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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키드’가 ‘박근혜 키드’를 막았다

대한민국 4050 세대, 우리가 진보인 이유.

by 조하나



나는 ‘MZ세대’이면서 동시에 ‘MZ’가 아니다. 사회과학의 잣대로 나이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면 MZ의 끝자락, 그 턱걸이에 겨우 걸쳐지지만, 솔직히 말해 그 너른 그물에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 굳이 학술적인 언어로 나를 규정해야 한다면, 나는 ‘MZ’의 ‘M’, 즉 ‘밀레니얼 세대’다. 2000년, 세기말의 불안과 새천년의 희망이 교차하던 그해 대학 새내기가 되었고, 한국 사회는 우리를 ‘밀레니얼 세대’라 부르며 엄청난 기대와 희망을 한 어깨에 지웠다.


나는 전두환의 군사독재 시절에 태어나 노태우 정권 아래에서 ‘국민학교’라는 이름의 교문을 드나들었다. 1987년, TV 속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을 보며 다섯 살짜리 꼬맹이는 “아빠, 제일 잘생긴 아저씨가 대통령 됐어!”라고 천진하게 외쳤다. 그때 아빠가 왜 그토록 씁쓸한 미소를 지었는지, 그 미소의 행간에 어떤 깊은 절망과 체념이 숨겨져 있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5.18 광주, 그 피로 얼룩진 학살의 주범이자 군사 반란의 수괴가 다시금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다섯 살의 나는 이해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었다.


답답하고 무거운 공기는 사회 전체를 짓눌렀다. '해도 괜찮아' 보다 '하면 안 되는 것'이 더 많았고, '남자다워야 한다', '여자다워야 한다', '죽어라 공부해야 한다', '죽도록 열심히 일해야 한다'라는 말이 언제나 들려왔다. 그 현실에서 국민의 눈과 귀를 돌리기 위해 도입된 컬러 TV는 ‘88 서울 올림픽’의 굴렁쇠 소년을 찬란하게 비췄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며 나는 사춘기를 맞았고, 서태지와 아이들이 일으킨 문화혁명의 열기는 H.O.T, 젝스키스, S.E.S, 핑클, GOD와 같은 1세대 아이돌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권위주의적 질서가 너무나 당연했기에 그것이 ‘권위’인지조차 몰랐던 시절, 피부 아래 공기처럼 스며든 억압 속에서 우리는 교육받고 자랐다. 여학생은 ‘가정’을, 남학생은 ‘기술’을 무조건 배워야 했고, 교복과 귀밑 3센티 단발머리의 규율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교사들의 무자비한 폭력은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고, 스승의 날이면 교실마다 학부모들이 건넨 촌지와 선물들로 선생님들의 책상이 풍요로워졌다.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고, 아무것도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제주도로 예정되었던 고등학교 수학여행은 김영삼 정부 말기, IMF 외환 위기의 한파 속에 경주로 변경되었고, 그마저도 여행비를 감당하지 못해 따라가지 못한 친구들이 교실 한구석을 채웠다.



1988 서울올림픽 '굴렁쇠 소년'






십 대의 끝자락, 나는 김대중 대통령을 만났다. 1997년 대선 개표 방송을 지켜보던 아빠의 얼굴에 비로소 환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나는 이제 아빠의 표정에 담긴 복잡한 문맥과 그 깊은 행간의 의미를 어렴풋이나마 알아챌 수 있을 만큼 자라 있었다.


김대중이 두려웠던 박정희는 그를 바다 한가운데 빠트려 죽이려고 했고, 군사반란을 일으킨 전두환은 적반하장으로 김대중에 내란죄를 뒤집어씌워 사형을 선고했다. '국민'과 '주권', '민주주의'를 귀히 여겼다는 이유로, 권력을 원래 주인인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진실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는 이유로 내란 세력에 의해 수십 년간 수십 차례나 죽을뻔 했던 김대중이 끝내, 대통령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전두환을 용서했다. 나는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용서의 깊이를 감히 헤아리지 못한다.


보수 정부 김영삼에게 부도 상태나 다름없는 국가를 넘겨 받은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에게 설명하고 호소하고 설득했다. 자신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의 월급을 자진 삭감하며 고통을 나누겠다고 했다. 그러자 김대중을 신뢰하고 존경했던 국민들은 결혼 폐물, 아이 돌반지까지 가지고 나와 전국민적인 금모으기 운동으로 IMF를 최단기간에 이겨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에겐 내다놓을 금붙이가 없었지만, 국가 지도자와 국민 간의 신뢰와 존중이 쌓인 나라는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걸 직접 보고 들었다. 그리고 그 신뢰와 존중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되었다. 그 말도 안 되는 기적의 경험은 두고 두고 내 인생의 값진 자양분이 됐다.


당시에는 그 의미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인터넷 초고속망 구축’과 ‘문화 강국’의 청사진이 현실이 되는 것을 나는 온몸으로 경험했다. 삐삐와 시티폰을 거쳐, 스무 살 내 손에는 어느새 휴대전화가 들려있었다. 일본 앞에만 서면 유독 주눅 들고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시달리면서도 동시에 막연한 경외감을 느꼈던 대한민국 국민에게, 김대중 대통령은 수십 년간 굳게 닫혀 있던 일본 문화의 빗장을 풀며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라”고 설득했다. 사회에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거리는 활기로 넘실댔다. 나는 그 모든 것이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아빠는 이따금 나를 상기시켜 주곤 했다. 이 나라가, 이 사회가 본래부터 이렇지는 않았노라고. 아빠가 보냈던 무겁고 답답했던 사춘기와 청춘의 풍경을 회상하며, 지금은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 정부, 김대중의 시대이기에 모든 것이 다르다고 힘주어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살아갈 세상은 아빠가 살아왔던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기에 참으로 다행이라고, 그 무뚝뚝한 양반이 가끔 속내를 비쳤다.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면, 사회가 바뀌고 사람들의 삶 또한 바뀐다는 것을,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0104201711091411553478075013715.jpg MJ와 DJ





대학생이 되어 내 생애 첫 투표권을 주저 없이 노무현에게 주었다. 김대중 대통령을 통해 정치에 눈뜨고 세상의 변화를 체감했던 나에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민주당의 안락한 텃밭을 마다하고 패배가 예정된 부산의 험지에 기꺼이 출마하여 텅 빈 공터에서 외로이 연설하던 그의 모습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울림이었다. 20년 전 '지역주의'를 깨부수겠다며 말만 하는 수두룩한 기회주의자 정치인들 중에서 노무현은 미련스러울 정도로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는 바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보석이었다. 그런 어른을, 그런 정치인을 현실 정치에서 그렇게 일찍 만날 수 있었던 건 우리 세대의 행운이었다.


‘고졸’ 노무현의 말과 글은 그 누구보다 명징했고, 가장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는 거리의 서민들과 스스럼없이 손을 잡았으며, 함께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 검찰 권력과 언론 재벌 <조선일보>와 싸울 땐 거칠 것이 없었다. 그 깡패나 다름없는 양아치들과 맨 주먹으로 혼자 싸우다 얼굴이 터지고 피가 철철 흘러도 국민을 향해선 언제나 아무렇지 않다며 환히 웃었다.


나는 그를 ‘서민 출신’이기에 대통령으로 뽑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임기 5년 내내 기득권 세력의 지독한 멸시와 음해, 조롱에 시달려야 했다. 심지어 그가 속했던 당내 세력마저 학연, 지연, 정치적 배경이 없는 그를 공공연히 무시하고 질투하고 따돌렸다. 여야가 합세해 끝내 대통령 탄핵안을 가결했을 때, 나는 난생처음 광장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바보 노무현’. 그는 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가장 철저히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이었다. 대통령이 되고도 그가 꿈꾸었던 개혁과 비전을 마음껏 펼쳐 보일 시간도, 공간도 제대로 허락받지 못했다. ‘서민 출신이라 그를 지지했다’던 시민들 중 일부마저 ‘역시 힘없는 사람은 대통령이 되어도 어쩔 수 없구나’ 체념하고 절망하며 기득권의 질서 속으로 다시금 편입되었다. 그렇게 위태로운 시간을 오직 국민의 힘으로 겨우겨우, 꾸역꾸역 임기를 마친 노무현을, ‘감히’ 기득권에 맞서 개혁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MB 정부는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20210525060607252ouyk.png 2000년 총선, 지역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서울 종로를 포기하고 부산에 출마한 노무현의 명지시장 공터 연설






당시 MB 정부는 국정원과 군, 경찰의 사이버 심리전담팀을 총동원하여 치밀하고도 광범위한 사이버 심리전을 펼쳤다. ‘일베’와 ‘디씨’ 같은 극단적 혐오 커뮤니티를 노골적으로 지원하고 방조하며,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한 갈 곳 없는 분노와 불만을 뒤틀린 혐오 문화로 배양하여 노무현이라는 한 인간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진보의 상징이었던 그를 도덕적으로 파멸시켜, 스스로 깊은 수치심과 모멸감, 죄책감과 책임감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려 했다. 검찰이 언론에 무차별적으로 흘린, 조작되고 왜곡된 정보들은 날카로운 칼이 되어 그의 심장을 난도질했고, 결국 노무현은 마지막 담배 한 대조차 제대로 피우지 못한 채 우리 곁을 떠났다.


그렇게 나는, ‘시민’ ‘주권’ ‘정치’라는 단어의 의미를 가르쳐주었던, ‘나의 대통령’ 노무현을 눈앞에서 속수무책으로, 허망하게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해 봄, 세상이 통째로 무너지는 듯했던 절망감은 단순히 한 정치인의 죽음을 넘어, 우리 세대의 심장에 깊고 서늘한 구멍을 남겼다. ‘지켜주지 못했다’는 통한의 죄책감은 사무치는 그리움이 되었고, 그의 마지막 당부처럼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서로의 상처를 다독이며 더 나은 세상을 향한 연대의 디딤돌이 되었다. 이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이야말로 우리가 결코 과거로 퇴행할 수 없는, 절망 속에서도 한 뼘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823113_48365_714.jpg 2009년 5월,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인생에서 가장 예민한 시기인 십대와 이십대에 김대중과 노무현에게 민주주의를 배우고 경험한 나는 일찍이 정의와 상식에 관한 명백한 가이드라인을 가질 수 있었다.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권에서 청춘을 보낸 우리는 MB와 박근혜 정권의 문제점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우리는 명박산성에 갇혀 물대포를 맞으면서 광장을 지키고, 촛불로 박근혜를 몰아냈다.


우리는 노무현의 시대를 통해 힘없는 서민의 아들이 기득권의 견고한 성벽에 온몸으로 부딪힐 때, 설령 그가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얼마나 무력하게 부서지고 잔인하게 제거당할 수 있는지 뼈저리게 목격했다.


민주 진영에게 이 땅은 언제나 불공정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었고, 기득권 세력은 언론을 비롯한 모든 공적 인프라를 사적으로 이용했다. 때로는 승리보다 패배가 더 익숙한 싸움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냉정한 현실 앞에서 절망만을 학습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사람 한 사람의 작은 촛불이 모여 거대한 빛의 강물을 이루고, 깨어있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연대가 불가능해 보이던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광장에서, 거리에서, 서로의 눈빛 속에서 확인했다. 그것이 우리가 피와 눈물로 체득한 민주주의의 진짜 모습이었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의 근거였다.



2016년 촛불 혁명





그렇다면 노무현 정권에서 20대를 보낸 우리 세대가 MB와 박근혜 정권을 겪으며 30대가 되어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심각한 문제 의식을 느꼈을 때, MB와 박근혜 정권에서 10대와 20대를 보낸, 지금 우리와는 전혀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하고 있는 ‘박근혜 키드’는 어떤 풍경 속에서 자랐을까.


성인이 되기 전까지의 아날로그의 온기를 기억하는 '노무현 키드'인 우리들에 비해 '박근혜 키드'는 어렸을 때부터 디지털에 익숙했다. MB 정부 시절부터 국가 권력이 총동원되어 조직적으로 펼쳐졌던 교묘한 사이버 심리전의 냉기 속에서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그 어떤 가이드라인 없이 자연스럽게 또래 집단을 형성하고 학창 시절을 보냈다. 온라인 공간은 특정 정치세력에 대한 조롱과 비하, 악마화가 일상처럼 넘실댔고, 극단적인 혐오와 냉소가 마치 깨어있는 시민의 목소리인 양 포장되기 시작한 때였다. ‘일베’와 ‘디씨’ 같은 커뮤니티가 위세를 떨치며 만들어 낸 오염된 공기 속에서 그들의 가치관은 알게 모르게 영향받았다.


MB와 박근혜 정권 때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들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심지어 직접 보지도 못한 대통령 노무현을 조롱하고 비하하는 합성 밈을 스마트폰으로 퍼뜨리며 놀았다. 그들은 노무현이 어떤 사람인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무력하고 순진하고 만만한, 힘 세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 MB에게 스러진 우스운 놀림감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십대, 이십대, 삼십대가 되었다. 지금 이 순간도 초등학교 아이들부터 대학생, 사회인까지 노무현 코알라 합성 필터를 쓰고, 노무현 코알라 합성 얼굴로 티셔츠를 만들어 온라인에서 팔고 있다. 누구보다 국민을 짝사랑했던 '바보 노무현'은 교활하고 사악한 수구 정권이 오래도록 꾸준하고 집요하게 진행해 온 사이버 내란에 여전히 이용되고 있다.


소위 ‘이대남’으로 통칭되는 그들이 마주한 사회 현실 또한 암울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집값, 얼어붙은 취업 시장, ‘N포 세대’라는 절망적인 자조와 수저 계급론이 공공연하게 회자되는 극심한 불평등, 그리고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그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어쩌면 그 절망감이, 그 불안이 그들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거기에 더해 그 거대한 시스템 앞에서 개인의 분노가 때로는 가장 손쉬운 대상에게, 혹은 잘못된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을 이용하는 기회주의자, 혐오주의자 정치 세력이 등장했다.


물론 ‘밀레니얼 세대’라 불리며 새천년의 희망을 한 몸에 받았던 우리 역시 꽃길만을 걸었던 것은 아니다. 외환 위기의 한파가 채 가시지 않은 캠퍼스에서,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첫 번째 실험 대상이 되었고, 졸업과 동시에 최악의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천국에서 ‘88만 원 세대’라는 암울한 이름표를 달아야 했다. 무기력한 우리에게 사회와 언론이 붙여 놓은 ‘잉여 세대’, '부모 세대보다 가난한 첫 세대'라는 냉소적인 낙인을 달고,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위선적인 가스라이팅을 견뎌내야 했던 우리의 젊음 또한 불안과 절망에 깊이 흔들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회 시스템에 대한 정당한 분노와 개인적인 억울함을, 우리와 똑같이 힘겨운 시대를 살아가는 다른 사회 구성원, 즉 여성이든 남성이든, 혹은 우리보다 더 취약한 약자들을 향한 비겁한 혐오로 변질시키지 않았다. 혐오와 분노, 두려움을 교묘하게 부추겨 노골적으로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는 정치인들이 없었던 것도 한 몫 했다.


그것은 우리가 ‘바보 노무현’에게서 배운 세상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김대중과 노무현 시대를 지나며 이 나라의 시스템에 좌절했지만, 동시에 이 나라의 가능성을 경험했다. 일제강점기와 오랜 군사 독재의 잔재에 몸살을 앓는 이 나라에 대한 분노와 애처로움, 희망을 동시에 품은 세대로 우리는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와 빛의 길을 걷기 위해 촛불을 들었다.


우리는 노무현에게 배웠다. 아무리 현실이 팍팍하고 부조리가 판을 칠지라도,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타인에 대한 존중을 잃지 말아야 하며, 약자의 손을 잡고 함께 연대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고. 그의 서툴지만 진심 어린 외침은, 우리 세대의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도덕적 원칙으로, 그리고 힘든 시절을 버텨내는 자긍심의 근거로 깊이 새겨졌다. 더욱이, 우리는 가장 믿고 사랑했던 존재를 눈앞에서 허망하게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참혹한 고통인지, 그 슬픔이 한 개인의 삶을 어떻게 송두리째 흔들어 놓는지 너무나 아프게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 뼈에 사무치는 상실을 알기에, 우리는 타인에게 비슷한 상처를 되돌려주는 방식으로는 결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혐오가 아닌 연대, 절망이 아닌 희망을 선택해야만 했던 것은, 어쩌면 우리 세대의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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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는 나라를 거대한 도박판으로 만들어 천문학적인 사익을 추구했고, 박근혜는 무능과 부패, 304명 세월호 아이들의 비극을 국정농단으로 덮으려다 이 나라의 근간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헬조선'이라는 말이 청년들의 입에서 자조적으로 터져나왔지만, 박근혜는 '청년 정치'를 외치며 이준석을 내세워 남과 여, 청년과 노인, 장애인과 비장애인, 노동자와 기업가, 빈곤층과 중산층을 갈라쳐 강자와 포식자를 제 편으로 끌어들였다.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은 나라를 '헬조선'으로 만들어야 사회가 더 혼란하고 분열되고 갈등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파면된 박근혜 정권 이후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인수위원회조차 없이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온 힘을 다해 수습하려 애썼다. 박근혜와 함께 파면당한 보수 세력은 MB와 박근혜 정부에서 의도적으로 키워온 경제, 사회, 정치 갈등의 원인을 모두 문재인 정부에 뒤집어 씌우며 반격에 나섰다.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보수 세력은 백신 음모론을 퍼뜨리며 정부의 방역 지침을 사사건건 방해했고, 급기야 대통령 부부가 카메라 앞에서 백신을 맞으며 국민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자 그들은 대통령이 백신을 맞은 주사기에 바늘이 없다고 우기며 계속해서 음모론을 퍼뜨렸다. 그때 나는 해외에 있었다. 내가 있는 나라에선 백신은커녕 마스크도 없이 진료도 못 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하루에 수백, 수천이었다. 나는 사람의 목숨마저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용하는 세력을 보며 일제강점기 나라를 팔고도 떳떳했던 이들과 군사 독재에 부역하며 금은보화를 쌓은 기득권의 실체를 뼈져리게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들어선 보수 세력과 윤석열 정부는 무능과 부패, 159명 이태원 청년들의 안타까운 희생을 친위 군사 쿠데타로 덮으려다 결국 나라의 뿌리마저 뽑아버렸다. 그리고 이제 다시, 민주 정권 이재명 정부가 '또다시' 제대로 된 인수위도 없이, 성대한 취임식도 없이, 펜 한 자루 남기지 않고 텅 비워버렸다는 무덤 같은 용산 대통령실에 들어가 뒷수습을 시작한다.


이십 대에 노무현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민주공화국의 주인이 누구인지, 정치가 무엇인지를 피와 눈물로 배운 우리는, 삼십 대에 박근혜를 탄핵하고 문재인에게 표를 줬고, 사십 대에 윤석열을 탄핵하고 이재명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아무리 대한민국의 오랜 군사 정권의 비호 아래 부와 권력을 축적해 온, 인구도 많고 영향력도 막강한 TK와 PK, 그리고 강원도가 똘똘 뭉쳐 내란 세력을 지지하고, 국민에게 총칼을 겨눴던 과거를 미화하며 여전히 그 망령을 추종한다고 해도, 20년 전 힘없던 ‘노무현 키드’들은 이제 그의 꿈을 대신 이루는 역사의 주역으로 성장했다.


아무리 MB 정권부터 단 한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되어 온 교묘한 사이버 심리전과 추악한 여론 조작, 온갖 음모론과 상대를 향한 맹목적인 혐오, 왜곡, 악마화로 이 한국 사회를 더럽히고 병들게 해도, 이제 막 40대가 된 나는 앞으로 50대, 60대, 70대가 되어서도, 결코 이도 저도 아닌 기계적 중립이라는 허울 좋은 가면 뒤에 숨어 비겁한 가식을 떨거나, 더 이상 지킬 가치조차 남지 않은 낡고 부패한 수구 기득권 세력에 힘을 실어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수구 세력이 10대와 20대를 거짓과 선동으로 현혹하여 우경화하려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 우리가 이십 대였을 때, 남자들은 지금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열악한 환경에서 군 생활을 했다. 지금보다 훨씬 더 노골적인 성차별이 만연했지만 ‘페미니즘’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 우리가 청년이었을 때, 국민연금 수령 연령이 65세로 미뤄지고, 우리가 내야 할 연금도 높아졌지만, 우리는 우리의 현실이 고달프다고 떼쓰거나 노년층과 편 갈라 싸우지 않았다. 우리 사회를 위해 묵묵히 성실하게 일해 온 세대를 위한 존중이었고, 정성껏 나를 기른 부모 세대에 대한 사랑과 연대가 있었다. ‘라떼는 말이야’를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키드’인 우리는 서로를 남과 여로, 청년과 노인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노동자와 중산층으로 갈라 세우며 증오하고 혐오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누군가를 이 사회에서 없애버리고 싶다는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어떤 것도 명분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우리도 서운했다. 사회는 우리더러 새천년을 이끌어 갈 희망이라며 비행기를 높이 태워놓고는 신자유주의와 비정규직, 계약직 시스템으로 우리가 바닥을 뚫고 추락하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우리는 스스로 비웃었고, 무기력감에 빠졌으며, 그러면서도 태어나 자라며 학습된 어른에 대한 공경과 사회에 대한 책임을 따랐다. 반항을 꿈만 꾸는 착한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불안했다. 우리 세대의 이야기가 없을까봐. '베이비 부머' 세대로 태어나 산업화 시대를 지나 군부 독재를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다시 세운 부모 세대와 태어나면서부터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자란 'Z 세대' 사이에서 아날로그 반, 디지털 반, 권위주의 반, 민주주의 반, 고성장 시대와 저성장 시대 반반씩 경험한 우리가 '돌연변이' 취급을 받을까봐. 그런데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 세대만의 분명한 시대정신과 이야기, 역할이 있었다. 우리는 삶에서 가장 반짝이는 청춘에 김대중과 노무현의 시대를 겪은 '노무현 키드'였다.


아무리 뼛속까지 '박근혜 키드'인 극우 포퓰리스트 이준석이 제 이익을 위해 갑자기 자신이 '노무현 키드'라 호소한다 해도, '세대포위론'이라는 허망한 이론을 내세우며 2030과 6070을 극우화해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세대라는 4050을 포위한다고 선동해도, 대한민국 2030 남성에 혐오 문화를 퍼뜨리고 고립시키며 발악을 한다 해도 소용없다. 12.3 내란 이후 지난 6개월 간 민주주의와 헌법을 온몸으로 체화하며, 2025년 6월 3일, 끝내 이재명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2030 청년 여성들의 표로써 우경화된 2030 청년 남성의 표는 앞으로 매번 무력해질 것이다. 혐오는 빛을 이길 수 없고, 칼은 꽃을 이길 수 없다.


국민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공장에 들어간 소년공 이재명은 시간이 흘러 사법고시 합격 후 우연히 들은 특강을 계기로 판검사 대신 인권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 특강을 한 사람은 바로 노무현 변호사였다. 그리고 바로 그 이재명이 2024년 12월 3일, 45년만의 불법 비상계엄이자 내란을 막는 데 앞장섰다. 운명이다. 국민을 그렇게나 짝사랑했던 노무현이 남긴 선물이다. 김대중은 노무현에게 길을 터주었고, 노무현은 문재인을 다시 정치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리고 20년 전 노무현이 꿈꿨던 '사람사는 세상'은 이재명의 '함께 사는 세상'으로 이어진다. 이재명은 또 누구에게 꿈을 줄까?


우리는 노무현에게 배웠다.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고 함께 울고 웃을 줄 아는 마음을,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으로 정당에 참여하여 정치인을 국민의 도구로 활용할 줄 아는 지혜를, 부당한 권력 앞에서 결코 두려워하지 말고 정의를 향해 당당히 호통칠 줄 아는 용기를, 그리고 스스로 잘못했을 때는 진심으로 부끄러워하고 반성할 줄 아는 겸손함을.








여전히 선거철만 되면 나라 곳곳, 작은 시골 마을과 도시의 변두리에서는 내란 세력이 대동한 승합차가 노인회관의 어르신들을 실어 나르고, 식사 한 끼와 몇 푼의 용돈으로 투표일 저녁 막판, 더러운 표를 사는 일이 수십 년째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불법과 탈법이 공공연한 비밀처럼 자행되고 있는데도, 선관위에 아무리 항의해도 그들은 꿈쩍도 않는다.


이번 대선에는 너무 화가 나 민주당에 전화를 걸어 “저들은 저토록 파렴치한 불법을 대놓고 저지르고 있는데, 왜 당신들은…….” 하다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저들이 저런다고 우리도 똑같이 추악해져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것이 과연 우리가 지켜온 가치에 부합하는 일인가? 차라리 패배할지언정, 저들과 똑같은 괴물이 된다면 그것은 승리보다 더한 치욕이 아닌가? 그것은 결코, 노무현이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이 아닌가? 민주당 사람이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고 일부러 부산 험지에 출마해 매번 낙선하면서도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던 노무현을 떠올리며, 나는 민주당에 "정정당당하게, 우리답게 해달라"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저들은 언제나 우리, 민주 진영을 향해 비웃는다. 고지식하게 도덕과 양심을 따지다 결국 제 실속도 못 차리고 현실의 냉혹함도 모르는, 저들의 눈에 우리는 그저 순진하고 어리석은 ‘루저’ 일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느리고 더디게 보일지라도, 아주 조금씩, 이 세상은 분명히 바뀌고 있다. 그들이 애써 외면하고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알고 있다. 어떻게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짓밟고 죽여서라도 정점에 올라서려는 사람들은 평생 경험하지 못할, 돈으로 결코 환산할 수 없는 따뜻하고 정의로운 연대의 힘과 미래를 향한 희망의 가치를,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그리고 저들에게 퉁퉁 부은 눈으로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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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으로 치러지는 조기 대선 국면에서도 기어코 대한민국을 반으로 갈라놓고 증오와 분열의 붉은 깃발을 꽂으려는 저 내란 세력이 신봉하는 것은, 다름 아닌 오랜 군사독재 시절의 추악한 잔재와 스스로 선택한 정신적 노예근성, 그리고 상대를 인간이 아닌 제거 대상으로 여기는 맹목적인 혐오일 뿐이다. 그 근저에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혐오가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너무나도 꾸준히, 그리고 치열하게 저질러온 악행들을 또 다른, 더 큰 악으로 덮으려는 죄악의 쳇바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스스로를 증오와 분노의 지옥에 가두고 끝없는 고통 속으로 침잠하고 있다. 스스로를 혐오하며 깊은 열등감에 시달리기에, 그들이 세상에 내뿜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자신이 보고 배운 그대로의 혐오와 두려움뿐이다. 그래야만 자신이 조금이라도 덜 추악해 보인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들은 영혼도 마음도 가난하다. 진정 그리워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이,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김대중, 노무현과 같을 리가 없다. 그토록 억울하게, 그리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결코 누구도 원망하지 말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달라고 당부하고 떠난 사람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렇게까지 잔인하고 악해질 수는 없는 법이다. 저들은 혐오를 되물림하지만, 우리는 사랑과 꿈을 되물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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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21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재명은 노무현을 대신했고, 김문수는 박정희를 대신했다. 그리고 ‘노무현 키드’인 4050 세대가 ‘박근혜 키드’인 2030을 막아섰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내란 세력이 황폐화시킨 나라를 재건하는 조기 대선으로, 인수위도 없이 대선일 바로 다음날 일을 시작했다. 12.3 내란, 계엄군의 군홧발에 짓밟힌 국회 로텐더홀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취임 선서를 마치고, 국민을 위해 연설했다.(2025년 6월 4일, 이재명 대통령 취임 연설문) 그의 취임 연설은 쉽고, 명확하며, 아름답고, 익숙했다. 그것은 바로 노무현의 언어였다.


이재명의 수행실장이 방송에서 뒷이야기로 밝히길, 대선 개표 중 '당선 확실'이 뜨고 참모진이 미리 준비한 연설문을 본 이재명은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임에도 다시 참모진을 불러들여 연설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싹 다 고쳤다고 한다. 뜬구름 잡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언어 대신 '서민'의 언어, '국민'의 언어를 쓰라고 말이다. 한강 작가의 표현,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자를 구한다"는 문장도 이재명 대통령이 직접 넣은 것이라 했다.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그는 "통합은 유능함의 지표이며, 분열은 무능의 결과이다. 국민 삶을 바꿀 실력도 의지도 없는 정치세력들이 권력유지를 위해 국민을 편 가르고 혐오를 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재명은 노무현의 죽음을 똑똑히 지켜보고 기억하는 사람이다. 국민과의 거리가 가장 가까웠던 노무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간 내란 세력이 이재명을 칼로 죽이려했을 만큼 두려워하는 이유다.


대한민국 정치인 중 가장 많은 구독자를 보유하고, 12.3 내란의 밤 유튜브 라이브 방송으로 시민들에게 "국회로 모여달라" 외친 이재명이 대통령이 되어 꺽이지 않는 의지와 혀를 내두르는 실력과 유능함으로 나라를 재건하고 국정을 운영한다면 앞으로 내란 세력에겐 악몽만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 와중에도 저들은 실력을 키워 정당하게 경쟁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떻게든 편법과 불법을 통해 댓글을 조작하고 아이들과 청년을 세뇌해 극우화할 궁리만 하고 있다. 악은 더 큰 악으로 번질뿐이다.


우리 '노무현 키드' 세대는 단순히 과거의 퇴행을 막는 방파제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한 시대의 빛바랜 추억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느껴야 할 약자를 향한 깊은 연민, 불의에 맞서 함께 싸우며 느끼는 연대의 뜨거운 벅참, 칠흑 같은 절망 속에서도 끝내 놓을 수 없는 내일에 대한 간절한 희망, 그리고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고 존경했던 사람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같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슴 뛰는 감정들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게 만드는 진정한 동력이 된다. 그것이 바로 ‘바보 노무현’이 그의 삶과 죽음으로 우리에게 남긴 진짜 숙제이자, 우리가 기꺼이 짊어지고 나아갈 시대적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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