화 이론이 설명하듯, 한번 잘못된 신념에 빠진 이들은 그에 반하는 객관적 증거 앞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수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맹신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느덧 스마트폰 액정 속 세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무게로 우리를 짓누른다. 그곳에서 떠도는 날 선 말들은 보이지 않는 파편이 되어 우리의 일상을 할퀴고,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그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다.
특히, 현실에서 소외감을 느끼거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개인들에게 온라인상의 극단적인 커뮤니티는 일종의 ‘심리적 안식처’를 제공한다. 그곳에서는 자신의 생각이 지지받고, 복잡한 세상사가 단순 명쾌한 음모론으로 설명되며, 공동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강한 소속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극단주의적 사고를 더욱 고착화하고 사회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된다.
온라인의 익명성은 현실에서는 감히 표출하지 못할 수준의 증오와 폭력성을 분출하는 배출구가 되고 있다. 익명이라는 가면 뒤에서, 그들은 가장 비겁한 방식으로 칼을 휘두른다. 특정 정치인, 언론인, 심지어 일반 시민을 향한 무차별적인 ‘좌표 찍기’와 ‘사이버 불링’은 이미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키보드 소리는 점점 커지고, 한 인간의 존엄성은 그렇게 맥없이 무너져 내린다. 책임감은 어디에도 없다. 죄책감도 없다. 오직 배설의 쾌감만이 남을 뿐이다. 이러한 온라인상의 폭력은 현실에서의 좌절감, 무력감, 분노 등을 손쉽게 배설하는 창구 역할을 하며, 단순한 ‘키보드 배틀’을 넘어, 현실 세계의 폭력과 테러 위협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을 안고 있으며, 실제로 그러한 사건들이 빈번하게 발생하며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위기의 민주주의, 성찰과 실천으로 열어야 하는 우리의 길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뒤틀린 자기애와 맹목적인 증오가 결합한 극단주의의 망령에 깊이 포위되어 있다. 법치주의는 조롱당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실종되었으며,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개심만이 우리 사회를 할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수사를 넘어, 우리 민주주의의 존립 기반을 위협하는 실존적 위기이다. 이 위험한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면, 어렵게 쌓아 올린 민주주의의 공든 탑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절박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
역사는 증언한다. 절망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서야 비로소 인간은 별을 본다고 말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이 암흑 또한 새로운 여명의 시작일 수 있다. 다만, 그 여명은 저절로 밝아오지 않는다.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그의 저서 <폭정(On Tyranny)>에서 파시즘과 권위주의가 민주주의를 잠식해 들어오는 과정을 경고하며, 시민들이 일상에서 민주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수호해야 함을 역설했다. 그의 경고는 오늘날 대한민국 현실에 울림을 주며, 단순히 개인의 윤리 의식에 호소하거나 특정 정치 세력의 변화만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접근임을 일깨운다. 현재의 위기는 보다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의 해법과 함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깊은 성찰과 용기 있는 실천을 요구한다.
첫째,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의 회복과 강화가 절실하다. 위르겐 하버마스가 강조했듯, 민주주의의 건강성은 공론장에서의 합리적 토론과 상호 이해를 통해 담론의 질을 높이는 데 달려있다. 무작위 추첨을 통한 시민의회를 구성하고, 전문가 지원을 강화하며, 숙의 결과의 정책 반영 노력을 의무화해 이를 실질화해야 한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도 강화해야 한다. 또한, 유아기부터 성인까지 전 생애에 걸쳐, 가짜뉴스 판별, 정보의 비판적 수용, 디지털 윤리, 다양한 관점 존중 등을 포함하는 체계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의무화하고 강화해야 한다. 핀란드의 다부처 협력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모델은 우리가 나아갈 길을 잘 보여준다.
둘째,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확충과 신뢰 회복이 시급하다. 로버트 퍼트넘이 <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에서 주장했듯, 공동체 내 신뢰와 호혜성의 규범, 그리고 시민적 네트워크를 건강한 사회의 혈맥처럼 여겨야 한다. 독일이 통일 이후 동서독 주민 간의 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서로를 알아가기(Kennenlernen)’ 프로젝트와 같은 다양한 시민 교류 프로그램을 운영했듯 우리 사회도 정치적 입장을 넘어선 다양한 배경의 시민들이 만나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플랫폼과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지역 도서관이나 주민센터를 중심으로 세대 간, 계층 간, 혹은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참여하는 독서 토론, 공동체 프로젝트, 봉사활동 등을 활성화하여, 혐오의 돌멩이를 걷어내고 연대의 씨앗을 뿌리는 실질적 노력을 해야 한다. 작은 일상에서부터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혐오와 배제가 아닌 연대와 환대의 문화를 만들어 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거창한 구호가 아닌, 이웃에게 먼저 건네는 따뜻한 인사, 공공장소에서의 배려, 온라인에서의 정중한 소통 등 작은 실천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는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셋째, 민주적 제도와 규범에 대한 확고한 수호 의지가 필요하다. 법치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폭력 행위, 정치인에 대한 테러 위협, 그리고 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 시도 등은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등장이 평범한 사람들의 무관심과 기존 규범의 붕괴에서 시작된다고 준엄하게 경고했다.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단호히 맞서야 하며, 선거관리위원회의 중립성과 공정성은 철저히 보장되어야 한다. 독립적인 헌법기관들이 제 역할을 수행하도록 시민들의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날카롭게 감시해야 한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이지만, 그것이 타인의 존엄성을 짓밟고 폭력을 선동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걸 분명히 해야 한다. 혐오 표현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높이고, 그 규제 범위와 방식에 대한 건강한 사회적 논의와 합의를 도출해 나가야 한다.
한국 사회는 그토록 우려했던 극단주의의 망령이 가장 참혹한 형태로 현실화된 결과를 12.3 내란 사태로 경험했다. 국가 권력의 정점에서 국민을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하고, 민주적 절차를 무시한 채 헌정 질서를 유린한 12.3 내란 사태의 사회적 상흔과 민주주의의 파괴의 직간접적인 국가적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다. 공포와 불신이 사회를 뒤덮고, 시민적 자유는 질식하며, 공동체는 깊은 트라우마와 분열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역사는 그러한 암흑기가 도래했을 때, 사회가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고 또 얼마나 처절한 대가를 치르는지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또한,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도 인간이 어떻게 불굴의 의지로 새로운 길을 모색해 왔는지, 어떻게 무너진 정의를 다시 세우고 상처를 치유해 왔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이러한 역사의 암흑기에 등장하는 새로운 리더십의 길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단순히 지도자가 바뀌는 것을 넘어,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만끽하는 동시에 표현의 자유를 책임 있게 사용하는 국민적 성숙함이 요구될 것이다. 무너진 민주적 가치와 제도를 복원하는 험난한 과정 속에서, 과거의 잘못을 철저히 규명하고 책임을 묻는 고통스러운 자기 성찰과, 상처 입은 공동체의 치유를 위한 사회적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이 나치즘을 철저히 반성하고 민주주의 교육을 강화했던 뼈아픈 교훈처럼, 진실을 직면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용기 없이는 진정한 사회 통합도, 미래로의 전진도 불가능하다.
물론, 이 과정에서 새로운 리더십은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국민적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게 된다. 하지만 정치적 양극화의 잔재, 산적한 사회경제적 난제들은 여전히 거대한 도전이 될 것이며, 이에 대한 해결 과정에서 또 다른 갈등과 실망이 야기될 수도 있다. 따라서 특정 지도자에게 모든 희망을 투사하는 대신, 우리가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바로 시민사회의 역할이다.
역사적으로 극단주의와 정치적 폭력에 휩쓸렸던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어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우리 역시 그를 경험했다. 각국의 역사적 맥락은 다르지만,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성찰과 실천적 노력이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우리 시민 각자의 가슴 깊은 성찰과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한다. 나는 얼마나 자주 ‘확증 편향’이라는 안락한 감옥에 갇혀 듣고 싶은 이야기만 골라 듣는가? 나의 무심한 언행이 혹시 타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거나 혐오를 확산시키는 데 알게 모르게 기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복잡한 문제 앞에서 너무 쉽게 단정하고 분노의 감정에 나를 내맡기고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자기 성찰은 때로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기 위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첫걸음이 된다.
결국,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극단주의의 광풍을 잠재우고, 최악의 상황을 경험했던 집단적 트라우마를 극복해 다시 일어서서 더 건강한 공동체를 재건하는 힘은 어느 특정 영웅이나 정치 세력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연대와 용기 있는 실천, 그리고 민주적 가치와 제도를 지키려는 끊임없는 노력에 달려있다.
상처 입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우리는 다시 광장에 설 것이다. 분노의 함성 대신 따뜻한 연대의 노래를 부르며, 절망의 잿더미 위에 희망의 꽃씨를 심을 것이다. 그 작은 몸짓들이 모여 거대한 숲을 이루는 날,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봄을 맞이하리라 믿는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파수꾼이 되어, 혐오와 분열을 넘어 상호 존중과 이성에 기반한 공동체를 재건하기 위한 지혜와 용기를 발휘해야 할 결정적 순간이다. 개인의 각성과 더불어, 사회 시스템 전반에 걸친 개혁과 실천이 동반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어둡고 혼란스러운 터널을 빠져나와 더 성숙한 민주주의의 햇살 아래 함께 설 수 있다.
길은 원래 없다. 다만 걸어가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라는 길 또한 그러하다. 우리가 걷지 않으면, 그 길은 사라진다. 우리 함께 걸어야 한다.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시대정신이자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