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속 반민주주의자들에 관한 인문학적 시선.
윤석열 전 대통령은 지난해 기습적으로 선포한 12.3 불법 비상계엄으로 헌법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국민의 신의를 배반했다는 중대한 이유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당했다. 그로 인해 치러진 6.3 조기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며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기고 간신히 살아남았다. 하지만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가 41.15%의 표를 얻고,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가 8.3%를 기록한 결과는 축배를 들기엔 아무래도 찜찜하고 불편한 숫자다.
우리는 ‘정치적 양극화’라는, 개념적으로만 이해했던 상황을 명확한 숫자를 통해 눈으로 직접 확인했다. 어떻게 내란을 옹호하고 비호하고 반헌법적 언행을 일삼으며 내란에 동조하고, 또 내란을 선동한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이 다수 포진된 정당의 후보가 40%를 웃도는 지지율을 얻을 수 있을까?
40%라는 수치는 내란 세력의 정치적 생명력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얼마나 깊은 병에 들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 지표이다. 12.3 내란으로 치러진 6.3 조기 대선은 질병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던 깊고 뿌리 깊은 사회적 균열을 극명하게 드러낸 하나의 증상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 시도와 그에 따른 조기 대선은 이 균열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만들었을 뿐이다.
새로운 대통령 이재명이 마주한 현실은 승리의 축배를 들 수 있는 상황이 결코 아니며, 그것은 언제든 극심한 갈등과 심리적 내전으로 비화할 수 있는, 서로 다른 현실 속에 사는 두 개의 국민을 앞에 둔 위태로운 항해의 시작이다.
1.19 서울서부지법폭동을 지켜보며, 윤석열 전 대통령 체포 당시 한남동 관저 앞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이스라엘기를 흔들며 상상할 수조차 없는 욕설을 내뱉고, 여성 국회의원들만 골라 삶은 달걀을 얼굴에 던지고, 죽이겠다 협박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내내 생각했다.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저들은 앞으로 어떻게 품고 갈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스웨덴 예테보리대학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가 올해 3월 발표한 민주주의 지수에서 한국은 ‘선거민주주의’ 국가로 등급이 내려갔다. 이 연구소가 ‘독재화가 진행 중인 나라’로 한국을 꼽은지 1년 만이다. 1993년부터 최상등급인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됐으나, 내란 사태로 막을 내린 윤석열 정부 3년 동안 민주주의 지표가 급속히 하락한 탓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부설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이 2월에 발표한 민주주의 등급에서도 한국은 ‘완전한 민주제’에서 ‘결함 있는 민주제’로 강등됐다.
대선 전 <한겨레>와 한국정당학회, 여론조사 전문업체 에스티아이가 진행한 ‘2025~26 유권자 패널조사’에서 10명 중 8명은 정치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를 여전히 신봉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독재나 권위주의에 우호적인 응답도 젊은층을 중심으로 일정부분 확인됐다. 위험 수위에 이른 것은 아니지만 ‘잠재적 독재자’(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렛)가 출현할 토양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 세대의 민주주의 효능감을 높일 방안이 필요해 보인다.
우선 세 가지 선택지를 주고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을 물었다. 76.9%는 ‘민주주의가 다른 어떤 제도보다 항상 낫다’고 답했다. 13.9%는 ‘상황에 따라서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낫다’, 3.9%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민주주의나 독재나 상관 없다’고 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는 87년 민주화를 경험한 50대(83.3%)에서 가장 높았고, 20대(70%)에서 가장 낮았다.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은 89.3%, 국민의힘 지지층은 65.5%가 민주주의가 항상 낫다고 답했다. 독재가 나을 때도 있다는 응답은 연령·정당·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었다. 권위주의 정권 경험이 없는 20대(19.6%)와 30대(16.6%), 개혁신당 지지층(27%)과 국민의힘 지지층(23.7%), 보수 유권자가 많은 대구·경북(18.8%)과 부산·울산·경남(18.3%)에서 응답 비율이 높았다. 반면 40대(9.8%)와 50대(9.1%), 민주당 지지층(5%)과 조국혁신당 지지층(8.1%), 5·18의 상흔이 깊은 광주·전라(5.4%)에서 독재 호응 비율이 낮았다.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를 뽑은 유권자들에게 "당신은 12.3 계엄과 윤석열 탄핵에 대한 김문수의 입장에 동의해서 뽑았나?"라고 물으니, 54%가 "그렇지 않다", 41%가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김문수를 뽑은 사람들 중 86%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재명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이재명 후보를 심판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흥미로운 점은 전 정권은 이재명이 아닌 윤석열과 국민의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재명 후보에 대해 '심판'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다. 조중동을 필두로 한 레거시 미디어에 극우 유튜버, 정치인들이 함께 오랫동안 진행해 온 '이재명 악마화'의 결과가 여지없이 실체로 드러난 거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준석 개혁신당 후보를 뽑은 유권자들 중 85%가 "보수 세력의 세대교체를 기대해서"라고 답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이준석을 뽑은 사람들 중 54%가 "이준석이 젊은 남성 유권자를 대변하는 후보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이준석이 3차 대선 토론을 기점으로 '혐오 정치를 상징하는 청년 정치인' '반페미니스트로 젊은 남성의 분노를 이용하는 극우 포퓰리스트'라는 국내외 언론의 비판을 받으면서 이에 대해 솔직하게 답변하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아졌을 거라고 분석한다. 다시 말해, "이준석이 젊은 남성 유권자를 대변하는 후보이기 때문에" 그에게 투표했다는 답변이 설문조사 수치보다 더 높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개혁신당에 호감이 있어서 뽑았다는 답변은 39%에 그쳤다.
3차 TV 토론에서의 여성 신체 관련 발언으로 전체 유권자의 65%가 이준석 후보에 대한 생각이 "나빠졌다"고 답했다. 그러나 세대별, 성별로 나눠보면, 2030 남성 유권자 중에서는 이준석의 발언으로 그에 대한 생각이 "나빠졌다"라고 답한 이들은 36%에 그쳤고, 심지어 20대 남성의 23%는 오히려 이 발언으로 이준석에 대한 생각이 "좋아졌다"라고 답했다. 이 지점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이준석이라는 청년 정치인을 내세워 지난 10년 간 노력해온 '갈라치기', '혐오와 갈등의 정치'의 위험한 결과물이라는 것에는 모든 학자들과 전문가들의 이견이 없다. 그러나 2030 여성 유권자들이 이들의 표를 상쇄하고 있다는 점 또한 다행이라고 말한다.
이에 반해, 민주 진영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당원들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대선에 임했다. 국민의힘과 개혁신당 지지자들은 선거에서 져도 대통령이 이재명이지만, 민주 진영은 선거에서 지면 김문수(라 쓰고 윤석열이라 읽는다)가 대통령이 되는 상황이었다. 김문수가 정권을 이어간다면, 내란 진압은 물거품이 되고, 12.3 계엄의 밤 체포돼 처단되었어야 할 운명을 거스른 이들은 정치적 탄압 이상의 직접적인 생명과 안전을 걱정하는 처지가 될 터였다. 윤석열 정권에서의 경찰은 윤석열이 파면되고나서도 '빛의 혁명'에 참여하고 시위조직위에 후원하고 선결제를 한 시민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계좌까지 들여다 봤으며, 검찰과 사법 카르텔은 윤석열의 구속을 취소하고 비공개 내란 재판을 진행하며 이재명의 대선 출마를 막기 위해 국민이 맡겨둔 권한과 권력을 이용했다. 1.19 서부지법 폭동에 이어 이미 윤석열 지지자에 의해 죽을 고비를 넘긴 야당 대표 이재명에 대한 물리적 테러와 온라인 상에서 조직적으로 펼쳐진 '이재명 악마화'는 계속 됐다. 민주 진영에게 6.3 조기 대선은 김문수라는 후보 개인에 대한 가치 판단의 문제가 아닌, '생사를 넘나드는' 과제였다.
물론 이 40%라는 수치를 단일한 집단으로 규정하는 것은 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다. 이 안에는 내란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이념적 강경파’뿐만 아니라, 내란 자체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상대 진영에 대한 극도의 반감으로 ‘최악 대신 차악’을 선택한 ‘소극적 반대파’, 그리고 오랜 기간 형성된 정치적 관성과 지역 기반, 혹은 부동산이나 세금 같은 특정 정책에 대한 기대로 투표한 ‘관성적 지지층’이 혼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이들이 결과적으로 내란 세력의 정치적 생명력을 연장시켜 주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물론 극단적인 진영은 보수와 진보, 양측에 존재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극단적인 보수 진영은 상대 진영에 대한 악마화와 혐오를 넘어 직접적인 신체적, 물리적 테러를 자행한다. 실제로 이들은 이미 한 차례 민주 진영의 지도자 살해를 실행에 옮겼고, 대선이 끝난 지금도 끊임없이 민주 진영의 지도자와 지지층에 대한 테러 위협을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극우 커뮤니티 '펨코'에서는 이런 글이 광적인 호응을 얻는다. 이들은 1.19 서울지법 폭동을 벌이고 대학가를 찾아다니며 학생들에게 폭언을 퍼부으며 물리적, 신체적 폭력을 행사한다. 이것은 정치적 다양성이나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한참 벗어난 반민주주의적 행태임에 논쟁의 여지가 없다.
하여, 6.3 조기대선에서 국민의힘 김문수에 투표한 40%와 개혁신당 이준석에 투표한 8% 중에서도 사회학, 정치학적으로 '극우 파시즘' 세력으로 분류되는 극단주의 지지층에 초점을 맞춰 국내외 석학들의 논문들을 세계적인 경향에 맞춰 분석해봤다.
대한민국의 극우 파시즘 세력의 내면을 들여다 보다
정치학적 관점에서 볼 때, 40%의 선택은 ‘내란에 대한 지지’라기보다는 ‘상대 진영에 대한 극단적 적대감’의 표출로 해석된다. 현대의 양극화된 정치 지형에서 유권자들은 개별 정책이나 후보 자체의 검증된 실력, 공적 마인드보다는 ‘우리 편’과 ‘저들 편’이라는 ‘원초적 부족주의’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정서적 양극화’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이는 서로 다른 사회 집단 간의 상호 혐오를 지칭하며, 특히 정치적 맥락에서 강력한 정당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이 자신의 정당에 대해서는 긍정적 감정을, 반대 정당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표출하는 ‘부족적’ 본능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이재명과 민주 진영은 단순한 정치적 경쟁자가 아니라, 국가 정체성을 위협하고 자신들의 삶을 파괴할 ‘적’으로 규정된다. 이 ‘적’에 대한 공포와 증오가 극심하기 때문에, ‘우리 편’의 수장이 저지른 ‘내란’이라는 반헌법적 행위조차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거나, 심지어 ‘오죽했으면 그랬겠나’라는 식의 왜곡된 정당화의 대상이 된다. 이는 칼 슈미트가 언급한 ‘친구 vs 적’ 구도가 민주적 절차를 완전히 삼켜버린 상황으로, 정서적 양극화가 정치적 반대자를 도덕적, 사회적 ‘타자’로 변모시키는 과정과 일치한다.
다만 이러한 ‘친구-적’ 구도의 형성 과정이 온전히 한쪽에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 진영 역시 때로는 독선적인 태도나 정책적 실패, 혹은 자신들만이 선(善)이라는 도덕적 우월감으로 반대편의 정당한 비판이나 불안감까지 ‘수구’나 ‘반동’으로 치부하며 이들을 ‘적’으로 규정하는 데 일조한 측면은 없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양극화라는 질병은 한쪽의 바이러스만으로 발병하지 않으며, 양쪽의 면역 체계가 함께 약화될 때 심화되기 때문이다.
권력 상실에 대한 공포는 이러한 부족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핵심 동력이다. 40%의 국민의힘 지지 기반은 권력을 잃었을 때 자신들의 경제적 기득권, 사회적 지위, 나아가 문화적 정체성까지 박탈당할 것이라는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공포는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키고 민주주의라는 대원칙마저 내던지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며, 그들에게 김문수 후보에게 던진 표는 내란 옹호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절박한 투쟁으로 인식된다. 즉, 이들에게 자신들의 ‘부족’을 지지하는 것은 대안이 실존적 소멸로 인식될 때 합리적인 행위가 되는 것이다. 이 공포는 특정 정책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문화적, 실존적 말살에 대한 공포이기에, 민주적 규범조차 쉽게 무시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 전체에 만연한 불안과 분열이 특정 계층에 어떻게 응축되는지를 보여준다. 40%의 지지자들은 나머지와는 전혀 다른 미디어 생태계와 정보 유통망 속에서 살아간다. 그들이 주로 접하는 유튜브 채널, 온라인 커뮤니티, 특정 언론은 내란을 ‘의로운 결단’으로, 탄핵을 ‘좌파의 음모’로 규정하는 ‘대안 현실’을 끊임없이 유포한다. 이러한 ‘필터 버블’ 또는 ‘반향실’ 현상은 알고리즘뿐 아니라 개인의 인지적 한계와 ‘자연스러운’ 경향성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으며, 사용자를 반대 관점으로부터 격리시킬 수 있다.
비록 일부 연구에서는 검색 엔진이나 소셜 미디어가 뉴스 이용의 다양성을 증가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 매우 편향된 소수의 개인들은 자발적으로 반향실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음도 인정된다.
이러한 고립된 정보 환경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이 ‘절대다수의 상식’이라고 믿으며, 외부의 비판을 ‘적들의 선동’으로 치부한다. 더 나아가, 이들은 스스로를 페미니즘, 다문화주의, 차별금지법 등의 급격한 사회 변화와 경제적 불평등의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심리를 보인다. 이 피해자 의식은 ‘저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힘들다’는 분노로 이어지며,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극단적인 수단도 용납될 수 있다는 위험한 논리를 낳는다.
이는 기존 질서를 파괴하려 드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구호와 정확히 같은 심리 구조이다. 필터 버블은 단순히 개인을 고립시키는 것을 넘어, 피해자 서사를 적극적으로 배양하고 검증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 안에서 개인들은 외부의 비판에 무감각해지고, 자신들을 정의로운 희생자로 여기는 서사에 더욱 충성하게 된다.
역사는 이러한 현상이 결코 새롭지 않음을 증언한다. 극심한 사회 혼란기에는 언제나 민주적 절차의 번거로움을 경멸하고, ‘단칼에 문제를 해결해 줄’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코로나-19 글로벌 팬데믹 이후 2020년대 한국의 상황은 1920-30년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너지고 히틀러가 부상한 과정과 섬뜩할 정도로 유사하다. 당시 독일 국민 다수는 경제 파탄, 정치적 무능, 베르사유 조약의 굴욕감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그들은 히틀러의 폭력성과 반유대주의를 알면서도, 그가 가져다줄 ‘안정과 질서’, ‘강한 독일’이라는 환상에 표를 던졌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언론은 극심한 정치적 양극화와 정파적 편향성을 보였으며, 이는 이후 나치 정권의 포괄적인 선전 체제 구축의 토대가 되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내란’을 ‘해프닝’으로 치부하고 그 후계자에게 40퍼센트의 표를 던진 행위는, 민주주의의 가치보다 눈앞의 안정, 혹은 안정처럼 보이는 것과 진영의 승리를 우선시했던 과거의 비극을 정확히 되풀이하는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는 민주주의가 시장경제와 민중의 실질적 요구 사이의 균형을 맞추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전형적인 사례로 여겨진다.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운명에 처한다”는 격언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열망은 고전적 파시즘과는 다른 양상을 띨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얀-베르너 뮐러가 지적했듯, 현대의 반민주적 세력은 폭력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반다원주의’와 ‘진정한 국민’ 같은 그럴듯해 보이는 명분을 내세우며 시민권을 제한하려 할 수 있다. 즉, 혼란에 대한 반작용으로 질서를 갈망하는 것은 역사적 반복이지만, 그 질서를 구현하려는 지도자의 양태와 전략은 시대에 따라 변모하며, 때로는 더 교묘한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은 한 국가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공통의 대답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내란’이라는 단어 자체가 한쪽에서는 ‘친위 쿠데타’로, 다른 한쪽에서는 ‘구국의 결단’ 혹은 ‘좌파 척결 시도’로 불리는 현실은, 같은 사건을 지칭하는 단어와 서사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세계관의 전쟁이며, 이러한 상황에서는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하다. 40%의 지지자들은 사실 김문수라는 정치인이 아니라, ‘내란은 정당했다’는 자신들만의 서사, 자신들의 세계관 그 자체에 투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탈진실(Post-truth)’ 시대의 단면이다. ‘무엇이 진실인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으며, ‘나는 무엇을 믿고 싶은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이들에게 ‘민주주의 수호’라는 구호는 위선적인 기득권층의 언어일 뿐이며, 차라리 자신들의 분노와 불안을 대변해 주는 ‘강한 목소리’가 더 진실하게 들린다. 이는 이성이 아니라 ‘신앙’의 영역에 속한다.
이처럼 기본적인 사실이나 핵심 개념의 의미에 대한 합의가 불가능해지는 인식론적 위기는 정치적 분열의 단순한 증상을 넘어 그 핵심 동인이 된다. 공유된 인식론 없이는 민주적 숙의를 위한 공통의 기반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어떠한 정치적 해법도 극도로 취약하게 만든다.
분열의 심리
상대방을 ‘악마’로 규정하는 것은 특정 진영의 생존 전략이지만, 이는 단순한 수사나 비유를 넘어선다. 그것은 구성원들의 정신세계에 실재하는 ‘현실’을 창조하는 연금술에 가깝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상징적 상호작용론은 인간이 객관적 현실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한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고 설명한다. 과거 이재명 당 대표 시절 발생했던 테러 시도는, 그를 ‘악마’ 또는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 서사가 한 개인의 머릿속에서 물리적 행동으로 전환된 끔찍한 증거이다. 그 테러범에게 이재명은 한 명의 정치인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악의 상징’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일단 ‘악마’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를 향한 모든 폭력과 비인간적 행위는 ‘정의 구현’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이러한 ‘타자화’ 과정은 정서적 양극화의 핵심적 특징으로, 정치적 반대자를 도덕적, 사회적 ‘타자’로 변모시킨다. 이러한 타자화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필리아(philia)’, 즉 정치적 우애를 약화시키는데, 필리아는 상호 존중과 대화에 필수적인 시민적 덕목이다.
40%의 지지자들은 이 ‘악마 퇴치’ 서사에 깊이 동조함으로써, 내란이라는 극단적 행위마저 ‘필요악’으로 받아들이는 심리적 면죄부를 얻는 것이다. 결국, 악마화는 단순한 정치적 양극화의 산물이 아니라, 극단적인 정치 폭력과 민주주의 침식 행위를 가능케 하는 필수적인 심리적 기제이다. 상대방을 비인간화함으로써, 정상적인 도덕적 제약을 우회하고 반민주적 행위에 대한 지지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겐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지?”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대 역시 자신에게 똑같이 악한 짓을 하고 복수할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투사(Projection)’의 전형적인 예이다.
이들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공격성, 비합리성, 그리고 내란을 옹호했다는 ‘죄의식’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그 감정을 거울에 비추듯 상대에게 투사해 버린다. 즉, “우리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저들이 정권을 잡으면 우리를 가만두겠는가?”라는 공포는, 사실 “만약 우리가 저들의 입장이었다면, 우리는 상대를 절대로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자기 고백에 가깝다.
그들은 상대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 자신들의 내면을 비춘 자신들이 만든 허상과 싸우고 있는 것이며, 스스로의 죄의식이 만들어 낸 유령에 쫓기는 셈이다. 이 공포는 너무나 생생하기에,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더욱 필사적으로 뭉치고, 상대의 몰락을 외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투사된 죄의식에서 비롯된 선제적 공격성은 위험한 순환 고리를 만든다.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잠재적 보복을 두려워하여 더욱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고 반민주적 수단을 지지하게 되며, 이는 상대방의 적대감을 실제로 강화시켜 자신들의 편집증적 세계관을 ‘확증’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현대 사회의 가장 기괴하고도 비극적인 지점 중 하나는 고학력과 사회적 지위가 더 이상 합리적 사유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40%의 지지자 중 다수가 고학력에 경제적으로 안정된 계층이라는 점은 이를 방증한다. 역사학적, 사회학적 관점에서 계몽주의 시대부터 이어져 온 ‘교육’과 ‘지식’이 인간을 미신과 광기에서 해방시킬 것이라는 믿음은 현실에서 처참히 부정된다. 이들에게 지식은 ‘진리 탐구’의 도구가 아니라, ‘기존 신념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전락했다.
변호사는 법률 지식을 동원해 내란을 헌법 수호 행위로 궤변을 늘어놓고, 의사는 과학적 용어를 차용해 상대 진영의 정책을 비과학적이라 매도한다. 그들의 지성은 신념이라는 우리 안에 갇힌, 발톱이 잘린 맹수와 같다. 포효할 수는 있으나, 결코 우리를 부수고 나오지는 못한다. 이들은 ‘아는 것’과 ‘믿는 것’ 사이에 거대한 방화벽을 쌓아 올린, 현대판 ‘교양 있는 야만인’들이다.
양극화된 사회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개인들이 자신의 인지 능력을 기존의 편견을 강화하는 데 사용하는 이러한 ‘지적 포획’ 현상은, 그들을 설득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고 이성적 대화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그들의 교육 수준은 오히려 자신들의 이념적 입장을 더욱 정교하게 방어하고 합리화하는 데 기여하여, 극단주의적 신념을 더욱 공고히 하는 역설을 낳는다.
40%의 지지자들은 우리의 평범한 이웃, 선생, 교수, 자영업자, 경찰, 판검사, 기업인, 국회의원, 정부 관료 등 다양한 얼굴을 하고 우리 사회 곳곳에 산다. 이는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을 보며 이야기했던 ‘악의 평범성’의 현대적, 디지털 시대 버전이다. 악은 괴물 같은 악당이 아니라, 사유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에 의해 자행된다는 것이다.
2025년 대한민국의 40%는 바로 이 ‘악의 평범성’의 디지털 시대적 구현이다. 내란을 지지하는 판사는 법정에서는 냉철하게 법리를 따지지만, 퇴근 후에는 동창회 단톡방에서 가짜뉴스를 퍼 나른다. 자상한 아빠이자 성실한 회사원인 그는, 주말에는 특정 정치인을 ‘죽여야 한다’는 유튜브 댓글에 ‘좋아요’를 누른다. 이들은 스스로를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이야말로 나라를 걱정하는 ‘애국자’라고 굳게 믿는다. 이러한 성실한 시민의 얼굴을 하고 공동체의 기반을 좀먹는 ‘사유의 포기’야말로 우리 시대 파시즘의 맨얼굴이다. 그것은 광장에 모여 나치식 경례를 하는 대신, 각자의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조용하고도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은 이러한 ‘사유의 포기’를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관심을 포착하고 이윤으로 전환하도록 설계되었으며, 종종 성찰보다는 속도, 분노, 감정적 반응을 보상한다. 사람들은 수동적으로 분열을 조장하는 시스템에 참여하며, 질문 없이 정보를 소비하고 공유한다. 이러한 무관심과 일상성은 아렌트가 경고했던 바로 그 ‘사유의 부재’와 도덕적 판단의 유예를 반영한다.
‘알고리즘적 악의 평범성’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이 현상은, 디지털 플랫폼이 어떻게 대규모로 극단적 정서를 정상화하고 무비판적 사고를 촉진하는지를 보여준다. 익명적이거나 반익명적인 온라인 참여의 용이성은 개인이 현실 세계에서는 지지하지 않을 극단적인 견해나 행동, 예를 들어 내란 지지나 혐오 발언을 하게 만들 수 있다. 이러한 행위들은 온라인 부족 내에서 정상화되고, 그 결과로 발생하는 책임감의 희석은 비판적 사고와 도덕적 책임을 더욱 약화시킨다.
내란을 옹호하고 선동한 국민의힘을 지지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결국, 당신이 꿈꾸는 세상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을 때, 그들의 유토피아는 구체적인 청사진이 있는 ‘건설적인 세상’이 아니라, ‘부정(否定)을 통해 정의되는 세상’, 즉 ‘텅 빈 유토피아’임이 드러난다.
그들의 이상향은 ‘무엇이 있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없는가’로 채워져 있다. 그들이 증오하는 ‘종북/주사파 세력’이 없는 세상, 자신들의 가치관을 위협하는 ‘페미니즘/PC주의’가 없는 세상, 복잡한 갈등과 토론 대신 ‘강력한 지도자’의 일사불란한 명령만 존재하는 세상. 즉, 그들이 꿈꾸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실재한 적도 없는 ‘신화화된 과거’로의 회귀이다. 그곳은 모든 것이 단순하고, 위계질서는 명확하며, ‘우리’와 ‘그들’의 경계가 확실했던, 상상 속의 ‘좋았던 옛 시절’이다.
국내외 수많은 학자들과 분석가들은 더 이상 새로운 아젠다를 찾지 못하고 이슈를 선점하지 못하는 보수 세력의 극우화는 이미 세계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현상이라고 말한다. 기후 위기, 성평등, 경제적 양극화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정치적 이슈를 선점한 진보 진영에 비해 기존의 제도나 시스템, 관행을 지키려는 보수 진영의 소구력과 영향력이 줄어들면서, 위기에 처한 보수는 중도층 확보를 통한 지지층 확대를 포기하고 기존 지지층의 이탈을 막기 위해 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이며 강력한 선전 문구와 이념에 소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기 보다 과거의 군사 독재, 권위주의 시대를 미화하고, 지지자들이 잃은 것, 그리고 앞으로 잃어갈 것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공포를 극대화하는 정치 진영이 극우 파시즘으로 변질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들의 서사에는 새로운 주인공이나 창의적인 플롯이 부재하며, 오직 ‘악마를 퇴치한 후의 고요’만이 존재할 뿐이다. ‘악마가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전무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체성 자체가 ‘악마와 싸우는 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적이 사라지면 자신의 존재 이유도 희미해지는, 비극적인 공생 관계인 셈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적의 승리가 아니라, 적이 사라진 후의 공허함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반동적 유토피아는 본질적으로 파괴적이고 지속 불가능한 정치 프로젝트이다. 배제와 신화화된 과거로의 회귀에 기반하기 때문에 복잡하고 다원적인 현대 사회를 운영할 실행 가능한 청사진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 추구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억압을 낳는데, 이는 ‘적’을 끊임없이 식별하고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신념의 지정학
40% 지지자들의 외교적 입장은 단순한 정책 선호를 넘어, 그들의 세계관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신앙고백’에 가깝다. 중국에 대한 병적인 혐오와 미국·일본에 대한 맹목적인 추앙이라는 기묘한 조합은, 이들의 지정학적 인식이 현실 정치 분석의 결과가 아니라 ‘선악 이분법’에 기반한 거대한 신화 체계임을 드러낸다.
미국: 구원이자 질서의 상징, ‘아버지 국가(Father State)’
이들의 역사 인식 속에서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와 보호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국가로 각인되어 있다. 공산주의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준 ‘구원자’이자, 전후 폐허에서 경제 성장을 이끌어 준 ‘후원자’로서 미국은 시혜적이고 절대선에 가까운 ‘아버지 국가’의 이미지를 갖는다. 따라서 ‘반미(反美)’는 단순한 외교 노선 비판이 아니라, 국가의 근본을 부정하고 아버지를 거역하는 ‘패륜’과 동일시된다.
또한 이들에게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그들 이데올로기의 최종적인 보증인이다. 국내 정치에서 반대파를 ‘종북’으로 몰아붙일 때 그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은 ‘얼마나 미국적인 가치에 충실한가’이며, 미국을 추앙하는 행위는 곧 자신들의 정치적 신념이 세계사적 정통성을 갖는다는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의례와도 같다.
중국: 모든 악의 총합이자 ‘야만’의 현신
과거 ‘소련/북한’이 차지했던 ‘절대악’의 자리를 이제 중국이 완벽하게 대체했다. 중국은 이들이 가진 모든 공포와 혐오를 투사하기에 가장 완벽한 대상이다. ‘공산당 일당독재’라는 정치적 야만성, ‘미세먼지/코로나-19’와 같은 환경·보건의 위협, ‘동북공정’이라는 역사 침탈, 그리고 ‘짝퉁’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저열함까지, 이들에게 중국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인시켜주는 ‘타자(Other)’이자 모든 혼란의 근원이다. 중국을 혐오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고, 깨끗하며, 문화적으로 우월한 존재’라는 심리적 위안을 얻는다.
이들에게 국내의 정치적 반대 세력을 ‘친중/종중’ 프레임에 가두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정치 전략이다. 상대방을 합리적인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야만적인 외세에 부역하는 ‘제5열’로 낙인찍음으로써, 모든 논의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 내란을 옹호하는 논리 역시 “친중 세력에게 나라를 넘기지 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라는 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외교관은 실용적인 국익 계산보다는 국내 정치적 부족 전쟁의 연장선상에서 형성된다. 국제 관계는 이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국내 반대파를 외국 ‘악마’와 연관시켜 비난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일본은 ‘문명화된 파트너’: 이념을 위한 역사적 기억상실
가장 기괴하고도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일본에 대한 태도이다. 과거 자신들을 식민 지배했던 국가를 ‘추앙’하는 이 모순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위해 역사를 재구성하고 식민화하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현재의 이념적 소속감’이다. 이들의 세계관 속에서 오늘날의 일본은 ‘과거의 제국주의 국가’가 아니라, 미국과 함께 ‘자유민주주의 진영’에 속한 ‘문명 클럽’의 일원이다. 반면 중국과 북한은 ‘공산독재 진영’에 속한 ‘야만 클럽’으로 규정된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는 ‘문명 클럽’의 연대를 방해하는 사소하고 불필요한 장애물, 혹은 ‘야만 클럽’에 동조하는 좌파들의 선동으로 치부된다. 식민 지배의 아픈 역사를 외면하고 일본과 손을 잡는 행위는, 자신들이 ‘야만’이 아닌 ‘문명’의 편에 섰음을 증명하는 행위가 된다. 이것이야말로 ‘내부 식민자’라는 명칭이 가장 잘 어울리는 지점이다. 그들은 외부의 적과 싸우기 위해, 자국 역사의 가장 아픈 기억마저도 스스로 식민화하고 검열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긋는 선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경선이 아니라, ‘문명(미국-일본-우리)’과 ‘야만(중국-북한-저들)’을 나누는 이념의 선이다. 그 선을 긋기 위해서라면, 헌법(내란)도, 역사(친일)도 얼마든지 제물로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내부 식민자’들의 가장 위험하고도 서글픈 지정학적 초상이다.
그들의 외교관은 국가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한 순례길과 같다. 일본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현재의 이념적 동맹을 위해 국가적 기억과 역사적 진실을 희생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선택적 기억상실은 그들의 마니교적 세계관을 유지하는 데 결정적이며, 자신들의 이념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역사를 도구화하는 전략이다.
미래를 위한 전투적 세뇌 교육
이들은 오래전부터 미래 세대의 정신을 겨냥한 ‘초토화 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해 왔다. 최근 <뉴스타파>의 잠입 취재로 드러난 ‘리박스쿨’ 사태는, 윤석열 정권 하에서 온라인 댓글을 조작하고 초등학생들에게 극우 역사관을 세뇌하려는 계획이 실제로 실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그들의 ‘파이가 커지고 있다’는 양적 확장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투쟁 방식이 질적으로 변화했음을, 그리고 그들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징후이다.
‘리박스쿨’과 같은 시도는 역설적으로 그들이 현재의 성인 세대와의 ‘사상전’에서 패배했거나 승리할 수 없음을 자인한 행위이다. 이미 비판적 사고력을 갖춘 성인들을 상대로 자신들의 왜곡된 역사관과 이념을 설득하는 데에는 한계가 명확하기에, 그들은 전략을 ‘설득’에서 ‘주입’과 ‘세뇌’로 전환한 것이다.
이는 당장의 선거 승리를 넘어, 10년, 20년 후를 내다보는 무서운 장기 전략으로, 지금 초등학생인 아이들이 유권자가 되었을 때 그들에게는 극우적 사관이 ‘교육받은 진실’이 되고 민주주의적 가치는 ‘좌파의 선동’이 되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교육 내란’이자 ‘세대 전쟁’의 선포나 다름없다.
이러한 시도는 히틀러 유겐트나 문화대혁명의 홍위병과 같은 전체주의의 망령을 되살린다. 나치는 아이들을 가정과 학교로부터 분리시켜 당의 이념을 주입했고, 마오쩌둥은 젊은 학생들을 동원해 기성세대를 타파했다. ‘리박스쿨’의 본질은 아이들을 부모 세대의 가치관으로부터 단절시키고 특정 이념의 ‘소년병’으로 키우려는 전체주의적 발상과 정확히 같다.
이 문제의 가장 심각한 지점은 단순히 ‘틀린 역사’를 가르친다는 데 있지 않고, 아이들의 정신에서 ‘질문하는 능력’ 자체를 제거하려는 시도에 있다. 진정한 교육은 학생에게 “왜?”라고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지만, ‘리박스쿨’과 같은 주입은 “왜?”라는 질문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정해진 답을 암기하게 하며 의심을 ‘불순’한 것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한 인간의 지적 성장을 막는 ‘정신적 살해 행위’에 해당하며, 한 세대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 인간’으로 만들려는 것보다 더 큰 폭력은 없다.
‘리박스쿨’과 같은 시도는 이제 그 질병이 민주주의의 뇌와 척수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치명적인 증상이다. 이러한 미래 세대 대상의 세뇌 시도는 현 성인 세대 사이에서 자신들의 세계관이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미래의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절박하고도 위험한 도박이다.
2025년 조기 대선에서 내란 세력을 지지한 40%가 대부분 TK(대구·경북), PK(부산·경남), 강원, 그리고 서울의 강남, 송파, 서초 등의 지역 출신이라는 점은 대한민국 지역주의의 여전한 위력을 보여준다.
이 뿌리 깊은 지역주의는 박정희 시대, 국가의 자원을 영남에 집중시킨 ‘차별적 근대화’의 설계도 아래 태어났다. 경부고속도로는 산업의 동맥이 되었지만, 그 그늘에 가려진 호남은 소외의 섬으로 남았고, 권력의 요직에서 배제되었으며, 5.18 광주에서는 민주주의를 외치다 피를 흘려야 했다. 이러한 깊은 상흔은 합리적 판단이 아닌 부족주의적 충성심과 피해의식이 정치를 지배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동쪽 지역의 많은 유권자들에게 ‘12.3 내란’은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근대화의 적자(嫡子)’이자 ‘안보의 보루’인 자신들의 세력이 국가의 정통성을 되찾아 오려는 행위로 쉽게 받아들여졌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끈적한 지역주의라는 접착제 위에, 2025년의 대한민국은 더욱 날카롭고 위험한 ‘새로운 균열’을 목도하고 있다. 바로 ‘청년 정치인’ 이준석이 ‘공정’이라는 이름의 메스로 그어놓은 세대와 젠더라는 상처이다.
그는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20대 남성들의 불안과 분노를 ‘여성’과 ‘기성세대’라는 적에게 돌리는 교활한 서사를 만들어 냈다. 이번 대선에서 그가 8%에 달하는 지지를 얻었다는 사실은, 이 새로운 ‘갈라치기의 정치’가 더는 소수의 넋두리가 아니라 우리 사회를 파편 내는 유의미한 파괴력을 지녔음을 증명하는 섬뜩한 경고등이다.
미국에서의 연구 결과, 백인 미국인들의 사회적 지위 상실에 대한 인식이 반민주적 정서를 유발한다는 점은 한국의 특정 남성 집단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그로 인한 정치적 반응과 유사한 기제를 시사한다.
이제 대한민국은 두 개의 전선, 즉 노년층의 의식을 지배하는 지역주의라는 낡은 망령과 청년들의 영혼을 잠식하는 세대 및 젠더 갈등이라는 새로운 유령에 동시에 맞서야 한다. 이 두 개의 분열이 서로를 이용하고 증폭시키며 만들어 내는 이 기괴한 불협화음이야말로, 40%라는 현상을 떠받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태로운 지반이다.
다시, 민주주의
현재 대한민국이 마주한 현실은 ‘내란’과 ‘민주주의’라는 단어의 본질적인 의미 자체가 붕괴하고, ‘무엇이 진실인가’보다 ‘내가 무엇을 믿고 싶은가’가 우선시 되는 ‘세계관의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탈진실 현상에 맞서기 위해서는 단순히 사실을 확인하는 것을 넘어, 그 사실들이 민주적 틀 안에서 왜 중요한지에 대한 공유된 이해를 구축하는, 즉 의미를 만들어내는 작업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는 인식론적 전투이자 서사적 전투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독립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저널리즘과 미디어 리터러시 프로그램에 대한 강력한 투자를 통해 사회적 담론을 위한 공통의 사실적 기반을 재구축해야 한다. 가령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공공성을 강화하여 신뢰의 구심점을 복원하고, 알고리즘에 의해 조장되는 가짜뉴스 확산에 대해서는 ‘팩트체크 의무화 및 결과 알림’과 같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또한, 가짜뉴스를 반박하는 것을 넘어, 민주적 가치와 검증 가능한 사실에 뿌리를 둔 강력한 대항 서사를 구축하여 ‘대안 현실’에 도전해야 한다. 동시에 단순히 적을 부정하는 것을 넘어, 국가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이고 포용적인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텅 빈 유토피아’의 공허함을 극복해야 한다.
극단적인 정서적 양극화, 상대방에 대한 악마화, 그리고 ‘친구-적’ 구도가 만연한 상황에서, ‘정치적 우애’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함양해야 할 적극적인 민주적 실천이다. 부족적 본능이 강할수록 시민 교육, 공동체 구상, 책임 있는 리더십을 통해 이를 의도적으로 길러내야 한다.
우리는 의견 불일치 속에서도 공감과 상호 존중을 증진함으로써 ‘타자화’에 적극적으로 맞서야 한다. 가능하다면 반대 집단 간의 건설적인 대화를 위한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 독일의 ‘연방정치교육원’ 모델을 참고하여 초당적인 시민 정치 교육을 강화하거나, 추첨을 통해 구성된 시민들이 주요 현안을 학습하고 토론하는 ‘시민의회’를 활성화하는 것이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philia)’ 개념, 즉 ‘정치적 우애’를 되살려야 한다. 이는 상호 존중과 대화에 필수적이며, 당파적 분열을 초월하는 공유된 시민 정체성을 육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정치 지도자들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갈등을 격화시키기보다는, 표현 및 수사의 수위를 낮추고 상대를 존중하는 자세를 보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규범의 침식, 반민주적 지도자에 대한 지지, 그리고 ‘내부 식민화’와 같은 위협에 직면하여, 민주주의 방어는 내란 지지와 같은 증상과 불평등 및 불만과 같은 근본 원인을 모두 해결하는 다층적 접근을 요구한다. 제도적 해결책만으로는 부족하다. 국민을 반민주적 호소에 취약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심리적 조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불충분하다. 다행히 제21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재명은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가 취임하자마자 최대한 집중하는 것이 바로 '경제'인 것이다.
행정부의 권한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견제와 균형을 강화해야 한다. 여기에는 사법부 독립, 입법부 감독, 언론 자유의 수호가 포함된다. 또한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 남용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헌법 개정 논의를 시작하고, 지역주의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현행 승자독식 소선거구제를 보완할 수 있는 선거제도 개혁(예: 권역별 비례대표제 확대 등)을 추진해야 한다. 더불어 심각한 해악을 야기하는 선동, 허위 정보 유포, 그리고 내란과 같은 민주적 절차 전복 시도에 대한 법적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적 회복탄력성을 키워야 한다.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소외와 같은 불만의 근본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 이를 위해 민주적 가치를 수호하고 시민 참여를 증진하는 시민사회단체를 지원하고, 민주적 가치와 역사적 정확성을 증진하는 비판적 사고 교육 및 교육과정에 집중 투자하여 제2, 제3의 ‘리박스쿨’과 같은 ‘초토화 교육학’에 대응해야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무심코 행하는 행동들이 집합적으로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는 ‘악의 평범성’과 지성을 오용하는 ‘교양 있는 야만인’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건강이 궁극적으로 개인의 주체성에 달려 있음을 시사한다. 제도적 해결책도 중요하지만, 민주주의의 궁극적인 보호 장치는 시민 개개인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윤리적으로 행동하며, 공론장에서 자신의 역할에 책임을 지려는 의지에 있다.
비판적 사고와 개인의 도덕적 책임감을 중시하는 문화를 조성해야 한다. 아렌트의 연구는 악에 대한 저항이 ‘사유’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한다 – 질문하고, 다양한 관점을 모색하며, 쉬운 답을 거부하는 것이다. 개인들이 자신의 필터 버블에서 벗어나 불편하더라도 다른 관점과 교류하도록 장려해야 한다. 또한, 모든 ‘좋아요’, ‘공유’, 댓글이 잠재적인 결과를 초래한다는 온라인 행동의 윤리적 함의를 강조해야 한다. 비대한 자아와 자신을 객관화할 줄 아는 능력 부족 문제에 대해, 겸손과 자기 성찰을 함양하는 교육을 통해 접근해야 한다.
심리적 내전과 다름없는 분열의 골이 깊은 상황에서 민주적 쇄신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며, 심각한 도발 앞에서도 민주적 원칙에 대한 확고한 헌신을 요구한다. 깊은 위기는 해결책이 지속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며 절망이나 권위주의적 대응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아야 함을 의미한다.
즉각적인 해결책은 없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치유 과정은 길고 어려우며,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질 수 있다. 원칙 있는 행동을 유지해야 한다. 보복 조치의 유혹을 피하고, 답답하더라도 민주적 절차를 고수해야 한다.
점진적인 진전에 초점을 맞추고, 가능한 부분에서 작은 다리를 놓고 이해를 증진해야 한다. 목표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자들을 ‘이해’하거나 ‘용서’하는 것도, 그들을 ‘절멸’시키는 것도 아니다. 살아있는 몸까지 죽이지 않고 병든 부위를 도려내는 ‘냉철하고도 정교한 외과의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가야 한다
대한민국은 깊이 뿌리내린 적대감, 대안적 현실, 그리고 인구의 상당 부분이 반민주적 서사와 행동에 취약한 상태로 분열된 공화국이라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해 있다. 이 위기는 단순히 정치적인 것을 넘어 인식론적, 심리적, 역사적 차원을 아우른다.
진단은 암울하지만, 회복을 향한 길은 존재한다. 이는 제도 개혁, 사회적 치유, 경제 정의, 교육 혁신, 그리고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비판적 사고에 대한 새로운 헌신을 포함하는 다각적인 접근을 요구한다. 앞으로의 길은 험난하며, 용기, 지혜, 그리고 민주적 원칙에 대한 확고한 헌신을 필요로 한다. 특히 그 원칙을 지키기 가장 어려울 때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것만 같은 역사의 폐허 위에 서 있다. 우리의 과업은 승리의 깃발을 꽂기 위해 적의 시체를 넘는 것이 아니다. 그 폐허의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깨진 벽돌 한 장을 더 빼내는 손이 아니라, 그 틈에 이름 모를 들꽃 씨앗 하나를 심는 첫 번째 손이 되는 것, 그것이 이 폭풍을 함께 헤쳐 나갈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하고도 가장 존엄한 희망의 시작이다.