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포털 사이트나 유튜브 검색창에 ‘대치동’이라는 세 글자를 입력해 보자. 화면 가득 펼쳐지는 것은 화려한 성공 신화와 그것을 향한 열망,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깊은 그림자다.
한쪽에서는 ‘대치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이 자녀를 서울대에 보내는 비법을 열정적으로 전수하고, 코미디언 이수지가 이를 절묘하게 패러디한 영상은 연일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며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증명한다. 마치 대치동은 대한민국 성공의 압축판이자, 욕망의 용광로처럼 보인다. <SKY 캐슬>은 드라마가 아닌 현실이며, 그곳에서는 오늘도 치열한 입시 전쟁이 현재진행형임을 웅변하는 듯하다.
그러나 스크롤을 조금만 더 내려보면, 혹은 연관 검색어의 다른 한 축을 클릭해 보면, 우리는 전혀 다른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얼굴과 이름을 철저히 가린 채, 자신을 ‘대치동 키드’라고 밝히는 수많은 젊음이 렌즈 앞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털어놓는 이야기들.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명문대 합격의 환희가 아니라, 오랜 시간 짓눌려온 우울증과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공황장애,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경쟁의 상흔이다.
마치 화려한 무대 뒤 분장실의 지워지지 않은 눈물 자국처럼, 성공이라는 이름표 뒤에 가려진 그들의 창백한 얼굴은, 우리에게 묻는다. 무엇이 진짜 성공이며, 이 질주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과연 이 시스템은 누구를 위한 축제인가, 아니면 누군가의 무덤인가?
이러한 양극단의 풍경은 단순한 흥미로운 현상을 넘어, 우리 사회 학벌주의가 만들어 낸 기형적인 자화상의 단면이다.
학벌이라는 이름의 괴물: 시스템의 붕괴와 양심의 마비
대한민국에서 학벌은 단순한 교육 수준을 넘어 개인의 능력과 미래, 심지어 인격까지 재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 군림해 왔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이와 고향 다음으로 출신 학교를 묻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사회. 그러나 필자가 해외에서 보낸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의 현실이 얼마나 기형적인지를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이처럼 학벌이 개인의 모든 것을 규정짓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그 정점에 있는 소위 ‘엘리트’들은 종종 그 학벌이라는 이름 아래 더 큰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거나, 심지어 시스템 자체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왜곡하는 추악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이 쌓아 올린 지성의 탑이, 때로는 양심의 무덤이 되는 아이러니다.
이러한 학벌 카르텔의 정점에 있는 인물로 12.3 내란을 일으킨 내란수괴로 지목되는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있다. 윤석열은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서 오랜 기간 법조 카르텔의 핵심부에 자리하며 그 폐쇄성과 특권 의식을 체화해 온 인물이다. 그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는 동안 국민에게 보여준 모습은, 학벌이라는 배경이 개인의 도덕성이나 공감 능력, 나아가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적 능력과는 얼마나 무관할 수 있는지, 아니 오히려 그것들을 어떻게 심각하게 결여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회자된다.
대다수 국민이 그의 도덕적 흠결과 소통 능력 부재, 그리고 국정 운영 능력 전반에 대해 ‘형편없다’는 비판을 제기하는 현실은, 학벌 지상주의가 만들어 낸 ‘껍데기뿐인 엘리트’의 전형이자, 그 엘리트가 국가 시스템을 장악했을 때 어떤 비극이 초래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지표로 읽힌다.
최고 학부를 나오고 국가의 중책을 맡았던 한덕수 전 총리가 자신이 연루된 중대한 혐의(내란 동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듯 국가 권력을 동원하는 듯한 행태나, 그와 함께 거론되는 최상목 경제부총리, 그리고 최근 사법부의 정치 개입 논란에서 드러나듯 대법관 중 단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서울대 법대 출신이라는 사실 등은 우리 사회 최상층부를 장악한 학벌 카르텔의 견고한 성채를 보여준다.
이들은 학연으로 얽혀 서로를 비호하고, 국가 시스템마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동원하는 듯한 행태를 보인다. 국민을 위한 봉사라는 공직의 근본 가치는 실종되고,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법치와 공정은 무력화된다.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헌신이 아니라, 그들만의 리그를 지키려는 동류의식은 아닌지 의심하게 만든다.
학벌이 인격이나 공감 능력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과학고와 하버드대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정치 생활 내내 이용해 온 정치인 이준석의 사례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가 3차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보인,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비유로 인간의 존엄성을 난도질한 패륜적 망언은, 그가 내세웠던 ‘새로운 청년 정치’, ‘구태 타파’라는 이미지와의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학벌 엘리트의 위선과 이중성을 폭로한다.
이준석은 여전히 학벌을 정치적 자산으로 내세우지만, 그의 언행에서 드러나는 것은 구태 정치를 답습하는 모습과 국민 일반의 정서와는 동떨어진 듯한 ‘공감 능력의 현저한 결여’이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성향을 넘어, 경쟁과 성취만을 강조하는 엘리트 교육이 만들어 낸 ‘정서적 괴리’는 아닌지, 그리고 이러한 유형의 리더십이 사회에 어떤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지 심각하게 성찰해야 할 지점이다. 그의 모습은 마치 잘 만들어진 로봇처럼 지능은 뛰어나지만, 인간적인 따뜻함이나 윤리적 고민은 결여된,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의심케 하는 위험한 단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엘리트들의 실망스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카르텔 입성 경쟁에 내몰리는 것과 같다. 고학력자로 이너서클에 진입하지 못하면 낙오자처럼 취급하는 사회 분위기, 단 한 번의 실패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숨 막히는 압박감은 부모와 아이들 모두를 극한으로 내몬다.
그리고 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교육 과정은 어떠한가? 달달 외워서 시험만 잘 보고, 소위 ‘고시’에 패스하면 그 사람의 공감 능력이나 도덕적 잣대, 인문학적 소양 등은 전혀 검증되지 못한 채 사회 기득권층, 고위 관료로 쉽게 올라서는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이것이 바로 윌리엄 데레저위츠의 저서 <공부의 배신: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에서 지적한 ‘껍데기만 남은 엘리트’, 혹은 ‘양심이 마비된 괴물’을 시스템적으로 길러내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호소하는 다음 세대에게 전가되며, 이들은 또다시 이 비정한 시스템의 부품이 되거나 혹은 낙오자로 스러져간다. 성공이라는 이름 아래 자행되는 아동 학대의 또 다른 형태는 아닌지, 그리고 그들이 짊어져야 할 마음의 짐은 과연 누가 책임질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결국, 학벌이라는 이름의 괴물은 개인의 양심을 마비시키고, 사회 시스템을 왜곡하며, 나아가 민주주의의 근간마저 뒤흔드는 심각한 병폐로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성의 배신은 과연 우리 시대만의 문제일까? 아니면 역사는 이러한 비극을 끊임없이 반복해 왔던 것일까.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우리는 이제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 지성의 배신이 남긴 역사의 상흔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성의 배신,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 권력의 유혹과 지식인의 책무
우리가 이미 살펴본 학벌 괴물의 섬뜩한 모습은, 비단 오늘날 우리 사회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지성은 끊임없이 권력의 유혹과 시험에 직면해 왔으며, 그 결과 수많은 ‘지성의 배신’ 사례를 남겼다. 이러한 과거의 과오를 되짚어보는 것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의 비극을 막기 위한 처절한 자기 성찰의 과정이다.
먼저 우리 역사 속에서 그 어두운 그림자를 추적해 본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백성의 고통보다는 공허한 명분론과 당파적 이익에 눈이 멀어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익을 그르치기 일쑤였다. 지식이 현실과 괴리될 때 얼마나 공허해지는지, 지식인 집단이 파벌을 형성하여 국가 전체의 이익을 어떻게 저해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의 혼을 팔아 개인의 영달을 꾀했던 변절한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내세운 자기 합리화의 논리는 지식이 어떻게 생존의 도구를 넘어 민족 배반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대가가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증언한다.
가장 가까운 과거인 군부독재 시절에는 또 어떠했는가. 수많은 어용학자와 언론인들이 권력에 아부하며 진실을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데 앞장섰다. 이는 앞서 지적한 ‘내란 세력’이나 ‘권력에 기생하는 엘리트’들의 역사적 원형이라 할 수 있으며, <공부의 배신: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에서 비판하는 ‘비판적 사고를 상실한 지식인’의 전형이다.
특히, 해방 이후 현대사에서 ‘서울대 법대 카르텔’과 같은 폐쇄적인 엘리트 집단이 어떤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과거 권위주의 정권과 유착하며 현재의 기득권을 구축해 왔는지 그 뿌리를 추적하는 것은, 데레저위츠가 지적한 ‘엘리트 대학의 자기 복제 시스템’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해 왔는지 이해하는 핵심 열쇠이다.
시야를 세계로 넓히면, 지성의 배신은 더욱 참혹한 모습으로 반복된다. 나치 정권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나 법학자 칼 슈미트의 사례는, 고도로 발달한 지성조차 어떻게 야만적인 이데올로기에 굴복하고 반인륜적 범죄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끔찍한 예시다.
이는 데레저위츠가 경고한 ‘인문학적 성찰이 결여된 지식’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웅변한다.또한 스탈린 치하에서 과학적 진실을 왜곡하며 수많은 이들을 고통으로 내몰았던 유전학자 트로핌 리센코의 망령은, 이념이 과학과 학문의 자율성을 어떻게 짓밟고 파괴하며, 권력과 결탁한 사이비 과학이 사회에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생생하게 증언한다. 프랑스혁명 이후의 공포정치나 20세기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벌어진 지식인 숙청과 세뇌의 역사는, 시대의 광풍 앞에서 지식인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 그러나 동시에 진실을 향한 저항과 증언이 얼마나 숭고한 가치를 지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처럼 국내외 역사를 통해 우리는 지식인이 타락하는 다양한 양상과 그 근본적인 원인들 – 개인의 탐욕, 이념적 맹신, 권력에의 의지, 시대적 압력, 도덕적 용기의 부재 등 – 을 확인할 수 있다.
타락의 씨앗은 개인의 내면과 그를 둘러싼 사회 구조 모두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무엇보다 인간 본연의 ‘탐욕과 야망’이 지식인을 시험에 들게 한다. 물질적 풍요, 권력에의 의지, 세속적 명예욕 앞에서 지식과 양심은 너무나 쉽게 거래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불의에 맞설 ‘도덕적 용기의 부재’와 ‘안락함을 추구하는 나약함’이 더해질 때, 지식인은 기꺼이 권력의 시녀가 되기를 자처한다. 또한, 자신의 지적 능력을 과신하는 ‘지적 오만과 선민의식’은 대중과의 괴리를 심화시키고 비판적 성찰을 가로막아 스스로 고립된 괴물이 되게 한다.
사회 및 구조적 차원에서는, ‘특정 이념에 대한 맹신과 편향’이 지성의 눈을 멀게 한다. ‘시대적 압력과 전체주의 체제의 폭압’ 역시 지식인의 자유로운 사유를 억누르고 생존을 위한 굴종을 강요한다. 더불어, <공부의 배신: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에서 데레저위츠가 통렬히 비판한 ‘비판적 사고와 윤리 교육이 부재한 교육 시스템’과 ‘학문 공동체의 폐쇄성 및 카르텔화’는 지식인이 사회적 책임을 망각하고 기득권 유지에만 급급하게 만드는 구조적 원인이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타락의 역사를 반면교사 삼아 ‘배운 자의 진정한 책무’는 무엇인지 숙고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에 대한 고민이다. 권력에 아부하거나 진실을 왜곡하지 않는 소극적 의무는 기본이다.
더 나아가, 진정한 지식인은 첫째, 객관적 사실에 기반한 ‘진실을 탐구하고 용기 있게 전달’할 책무가 있다. 둘째, 사회와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적 지성’을 견지해야 한다. 데레저위츠가 강조했듯, ‘생각하는 힘’이야말로 지식인을 지식인답게 만드는 핵심이다. 셋째, 자신의 지식과 영향력을 ‘사회적 약자를 옹호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넷째, 인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과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고 실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책무의 근간에는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인문학적 성찰과 높은 윤리적 자세’가 자리해야 한다. 과거의 어둠 속에서 길어 올린 성찰이야말로,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 우리는 ‘학벌’이라는 이름의 괴물이 어떻게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엘리트의 양심을 마비시키며, 나아가 민주주의의 근간마저 뒤흔드는지 처절하게 목도했다. 또한, 지성의 배신이라는 인류 역사의 오랜 비극이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음을 확인하며, 진정한 지식인의 책무가 무엇인지 고뇌했다.
그렇다면 이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이 모든 문제의 뿌리에는 잘못된 교육이 자리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공부의 배신: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가 통렬하게 지적하듯, 단순한 스펙 쌓기와 경쟁에서의 승리만을 강요하는 교육은 ‘영혼 없는 똑똑한 양떼’를 길러낼 뿐이다.
따라서 교육개혁은 모든 변화의 출발점이다. 단순히 입시 과목을 바꾸거나 시험 방식을 개선하는 차원을 넘어, 교육의 패러다임 자체를 전환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학생들의 행복 지수와 학업 성취도 모두에서 세계 최상위권을 유지하는 핀란드는 경쟁을 최소화하고 학생 개개인의 속도에 맞춘 학습, 놀이와 휴식의 가치를 존중하며 전인적인 성장을 돕는다.
다문화 사회인 캐나다의 교육은 비판적 사고력과 의사소통 능력을 강조하며, 학생들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협력하는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이끈다.
나아가 독일은 지식 습득을 넘어 개인의 전인적 인격 형성을 중시하는 ‘빌둥(Bildung)’이라는 깊은 교육 철학의 전통 위에서, 대학 진학을 위한 인문 교육과 함께 이론과 실습을 겸비하여 사회적으로 높은 인정을 받는 장인을 길러내는 ‘아우스빌둥(Ausbildung)’이라는 강력한 직업 교육 시스템을 병행한다.
프랑스 역시 고등학교 과정에서부터 모든 학생이 철학을 배우고, 바칼로레아에서 복잡한 철학적 질문에 대한 논리적이고 비판적인 글쓰기를 요구함으로써, 스스로 사유하고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며 세상과 소통하는 시민을 길러내는 데 중점을 둔다. 특히 프랑스 교육에서 강조되는 토론 문화는 이러한 철학 교육의 연장선상에 있다. 어릴 때부터 정치, 사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토론의 기본 원칙, 즉 상대방의 의견이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며, 토론의 상대를 인간적으로 존중하는 태도를 배우는 것이다. 무엇보다 토론은 누가 이기고 지는 승패의 경쟁이 아니라, 서로 다른 생각의 차이를 발견하고 이해하며 함께 더 나은 결론을 모색해 가는 과정임을 체득하게 한다.
이러한 국가들처럼, 우리도 입시 경쟁이라는 단일 목표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스스로 질문하고 탐구하며, 인문학적 성찰을 통해 세상과 자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갖도록 돕는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길을 모색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고, 협력과 공감의 가치를 가르치는 교육 철학의 정립이 시급하다. 이것이 바로 <공부의 배신: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에서 데레저위츠가 말하는, 진정으로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고 ‘의미 있는 삶’을 살도록 이끄는 교육의 본질일 것이다.
그러나 교육 시스템의 변화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와 함께 성공에 대한 획일적인 가치관을 강요하는 사회 분위기 자체를 쇄신해야 한다. 명문대 졸업장과 고액 연봉, 권력의 정점에 서는 것만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가 되는 사회에서는 결코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다양성이 꽃필 수 없다. 각자의 개성과 잠재력을 존중하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인정하며, 실패로부터 배우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격려하는 포용적인 사회문화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는 곧 <공부의 배신: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이 말하는 ‘의미 있는 삶’을 각자가 찾아 나설 수 있도록 지지하는 공동체의 역할이기도 하며, 물질적 성공을 넘어 정신적 풍요와 사회적 기여를 중시하는 가치관의 전환을 의미한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교육개혁과 사회 분위기 쇄신을 이끌어 내는 힘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각성과 적극적인 연대에서 나온다. 학벌 카르텔과 부패한 엘리트들이 만들어 내는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끊임없는 감시와 비판, 그리고 적극적인 사회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민주주의의 주인은 결국 시민이며, 시민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며 부조리에 맞서 싸울 때만이 ‘지성의 배신’은 설 자리를 잃고 ‘학벌 괴물’은 힘을 잃게 될 것이다. 내 손으로 직접 우리 사회의 미래를 만들어 가겠다는 주체적인 각성이야말로 모든 변화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며, 이는 때로는 불복종과 저항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오랜 시간 굳어진 시스템과 의식을 바꾸는 데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작은 목소리들이 모여 거대한 함성이 될 때, 우리는 분명 더 정의롭고 인간적인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학벌이라는 허울 좋은 ‘가면’ 뒤에 숨겨진 진실을 직시하고, 진정한 배움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 아이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한 오늘의 치열한 고민과 실천이야말로, 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갈 유일한 빛이 될 것이다. 과거의 실패를 복기하고 현재의 부조리에 저항하며 미래의 희망을 함께 벼려낼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지긋지긋한 악순환의 고리를 우리 세대의 손으로 끊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