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6월 3일. 내일이면 대한민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하는 조기 대선의 날을 맞이한다. 이 짧은 밤이 지나면, 우리는 또 한 번 역사의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다. 지난 시간의 격랑이 채 가라앉지 않은 이 땅 위에, 기대와 불안이 교차하는 기묘한 정적이 흐른다.
불과 몇 달 전, 우리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헌법을 유린하고 국민의 신의를 저버린 죄로 파면당하는 초유의 사태를 목도했다. 2024년 12월 3일, 내란수괴 윤석열의 불법 비상계엄 선포와 친위 쿠데타 시도라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던 그 암흑의 시간은, 시민들의 거대한 함성과 헌법재판소의 준엄한 판결로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그 깊은 상흔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 이 새로운 선택의 의미를 더욱 무겁게 만들고 있다.
변절한 영웅들, 뒤틀린 자화상: 권력의 유혹과 자기기만의 서사
이번 조기 대선 국면에 내란당 국민의힘에서 등장한 예상치 못한 인물들은, 우리에게 ‘변절’과 ‘자기기만’이라는 화두를 던진다. 국민의힘 후보로 나선 김문수, 그리고 그의 배우자 설난영. 그들의 이름 앞에는 한때 ‘대한민국 노동 운동의 화신’, ‘세진전자 노조위원장’이라는 빛나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고, 심지어 조롱하며, 내란을 일으킨 대통령과 끝까지 절연하지 못한 채 부정선거 음모론을 부르짖는 기이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다.
설난영의 행보는 기괴하다. ‘대통령 후보 배우자’라는 공적인 타이틀을 달고 코미디 풍자 프로그램 <SNL>에 출연해 상대 후보 배우자를 공개적으로 조롱하는 전례 없는 모습을 보이더니, 노동절에는 “저 노조의 ‘노’자도 몰라요. 제가 노조하게 생겼습니까? … 노조는 아주 그냥 과격하고, 세고, 못생기고… 저는 반대되는 사람이거든요. 예쁘고, 문학적이고, 부드럽고”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녀의 프로필에 기재되었던 ‘성신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이라는 학력 정보는, 이후의 논란과 맞물려 또 다른 의혹의 씨앗을 뿌렸다. 한국노총은 “세진전자 노조위원장 설난영은 이제 없다”며 그 변절에 명확한 선을 그었지만, 정작 국민의힘과 대한민국 대부분의 언론은 이 명백한 여성 비하, 노동 비하 발언에 대해 약속이나 한 듯 침묵했다.
선택적 침묵, 선택적 분노: 정의는 어떻게 왜곡되는가
‘선택적 침묵’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병리 현상 중 하나이다. 마땅히 터져 나와야 할 비판의 목소리가 특정 세력의 이해관계나 진영 논리 앞에서 힘없이 잦아들 때, 사회는 자정 능력을 상실하고 서서히 병들어 간다.
이러한 침묵의 카르텔은, 작가 유시민이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 출연해 설난영의 여성/노조 비하 발언 배경을 분석했을 때 더욱 극명하게 그 실체를 드러냈다. 유시민은 설난영이 “노동자로서 대학생 출신 노동자, ‘학출’과 혼인한 거다 … 그런 남자와의 혼인을 통해서 자신이 조금 더 고양됐다고 느낄 수 있다”며, “유력한 정당의 대통령 후보 배우자라는 자리가 설 씨의 인생에서는 갈 수가 없는 자리다. 영부인이 될 수도 있는 거다 … 그러니까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그런 뜻”이라고 해석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설난영의 원 발언에는 침묵하던 내란당 국민의힘과 대부분의 언론이, 바로 다음 날부터 일제히 유시민을 ‘계급주의자’, ‘학벌주의자’, ‘여성 비하’, ‘노동 비하’라며 맹공을 퍼부은 것이다. 유시민이 서울대 출신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여기에 ‘계급주의자’라는 프레임을 씌우지 않았을 것이다. 상고 출신 ‘고졸’ 노무현을 지지했던 맨 첫 줄에 섰던 유시민을 ‘학벌주의자’로 매도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여성 비하’, ‘노동 비하’라는 주장 역시 이 발언의 배경과 맥락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면 허무한 주장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진보’를 표방하는 일부 정당과 여성단체마저 이 대열에 합류하여 그를 비판하는 성명을 냈다. 장제원 의원의 10년 묵은 성폭행 의혹이 다시 불거졌을 때나, 설난영의 명백한 비하 발언에는 한마디 없던 이들이, 유독 유시민의 발언에 대해서만 이토록 선택적으로 분노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의 공론장이 얼마나 뒤틀려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잊혀진 과거, 은폐된 진실: 동지에서 괴물로, 그 비극의 연대기
유시민은 비판받아야 할 언행이 있다면 마땅히 비판받아야 할 비평가이자 ‘퍼블릭 스피커’이다. 그러나 그의 발언에 대한 비판이 과연 정당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는가? 지성과 논리로 책임 있는 보도를 해야 하는 대한민국 언론과 언론인들은 과연 유시민의 발언을 색안경 없이 보고 들었는가?
1985년, 전두환 군부 독재 시절,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사건으로 김문수가 보안사 분실로 소리소문 없이 끌려갔을 때, 철문 밖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문을 두드렸던 사람이 바로 유시민이었다. 그들은 단순한 지인이 아니라 ‘생사를 같이한 동지’였고, 유시민은 설난영과 함께 김문수의 구명 운동을 벌였다. 유시민, 그에게는 김문수, 설난영 부부의 개인사를 논평할 만한 경험과 자격, 그리고 정보가 충분히 있다.
김문수가 1994년 신한국당에 입당하며 노동운동의 길에서 돌아선 것은, 많은 이들에게 ‘배신’과 ‘변절’로 기억된다.
유시민의 발언은, 1970-80년대 ‘학출’과 노동자 간 결혼이 유행했던 시대적 배경과, 그 관계가 실제 어떠했는지에 대한 내재적 감상이자 해설이었다. 노동운동가 한명희는 과거 설난영이 김문수와 결혼 후, 친한 친구인 자신을 본척만척하며 <동아일보> 사설을 탐독하고 일본어까지 공부해야 한다며 부산을 떨던 모습, 그리고 김문수가 쪽방에서 설난영이 가져다준 밥을 먹으면서도 그녀를 무시하자 “야! 노동자 출신하고 결혼했으면 있는 그 자체로 존중해야지, 이게 뭐 하는 짓이냐!”라고 질책했던 일화를 생생히 증언했다.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이총각 역시, 설난영이 김문수로부터 “네가 인물이 잘났냐, 학벌이 있냐, 키가 크냐, 집안이 좋으냐”는 인격적 모욕을 당했다며 ‘학출’과의 결혼을 후회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이러한 증언들은, 설난영의 현재 모습 이면에 어떤 상처와 억압, 그리고 뒤틀린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유시민의 발언이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한때 동지였던 이들의 처참한 변화에 대한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증언들은 단순히 과거의 가십이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시대와 관계 속에서 뒤틀리고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씁쓸한 기록이다. 노동운동의 화신이었던 이들이 어떻게 권력과 인정욕구 앞에서 과거의 자신을 배반하고, 심지어 한때 동지였던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존재로 변모해 가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병든 사회의 진단서: 교묘한 프레임, 선택된 의제의 그림자
우리가 목도하는 이 모든 현상, 특히 진실이 교묘하게 편집되고 여론이 특정 방향으로 몰리는 작금의 사태는, 사회과학의 예리한 렌즈, 그중에서도 ‘의제 설정 이론’과 ‘프레이밍 이론’을 통해 그 섬뜩한 민낯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의제 설정 이론은 언론과 특정 세력이 대중에게 ‘무엇에 대해 생각할 것인가’를 결정짓는 막강한 힘을 설명한다. 어떤 이슈는 연일 대서특필하며 사회 전체의 관심사로 떠오르게 만들고, 또 어떤 이슈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축소함으로써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설난영의 명백한 노동 비하, 여성 비하 발언은 이미 휘발됐다. 그 발언이 담고 있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의식은 ‘주요 의제’로 설정되지 못한 채 일부의 지적으로만 머물렀고, 그 결과 대중은 그 문제의 본질과 파장을 제대로 인지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의제 설정의 권력을 쥔 자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감추고 싶은 것은 철저히 외면함으로써, 결국 기울어진 정보 환경 속에서 대중의 판단을 왜곡시킨다.
또한, 특정 의제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프레이밍 이론이다. 프레임은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 특정 사건이나 인물, 이슈에 대한 해석의 틀을 제공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유시민의 발언을 둘러싼 논란은 이 프레이밍 전략의 교과서적인 사례이다. 그의 발언이 담고 있던, 한때 동지였던 이들의 변절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들의 심리적 배경에 대한 분석이라는 복잡한 맥락은 철저히 제거되었다. 대신, ‘여성 비하’, ‘학벌주의자’, ‘계급주의자’라는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프레임이 씌워져 집중포화를 맞았다. 이 강력한 프레임은 반복적으로 노출됨으로써 대중의 뇌리에 각인되었고, 그 결과 유시민 개인에 대한 비난을 넘어 그가 상징하는 ‘비판적 지성’ 전체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조장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더욱 통탄할 일은, 진보를 표방하는 일부 세력마저 이 교묘한 프레임에 편승하거나 침묵으로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이처럼 ‘의제 설정’이 우리에게 ‘어떤 그림을 볼 것인가’를 선택하게 한다면, ‘프레이밍’은 그 그림에 ‘어떤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인가’를 강요한다. 특정 이슈(유시민의 발언)는 중요 의제로 부각되어 집중 조명되는 동시에 치명적인 프레임이 덧씌워져 그 파괴력이 극대화된다. 반면, 자신들에게 불리한 이슈(설난영 발언)는 의제에서 배제되거나, 혹은 ‘실수’, ‘개인의 사생활’과 같은 다른 프레임으로 덮어씌워 그 본질을 희석하려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물어야 한다. 이 거대한 의제 설정과 프레임의 설계자들은 누구이며,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이러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공론장이 오염될 때,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어떻게 질식해 가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현란한 프레임의 홍수 속에서 시민들은 어떻게 비판적 사고의 끈을 놓지 않고 진실의 편에 설 수 있을 것인가?
새벽을 기다리며
기득권 세력과 그들을 추종하는 언론은 늘 그래왔듯 진실을 가리고 여론을 호도한다. 그들이 유시민이라는 한 명의 비평가를 공격하는 이유는, 그의 목소리가 그들의 거짓된 성벽을 흔드는 작은 균열이 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유시민은 정치인도 아니고, 민주당원도 아니다. 그는 시민과 사회가 부여한 신뢰와 권위가 있는 자유로운 비평가이자 이 사회 공동체를 구성하는 시민 중 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유시민은 자신의 발언에 관한 논란이 일파만파 커지자 책임을 지고 정중히 사과했다. 그러나 의도된 프레이밍에 맞춰 맥락을 제거하고 의도를 왜곡한 부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명확히 짚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6월 3일 조기 대선, 이재명 후보에 누가 될까봐, "내가 이렇게 비난 받는 건 이재명이 지난 시간 받아온 오해와 왜곡에 비하면 10분의 1에도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사과하는 태도 또한 진중하고 사려 깊었다.
나는 유시민이 그래서 좋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고 숱하게 말해왔다. 그리고 뜨겁게 독재에 맞서고, 어리석게 기득권 정치을 상대로 수십 년간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다 일선에서 물러나 이제 자신을 '지식 소매상'이라 소개한다. 그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사람이 비난을 두려워하면 기회주의자로 변한다.
유시민은 대한민국이 지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깨어나는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히고 저항하며 살아낸 사람이다. 그는 이 사회가 어두워지고 사람들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릴 때마다 비겁하게 숨지 않았고, 도망치지 않았고, 자신의 지성과 기세와 용기로 우리 사회를 나아지게 만드는 데 분명 역할을 했다. 그에겐 한국 사회의 시대정신과 현상을 비평할 분명한 지분이 있다. 유시민을 난도질하는 내란 세력과 언론들이여, 당신들은 그처럼 치열하고 뜨거웠던 적이 생에 단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민주공화국'이라 믿었던 대한민국의 행정부와 사법부, 군대, 경찰, 검찰, 국민의힘, 언론이 똘똘 뭉쳐 국민이 맡긴 권력으로 미친 짓을 내란수괴 하나를 어쩌지 못해, 심지어 그의 방패가 되어 체포도, 구속도, 재판도 제대로 못하는 걸 먹먹한 가슴으로 지켜봐야만 했던, 할 수 있는 거라곤 오직 자신이 아끼는 소중한 응원봉 빛을 들고 나와 꽁꽁 언 아스팔트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것이 전부였던, 국가에 철저히 배신당하고 버림 받고 상처 받은 가엾은 시민을 지난 6개월 간 진심으로 위로한 건 유시민뿐이었다.
유시민은 기울어진 운동장의 무분별한 비난이든 정당한 비판이든 따지지 않고, 지적을 받으면 받아들일 줄 알고, 사과할 줄도 안다.
내란을 일으키고도 반년이 넘도록 제대로된 사과 한 마디 없는 내란수괴 윤석열과 내란당 국민의힘이 대선 후보를 내고 선거운동을 하며 이재명 후보에게 되레 '독재'와 '보복'을 할 거라 외치고 있는 상황에서 내란 세력과 유시민의 발언을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며 '기계적 중립'을 운운하는 레거시 미디어는 제발 부끄러운 줄 알라. 이미 스스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세상이 돌아가는 감각마저 잃은지 오래지만.
레거시 미디어는 더이상 이슈 선점이나 논조의 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시대가 바뀌었다. 대한민국 실시간 시청자수 1위부터 5위가 모두 진보 진영의 유튜브 채널이다. 안타깝지만 세상 사람들 모두 아는데, 그들만 모른다. 제 머리만 땅에 박고는 자기가 안 보이는 줄 알고 우스꽝스럽게 굴고 있다. 이준석의 성접대 녹취 풀버전을 아무리 레거시 미디어가 외면해도, 아무리 유시민의 발언으로 물타기를 시도해도 시민은 이미 다 알고 있다.
12.3 내란 이후 6개월 간 유시민은 우리 사회 공동체를 위해 끊임없이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숱한 말을 쏟아내다 보면 한두문장의 비문이나 감정의 공백이 생길 수 있다. 거기에 따른 사람들의 왜곡과 억측과 오해에도 불구하고 유시민은 자신에게 그럴 의무가 없음에도 만신창이가 된 우리 사회를 위해, 상처받은 민주 시민들을 위해 이 시대 지성인의 마땅한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 있다.
검찰 개혁을 하려는 조국의 가족이 도륙당했을 때 나는 저 악랄한 기득권 카르텔을 상대하려면, 저들의 더럽고 저열한 플레이에서 살아남으려면 말 그대로 '털어서 단 한 톨의 먼지도 나오지 않는 사람'만이 개혁을 할 수 있다고 절망에 빠져 허무한 말만 내뱉었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신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진보 진영에만 신에 가까운 도덕적 기준을 들이대는 사회와 언론과 심지어 같은 편이라는 진보 진영의 일부 세력이 그토록 가식적이고 안타까울 수 없었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중심을 잡고 서야 할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것이다. 과거의 아픔과 교훈을, 변절한 이들의 어제와 오늘을, 그리고 침묵의 대가로 우리가 무엇을 잃었는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질문’ 해야 한다. 왜 그들은 침묵하는가? 왜 그들은 선택적으로 분노하는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내일, 우리가 던질 한 표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한 명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행위를 넘어, 우리가 어떤 가치를 지키고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엄숙한 선언이기 때문이다. 부디 이 밤이 지나 새벽이 올 때,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길을 밝히는 작은 등불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등불들이 모여, 절망의 시대를 넘어 진실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시민 작가의 발언이 논란이 된 직후 설난영 씨의 프로필에서 ‘대학 졸업’이라는 학력이 갑자기 사라지고 ‘고졸’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이다. 마치 그의 분석을 스스로 입증이라도 하듯 말이다. 이는 그녀가 어쩌면 스스로도 자존감의 심각한 부재를 느끼고 있으며, 한 인간으로서, 한 여성으로서 건강한 자의식마저 결여된 것은 아닌지 깊은 의문을 자아낸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가 이미 지긋지긋하게 경험했던 또 다른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성형 논란과 온갖 의혹 속에서도 권력의 정점을 탐닉했던, 헌법 위반 내란으로 파면된 대통령 윤석열의 아내였던 김건희의 모습과 말이다. 내면의 공허함을 외부적인 치장이나 타인을 통한 권력 추구로 채우려 했던 그 과거의 모습과,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설난영의 행보 사이에서 섬뜩한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과연 지나친 확대 해석일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